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가을, 뮌헨에서 돌아온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Neville Chamberlain)이 종이 한 장을 높이 들어 보였습니다. 히틀러와 함께 이름을 올린 9월 30일자 영독 선언이었고, 두 나라 국민이 다시는 서로 전쟁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문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환호와 축하가 그를 맞았습니다. 체임벌린은 뮌헨의 합의를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불렀습니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39년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평화를 지키려던 양보는 왜 전쟁을 막지 못했을까요? 1931년 만주에서 1939년 폴란드까지, 침략과 그에 맞선 대응이 어떤 차례로 이어졌는지 공개 기록으로 따라가 봅니다.

베르사유와 대공황이 남긴 것

1차 대전을 끝낸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의 군대를 묶었습니다. 육군은 10만 명까지, 해군은 1만 톤 미만의 배만 둘 수 있었고 잠수함대와 공군은 아예 금지됐습니다. 징병도 막혔고, 프랑스와 맞닿은 라인란트(Rhineland)에는 독일 군대도 요새도 둘 수 없었습니다.

전쟁 책임 조항과 막대한 배상금, 군비 제한은 대부분의 독일인에게 특히 가혹해 보였습니다. 여기에 경제 위기가 겹쳤습니다. 1929년 미국 주식 시장 붕괴와 독일의 경기 하강, 프랑스와 영국의 재정 곤란이 한꺼번에 닥쳐 세계 금융 위기가 됐고, 1933년 런던 경제 회의도 큰 합의를 내지 못해 대공황은 1930년대 내내 이어졌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의 영상 해설에 따르면 1933년 초 독일 노동 인구의 3분의 1 넘게 일자리가 없었고, 이 상황이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건을 비난하며 지지를 모았습니다.

대서양 건너 미국은 안으로 물러섰습니다. 대공황은 미국을 1차 대전 뒤의 고립주의 쪽으로 더 밀어냈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Office of the Historian)은 1931년 일본의 중국 동북부 점령,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중부·동부 유럽에서 독일의 팽창에 미국이 큰 조치를 하지 않았다고 정리합니다.

동아시아: 만주에서 노구교까지

첫 침략은 유럽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 일어났습니다. 1931년 9월 18일 묵덴(지금의 선양) 근처에서 철로 한 구간이 폭파됐습니다. 철도를 가진 일본은 중국 민족주의자 탓으로 돌리고 이를 기회로 만주를 침공했습니다. 폭탄은 일본 육군의 중간 간부들이 군사 행동의 구실을 만들려고 설치했을 수 있다는 추측도 있었습니다.

몇 달 만에 일본군은 만주를 휩쓸었습니다. 일본은 이곳을 만주국이라는 새 자치국으로 선포했지만, 실제로 다스린 것은 현지 일본군이었습니다. 대공황 속이라 일본을 벌하는 경제 제재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적었습니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은 1932년 초, 미국의 권리를 해치는 일본·중국 사이의 조약이나 합의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른바 스팀슨 독트린(Stimson Doctrine)입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이 불승인 원칙이 계속되는 일본의 침략과 팽창 앞에서 거의 효과가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리턴 조사단(Lytton Commission)을 보냈습니다. 보고서는 분쟁의 책임을 중국 민족주의와 일본 군국주의에 똑같이 나눴지만, 만주국은 중국의 영토 보전을 어겼다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33년 연맹이 이 보고서를 채택하자 일본 대표단은 자리를 떴고 다시는 연맹 이사회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뒤이은 중일 휴전도 만주를 일본 손에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근처 마르코 폴로 다리, 곧 노구교에서 중국군과 일본군이 부딪쳤고 두 나라는 전면전에 들어갔습니다. 일본군은 해안을 따라 내려가 수도 난징까지 들어갔습니다. 난징에서 미국인을 피난시키던 미 군함 파나이(Panay)는 일본 육군의 폭격을 받아 3명이 숨졌습니다. 1937년 전까지 미국 관리 가운데 강한 태도를 권한 사람은 적었고, 미국은 일본을 자극할까 봐 중국을 거의 돕지 않았습니다.

유럽: 재무장, 라인란트, 에티오피아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이 히틀러를 독일 총리로 임명했습니다. 몇몇 보수 정치인이 대통령을 설득해 이뤄진 정치적 거래의 결과였습니다. 히틀러는 독일을 국제연맹에서 빼내고 유럽 군축 논의에서도 물러났습니다.

1934년 1월에는 폴란드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습니다. 독일이 재무장하기 전에 프랑스와 폴란드가 군사 동맹을 맺을 가능성을 없애려는 수였습니다. 1935년 초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건을 깨는 재무장 계획을 발표했고, 1936년 3월에는 비무장지대인 라인란트로 군대를 보냈습니다.

남쪽에서는 이탈리아가 움직였습니다.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이탈리아는 1935년 10월 초 에티오피아(당시 이름 아비시니아)를 침공해 1936년 5월까지 정복하고 합병했습니다. 침공 날짜는 자료에 따라 10월 2일 또는 3일로 적혀 있습니다.

국제연맹은 이탈리아에 제재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IWM 학예사는 연맹이 가벼운 제재 말고는 실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영국도 침공을 막지 않았으며, 이를 지켜본 히틀러가 크게 고무됐다고 말합니다.

연맹의 제재가 있고 이탈리아와 영국·프랑스의 동맹이 끝난 뒤, 이탈리아와 독일은 1936년부터 가까워졌습니다. 그해 10월 25일 두 나라는 협력 조약을 맺었고 11월 1일 로마-베를린 추축(Axis)을 발표했습니다. 11월 25일에는 독일과 일본이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을 겨냥한 방공 협정(Anti-Comintern Pact)을 맺었고, 이탈리아는 1937년 11월 26일 여기에 들어갔습니다.

같은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졌습니다. 미국 의회는 1935년 8월 31일 전쟁 중인 나라에 무기, 탄약, 전쟁 도구를 수출하지 못하게 하는 첫 중립법을 만들었고, 1936년 2월 29일 법을 늘리며 교전국에 대한 대출도 막았습니다. 1937년 중립법에는 무기가 아닌 물건이라면 대통령 재량으로 교전국이 사 갈 수 있되 곧바로 값을 치르고 미국 배가 아닌 배로 실어 가게 하는 "현금 지불·자국 수송(cash-and-carry)" 조항이 들어갔습니다.

1938년: 오스트리아와 뮌헨

1938년 3월 12일 독일군이 오스트리아에 들어갔습니다. 4월에 치른 국민투표는 오스트리아 사람 약 99%가 합병을 원한다고 나오도록 조작됐고, 이 투표로 합병이 뒤늦게 승인됐습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SHMM)은 1935년의 재무장부터 1936년 라인란트,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합병, 곧 안슐루스(Anschluss)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사실상 받아들였다고 설명합니다.

다음은 체코슬로바키아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뮌헨 위기 때까지 의회 민주주의를 지킨 나라였고, 독일과 맞닿은 국경 지대 수데텐란트(Sudetenland)에는 독일계 주민이 다수 살았습니다. 독일과 전쟁이 나면 쓸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방어 진지도 모두 이 지역에 있었습니다. 1938년 늦여름 히틀러는 수데텐란트를 넘기지 않으면 유럽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 TNA)의 교육 자료는 그해 9월 히틀러가 수데텐 독일인 300명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고 적습니다. 그는 이 주장을 구실로 체코 국경에 군대를 두었고, 수데텐란트의 나치에게는 소란을 일으키라는 지시가 내려갔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는 수데텐을 넘기면 방어 시설 대부분이 독일 손에 들어가 나라가 무방비가 될 것을 걱정했습니다.

체임벌린은 9월에 독일로 세 번 날아갔습니다. 첫 회담지 베르히테스가덴의 회담록에는 "세계 전쟁이 나든 말든 상관없다"며 곧 해결하겠다는 히틀러의 말과, 무력으로 해결할 작정이면 왜 자기를 오게 했느냐는 체임벌린의 반문이 남아 있습니다. 일주일 뒤 고데스베르크, 9월 29일 뮌헨이 이어졌습니다.

뮌헨 회담에는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네 나라 지도자가 앉았고, 체코 지도자들은 히틀러의 고집으로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1938년 9월 29일 히틀러, 체임벌린,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무솔리니가 서명한 협정은 수데텐 지역에서의 철수를 10월 1일 시작해 10월 10일까지 끝내게 했습니다. 자세한 조건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포함한 다섯 나라 대표의 국제 위원회가 정하기로 했습니다. 10월 1일 독일군은 총 한 발 쏘지 않고 수데텐란트를 점령했습니다.

협정 직전 영국에는 전쟁 공포가 번져 아이들이 피난하고 방독면을 받으려는 줄이 섰습니다. 영국에서 뮌헨 협정은 환호를 받았습니다. 반면 당시 정부 밖에 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뮌헨을 "완전한 재앙(an unmitigated disaster)"이라고 불렀고, 히틀러는 뒤에서 영독 선언을 하찮은 문서로 여겼습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독일의 움직임과 영국·프랑스의 대응을 계단처럼 놓은 개념 도표. 1935년 베르사유 제한을 깬 재무장, 1936년 라인란트 진주,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합병은 파란 계단이고 대응 칸에는 '대체로 받아들임'이라고 적혀 있다. 1938년 9월 수데텐란트 요구와 전쟁 위협은 파란 계단이고 대응은 뮌헨 협정으로 수데텐란트를 넘김이다. 1939년 3월 체코 나머지 점령은 빨간 계단이고 대응은 폴란드 보장,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은 빨간 계단이고 대응은 9월 3일 선전포고다. 지도가 아닌 단순한 개념 도표이고, '대체로 받아들임'은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의 표현을 따랐다는 메모가 있다
요구와 대응의 계단. 파란 칸은 양보나 묵인, 빨간 칸은 보장과 전쟁입니다 (도표)(도표)

1939년: 프라하에서 폴란드까지

뮌헨의 약속은 반년을 가지 못했습니다. 1939년 3월 14~15일 독일의 압력 아래 슬로바키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3월 15일 독일은 체코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를 침공해 점령했습니다. 뮌헨 협정을 정면으로 어긴 일이었고, 독일은 이 땅에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을 세웠습니다.

3월 31일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국경의 보전을 보장했습니다. IWM은 이 보장을 유화 정책이 끝난 지점으로 봅니다.

4월에는 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해 합병했고, 4월 28일 히틀러는 폴란드와 맺은 불가침 조약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습니다. 보장도 히틀러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는 위협으로도 양보로도 전쟁을 단념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이 조약을 맺었습니다.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와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가 협상했습니다. 공개된 부분은 서로 10년 동안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고, 비밀 의정서는 동유럽을 두 나라의 세력권으로 나누고 폴란드를 나레프·비스와·산 강을 따라 가르기로 했습니다. 서로 앙숙이던 두 나라가 편의로 맺은 합의였습니다.

9월 1일 독일은 소련의 개입을 걱정하지 않고 폴란드를 공격했습니다. 침공을 앞두고 나치 선전은 폴란드가 독일계 주민을 박해한다고 비난했고, 친위대(SS)는 군과 짜고 독일 라디오 방송국에 대한 가짜 공격을 꾸며 폴란드에 뒤집어씌웠습니다.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다섯 달 전의 약속대로 독일에 선전포고했고, 9월 17일에는 소련이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했습니다. 이렇게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습니다.

1931년부터 1939년까지를 해마다 한 줄로 놓고 동아시아, 유럽, 미국 세 칸으로 나눈 연표 도표. 동아시아 칸: 1931년 9월 18일 묵덴 철도 폭파와 일본의 만주 침공, 1932년 초 스팀슨 독트린, 1933년 연맹의 리턴 보고서 채택과 일본 대표단 퇴장, 1936년 11월 25일 독일·일본 방공 협정,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충돌과 중일 전면전. 유럽 칸: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총리 임명, 1934년 1월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 1935년 초 재무장 발표, 1935년 10월 초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연맹 제재, 19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 스페인 내전 발발, 11월 1일 로마-베를린 추축 발표, 1937년 11월 26일 이탈리아의 방공 협정 가입, 1938년 3월 12일 독일군 오스트리아 진입, 9월 29일 뮌헨 협정, 10월 1일 수데텐란트 점령, 1939년 3월 15일 보헤미아·모라비아 점령, 3월 31일 폴란드 보장, 8월 23일 독소 조약, 9월 1일 폴란드 침공, 9월 3일 선전포고, 9월 17일 소련의 침공. 미국 칸: 1935년 8월 31일 첫 중립법, 1936년 2월 29일 갱신과 대출 금지, 1937년 중립법의 현금 지불·자국 수송 조항, 1939년 11월 마지막 중립법과 무기 금수 해제. 줄 높이는 사건 수에 따라 달라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1931~1939년의 세 갈래. 미 국무부 역사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 영국 전쟁박물관 자료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군비와 계산: 비행기, 레이다, 시간

뮌헨 협상이 한창이던 1938년 9월 20일, 영국 제국방위위원회(Committee of Imperial Defence)의 사무국장 이즈메이(Ismay) 장군이 내각에 비밀 각서를 보냈습니다. 각서는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흡수하면 군사적 위신과 전쟁 능력이 커지고, 프랑스와 영국을 상대로 지금보다 강한 지상군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하늘의 셈법은 조금 달랐습니다. 공중 타격력에서는 독일이 영국·프랑스 공군보다 앞선 상태를 지킬 수 있다고 보았지만, 필요한 노력을 들이면 공습에 대한 방어에서는 독일을 따라잡거나 적어도 격차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결론은 군사적으로는 "시간이 우리 편"이며, 독일과 꼭 싸워야 한다면 지금보다 6~12개월 뒤에 싸우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습니다.

체임벌린은 뮌헨 협정에 서명하던 때에도 전쟁에 대비해 군비 지출을 크게 늘리는 데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IWM 학예사는 영국과 프랑스의 재무장이 1930년대 말에 빨라졌지만 1939년의 전쟁에 할 수 있었던 만큼 준비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영국이 레이다(radar) 개발에 큰 자원을 쏟은 일은 크게 도움이 됐다고 덧붙입니다.

처칠은 1932년 독일을 다녀온 뒤 1930년대 내내 재무장을 점점 더 크게 요구했습니다. 그를 전쟁광이나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으로 본 이들도 있었지만, IWM 학예사는 그 어느 쪽을 뒷받침할 증거도 없다고 말합니다.

유화 정책을 어떻게 볼까

유화(appeasement)는 적대적일 수 있는 나라의 요구를 들어주며 평화를 지키려는 정책을 말합니다. IWM은 이 말을 1930년대 영국이 히틀러의 영토 확장을 막지 않고 둔 정책의 이름으로 소개합니다. 지금은 약함의 정책으로 널리 평가가 떨어졌지만, 당시에는 인기 있고 현실적인 정책으로 보였다는 설명이 뒤따릅니다.

왜 인기가 있었을까요? 체임벌린도 영국 국민도 또 한 번의 세계대전 학살만은 피하고 싶었습니다. 제국을 지키느라 힘이 부친 영국은 큰 재무장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주요 동맹 프랑스는 크게 약해졌으며 영연방의 지원도 1차 대전 때와 달리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영국인은 독일이 1918년 패배 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정부의 생각도 비슷했습니다. 영국 정부는 히틀러와 독일에 정당한 불만이 있으며, 그 불만을 들어주면 히틀러가 만족해 요구를 줄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영국 여론은 베르사유 조약의 영토·군사 조항을 어느 정도 고치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영국도 프랑스도 나치 독일과 싸울 군사적 준비가 됐다고 느끼지 않았습니다.

비판하는 쪽은 결과를 봅니다. IWM 학예사는 독일의 요구에 양보할 때마다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를 자기 야망의 큰 위협으로 보지 않게 됐고, 그래서 유화가 전쟁을 피하기는커녕 더 일어나기 쉽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체임벌린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오래, 유화 전반과 특히 1938년 9월의 행동 때문에 비난받았습니다.

변호하는 쪽의 근거도 같은 기록 안에 있습니다. 뮌헨 때문에 히틀러가 그 시점에 영국·프랑스와 싸울 위험을 질 수 없어 계획한 정복 전쟁을 접어야 했다고도 말할 수 있고, 유화가 두 나라에 재무장할 시간을 벌어 주었다는 것이 학예사의 다른 설명입니다. 체임벌린은 앞선 총리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와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의 노선을 이어 간 사람이었고, 총리에서 물러난 지 여섯 달 만인 1940년 11월 세상을 떠나 자기 변론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TNA의 학습 자료는 학생들에게 체임벌린을 변호하는 논리를 직접 세워 보라고 권합니다.

동아시아에서 먼저 나온 교훈도 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1931~33년 만주 위기가 밀고 나가려는 강국 앞에서 1920년대의 평화·불가침·군축 합의가 쓸모없었음을 보여 줬다고 정리합니다. 기록에 남은 날짜를 차례로 놓으면, 양보와 묵인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이어졌다는 것이 보입니다.

유화 정책을 보는 견해를 세 칸으로 나눈 도표. 위 칸 '당시 인기를 얻은 까닭'에는 또 한 번의 세계대전을 피하고 싶었음, 제국을 지키느라 힘이 부친 영국, 약해진 프랑스, 확실하지 않은 영연방의 지원, 1918년 패배 뒤 독일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이 영국 전쟁박물관 출처와 함께 적혀 있다. 아래 왼쪽 '비판' 칸에는 양보할 때마다 히틀러가 영국과 프랑스를 큰 위협으로 보지 않게 됐다는 것, 그래서 전쟁이 더 일어나기 쉬워졌다는 것, 처칠의 '완전한 재앙'이라는 말, 체임벌린이 죽은 뒤에도 오래 비난받았다는 것이 있다. 아래 오른쪽 '변호' 칸에는 재무장할 시간을 벌었다는 것, 1938년 9월 이즈메이 각서의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말, 체임벌린이 앞선 총리들의 노선을 이었다는 것, 영국 국립문서보관소가 학생들에게 체임벌린을 변호하는 논리를 세워 보라고 권한다는 것이 있다
유화 정책을 보는 눈. 영국 전쟁박물관과 영국 국립문서보관소가 적은 근거를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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