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10월 23일 밤 21시 40분, 이집트 북쪽 해안에서 영국 8군의 야포와 중포 1,000문 가까이가 한꺼번에 불을 뿜었습니다. 15분 동안 적 포대를 쏜 뒤, 22시에 보병이 지뢰밭 쪽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날 밤은 맑았고 거의 보름달이었습니다.
싸움터의 이름은 사막 철도의 작은 정거장에서 왔습니다. 엘 알라메인(El Alamein)은 "쌍둥이 돌무더기"라는 뜻이고, 알렉산드리아까지는 60마일(약 97 km)밖에 남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두 군대는 왜 하필 여기서 마주쳤을까요? 지난 2년 동안 양쪽이 리비아와 이집트의 해안 길을 몇 번이나 오간 까닭을 따라가 보면, 답의 많은 부분이 기름과 물, 그리고 항구까지의 거리에 있습니다.
1940년 12월의 첫 반격부터 1943년 5월 튀니스의 항복까지를 차례로 봅니다. 숫자는 대부분 영국 지휘관의 보고서, 영국 하원 기록, 호주 정부 기관 자료에서 왔습니다. 적의 손실은 영국 쪽이 낸 추정이라는 점도 함께 밝힙니다.
세 대륙 사이의 사막
영국은 이집트에 중동군을 두고 있었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세 대륙을 잇는 길목입니다. 프랑스가 지고 이탈리아가 참전하자 이 지역의 방어는 영국 혼자 맡는 일이 됐습니다.
본국에서 이집트까지는 멀었습니다. 중동군 총사령관을 지낸 알렉산더(Harold Alexander) 장군은 전쟁 뒤에 낸 보고서에서 그 바닷길을 1만 2,000마일(약 19,300 km)로 적고, 이 군대를 "포위된 수비대"에 빗댔습니다.
싸움터가 된 리비아 사막에는 얻을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길이 멀고, 다닐 길이 모자라고, 물이 모자랐습니다. 사람과 탄약뿐 아니라 연료와 물까지 뒤에서 날라야 했기 때문에, 이 전역에서는 늘 군수(logistics)가 공세의 크기와 속도를 정했습니다.
1940~1941년: 오갔던 해안 길
웨이벌의 반격이 시작되기 전, 이탈리아군은 이집트 안의 시디 바라니(Sidi Barrani)까지 들어와 있었습니다. 반격은 1940년 12월 7일에 시작됐습니다. 수송 차량이 모자랐기 때문에 먼저 아군 방어선과 적 사이의 사막에 탄약·물·기름 저장소를 만들었고, 전군의 며칠 치 보급을 방어선보다 20~30마일 앞에 쌓아 두었습니다.
반격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이어졌습니다. 바르디아(Bardia)는 1941년 1월 3~5일, 토브루크(Tobruk)는 1월 21~22일에 떨어졌고, 2월 7일에는 벵가지(Benghazi)가 항복했습니다. 호주 보훈부는 바르디아를 호주군이 2차 대전에서 치른 첫 큰 지상전으로 적었습니다.
포로 수는 기록마다 조금 다릅니다. 바르디아의 포로는 웨이벌(Archibald Wavell) 중동군 총사령관의 보고서에 4만 5,000명, 호주 보훈부 자료에 4만 명 넘게로 적혀 있습니다. 웨이벌은 두 달 동안 500마일(약 805 km)을 나아가 포로 13만 명, 전차 400대, 포 1,290문을 잡았고, 영국 쪽 손실은 전사 500명, 부상 1,373명, 실종 55명이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웨이벌은 해군의 몫도 따로 적었습니다. 해군이 바닷길을 지키고 솔룸·바르디아·토브루크 항구를 열어 주지 않았다면, 500마일을 빠르게 움직이는 작전의 보급 문제는 넘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곧 독일군이 왔습니다. 알렉산더 보고서는 독일 21기갑사단이 1941년 2월 "5경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아프리카에 왔다고 적었고, 호주 보훈부 자료는 3월 초 롬멜(Erwin Rommel)이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고 왔다고 적었습니다.
독일군이 온 뒤 토브루크는 포위됐습니다. 1941년 4~8월 호주군 약 1만 4,000명이 이 항구 도시에서 포위됐습니다. 토브루크가 버티는 동안 상대는 보급 대부분을 트리폴리(Tripoli) 항구에서 사막 약 1,500 km를 건너 땅으로 날라야 했습니다.
포위된 도시는 바다로 숨을 쉬었습니다. 영국·호주 해군의 배가 오간 이 길을 사람들은 "토브루크 연락선"이라 불렀습니다. 그 사이 구축함 둘, 슬루프 셋, 작은 배 21척이 사라졌습니다. 포위는 1941년 12월 10일에 풀렸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은 호주 9사단이 1941년 4월 8일~10월 25일에 전사 749명, 부상 1,996명, 포로 604명을 냈다고 적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시기를 돌아보며, 서쪽으로 나간 공세가 두 번 키레나이카(Cyrenaica, 리비아 동부)를 쓸었지만 두 번 모두 다른 전선에 힘을 빼앗겼다고 썼습니다. 1941년에는 발칸, 1942년 초에는 극동이었습니다.
1942년 여름: 토브루크에서 엘 알라메인까지
1942년 5월 중순, 사막의 두 군대는 한쪽에 10만 명쯤이었습니다. 처칠(Winston Churchill) 총리가 7월 2일 하원에서 밝힌 숫자로는 영국군 10만 명, 상대는 9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5만 명이 독일군이었습니다.
6월에는 영국 쪽이 크게 밀렸습니다. 가잘라(Gazala) 싸움에 이어 수비대 약 2만 5,000명의 토브루크가 하루 만에 떨어졌습니다. 함락 전날 밤 오킨렉(Claude Auchinleck) 장군은 런던에 90일 치 보급이 있다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처칠은 6월 21일 일요일 아침 워싱턴에서 함락 보고를 받았습니다.
처칠은 같은 연설에서 지난 2주 동안 키레나이카와 이집트에서 5만 명 넘게를 잃었고 그 대부분이 포로라고 했습니다. 롬멜은 사막을 400마일(약 644 km) 가까이 나아와 있었습니다.
영국 8군이 멈춘 곳이 엘 알라메인 선입니다. 이 진지는 1941년에 이미 지어 두었습니다. 남쪽 끝은 카타라 저지(Qattara Depression)가 막았는데, 옛 내해가 마른 바닥이라 모래 늪과 소금 늪이 깔려 짐 실은 낙타도 거의 지나지 못했습니다. 그 동쪽 끝이 해안에서 40마일(약 64 km)쯤까지 다가왔습니다.
사막에서는 보기 드물게 짧고, 남쪽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선이었습니다. 그래도 물은 여기서도 문제였습니다. 남쪽의 타카 고원 진지는 안에 물이 나는 곳이 없었고, 잠깐만 고립돼도 목이 말라 항복할 수밖에 없어서 비워야 했습니다. 8군은 이 선에서 7월 2일 상대의 돌파 시도를 막았습니다.
바닷길과 사막길: 누가 더 멀었나
처칠은 7월 2일 연설에서 두 길의 차이를 한 문장으로 말했습니다. 무기를 희망봉을 돌아 보내면 넉 달이 걸리고, 지중해를 건너면 건너기만 한다면 한 주 이하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전차와 대포는 아프리카를 빙 돌아 수에즈로 왔습니다. 1942년 9월 3일 수에즈에 닿은 미국 셔먼 전차 300대도 희망봉을 돌아온 배에 실려 있었습니다.
추축군의 바닷길은 짧았지만 "건너기만 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처칠은 이 바닷길을 말하며 몰타(Malta)도 함께 들었습니다. 상대가 1942년 3월 말과 4월 내내 시칠리아에 큰 공군을 모아 몰타를 쳤고, 몰타를 얻지는 못했지만 많은 물자를 아프리카로 건넸다는 것입니다.
엘 알라메인 앞에서 추축군의 보급선은 가장 길게 늘어났습니다. 그 부담은 무엇보다 연료에서 드러났습니다. 저장소나 수송대에 들어간 연료는 공습에 비교적 안전했지만, 이탈리아에서 아프리카로 오려면 유조선을 타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조선이 공습의 첫째 목표가 됐습니다. 영국 공군은 미 9공군 폭격기의 도움을 받아 유조선을 쳤고, 그 기간에는 도착한 것보다 가라앉은 것이 많았습니다. 독일군은 그리스에서 연료를 비행기로 날라 오기까지 했습니다.
배가 무사히 닿아도 끝이 아니었습니다. 추축군은 주로 토브루크와 벵가지 항구를 썼고 트리폴리는 아주 조금만 썼습니다. 그런데 토브루크조차 알라메인 전선에서 350마일(약 563 km), 그것도 좋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영국 공군이 토브루크를 거의 밤마다 폭격하자 배 상당수가 더 먼 벵가지로 돌아갔고, 그만큼 트럭으로 나르는 길이 길어졌습니다.
병력 사정도 좋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 보고서의 영국 쪽 관찰로는, 구축함과 비행기로 한 주 평균 5,000명쯤이 왔지만 병자가 생기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이질과 황달이 아주 흔했고 어떤 부대는 병력의 25%까지 앓았습니다.
영국 쪽 길은 멀었지만 끝에 큰 기지가 있었습니다. 중동의 항구들은 한 달에 군수품 46만 6,000톤을 처리했고, 알라메인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는 60마일이었습니다. 한쪽은 짧지만 끊기기 쉬운 바닷길 끝에 긴 사막길이 붙어 있었고, 다른 쪽은 아주 긴 바닷길 끝에 짧은 사막길이 붙어 있었습니다.
사막의 장비: 전차, 대전차포, 지뢰, 트럭
1942년 여름 엘 알라메인 앞의 독일 부대는 새로 온 164사단을 빼고 모두 차량화돼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사단은 XX군단의 세 사단을 빼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독일 기갑사단은 3호와 4호 전차를 썼고, 4호 가운데 몇 대는 고속 75 mm 포를 단 새 형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M13 전차는 13톤에 47 mm 포를 달았습니다.
알렉산더가 독일·이탈리아 보병 사단에서 가장 눈에 띈다고 한 것은 대전차포의 수였습니다. 사막에서는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고 옆구리가 거의 늘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부대까지 언제든 전차의 공격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방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뢰밭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사막에서 늘 그렇듯" 대전차 지뢰와 대인 지뢰가 깔린 지뢰밭이 적 방어 시설의 핵심이었다고 적었습니다. 10월에는 바다에서 데이르 엘 므레이르(Deir el Mreir)까지 깊이 5,000~8,000야드(약 4.6~7.3 km)의 띠에 지뢰와 거점이 빽빽했습니다.
트럭은 덜 눈에 띄지만 같은 무게였습니다. 앞으로 나가면 물 조금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고, 모든 보급이 같은 기지에서 와야 했습니다. 8월 23일까지 8군은 일반 수송 중대 46개에 맞먹는 수송과 전차 운반 중대 6개를 받았고, 7개 중대를 예비로 두었습니다.
보고서의 각주에는 그 무렵의 셈법이 남아 있습니다. 이론상 일반 수송 중대 하나가 철도 끝이나 항구에서 50마일 떨어진 사단 하나를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그 셈은 주 7일, 하루 10시간, 좋은 길을 전제로 했고, 사막에서는 어떤 때 여섯 중대가 한 중대의 일을 했습니다.
부서진 장비를 고치는 일도 전력이었습니다. 수리한 전차와 트럭, 포가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전투 중의 수리 숫자는 아래 숫자와 해석 절에서 다시 봅니다.
알람 할파: 기름이 모자란 공세
알렉산더는 상대가 보름달이 뜨는 8월 25일 무렵 공격할 것으로 봤습니다. 실제로 그럴 생각이었지만 연료 사정 때문에 늦어졌습니다. 9월 3일 무렵 상대가 이 공세를 위해 모아 둔 것은 작전 기준 2주 치 보급뿐이었습니다.
공세는 8월 30일 밤 시작됐습니다. 남쪽에서 맞선 영국 13군단과 상대의 타격 부대는 기갑과 포병에서 비슷했습니다. 양쪽 모두 야포·중포 300문쯤과 대전차포 400문쯤을 가졌고, 상대 전차는 500대(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반), 13군단은 중전차 300대와 경전차 80대였습니다.
9월 2일, 추축군의 연료 사정에 새 위기가 왔습니다. 그 이틀 동안 유조선 셋이 가라앉았습니다. 독일군이 나일 삼각주에 가장 가까이 온 것이 이때였습니다.
9월 7일 07시 싸움이 멈췄습니다. 상대는 4~5마일의 땅을 얻었지만 독일 전차 42대와 이탈리아 전차 11대, 차량 700대 가까이, 야포 30문과 대전차포 40문을 버리고 갔습니다. 영국 쪽은 상대가 이탈리아군 2,000명, 독일군 2,500명의 전사·부상자를 냈다고 추정했고, 포로는 300명이었습니다.
영국 쪽 손실은 전차 68대와 전사·부상·실종 1,640명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싸움이 얻고 잃은 숫자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고 보았습니다.
10월 23일 밤부터 11월 4일까지
그사이 영국 쪽 보급은 빠르게 불었습니다. 8월 1일부터 10월 23일까지 새 부대와 별도로 4만 1,000명이 전선 부대에 합류했습니다. 같은 기간 8군에 전차 1,000대 넘게, 수송 장갑차 360대, 차량 8,700대가 갔고, 전선으로 가는 사람이 전투 손실을 훨씬 넘었습니다.
공격 날짜는 달이 정했습니다. 보병이 밤에 지뢰밭을 차지하고 길을 내야 했고, 지뢰를 빨리 정확하게 걷으려면 밝은 달이 필요했습니다. 보름달이 10월 24일이었고, 알렉산더는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 8군 사령관과 뜻을 맞춰 10월 23일을 골랐습니다.
날짜에는 또 다른 계산도 들어 있었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내리는 횃불 작전(Operation Torch)이 11월 8일로 잡혀 있었고, 엘 알라메인 공세는 그보다 두 주 남짓 앞서도록 짜였습니다.
준비는 숨겨야 했습니다. 북쪽 공격 지점 뒤에는 휘발유와 물자, 탄약 7,500톤을 숨겨야 했고, 남쪽에는 낡은 휘발유 깡통으로 만든 가짜 송유관을 9월 27일부터 지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기만이 완전히 성공해 상대가 공격 사흘째에야 모든 힘을 진짜 공격 쪽에 모았다고 보았습니다.
첫 단계는 예정보다 24시간 늦게 끝났습니다. 가장 큰 까닭은 지뢰밭이 아주 빽빽했다는 것이었습니다. 10월 25일 새벽, 북쪽의 30군단은 적 방어선에 폭 6마일의 틈을 내 놓았습니다.
마지막 큰 공격의 이름은 슈퍼차지(Supercharge)였습니다. 달이 기울고 있어서 공격 시각은 첫날 밤보다 세 시간 늦은 11월 2일 01시 05분이었습니다. 알렉산더는 11월 2일의 싸움이 결정적이었고 상대가 그날 밤 물러나기로 정했을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이 결정의 날은 자료에 따라 조금 다르게 적힙니다. 호주 보훈부 자료는 11월 2일 롬멜이 총퇴각을 명령해야 했다고 적었습니다. 영국 쪽은 11월 3일 이른 아침부터 철수의 낌새를 보았고, 11월 4일 가잘(Ghazal) 부근의 싸움으로 엘 알라메인 전투가 끝났습니다.
쫓는 쪽의 보급: 토브루크, 벵가지, 트리폴리
11월 4일 영국 8군은 전차 600대 가까이를 낼 수 있었고, 독일군에게는 80대가 남아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큰 문제가 달아나는 상대를 이길 힘이 아니라, 추격이 보급을 앞지르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고 적었습니다.
앞에는 먼 거리가 있었습니다. 토브루크는 알라메인에서 350마일, 벵가지는 거기서 300마일(약 483 km) 더, 엘 아게일라(El Agheila)는 다시 160마일(약 257 km) 더 서쪽이었습니다. 국경까지 해안의 물 나는 곳은 예상대로 기름에 더럽혀져 있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는 물 송유관도 더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맨 앞 부대의 보급 수단은 도로 수송뿐이었습니다.
11월 13일 09시, 영국군은 싸움 없이 토브루크에 들어갔습니다. 10군단은 6일 동안 220마일(약 354 km)을 나아갔고, 도로와 철도는 크게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래도 솔룸에 물자를 내리고 마트루와 바르디아 항구를 점령 이틀 안에 열어, 앞선 여단 하나가 계속 나아갈 만큼의 보급을 마련했습니다.
11월 20일에는 벵가지에 들어갔고, 11월 25일 순찰대가 아게일라의 다음 방어선과 닿았습니다. 키레나이카 전체가 영국군 손에 들어왔습니다.
알렉산더는 아게일라가 앞선 항구에서 멀어 공격할 비축을 쌓는 데 시간이 걸렸고, 이것이 아게일라가 두 번이나 영국군 진격의 끝이 된 까닭의 하나였다고 적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는 아게일라를 벵가지에서 150마일로 적어, 앞의 거리 160마일과 조금 다릅니다.
이번에는 영국 쪽 보급이 따라왔습니다. 철도 끝은 11월 21일 카푸초(Capuzzo), 12월 1일 토브루크에 열렸습니다. 그 무렵 나일강 물이 하루 3,000톤씩 마트루 서쪽 25마일까지 왔습니다.
항구도 빨리 살아났습니다. 첫 배는 점령 나흘 뒤 토브루크와 벵가지에 들어갔습니다. 두 주 만에 토브루크는 하루 1,000톤의 최대 능력으로 돌아갔고, 세 주 만에 벵가지는 그 두 배를 부렸습니다.
1943년 1월 23일 05시, 영국군이 트리폴리에 들어갔습니다. 09시에 몽고메리가 도시 밖에서 이탈리아 당국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인이 비우고 떠난 벵가지와 달리 트리폴리에는 시민이 모두 남아 있었습니다.
공공 시설은 돌아갔지만 식량이 모자라, 영국 병사는 시민의 식량을 사지 못하게 했습니다. 항구는 피해가 특히 넓었습니다.
횃불 작전과 튀니스
1942년 11월 8일, 미군과 영국군이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의 해안과 항구에 내렸습니다. 오하이오 주립대 역사 매체 오리진스(Origins)의 글은 이 상륙을 그때까지 가장 크고 복잡한 상륙으로 적었습니다. 카사블랑카·오랑·알제 근처 세 곳에 배 670척쯤과 병사 10만 7,000명이 왔습니다.
11월 11일 휴전이 서명됐고, 연합군은 2,000명 조금 넘는 사상자로 모로코와 알제리를 확보했습니다. 상륙한 부대는 독일·이탈리아군이 증원되기 전에 튀니지를 차지하려고 동쪽으로 나아갈 계획이었습니다. 알제에서 튀니스까지는 500마일 넘게였습니다.
마지막은 1943년 5월이었습니다. 5월 12일 대량 항복이 이어졌고, 이탈리아의 메세(Giovanni Messe) 장군은 13일 아침까지 항복을 늦췄습니다. 알렉산더는 25만 명이 무조건 항복했고 663명이 빠져나갔으며, 마지막 전투의 연합군 쪽 손실은 2,000명보다 적었다고 적었습니다.
5월 13일 14시 15분, 알렉산더는 처칠에게 튀니지 전역이 끝났다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전보 끝의 말은 "우리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주인입니다"였습니다.
숫자와 해석
엘 알라메인 전투의 손실은 영국 쪽 기록에서 옵니다. 알렉산더는 처음 추축군의 3분의 1이 조금 못 되게 빠져나갔다고 보았고, 상대의 손실을 전사 1만 명, 부상 1만 5,000명으로 추정했습니다. 포로는 3만 명 넘게였고 그 가운데 1만 명이 독일군이었습니다.
전차는 600대 가운데 450대가 싸움터에 남았고, 포는 1,000문 넘게 부서지거나 잡혔습니다. 8군의 손실은 전사·부상·실종 1만 3,500명으로 참가 병력의 8%가 조금 못 됐습니다. 상대 쪽 숫자는 모두 영국 쪽 추정입니다.
수리 숫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8군에서는 전차 500대 넘게가 움직이지 못하게 됐지만 고칠 수 없는 것은 150대였습니다. 10군단에서만 전투 11일 동안 공장에 들어온 전차 530대 가운데 337대가 다시 나갔습니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에서 죽은 호주군만 3,000명이 넘습니다. 영연방 전쟁 묘지에는 이집트에 2,312명, 리비아에 856명의 호주군이 묻혀 있습니다.
이 전역을 어떻게 볼지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남아 있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은 1942년 7~11월 엘 알라메인 일대의 전투를 북아프리카 전역의 전환점으로 적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그보다 앞서, 알람 할파에서 아프리카 군단이 물러나기 시작한 때를 동쪽으로 밀려온 추축군의 물결이 처음 빠지기 시작한 때로 보았고, 몇 달 뒤 볼가 초원과 캅카스에서도 그랬다고 썼습니다.
처칠은 횃불 작전 상륙 이틀 뒤 런던 연설에서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끝의 시작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마 시작의 끝일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이 말을 튀니스까지의 전역 전체에 붙여, 추축국에 대한 첫 완전한 성공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눈길도 있습니다. 오리진스의 글은 횃불 작전이 노르망디에 가려 잊히기 쉽고, 지중해를 지나는 길고 고된 여정의 시작이나 전략적 값어치가 적은 비싼 곁가지로 그려지기도 한다고 적었습니다. 필자들은 그래도 분수령이었다고 보았고, 북서아프리카로 간 길이 꼭 필요했는지는 그때도 그 뒤에도 많은 사람이 물었다고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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