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오전 7시, 하와이 오아후섬 오파나(Opana)의 미 육군 레이다 기지에서 운용병이 다가오는 비행기 무리를 잡았습니다. 보고를 받은 장교들은 그날 아침 도착하기로 한 미국 비행기로 여겼습니다. 한 시간이 채 안 되어 그 비행기들이 진주만(Pearl Harbor)의 미국 태평양 함대 위에 나타났습니다.

일본 항공모함 6척에서 뜬 비행기가 두 번에 나눠 진주만과 주변 비행장을 쳤습니다. 이튿날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했고, 사흘 뒤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일본은 왜 훨씬 큰 나라를 먼저 쳤을까요? 미국은 왜 신호를 놓쳤고, 그 두 시간 동안 무엇이 부서지고 무엇이 남았을까요?

중국, 석유, 그리고 멈춘 협상

두 나라가 멀어진 출발점은 중국이었습니다.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정복했고,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처 루거우차오(마르코 폴로 다리)에서 중국군과 부딪친 뒤 중국과 전면전에 들어갔습니다. 미국 국무부 역사실은 이 일 뒤 미국이 중국을 도울 가능성이 커졌다고 설명합니다. 1940년 일본은 나치 독일과 추축 동맹을 맺었고, 이듬해 인도차이나 전체를 점령했습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한 군사·재정 지원을 늘리고 태평양의 군사력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일본으로 가는 석유와 원자재를 끊어 갔습니다. 미국은 일본군에 필요한 석유, 강철, 철의 주된 공급국이었습니다. 1941년 7월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정부는 일본 자산을 동결하고, 일본이 미국 석유와 강철을 사실상 얻지 못하게 했습니다.

자원이 모자란 일본 정부는 이 조치, 특히 석유 금수를 나라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로 보았습니다. 협상은 이어졌지만 거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일본의 중국 철수가 빠진 합의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그 조건은 일본 군 지도부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의 서술은 두 정부의 판단을 나란히 놓습니다. 일본 지도부는 금수로 심각한 부족에 놓이고, 물러설 수 없고, 미국이 더 협상할 뜻이 없다고 믿어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미국 지도부는 협상 타결을 포기하지 않았고, 일본에 미국 영토를 칠 군사력이 있는지 의심했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이 확실히 따를 길이었지만, 일본 지도부는 동남아시아의 자원 지역을 차지하기로 했습니다.

야마모토의 계획과 북태평양 항해

문제는 진주만에 있는 미국 태평양 함대였습니다. 일본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Isoroku Yamamoto) 제독은 전쟁 첫머리에 기습으로 미국 함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National WWII Museum은 그 목적을 일본이 전략 자원을 확보하고 점령지를 굳힐 시간을 버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계획의 열쇠는 세 가지였습니다. 꼼꼼한 준비, 기습, 그리고 전례 없는 규모의 항공모함과 해군 항공입니다. 1941년 봄부터 일본 항공모함 조종사들이 이 계획에 맞춘 특수 훈련을 했고, 10월 해군 군령부가 계획을 최종 승인했습니다.

공격 부대는 나구모 주이치(Chuichi Nagumo) 중장이 이끌었습니다. 대형 항공모함 6척, 곧 아카기, 가가, 소류, 히류, 쇼카쿠, 즈이카쿠가 중심이었고 지원함 24척이 따랐습니다. 따로 나선 잠수함 무리는 항공모함 부대를 피해 빠져나오는 미국 군함을 맡았습니다.

부대는 쿠릴 열도의 외딴 단칸만(Tankan Bay)에 모여 11월 26일 극비리에 떠났습니다. 보통의 항로를 피해 북태평양을 건넜고, 엄격한 무선 침묵을 지켰습니다. 12월 7일 새벽, 부대는 들키지 않고 오아후 북쪽 200마일 남짓한 곳까지 와 있었습니다. 그때 워싱턴의 협상은 깨진 상태였지만, 일본은 아직 공식으로 외교 관계를 끊지 않았습니다.

놓친 신호들

신호는 그날 아침에도 있었습니다. 동트기 전 진주만 입구 근처에서 정체 모를 잠수함 잠망경이 보였고, 구축함(destroyer) 와드(Ward)와 초계기가 공격해 격침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오전 7시에는 오파나 레이다가 첫 공격 파를 잡았습니다. 잠수함 보고는 일상 업무로 처리됐고, 레이다 탐지는 아침에 오기로 한 미국 비행기 무리로 여겨졌습니다.

더 앞선 신호도 있었습니다. 1941년 초 주일 미국 대사 조지프 그루(Joseph Grew)는 페루 공사에게서 들은 말을 국무부에 보고했습니다. 미국과 문제가 생기면 일본군이 진주만을 기습해 대공격을 꾀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 안에서 이를 확인할 정보망도, 민간·군 정보를 모아 판단할 독립 정보 기관도 없어 이 경고는 묻혔습니다.

미국은 1940년 여름 일본 외교 암호 PURPLE을 풀어 외교 전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독과 번역에는 시간이 걸렸고, 일본 육군과 해군은 외무성과 다른 암호를 썼고, 둘끼리도 암호가 달랐습니다.

일본 해군은 공격 전 몇 달 사이 암호를 여러 번 바꿨습니다. 공격 며칠 전, 진주만의 해군 정보 분석관들은 태평양 함대 사령관 허즈번드 킴멜(Husband E. Kimmel) 제독에게 일본 항공모함 네 척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고 보고했습니다.

National WWII Museum의 글은 진주만을 미국 역사에서 가장 나쁜 정보 실패의 하나로 꼽고, 역사가 로버타 볼스테터(Roberta Wohlstetter)의 말을 옮깁니다. 많고 다양한 신호가 앞서 있었는데도 완전한 기습을 이룬 공격이었다는 것입니다.

12월 7일 아침: 두 번의 공격 파

오전 6시, 항공모함 6척이 첫 공격 파 181대를 띄웠습니다. 뇌격기, 급강하 폭격기, 수평 폭격기, 전투기가 섞여 있었습니다. 첫 파는 8시 조금 전, 박물관이 적은 시각으로는 7시 55분 무렵 오아후에 닿아 완전한 기습을 이뤘습니다.

배와 함께 비행장도 맞았습니다. 포드섬과 카네오헤만의 해군 비행장, 에와의 해병대 비행장, 벨로스·휠러·히컴의 육군 항공대 비행장이 한꺼번에 폭격과 기총 소사를 받았습니다. 미국 비행기가 떠오르기 전에 부수려는 것이었습니다.

진주만에는 90척 넘는 배가 있었고, 주 목표는 전함 8척이었습니다. 7척은 포드섬 남동쪽 기슭의 '전함 줄(Battleship Row)'에 매여 있었고, 펜실베이니아는 수로 건너 건선거에 있었습니다. 공격 첫 몇 분 안에 포드섬 옆의 전함은 모두 폭탄이나 어뢰를 맞았습니다.

오클라호마는 좌현에 어뢰 8발을 맞고 12분이 안 되어 뒤집혔습니다. 수백 명이 배 안에 갇혔고 429명이 숨졌으며, 갇힌 사람 가운데 32명만 구조됐습니다. 웨스트버지니아는 어뢰 6발과 폭탄 2발을 맞고 가라앉아 106명을 잃었습니다. 포드섬 건너편의 옛 전함 유타도 어뢰를 맞고 곧 뒤집혀 58명이 숨졌습니다.

오전 8시 10분 무렵 애리조나(Arizona)가 철갑 폭탄을 맞았습니다. 폭탄이 장갑 갑판을 뚫고 앞쪽 탄약고에 불을 붙였고, 폭발과 화재로 승조원 1,177명이 숨졌습니다. 그날 배 한 척에서 나온 가장 큰 인명 손실이었고, 미국인 사망자의 약 절반이었습니다.

8시 30분 무렵 공격이 잠시 뜸해졌습니다. 그 틈에 손상된 전함 네바다(Nevada)가 움직여 수로를 따라 바다 쪽으로 나갔습니다. 그날 움직인 전함은 네바다 하나였습니다.

곧 둘째 파 170대가 나타났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는 둘째 파가 첫 파 30분 뒤에 떴다고 적고, 박물관은 둘째 파 공격이 8시 45분 무렵 시작했다고 적습니다.

둘째 파는 움직이는 네바다를 집중해서 노렸습니다. 수로에서 가라앉혀 좁은 항구 입구를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항만 관제탑의 명령에 따라 네바다는 호스피털 포인트(Hospital Point)에 스스로 얹혔고, 수로는 막히지 않았습니다. 공격은 오전 10시 조금 전,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안 되어 끝났습니다.

진주만 공격 연표 도표. 윗줄은 전쟁으로 가는 길: 1931년 일본의 만주 정복, 1937년 7월 7일 중일 전면전, 1940년 추축 동맹, 1941년 7월 미국의 일본 자산 동결과 석유·강철 제한, 1941년 10월 해군 군령부의 계획 승인, 11월 26일 기동부대 출항(항공모함 6척, 무선 침묵). 아랫줄은 12월 7일 아침(하와이 시각): 동트기 전 구축함 와드가 잠수함을 공격, 오전 6시 첫 공격 파 181대 출격, 7시 오파나 레이다가 비행기 무리를 잡음, 7시 55분 무렵 첫 파 공격, 8시 10분 무렵 애리조나 폭발, 8시 30분 무렵 잠시 뜸해지고 네바다가 움직임, 8시 45분 무렵 둘째 파 170대, 10시 조금 전 공격이 끝남. 맨 끝에 12월 8일 연설과 선전포고, 12월 11일 독일·이탈리아의 대미 선전포고가 있다.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전쟁으로 가는 길과 12월 7일 아침. 시각은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와 National WWII Museum이 적은 것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그날의 무기: 항공모함, 어뢰, 레이다

진주만 공격의 주인공은 항공모함이었습니다. 큰 함포를 단 전함이 아니라, 바다 건너 멀리서 띄운 비행기가 함대를 쳤습니다. 야마모토의 계획에서 항공모함과 해군 항공을 "전례 없는 규모"로 쓰는 것이 열쇠였던 까닭입니다.

비행기마다 맡은 일이 달랐습니다. 뇌격기는 물속으로 달리는 어뢰를 떨어뜨렸고, 폭격기는 위에서 폭탄을 떨어뜨렸으며, 전투기가 이들을 받쳤습니다. 오클라호마와 웨스트버지니아처럼 배 옆구리에 여러 발의 어뢰를 맞은 전함은 빨리 뒤집히거나 가라앉았습니다. 애리조나는 위에서 떨어진 폭탄 하나가 탄약고에 닿아 터졌습니다.

레이다는 이미 하와이에 있었습니다. 오파나 기지는 공격 한 시간쯤 전에 비행기 무리를 잡았습니다. 장비는 비행기를 보았지만, 그 신호는 아군 비행기로 읽혔습니다.

미국의 대공포는 빠르게 응사했습니다. NHHC는 일본군이 미국 대공 사격의 빠른 반응과 세기에 놀랐다고 적습니다. 같은 글은 더 많은 일본기를 떨어뜨리지 못한 까닭을 장병의 솜씨가 아니라 대공 무기의 수와 능력이 모자란 데서 찾습니다. 일본이 기습과 함께, 예상보다 훨씬 나은 비행기와 무기로 '기술적 기습'도 이뤘다는 것입니다.

숫자 읽기: 피해와 남은 것

미국 사망자 수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NHHC는 사망·실종 2,403명(해군 2,008명, 해병대 109명, 육군 218명, 민간인 68명)과 부상 1,178명을 적습니다.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은 그날 숨진 미국인을 2,390명(군인 2,341명, 민간인 49명)으로 적고, National WWII Museum은 "2,400명 넘게"라고 씁니다. 국립문서보관소는 죽거나 다친 미국인을 "3,500명 넘게"로 적습니다.

진주만 공격의 숫자를 자료별로 견준 도표. 미국 사망자는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2,403명(사망·실종, 해군 2,008명, 해병대 109명, 육군 218명, 민간인 68명), 국립공원청 2,390명(군인 2,341명, 민간인 49명), National WWII Museum '2,400명 넘게'다. 국립문서보관소는 죽거나 다친 미국인을 '3,500명 넘게'로 적었다. 공격한 일본 비행기는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의 한 쪽에서 353대, 다른 쪽에서 첫 파 181대와 둘째 파 170대다. 일본 손실은 비행기 29대와 100명이 안 되는 사람이다. 미국 비행기 188대가 부서지고 159대가 손상됐으며 배 21척이 가라앉거나 손상됐다
사망자와 비행기의 수. 공개 자료마다 숫자가 조금씩 달라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민간인 사망의 원인을 적은 방식도 다릅니다. NHHC는 민간인 68명 대부분이 호놀룰루에 떨어진, 신관이 잘못 맞춰진 대공포탄에 숨졌다고 적습니다. NPS는 민간인 49명 가운데 일부는 적의 공격, 일부는 아군 포화 때문이었다고 적습니다. 공격한 일본 비행기도 NHHC의 한 쪽은 353대, 다른 쪽은 첫 파 181대와 둘째 파 170대로 적습니다.

물건의 피해는 이렇습니다. 태평양 함대의 배 21척이 가라앉거나 손상됐고, 그 안에 전함 8척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비행기는 188대가 부서지고 159대가 손상됐으며, 대부분 이륙하기 전에 맞았습니다. 일본은 돌아오지 못한 비행기 29대, 곧 공격 부대의 10%가 안 되는 비행기와 100명이 안 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공격은 모든 것을 부수지 못했습니다.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세 척은 그날 항구에 없었습니다.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섬에 해병대 전투기를 내려 주고 돌아오는 중이었고, 렉싱턴은 정찰 폭격기 25대를 싣고 미드웨이섬으로 가고 있었으며, 새러토가는 정비를 위해 미국 서해안에 가 있었습니다.

배와 비행기에 집중한 공격은 연료 탱크 단지, 해군 공창의 수리 시설, 잠수함 기지를 남겼습니다. NHHC는 이 시설들이 그 뒤 몇 달 동안 진주만에서 시작한 작전에 꼭 필요했고, 항공모함과 함께한 순양함·구축함·급유함이 그 몇 달 동안 결정적이었다고 적습니다.

가라앉거나 손상된 배도 대부분 돌아왔습니다. 애리조나, 오클라호마, 유타 세 척을 빼고 모두 건져 고쳤습니다. 메릴랜드는 1942년 6월까지 완전히 고쳐져 현역에 돌아온 첫 배였고, 가라앉았던 웨스트버지니아는 1942년 5월 인양돼 뒤에 도쿄만 항복식 자리에도 있었습니다. 네바다는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에서 기함을 맡아, 진주만과 노르망디 두 곳에서 모두 싸운 유일한 배가 됐습니다.

공격이 부순 것과 남긴 것을 나눈 도표. 왼쪽 '부서진 것' 칸에는 전함 8척 모두 피해(5척 침몰, 3척 손상), 배 21척이 가라앉거나 손상, 비행기 188대 파괴(대부분 이륙 전), 여섯 비행장이 폭격·기총 소사를 받음이 있다. 가운데 '그날 항구에 없던 것' 칸에는 항공모함 세 척의 자리가 있다: 엔터프라이즈는 웨이크섬에서 돌아오는 바다 위, 렉싱턴은 미드웨이섬으로 가는 중, 새러토가는 미국 서해안에서 정비 중. 오른쪽 '남은 것' 칸에는 연료 탱크 단지, 해군 공창 수리 시설, 잠수함 기지가 있고, 이 시설이 그 뒤 몇 달 진주만에서 시작한 작전에 쓰였다는 메모가 있다. 아래 띠에는 가라앉거나 손상된 배 가운데 애리조나, 오클라호마, 유타 세 척을 빼고 모두 건져 고쳤고, 메릴랜드가 1942년 6월까지 완전히 고쳐진 첫 배이며 웨스트버지니아가 1942년 5월 인양됐다는 메모가 있다. 지도가 아니고 위치와 크기는 실제와 다르다
그날 부서진 것, 항구에 없던 것, 남은 것. 지도가 아니라 나눠 보는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그다음 날부터

12월 7일 이른 오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육군 장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의 전화로 공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오후 5시 무렵 비서 그레이스 툴리(Grace Tully)에게 의회에 보낼 선전포고 요청문을 불러 주었습니다. 타자 초안에서 그가 가장 크게 고친 곳은 첫 줄입니다. 처음에는 "세계사에 남을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world history)"이었습니다.

12월 8일 낮 12시 30분, 루스벨트는 의회 합동 회의에서 연설했고 라디오가 이를 전국에 전했습니다. 첫 문장의 12월 7일은 "치욕 속에 남을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이 됐습니다.

연설에서 그는 오아후 폭격이 시작된 지 한 시간 뒤 일본 대사가 국무 장관에게 미국 문서에 대한 답을 냈고, 거기에는 전쟁의 위협이나 암시가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연설은 말레이반도, 홍콩, 괌, 필리핀, 웨이크섬, 미드웨이섬도 공격받았다고 알렸습니다.

상원은 만장일치로 전쟁에 찬성했고, 하원에서는 몬태나의 평화주의자 지넷 랭킨(Jeanette Rankin) 한 사람만 반대했습니다. 루스벨트는 그날 오후 4시 선전포고에 서명했습니다. 12월 11일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미국도 두 나라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 두 곳에서 전쟁을 하게 됐습니다.

공격은 미국 사회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NHHC는 기습이 준 충격과 분노가 갈라져 있던 나라를 하나로 묶었다고 적습니다. 그 두려움은 다른 쪽으로도 흘렀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에 따르면 공격은 특히 서해안에서 안보에 대한 두려움을 불렀고, 경제 경쟁, 문화적 거리감에 대한 불신, 오랜 반아시아 인종주의와 겹쳐 일본계 미국인에게 재앙이 됐습니다.

1942년 2월 19일 루스벨트는 행정명령 9066에 서명했습니다. 그 뒤 여섯 달 동안 약 12만 2천 명의 남녀와 아이가 강제로 옮겨졌고, 그 가운데 7만 명 가까이가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들을 기소하지 않았고, 이들은 수용에 항소할 수 없었습니다. 1988년 공법 100-383은 이 수용이 부당했음을 인정하고 사과했으며, 수용됐던 사람마다 2만 달러를 지급했습니다.

남긴 것

진주만은 정보를 다루는 방식에 오래 남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1946년 여름 미 의회는 몇 달의 청문회 끝에 큰 보고서를 내고 22개의 결론과 권고를 달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더 큰 상상력과 정보의 뜻에 대한 더 예민한 인식이 있었다면, 누군가는 진주만이 일본 공격의 유력한 지점이라고 결론 내렸어야 했다고 적었습니다.

암호 해독은 공격 뒤 다시 속도를 냈습니다. 진주만의 조지프 로슈포르(Joseph Rochefort) 중령이 이끈 해군 해독반은 몇 달 만에 일본 해군 암호 JN-25를 풀었습니다. 박물관 글은 이 돌파가 미국 비행기가 일본 항공모함 4척을 가라앉힌 미드웨이 해전 승리에 결정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의 기억도 남았습니다. 해군 15명이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고 그 가운데 10명은 죽은 뒤였습니다. 유타의 피터 토미치(Peter Tomich) 상사는 보일러가 터지지 않게 막아 보일러실 승조원들이 빠져나가게 하고 숨졌습니다. 애리조나에는 형제 38쌍이 타고 있었고 그 가운데 63명이 숨졌습니다.

오클라호마 전사자 가운데 당시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35명뿐이었습니다. 2015년부터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efense POW/MIA Accounting Agency, DPAA)이 보훈부와 함께 유해를 다시 꺼내 300명 넘게 가족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인양되지 않은 애리조나는 지금도 진주만 바닥에 있고, 애리조나와 유타의 생존자 가운데 많은 이가 죽은 뒤 자기 배에 다시 묻히기를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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