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의 공습경보는 이미 풀려 있었습니다. 비행기 한 대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걸어서,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있었고, 불길을 막을 빈터를 만드느라 여성과 어린이들이 밖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히로시마 시각 오전 8시 15분 무렵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폭탄 하나를 떨어뜨렸습니다.

그 폭탄은 6년 전 대통령에게 전해진 편지 한 통에서 출발했습니다. 그 사이 미국은 나라 곳곳에 공장과 연구소를 둔 비밀 사업을 꾸렸습니다. 이 글은 맨해튼 계획이 어떻게 움직였고 1945년 7~8월에 무엇이 어떤 순서로 결정됐는지, 그리고 두 도시에서 숨진 사람의 수조차 왜 자료마다 다른지를 공개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편지 한 통과 경쟁의 두려움

1939년 10월 11일, 경제학자 알렉산더 삭스(Alexander Sachs)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그해 8월에 쓴 편지의 요점을 설명했습니다. 편지는 우라늄의 연쇄 반응 연구로 "매우 강력한 폭탄"을 만들 수도 있다고 알렸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 정부가 이 연구를 돕고 있다고 보고 미국 정부도 그렇게 하라고 권했습니다.

편지는 헝가리에서 건너온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가 함께 썼습니다. 그와 동료 망명 과학자들은 독일 과학자가 먼저 폭탄을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을 미국에 알리는 일을 자기 책임으로 여겼습니다. 루스벨트는 10월 19일 답장에서 민간과 군 대표로 우라늄을 연구할 위원회를 만들었다고 알렸습니다.

미 에너지부(DOE)의 역사 자료는 이 결정을 맨해튼 계획으로 이어진 많은 결정 가운데 첫째라고 부릅니다. 사업은 나치 독일보다 먼저 폭탄을 손에 넣으려는 경쟁으로 시작됐습니다.

군대가 맡은 과학 사업

1942년 여름, 군은 사업에 처음 붙인 위장 이름이 눈길을 끌까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8월 13일 일반 명령으로 맨해튼 공병 관구(Manhattan Engineer District, MED)를 세웠습니다. "맨해튼 계획"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나왔습니다.

9월 17일 육군은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 Groves) 대령을 사업 전체의 책임자로 앉혔고, 그는 엿새 뒤 준장이 됐습니다. 펜타곤 건설을 맡았던 공병 장교였습니다. 그의 방침은 분명했습니다. 전쟁이 다급하니 과학자들이 실험실 연구에서 개발과 생산으로 기록적인 시간 안에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942년 12월 2일, 엔리코 페르미가 이끈 연구진이 처음으로 스스로 이어지는 연쇄 반응을 얻었습니다(CP-1). 장소는 시카고 대학 운동장 관람석 아래의 라켓 코트였습니다.

12월 28일 루스벨트가 승인한 계획은 결국 20억 달러가 넘는 정부 투자가 됐습니다.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는 대통령에게 낸 보고서에서 폭탄이 1945년 상반기에 나올 수 있겠지만 그보다 이르기는 어렵다고 내다봤습니다. 1945년의 사업 규모는 미국 자동차 산업에 견줄 만했고, 노동자부터 노벨상 수상자까지 가장 많을 때 약 13만 명이 일했습니다.

오크리지, 핸퍼드, 로스앨러모스

사업은 육군이 조정했고 미국 곳곳에서 이뤄졌습니다. 그 가운데 핵심은 세 비밀 공동체였습니다. 지금은 이 세 곳이 한 국립 역사 공원으로 묶여 있습니다.

테네시주 오크리지(Oak Ridge)에는 우라늄-235를 모으는 Y-12, K-25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실험실 기술을 곧바로 큰 공장으로 옮기다 보니 문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공장에 보조 시설 하나까지, 오크리지의 세 시설을 다 합쳐서야 전쟁 중 만든 단 하나의 우라늄 폭탄에 쓸 우라늄이 모였습니다.

워싱턴주 핸퍼드(Hanford)는 플루토늄을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그로브스는 듀폰(DuPont)을 주 계약자로 삼고 컬럼비아강 가에 부지를 골랐습니다. 1943년 중반 공사를 시작했고, 첫 생산로인 B 원자로가 1944년 9월 말에 돌기 시작했습니다.

뉴멕시코주 북부의 로스앨러모스(Los Alamos)는 폭탄을 설계한 연구소였고 암호명은 "프로젝트 Y"였습니다. 산 위의 외딴 남학교 자리를 골랐고, 그로브스가 로버트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를 소장으로 뽑았습니다.

오펜하이머는 밖으로는 비밀을 지키되 안에서는 과학자들이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자고 했습니다. 1945년 2월 초 이곳에 핸퍼드의 첫 플루토늄이 도착했습니다.

비밀은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소련 정보기관은 1941년 가을부터 원자폭탄 사업에 관한 정보를 받고 있었습니다.

맨해튼 계획의 조직을 네모와 선으로 그린 개념도. 맨 위에 대통령(루스벨트, 뒤에 트루먼)과 육군장관 스팀슨이 있고, 그 아래 1942년 8월 13일 세운 맨해튼 공병 관구와 9월 17일 책임자가 된 레슬리 그로브스가 있다. 그 아래로 세 곳이 갈라진다. 테네시주 오크리지는 Y-12·K-25 공장에서 우라늄-235 농축, 워싱턴주 핸퍼드는 듀폰이 지은 플루토늄 생산로(B 원자로 1944년 9월 말 가동),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는 오펜하이머가 이끈 폭탄 연구소 '프로젝트 Y'. 핸퍼드에서 로스앨러모스로 화살표가 간다(첫 플루토늄 1945년 2월 초). 오크리지 칸에는 세 공장을 합쳐 우라늄 폭탄 하나 분량을 만들었다는 메모가 있다. 옆에는 1942년 12월 2일 시카고 CP-1의 첫 연쇄 반응, 가장 많을 때 약 13만 명이 일했다는 메모가 있다. 지도가 아니고 원리를 그리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누가 무엇을 맡았나. 지도가 아니라 조직의 흐름을 보여 주는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폭탄은 두 종류였습니다. 우라늄 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는 대부분이 설계를 완전히 시험하지 않은 채 7월 14일 태평양으로 떠났습니다. 플루토늄 폭탄은 새로운 설계를 확인해야 해서 시험이 꼭 필요해 보였습니다.

시험 이름 "트리니티(Trinity)"는 오펜하이머가 붙였습니다. 장소는 뉴멕시코 사막의 외딴 폭격장, "죽음의 여정"이라는 뜻의 호르나다 델 무에르토였습니다. 1945년 7월 16일 월요일 오전 5시 30분, 시험 장치가 터지면서 핵 시대가 시작됐습니다.

지켜본 사람들의 첫 반응은 대개 놀람과 기쁨, 안도였습니다. 그러나 곧 무거운 생각이 뒤따랐습니다.

시험 책임자 케네스 베인브리지(Kenneth Bainbridge)는 폭발을 "더럽고 무시무시한 광경"이라고 불렀고, 오펜하이머는 뒷날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구절이 떠올랐다고 돌아봤습니다. 원자 무기의 파괴력은 많은 과학자를 남은 생애 내내 괴롭혔습니다.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1945년 5월 초,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 육군장관이 트루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임시 위원회(Interim Committee)를 만들었습니다. 전쟁에서 원자 무기를 어떻게 쓸지, 전쟁 뒤 원자력 정책을 어떻게 할지 권고하는 자리였습니다.

5월 31일 회의에서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런스가 먼저 위력을 보여 주는 시연을 제안했습니다. 폭탄이 불발할 수 있고, 일본이 그곳에 미군 포로를 둘 수 있으며, 비행기가 격추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반대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시카고 금속연구소 과학자들은 "두 번째 의견"을 내려고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가 이끈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이 프랑크 보고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 먼저 보여 주지 않고 일본을 폭격하면 군비 경쟁을 피할 수 없고, 그것을 막을 길은 전후 국제 통제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펜하이머·페르미 등 위원회의 과학 자문단은 기술 시연으로는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고 봤고, 6월 21일 임시 위원회는 경고 없이 되도록 빨리 쓰자는 결론을 냈습니다.

표적 목록에는 처음에 교토가 들어 있었습니다. 스팀슨은 일본의 가장 소중한 문화 중심지라며 교토를 뺐고, 그 자리를 나가사키가 채웠습니다.

7월 24일 저녁, 포츠담 회담 중이던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새 무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 대화는 자료마다 조금 달리 적혀 있습니다. DOE 역사 자료에는 트루먼이 "보기 드문 파괴력을 가진 새 무기"가 있다고만 알린 것으로, 국무부 역사실 쪽에는 7월 16일 첫 원폭을 성공적으로 터뜨렸다고 알린 것으로 나옵니다.

이튿날인 7월 25일 투하 명령이 나왔습니다. 8월 3일 뒤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 나가사키 가운데 한 곳을 공격하라는 내용이었고, 다음 폭탄에는 따로 허가가 필요 없었습니다.

7월 26일 미국·영국·중국은 포츠담 선언을 내고 일본이 곧바로 항복하지 않으면 "신속하고 완전한 파괴"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아직 일본과 전쟁 중이 아니던 소련은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선언에는 원자폭탄 이야기가 없었고 천황의 지위도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7월 29일 일본은 선언을 거부했습니다.

8월 6일 히로시마

그날 새벽 에놀라 게이는 티니언섬을 떠났습니다. DOE 역사 자료는 히로시마에 민간인 30만 명 가까이와 군인 약 4만 3,000명이 있었다고 적습니다. 히로시마시는 당시 도시에 있던 사람을 약 35만 명으로 봅니다.

주민과 군인, 건물 철거에 동원된 주변 마을 사람들, 그리고 식민지였던 조선·대만·중국 대륙에서 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일부는 징용된 노동자였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의 유학생 몇 명, 미군 포로도 있었습니다.

폭심지에서 1마일 안의 건물은 거의 모두 무너졌고, 3마일 안의 건물은 거의 모두 부서졌습니다. 아무 피해 없이 남은 건물은 10%도 되지 않았습니다. 곳곳에서 한꺼번에 난 작은 불이 하나의 큰 화재 폭풍으로 합쳐져 시내 4.4제곱마일을 삼켰습니다.

며칠 뒤 생존자들에게서 방사선 질환의 첫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방사선 질환으로 인한 죽음은 3~4주 뒤에 가장 많았다가 7~8주 뒤에야 줄었습니다. 암 같은 장기적인 위험과 마음의 상처는 남은 생애 내내 이어졌습니다.

워싱턴 시각 8월 6일 오전 11시, 트루먼의 성명이 방송돼 미국이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고 알렸습니다. 이틀 뒤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의 일본군을 공격했습니다.

8월 9일 나가사키, 그리고 항복

8월 9일 오전 3시 47분, B-29 "복스 카(Bock's Car)"가 티니언을 떠났습니다. 첫 표적은 고쿠라 조병창이었습니다. 도착해 보니 고쿠라는 연기와 안개에 가려 있었고, 연료가 모자라 두 번째 표적인 나가사키로 향했습니다. 나가사키도 구름에 덮여 있었지만 폭탄은 오전 11시 2분 도시 위에서 터졌습니다.

DOE 역사 자료는 폭탄 아래에 20만 명 가까이가 있었다고 적고, 나가사키시는 당시 인구를 약 24만 명으로 봅니다. 폭탄은 두 미쓰비시 공장 사이에서 터졌고, 언덕과 지형 덕에 도시 일부가 피해를 덜 입었습니다. 그래도 폭심지 반 마일 안은 거의 다 무너졌습니다.

집의 피해는 자료마다 다르게 셉니다. DOE 역사 자료는 집 5만 2,000채 가운데 1만 4,000채가 무너지고 5,400채가 크게 부서졌다고 적고, 나가사키시는 1945년 12월 말까지 피해 가옥을 시 전체의 약 36%인 1만 8,409채로 봅니다.

그 사이 도쿄에는 소련 참전 소식과 나가사키 소식이 거의 한꺼번에 닿았습니다. 8월 9~10일 밤 어전 회의의 표결은 3 대 3이었고, 천황이 직접 나서 항복을 정했습니다. 8월 10일 일본은 천황이 명목상 국가 원수로 남는다는 조건 하나만 붙여 항복을 제안했습니다. 같은 날 그로브스는 다음 폭탄이 8월 17~18일 뒤 준비된다고 보고했지만, 트루먼은 항복 협상 동안 원자 공격을 곧바로 멈추라고 명령했습니다.

8월 12일 미국은 천황이 순전히 의례적인 자리로만 남을 수 있다며 항복을 받겠다고 밝혔습니다. 일본 정부 안의 논쟁이 이어지던 8월 13일 재래식 공습이 다시 시작돼 수천 명의 민간인이 더 숨졌습니다. 8월 15일 천황의 항복 방송이 일본 전역에 나갔고, 9월 2일 미주리함 갑판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습니다.

맨해튼 계획과 원폭 투하 연표 도표. 첫 줄은 1939~1942년: 1939년 10월 11일 아인슈타인 편지가 루스벨트에게 전해지고 10월 19일 우라늄 위원회 답장, 1942년 8월 13일 맨해튼 공병 관구, 9월 17일 그로브스, 12월 2일 CP-1, 12월 28일 루스벨트의 계획 승인. 둘째 줄은 1945년 5~7월: 5월 초 임시 위원회, 6월 21일 경고 없이 쓰자는 결론, 7월 16일 트리니티 시험, 7월 24일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새 무기를 알림, 7월 25일 투하 명령, 7월 26일 포츠담 선언, 7월 29일 일본의 거부. 셋째 줄은 1945년 8~9월: 8월 6일 히로시마, 8월 8일 소련 선전포고, 8월 9일 나가사키, 8월 10일 일본의 항복 제안과 트루먼의 원자 공격 중지, 8월 12일 미국의 답, 8월 15일 천황의 방송, 9월 2일 미주리함 항복 조인.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편지 한 통에서 항복 조인까지. 미 에너지부 역사 쪽의 날짜를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숫자 읽기와 엇갈리는 평가

두 도시에서 몇 명이 숨졌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릅니다. 미국과 일본의 공식 자료가 모두 그렇게 적습니다. 숫자가 갈리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언제까지를 셌느냐입니다.

히로시마의 경우 DOE 역사 자료는 직후의 폭풍·열·방사선으로 약 7만 명이 숨졌다고 적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시내에 포로로 잡혀 있던 미군 항공병 약 20명도 있었습니다. 숨진 사람은 1945년 말까지 10만 명을 넘었고, 5년 동안은 20만 명에 이르렀거나 넘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트루먼 대통령 도서관의 교육 자료는 처음 몇 분 동안 약 8만 명이라고 적습니다.

히로시마시와 평화기념자료관은 급성 방사선 장해가 거의 가라앉은 1945년 12월 말까지 약 14만 명(±1만 명)을 공식 추정으로 씁니다.

나가사키의 경우 DOE 역사 자료는 직후 4만 명이 숨지고 6만 명이 다쳤으며, 1946년 1월까지 7만 명 가까이, 5년 안에 그 두 배가 숨졌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트루먼 도서관은 첫 1분 뒤 3만 9,000명, 나가사키시는 1950년 7월 보고를 근거로 1945년 12월 말까지 7만 3,884명이 숨지고 7만 4,909명이 다쳤다고 적습니다.

두 도시를 합친 추정도 있습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2024년 발표문에는 두 원폭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주민 약 12만 명이 숨졌고, 그 뒤 몇 달과 몇 해 동안 비슷한 수가 화상과 방사선 상해로 더 숨졌다고 나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망자 추정을 자료와 시점별로 견준 막대 도표. 히로시마: 미 에너지부 역사 직후 약 7만 명, 1945년 말 10만 명 넘게, 5년 동안 20만 명 이상일 수도. 트루먼 도서관 처음 몇 분 약 8만 명. 히로시마시 1945년 12월 말까지 약 14만 명(±1만 명). 나가사키: 미 에너지부 역사 직후 4만 명, 1946년 1월까지 7만 명 가까이, 5년 안에 그 두 배일 수도. 트루먼 도서관 첫 1분 뒤 3만 9,000명. 나가사키시 1945년 12월 말까지 7만 3,884명. 투하 때 도시에 있던 사람은 히로시마 약 35만 명(히로시마시), 나가사키 약 24만 명(나가사키시)이라는 메모와, 자료마다 센 시점과 방법이 달라 바로 견줄 수 없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도시, 다른 숫자. 자료마다 센 시점과 방법이 다릅니다 (도표)(도표)

투하 결정은 더 크게 갈립니다.

DOE 역사 자료는 20세기 미국사에서 이보다 논란이 큰 문제는 아마 없다고 적고, 두 견해를 나란히 소개합니다. 많은 역사가는 전쟁을 끝내는 데 필요했고, 수십만 명이 죽었을지 모를 본토 침공을 피해 일본인과 미국인의 목숨을 구했다고 봅니다. 다른 역사가들은 원폭 없이도 일본이 항복했을 것이며, 트루먼과 참모들이 오직 소련을 위협하려고 폭탄을 썼다고 봅니다.

국무부 역사실도 포츠담 회담에서 트루먼이 보인 다소 강경한 태도를, 역사가들이 흔히 핵 능력이 협상력을 높여 줄 것이라는 미국 협상단의 믿음으로 해석해 왔다고 적습니다.

판단의 재료도 함께 적혀 있습니다. 미국은 도쿄와 모스크바 사이의 전문을 가로채 일본이 조건부 항복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시연, 소련 참전 기다리기, 봉쇄와 재래식 폭격 같은 다른 길도 있었지만 빨리 결과를 낼 것이라고 본 사람은 적었습니다.

DOE 역사 자료에 따르면 직전의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0주 넘는 싸움 끝에 미국인 1만 2,000명 넘게, 일본인 10만 명, 그리고 아마 오키나와 주민 10만 명이 더 숨졌습니다.

DOE 역사 자료는 트루먼이 원폭으로 전후 외교에서 우위를 얻기를 바랐다는 점도 적으면서, 결국 또 한 해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피하려는 생각이 결정에 가장 크게 작용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트루먼 도서관도 역사가들이 지금도 이 결정을 두고 논쟁한다고 적습니다.

남긴 것

DOE 역사 자료에 따르면 원자폭탄은 1931~1945년 전 세계에서 아마 6,000만 명이 숨진 전쟁의 끝에 쓰였습니다. 전쟁 동안 숨진 일본 군인과 민간인은 200만 명이 훨씬 넘고, 그 가운데 30만 명 또는 그 이상이 두 원폭 때문이었을 수 있습니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생존자들의 목소리입니다. 그들의 처지는 오랫동안 감춰지고 외면당했습니다. 1956년 지역 피폭자 단체들이 태평양 핵실험 피해자들과 함께 니혼 히단쿄(일본 원수폭 피해자 단체 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2024년 평화상을 이 단체에 줬습니다. 위원회는 핵무기 사용을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국제 규범, 이른바 "핵 금기"가 자리 잡는 데 피폭자의 증언이 큰 몫을 했다고 적고, 2024년 발표 때까지 거의 80년 동안 전쟁에서 핵무기가 쓰이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은 희생자의 유품과 피폭자의 증언으로 "No More Hiroshimas"라는 뜻을 전합니다.

자료관이 소개하는 유품 기록에 쓰카모토 시즈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23세였던 그는 그날 직장의 지시로 평소보다 조금 늦은 오전 8시 무렵 집을 나섰다가, 폭심지 가까운 교차로에서 피폭했습니다. 아버지는 7일에야 딸이 이노쿠치 마을로 갔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지만, 화상이 너무 심해 목소리를 듣고서야 딸을 알아봤습니다. 가족이 돌봤지만 시즈에는 10일에 숨졌고, 유품은 어머니 하나요가 기증했습니다.

미국이 핵무기를 혼자 가진 시간은 길지 않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1945년 5월 31일 임시 위원회 회의에서도 참석자 대부분이 미국의 독점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사업의 방식도 남았습니다. 과학·정부·대학·군·산업을 한 조직으로 묶은 맨해튼 계획은 20세기 후반 미국 "큰 과학"의 조직 모델이 됐고, 케네디 대통령이 달 착륙 목표를 밝힐 때 떠올린 것도 이 사업이었습니다.

2015년 11월 10일, 오크리지·로스앨러모스·핸퍼드의 세 곳이 맨해튼 계획 국립 역사 공원으로 지정됐습니다. 비밀이던 공장과 연구소가 이제는 누구나 찾아가 그 시대를 돌아보는 곳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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