1941년 6월 22일,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어진 국경 위로 독일군과 동맹군이 한꺼번에 넘어갔습니다. 공격을 받은 소련은 2년도 안 된 1939년 8월에 서로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상대였습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SHMM)은 이 침공을 2차 대전에서 독일이 벌인 가장 큰 군사 작전으로 꼽습니다.
작전 이름은 바르바로사(Barbarossa)였습니다. 독일은 몇 주 만에 끝날 전쟁을 기대했지만 그해 12월 모스크바 앞에서 반격을 맞고 물러섰습니다. 독일은 왜 동쪽으로 갔고, 세 갈래 공격은 어디까지 닿았을까요? 전차와 말, 철도가 맡은 몫과 전선 뒤에서 벌어진 일까지 공개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조약을 맺은 두 나라, 동쪽을 본 계획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독소 조약을 맺었습니다. 공개된 부분은 10년 동안 서로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이었고, 비밀 의정서는 동유럽을 두 나라의 세력권으로 나눴습니다. 이념이 정반대인 두 나라였기에 다른 나라들은 크게 놀랐습니다.
그 뒤 1년 반 동안 독일은 경제적으로도 이득을 봤습니다. 소련이 곡물과 석유를 보내고 독일의 공산품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에게 이 조약은 일시적인 전술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소련을 무너뜨리고 동유럽에서 "생존권(Lebensraum)"을 정복하는 것은 히틀러와 나치당의 오랜 목표였습니다.
결정은 1940년 7월에 내려졌습니다. 프랑스와 베네룩스를 정복하고 몇 주 뒤, 히틀러는 이듬해 안에 소련을 치기로 했습니다. 계획에는 소련의 슬라브인을 정복해 노예로 삼는 "독일화"와 경제 수탈이 들어 있었고, 그 구상은 군사적 승리 뒤까지 이어질 것이었습니다.
지령 21호와 세 집단군
1940년 12월 18일 히틀러는 지령 21호(Directive 21)를 냈습니다. 소련 침공을 지시한 첫 작전 명령입니다. 목표는 북쪽 항구 아르한겔스크에서 카스피해의 아스트라한까지 그은 가상의 선, 이른바 A-A선까지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 안쪽에 소련 인구와 경제력 대부분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름은 중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서 땄습니다.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작전을 마치느라 5주가 늦어진 끝에, 공격은 1941년 6월 22일 시작됐습니다.
독일군은 세 집단군으로 나뉘었습니다. 북부 집단군은 발트 3국을 지나 레닌그라드로, 중부 집단군은 민스크와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남부 집단군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와 돈바스 공업 지대로 향했습니다. 히틀러는 이 목표들을 대략 10주 안에 이룰 것으로 봤습니다.
서둘러야 할 까닭도 있었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의 학예사는 영상 해설에서, 독일이 6~8주 안에 소련을 전쟁에서 몰아내는 전격전을 계획했고 긴 소모전을 버틸 병력과 물자의 여유가 없었다고 짚습니다.
병력은 얼마나 됐을까요? 기관마다 숫자가 다릅니다. IWM은 350만 명이 넘는 독일·추축군과 148개 사단, USHMM은 300만 명이 넘는 독일군과 핀란드·루마니아 병력 65만 명을 적었습니다. National WWII Museum의 선임 역사가를 지낸 로버트 시티노(Robert Citino)는 독일군 약 350만 명에 동맹군 70만 명 가까이로 셉니다.
선봉은 기갑사단 17개와 전차 3,400대였고 공군 항공기 2,700대가 뒤를 받쳤습니다. 전선은 1,800마일(약 2,900 km)에 걸쳤습니다. 소련은 서쪽 국경에 큰 병력을 모아 두었지만 독일을 자극하지 말라는 명령 아래 있었습니다. 곧바로 쓸 수 있는 병력 약 500만 명과 전차 2만 3,000대를 가지고도 붉은 군대는 준비되지 않은 채 공격을 받았습니다.
1941년 여름: 거대한 포위전
경고는 있었습니다. 1941년 3월 미 국무차관 섬너 웰스(Sumner Welles)는 소련 대사 콘스탄틴 우만스키(Constantine Oumansky)에게 나치의 공격이 다가온다고 알렸습니다. 스탈린은 히틀러를 믿지 않으면서도, 독일군의 집결과 잇단 정보 경고에도 그가 그렇게 빨리 공격하리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거의 완전한 기습이었습니다. 첫날에만 소련 항공기 1,800대가 부서졌고 대부분 땅 위에서였습니다. 하늘을 잡은 독일 기갑부대는 소련군 뒤로 깊이 들어가 수백만 명을 포위했습니다.
포위는 잇달았습니다. 6월 28일까지 비아위스토크-민스크 포위망에서 소련군 3개 군이 갇혀 32만 명 넘게 잡혔습니다. 두 기갑집단은 7월 27일 스몰렌스크 너머에서 다시 만나 30만 명을 더 잡았고, 남쪽에서는 8월 8일 우만에서 10만 명이 포로가 됐습니다.
북쪽에서는 기갑부대가 3주 동안 500마일(804 km)을 나아가 7월 중순 레닌그라드에서 60마일(96 km) 떨어진 곳에 닿았습니다. 9월에는 핀란드군의 도움으로 레닌그라드를 바깥과 끊었지만 도시를 빼앗을 힘은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도시를 굶겨 항복시키라고 명령했고, 봉쇄는 890일 이어졌습니다.
그래도 소련은 나치 지도부의 예상처럼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처음 6주의 손실은 파국에 가까웠지만, 1941년 8월 중순부터 저항이 단단해졌습니다.
키예프로 돌린 방향, 모스크바 앞의 겨울
8월이 되자 중부 집단군의 보급이 위급해졌습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진격을 멈추고 북부와 남부를 보강하기로 했습니다. 기갑부대가 모스크바에서 220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독일 최고사령부는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히틀러는 자원이 많은 우크라이나를 더 중요하게 봤고, 8월 21일 크림반도와 도네츠 분지 정복을 앞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방향을 돌리자 소련군 5개 군이 키예프 주변에 갇혔습니다. 9월 말 키예프가 떨어졌습니다. 죽거나 잡힌 소련군은 IWM 기준 65만 명이 넘고, 시티노는 포로만 70만 명 가까이로 적습니다.
이 결정의 평가는 한쪽으로 기울지 않습니다. IWM은 스몰렌스크 전투 뒤 중부 집단군이 약해지고 옆구리가 위협받던 사정을 보면 어느 정도 군사적으로 맞았고, 소련을 놀라게 해 큰 병력을 없앴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독일이 완전한 승리를 거둘 단 하나의 진짜 기회를 버렸다고 적습니다.
기갑집단을 이끈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은 포위전이 소련에 새 예비 병력을 끌어올 틈을 준다며 수도로 곧장 가자고 주장했습니다.
10월 2일 히틀러는 모스크바를 향한 태풍 작전(Operation Typhoon)을 시작했습니다. 보강된 중부 집단군은 100만 명, 전차 1,700대였습니다. 소련은 거의 100만 명을 세웠지만 전차와 항공기는 얼마 남지 않았고, 수도 둘레에 여러 겹의 방어선을 두르고 시민을 동원했습니다. 첫 공격에서 브랸스크와 뱌지마의 두 포위전으로 60만 명 넘는 소련군이 잡혔습니다.
곧 비가 왔습니다. 가을비가 흙길을 진흙 강으로 바꾸는 라스푸티차, 곧 "진창의 계절"이었습니다. 바퀴 달린 차량과 말이 끄는 수레가 꼼짝하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소련은 예비군과 시베리아·동쪽 국경의 병력을 끌어왔습니다.
11월 중순 땅이 얼어붙자 독일 기갑부대는 모스크바를 둘러싸는 마지막 협공에 나섰습니다. 북쪽 집게는 도시에서 12마일 안까지 갔고, 12월 2일에는 정찰 부대가 5마일 안까지 다가갔습니다. 그것이 전체 진격의 끝이었습니다.
반격은 12월 초에 왔습니다. 날짜는 자료에 따라 12월 5일 또는 6일입니다. 100만 명 넘는 소련군이 투입됐고, 중부 집단군은 모스크바에서 최대 150마일까지 밀려났습니다. 히틀러는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를 해임하고 스스로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전차, 말, 철도: 무기와 보급
"전격전"이라는 말과 달리 독일군의 큰 부분은 말에 기대어 움직였습니다. 보병 사단은 포와 보급품을 말로 끌었고, 바르바로사에 쓰인 말은 약 70만 마리였습니다.
전차도 생각만큼 새롭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1940년 기갑사단 수를 두 배로 늘리려고 사단의 전차 전력을 반으로 줄였습니다. 투입된 전차의 절반 넘게는 낡은 경전차와 체코제였고, 1941년 중반 새 전차는 한 달에 250대만 나왔습니다.
소련 전차는 숫자가 많았지만 대부분 구형이었습니다. 1941년 6월 독일군과 맞선 약 1만 대 가운데 대다수는 BT 계열 경전차나 낡은 T-26이었습니다. 새 세대인 T-34와 KV-1이 막 배치되던 참이었고, 7월에 T-34를 처음 만난 독일군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작전 초 T-34는 1,000대가 안 됐고 대부분 훈련이 덜 된 승무원이 조금씩 나눠 쓰다 잃었습니다.
보급은 거리와 싸움이었습니다. 프랑스 전역 때보다 거리가 훨씬 멀었고 소련의 교통 기반은 훨씬 빈약했습니다. 러시아 철도는 궤간이 달라서, 독일 공병은 자기 기관차와 차량이 달릴 수 있게 선로를 바꾸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트럭과 마차는 비가 오래 오면 거의 다닐 수 없는 흙길을 지나야 했습니다.
겨울은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빠른 붕괴를 기대한 독일 계획자들은 겨울전 장비를 갖춰 주지 않았고, 겨울옷은 연료와 탄약에 밀려 폴란드에 묶여 있었습니다. 기록적인 추위에 전차와 차량의 윤활유가 얼었습니다.
무기와 물자를 제때 전선에 대는 일을 군수(logistics)라고 합니다. IWM은 이 군수를 독일이 진 아주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소련은 공장을 옮겼습니다. 전차·항공기·탄약 공장을 동쪽 우랄 지역으로 옮기는 큰 혼란 속에서도 1941년 하반기 소련의 전쟁 생산은 크게 늘었습니다.
바깥의 도움도 오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물자를 실은 첫 북극 수송선단이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에 닿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육군부가 소련이 6주를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경고했지만, 모스크바에 간 루스벨트의 측근 해리 홉킨스(Harry Hopkins)는 스탈린을 만난 뒤 소련을 도우라고 권했습니다. 10월 말까지 소련으로 가는 첫 무기 대여(Lend-Lease) 물자가 길을 떠났습니다.
전선 뒤의 학살과 포로
이 전쟁은 땅을 다투는 싸움만이 아니었습니다. USHMM은 작전 계획 처음부터 독일 군·경찰 당국이 소련 정부와 시민, 특히 유대인을 상대로 절멸 전쟁을 벌이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독일군은 점령 정책의 의도된 결과로 소련 시민 수천만 명이 굶어 죽을 것이라고 계획했습니다.
군대 뒤를 아인자츠그루펜(Einsatzgruppen)이 따라갔습니다. 보안경찰과 친위대 정보부(SD)의 부대로, 소련 땅의 대량 총살로 유대인을 학살한 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전쟁 첫 9달 동안 이들이 조직하거나 거든 총살로 50만 명 넘는 사람이 죽었고, 대부분 유대인이었습니다.
네 부대의 3,000명만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장친위대와 질서경찰, 국방군, 루마니아군, 현지 협력자가 함께했습니다.
학살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이웃이고 동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1941년 9월 키예프 밖 바비 야르(Babyn Yar) 골짜기에서는 이틀 동안 유대인 대량 총살이 벌어졌고, 베를린 본부로 간 보고서에는 그 이틀 동안 3만 3,771명이 학살됐다고 적혀 있습니다. 소련 땅에서 총살과 가스 차로 죽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는 적어도 150만 명이고 200만 명이 넘을 수도 있습니다.
포로도 같은 정책 아래 놓였습니다. 남은 자료로 보면 전쟁 동안 약 570만 명의 소련군이 독일 손에 들어갔고, 그 가운데 330만 명, 약 57%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죽었습니다. 같은 독일에 잡힌 영국·미국 포로는 23만 1,000명 가운데 약 8,300명(3.6%)이 죽었습니다. USHMM은 이 죽음을 사고도 전쟁의 자동적인 결과도 아닌, 나치 국가의 의도된 정책이라고 씁니다.
기간을 1941년 6월부터 1942년 2월까지로 좁혀도 소련군 포로 약 280만 명이 죽었고, 주로 의도된 굶김과 추위 때문이었습니다. 붙잡힌 정치위원을 모두 처형하라는 "정치위원 명령(Commissar Order)"은 오히려 소련군의 저항 의지를 굳혔습니다.
왜 실패했고 무엇을 남겼나
바르바로사는 소련의 전투력을 완전히 없애 항복을 받아 내지 못했습니다. IWM이 드는 까닭은 여러 겹입니다. 짧은 전쟁을 가정한 전략 계획, 소련 병력과 전투력을 계속 낮춰 본 정보 실패, 멀고 빈약한 길 위의 보급, 계획에 제대로 넣지 않은 날씨와 지형입니다. 그리고 IWM은 "아마 가장 중요한 까닭"으로 방어자의 끈질긴 저항을 꼽습니다.
정보 실패는 구체적이었습니다. 독일 최고사령부는 소련 서부의 병력만 계획에 넣고, 내륙과 동쪽 국경의 예비 병력은 셈에서 뺐습니다. 1941년 성탄절까지 독일군이 잡은 소련군이 300만 명이었는데도 소련은 계속 싸웠습니다.
대가는 양쪽 모두 컸습니다. IWM은 바르바로사 동안 독일군 사상자를 75만 명 넘게, 그 가운데 전사자를 약 20만 명으로 적고 1940년 서부 전역의 전사자 3만 명과 견줍니다. 시티노는 1941년 12월까지 붉은 군대의 사상자를 400만 명, 그 무렵 동부 전선 독일군의 사상자를 100만 명으로 셉니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히틀러는 1942년 6월 캅카스 산맥과 그 너머 바쿠 유전을 향해 다시 큰 공세를 폈고, 그해 9월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외곽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이 2차 대전에서 독일의 지배가 가장 멀리 뻗은 곳이었습니다.
동부 전선의 무게를 크게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시티노는 독일 육군이 2차 대전을 동부 전선에서 졌다고 봅니다. 전쟁 대부분 동안 독일군의 75~80%가 동쪽에 있었고, 독일군 전사자 500만 명 가운데 약 400만 명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것이 그의 근거입니다. 그는 미국인과 영국인이 이런 말에 언짢아하기도 한다고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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