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8월 23일,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 북쪽에서 볼가강 기슭에 닿았습니다. 그날 저녁 독일 항공대가 도시 위에 나타났습니다. 다섯 달 남짓 뒤인 1943년 2월 2일, 같은 도시의 트랙터 공장 둘레에서 남아 있던 독일군 무리가 마지막 무전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에 도시는 거의 다 무너졌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WM)은 스탈린그라드를 2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의 하나로 꼽습니다. 그런데 처음 독일의 여름 공세가 노린 것은 이 도시가 아니라 석유였습니다. 곁가지였던 도시는 어떻게 싸움의 한가운데가 됐을까요?

석유를 향한 여름 공세

1942년 여름 히틀러는 남러시아로 큰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남은 소련군을 무너뜨리고 끝내 캅카스 유전을 차지하려는 공세였고, 이름은 청색 작전(Operation Blau)이었습니다.

첫 진격이 잘 풀리자 히틀러는 속도를 내려고 남쪽 집단군을 둘로 나눴습니다. A 집단군은 캅카스 유전으로, B 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로 향했습니다. 미국 국립 2차 대전 박물관(National WWII Museum)에 실린 역사가 얀 만(Yan Mann)의 글은 처음 독일의 계획이 스탈린그라드에 매달리지 않았고 목표는 석유였다고 설명합니다.

독일군만의 공세도 아니었습니다. 1942년 전역에 루마니아는 27개 사단, 헝가리는 13개, 이탈리아는 9개 사단을 보냈고, 모두 약 44만 명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남부 집단군 쪽에 있으면서 스탈린그라드로 나아가는 독일 제6군의 옆구리를 지켰습니다.

진격은 갈수록 느려졌습니다. 파울루스(Friedrich Paulus)의 제6군은 7월 마지막 두 주에 55~70 km, 하루 4~5 km를 나아갔습니다. 8월 1일부터 19일까지는 모두 30~35 km, 하루 1.5~1.75 km로 떨어졌습니다. 그 사이 8월 7일에는 돈강 굽이의 칼라치 서쪽에서 소련군 앞부분을 에워싸 나흘 동안 5만 명을 포로로 잡기도 했습니다.

볼가강 가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는 모스크바에서 560마일 떨어진 볼가강의 높은 서쪽 기슭에 있습니다. 강을 따라 남북으로 15마일 길이의 초승달처럼 길게 붙은 도시입니다. 소련 독재자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소련 역사가들은 전투의 시작을 1942년 7월 17일로 잡지만, 독일군이 도시 앞에 닿은 것은 8월 하순입니다. 8월 21일 돌파를 시작한 독일 제14기갑군단은 사흘 만에 도시 북쪽의 볼가강까지 가는 쐐기를 밀어 넣었고, 독일군이 볼가강 기슭에 닿은 날은 8월 23일로 적혀 있습니다. 소련 최고 사령부(스탑카)는 8월 25일 도시에 계엄을 선포하고 민간인을 모두 내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도시는 싸우는 동안에도 무기를 만들어, 스탈린그라드와 그 둘레에서 만든 T-34와 T-60 전차가 공장을 나서자마자 전차 대대에 배치됐습니다. 그러나 도시로 다가오는 길의 싸움에서는 고장으로 잃는 전차도 많았습니다. 한 번은 엿새 동안 소련 전차 여단 12개가 전차 326대를 잃었는데, 그 가운데 200대가 고장이었습니다. 전차라는 기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주력전차 글에 있습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1942년 7월 17일 소련 역사가들이 잡는 전투 시작일, 8월 7일 칼라치 서쪽 공격과 나흘 동안 포로 5만 명, 8월 23일 독일군이 도시 북쪽 볼가강 도달과 폭격 시작, 8월 25일 도시에 계엄 선포, 9월 13일 도시 중심 공격, 10월 14일 공격 재개와 이튿날 트랙터 공장 함락, 10월 23일 붉은 10월 제철소 절반 함락, 11월 19일 북쪽에서 소련 반격 시작(천왕성 작전, 크게 표시), 11월 20일 남쪽에서 두 번째 공격, 11월 23일 칼라치 부근에서 고리가 닫힘(크게 표시), 12월 12일 독일 구원 작전 시작, 12월 19일 구원군이 포위망에서 35마일 떨어진 미시코바강 도달, 1943년 1월 10일 소련의 마지막 공세 시작, 1월 12일 피톰니크 비행장 상실, 1월 26일 마마이 언덕 탈환과 포위망 분단, 1월 31일 군 사령부의 마지막 무전과 파울루스가 포로가 됨(크게 표시), 2월 2일 북쪽 포위망의 마지막 무전과 전투 끝(크게 표시). 점의 색으로 독일군 행동, 소련군 행동, 중요한 날을 나눈다
1942년 7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건물 하나, 층 하나를 두고

9월 13일 제6군이 도시 중심으로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앞서 이 부대가 겨눈 곳은 마마이 언덕이었습니다. 높이 300피트로, 도시 한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형입니다.

그때부터 두 달 동안 싸움의 모양이 굳었습니다. 미 육군 군사사 센터가 펴낸 Earl F. Ziemke의 전사 Stalingrad to Berlin은 이것을 한 구역, 한 건물이 큰 군사 목표가 되는 피비린내 나는 싸움으로 그립니다. 두 쪽이 한 건물의 서로 다른 층을 차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0월 14일 파울루스는 공격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소련 역사가들은 그 뒤 두 주를 전투 전체에서 가장 격렬한 시기로 봅니다. 둘째 날 독일군은 북쪽 구역의 트랙터 공장을 차지하고 볼가강에 닿아 소련군 교두보를 둘로 갈랐습니다. 10월 23일에는 "붉은 10월" 제철소의 절반을 차지했습니다.

10월까지 도시의 대부분이 독일군 손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소련군은 볼가강 기슭을 놓지 않았고, 강 건너에서 예비 병력을 실어 날랐습니다.

11월이 되자 강이 어는 방식이 중요해졌습니다. 러시아의 강 대부분은 며칠 만에 기슭에서 기슭까지 단단히 얼지만, 볼가강 아래쪽은 다릅니다. 먼저 살얼음이 끼고 얼음덩이가 떠내려가며, 스탈린그라드의 위도에서는 강이 다 얼기까지 몇 주, 때로 몇 달이 걸립니다.

그동안 도시를 지키던 소련 제62군은 보급과 보충을 모두 건너편에서 받아야 했습니다. 얼음이 얼기 시작할 무렵 추이코프(Vasili Chuikov)가 이끄는 제62군의 거점은 교두보 두 개로 줄어 있었습니다.

11월 19일: 포위

소련군은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상륙과, 땅이 전차를 버틸 만큼 얼기를 기다렸다가 1942년 11월 19일 공세를 열었습니다. 자정부터 내린 눈으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공격은 독일군이 아니라 그 옆을 지키던 동맹군을 겨눴습니다. 08시 50분, 한 시간 반쯤의 포격 뒤 소련 제5전차군과 제21군이 돈강 서쪽에서 제6군의 전선을 넘겨받아 지키던 루마니아 제3군을 쳤습니다. 루마니아군에게는 47 mm보다 큰 대전차 무기가 없었습니다. 이튿날인 11월 20일에는 남쪽에서 제57군과 제51군이 베케톱카 교두보 남쪽의 루마니아 제6군단 전선을 뚫었습니다.

두 갈래의 공격은 돈강 가에서 만났습니다. 11월 23일 늦게, 돈강을 건너 10마일을 달려온 소련 제4전차군단이 제4기병군단과 만나 고리를 닫았습니다. 만난 곳을 미 육군 전사는 소베츠키로,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레이건 도서관 글은 칼라치로 적습니다.

1942년 11월 포위를 설명하는 개념 도표. 위가 북쪽이다. 오른쪽에 세로로 볼가강이 흐르고 그 서쪽 기슭에 스탈린그라드가 있다. 왼쪽에는 돈강이 굽어 흐른다. 가운데 점선 타원이 포위망으로, 안에 '제6군과 루마니아·이탈리아·크로아티아 병력', 굼라크 비행장과 피톰니크 비행장이 있다. 북서쪽에서 11월 19일 소련 제5전차군과 제21군이 루마니아 제3군을 치는 빨간 화살표, 남쪽에서 11월 20일 제57군과 제51군이 루마니아 제6군단을 치는 빨간 화살표가 와서 돈강 가의 한 점(11월 23일, 칼라치 부근 소베츠키에서 고리가 닫힘)에서 만난다. 아래쪽에는 12월 12~19일 코텔니코보 부근에서 올라온 독일 구원군의 점선 화살표가 포위망에서 35마일 떨어진 미시코바강에서 멈춘다. 지도가 아니며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두 갈래의 반격이 돈강 가에서 만나 고리를 닫았습니다. 기관 자료의 설명을 선과 화살표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이것이 주코프(Georgy Zhukov)와 바실렙스키(Aleksandr Vasilevsky) 장군이 11월 중순 시작한 천왕성(Uranus) 작전입니다. 고리 안에는 독일 제6군과 함께 루마니아·이탈리아·크로아티아 병력도 갇혔습니다.

이 반격은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10월 9일 정치 위원이 지휘관을 견제하던 이중 지휘를 없애는 명령이 나왔고, 10월 16일에는 전차·기계화 부대를 따로 움직이게 하는 명령이 나왔습니다. 얀 만은 이런 결정이 천왕성 작전 계획의 한 부분이었고 준비에 몇 주가 걸렸다고 봅니다.

하늘로 먹여 살리기와 구원 작전

히틀러는 포위를 뚫고 나가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버티기로 한 결정은 두 가지 가정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바깥에서 구원군을 모을 수 있고, 그때까지 하늘로 보급해 제6군을 버티게 할 수 있다는 가정이었습니다.

비행기 수부터 모자랐습니다. 11월 25일 제4항공군 사령관 리히트호펜(Wolfram von Richthofen)은 Ju 52 수송기가 298대 있는데 스탈린그라드를 먹이려면 500대가 필요하다고 보고했습니다. Ju 52는 한 대에 1톤을 실었고, 수송기로 돌린 쌍발 폭격기 He 111은 많아야 1,000파운드를 실었습니다. 11월 29일에는 Ju 52 38대와 He 111 21대가 떴는데, 포위망 안에 내린 것은 Ju 52 12대와 He 111 13대였습니다.

약속한 양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파울루스는 첫 사흘의 공중 보급이 약속한 하루 600톤의 일부에 그쳤다고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에게 편지로 알렸습니다. 같은 책의 다른 대목은 약속한 양을 하루 300톤으로 적고, 이것이 제6군 하루 필요량의 절반쯤이었다고 봅니다. NARA의 글은 남은 27만 명을 먹이려면 하루 700톤이 필요했다고 적습니다.

실제로 들어온 양은 그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12월 1일부터 23일까지 하루 평균 90톤, 1월 첫 세 주는 하루 120톤이었습니다. 하루 300톤에 이른 날은 12월 7일 하루뿐이었습니다. 전쟁에서 물자를 대는 일이 왜 성능만큼 중요한지는 군수·보급·정비 글에서 이어집니다.

두 부분으로 된 막대 도표. 위는 포위망 공중 보급, 하루 톤수. 필요량(미 국립문서보관소) 700톤, 처음 며칠의 약속(파울루스 편지) 600톤, 같은 책 다른 대목의 약속이자 필요량의 절반쯤 300톤, 가장 많았던 날 12월 7일 300톤, 1월 첫 세 주 평균 120톤, 12월 1~23일 평균 90톤, 12월 12일 전 제6군 보고 70톤. 연한 회색은 필요량과 약속, 짙은 색은 실제로 들어왔거나 보고된 양이다. 아래는 자료별 독일 쪽 손실, 단위는 천 명. 영국 전쟁박물관 전역 전체 50만(포로 9만 1천 포함), 미 육군 전사 포위망에서 20만 넘게, 미 육군 전사가 옮긴 소련 수치 사상 14만 7,200과 포로 9만 1천 넘게, 미국 2차 대전 박물관 글 약 16만 사망과 9만 1천 항복. 주황은 포로나 항복이다. 맨 아래에 양쪽 전체로 200만 명 넘게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실종됐고(미 국립문서보관소) 정확한 숫자는 역사가 사이에 다툼이 있다는 문장이 있다
약속과 필요, 실제로 들어온 양, 그리고 기관마다 다른 손실 숫자. 자료에 적힌 값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바깥의 구원 작전 이름은 겨울 폭풍(Wintergewitter)이었습니다. 만슈타인의 돈 집단군이 코텔니코보 부근에서 스탈린그라드 쪽으로 나아가는 계획으로, 제57기갑군단이 12월 12일 아침 출발했습니다. 그 무렵 제6군은 하루 평균 70톤만 들어왔다고 보고하고 있었습니다.

구원군은 12월 19일 포위망에서 35마일 떨어진 미시코바강까지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이틀을 싸우고도 그 강을 넘지 못했습니다. 포위망 안의 제6군과 바깥의 구원군은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1월 31일과 2월 2일

1월 초 포위망을 맡은 소련 돈 전선군은 소련 수치로 병력 28만 1천 명, 전차 250대였습니다. 제6군이 앞선 이틀 동안 항복 권고를 거절하자 마지막 공세가 1월 10일 시작됐습니다. 1월 12일 제6군은 두 비행장 가운데 나은 쪽인 피톰니크를 잃었습니다. 굼라크 비행장마저 잃은 뒤에는 하늘에서 떨어뜨리는 보급이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1월 26일 소련 제62군이 마마이 언덕을 되찾았습니다. 같은 날 서쪽에서 온 제21군 전차가 이들과 만나 포위망이 남북 둘로 갈렸습니다.

1월 31일 아침 6시 15분, 붉은 광장 백화점 지하의 제6군 사령부가 러시아군이 문 앞에 왔다는 무전을 보냈습니다. 한 시간쯤 뒤 사령부의 마지막 송신이 들어왔습니다. 파울루스는 바로 전날 원수로 진급해 있었고, 그 계급으로 포로가 된 첫 독일 장교가 됐습니다.

북쪽 트랙터 공장 둘레에서는 제11군단 3만 3천 명이 48시간을 더 버텼습니다. 2월 2일 08시 40분, 돈 집단군이 북쪽 포위망의 마지막 무전을 받았습니다. 이날로 도시 전체가 항복했고, 남은 추축군 9만 1천 명이 포로가 됐습니다.

도시에 남은 사람들

군대 사이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에 실린 올가 쿠체렌코(Olga Kucherenko)의 글에 따르면, 1942년 늦여름 독일군이 다가올 때 스탈린그라드에는 많게는 50만 명의 민간인이 남아 있었고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였습니다.

공식 이야기로는 방어에 직접 나선 사람 말고는 모두 피란했습니다. 실제로는 시 당국이 피란을 마지막 순간까지 미뤘습니다. 8월 23일 저녁 독일 항공대가 올 때까지 인구 70만 명 가운데 약 10만 명만 빠져나갔습니다. 일주일 이어진 폭격으로 주택의 90%가 사라졌고 많게는 7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숫자에는 다툼이 있습니다.

남은 사람들도 전투의 일부가 됐습니다. 전투 동안 시민 7만 5천 명이 여러 모습으로 군에 들어갔습니다. 10월 중순부터 독일군은 자기 구역의 시민을 하루 많게는 1만 명씩 걸어서 서쪽으로 내보냈고, 그해 말 독일 점령 지역에 남은 민간인은 1만 5천 명이 넘지 않았습니다.

전투가 끝난 도시는 너무 망가져서, 다른 곳에 새 도시를 짓고 폐허를 기념물로 남기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래 묻혀 있었고, 인정받기까지 거의 50년이 걸렸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독일 쪽 손실부터 숫자가 갈립니다. 자료마다 세는 범위와 기준이 다릅니다.

  • IWM은 스탈린그라드 전역 전체에서 독일이 잃은 병력을 50만 명으로 적고, 그 가운데 9만 1천 명을 포로로 셉니다.
  • 미 육군 전사는 포위망 안의 손실을 20만 명 조금 넘게로 적고, 정확한 합계는 정해지지 않은 듯하다고 덧붙입니다. 싸우는 동안 부상자 3만 명이 비행기로 빠져나갔습니다.
  • 같은 책에 실린 소련 쪽 수치는 독일군 사상 14만 7,200명과 포로 9만 1천 명 넘게입니다. 처음 발표보다 크게 낮아진 값이지만 책은 여전히 높아 보인다고 봅니다.
  •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의 한 글은 제6군 약 16만 명이 죽은 뒤 생존자 9만 1천 명이 항복했다고 씁니다.

갇힌 병력도 NARA는 27만 명,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의 같은 글은 25만 명으로 적습니다. 항복한 9만 1천 명 가운데 대부분은 소련 수용소에서 죽었고, 전쟁 뒤 10년 안에 독일로 돌아간 사람은 5천 명뿐이었습니다.

양쪽을 합친 숫자는 더 크고 더 불확실합니다. NARA의 글은 소련과 추축국을 합쳐 200만 명 넘게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되거나 실종됐다고 적으면서, 구체적인 숫자는 아직 역사가 사이에 다툼이 있다고 밝힙니다. 역사가 요헨 헬벡(Jochen Hellbeck)은 이 전투의 사망자를 100만 명이 넘는다고 표현합니다. 소련군의 손실은 미 육군 전사가 쓰일 무렵까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전환점이라는 말과 두 가지 신화

그때 사람들도 이 싸움의 무게를 알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1942년 9월 14일, 스탈린그라드가 버티든 무너지든 그 필사적인 방어가 전쟁의 흐름에 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썼습니다. 1943년 2월의 소련 승리 소식은 유럽과 세계에 벼락처럼 퍼졌습니다.

IWM은 이 전투를 "동부 전선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의 하나"로 둡니다. 미 육군 전사는 과달카날, 북아프리카 상륙과 함께 모든 전선에서 추축국이 물러나기 시작한 지점으로 봅니다. NARA의 글도 북아프리카의 횃불 작전, 과달카날의 망루 작전과 함께 1942년을 연합국 쪽으로 기운 결정적 전환점으로 꼽습니다.

앞의 하나는 동부 전선 안에서 무게를 재고, 뒤의 둘은 같은 무렵 다른 전선의 전투와 묶습니다. 셋 다 스탈린그라드 하나만으로 전쟁이 뒤집혔다고 쓰지는 않습니다.

전투를 기억하는 방식은 오래 둘로 갈렸습니다. 얀 만은 냉전 동안 두 쪽이 저마다의 이념 틀에 맞춘 설명을 내놓았다고 봅니다. 서방 문헌에는 독일 쪽 영향이 큰 견해가 자리 잡았습니다. 시내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 저항이 약했고, 동맹군이 옆구리에서 무너져 포위됐다는 줄거리입니다.

소련 쪽에는 또 다른 신화가 있었습니다. 스탈린의 뛰어난 지휘가 독일군을 일부러 도시 앞까지 끌어들였다는 선전입니다. 포위의 두 집게가 만나는 장면도 실제로 찍은 필름은 없고, 소련이 나중에 그 만남을 연출해 찍었습니다. 모스크바 대조국전쟁 박물관의 디오라마는 이 연출 장면을 따릅니다.

지난 수십 년 소련 문서가 일부 열리면서 더 섬세한 이해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얀 만은 아직 답하지 못한 물음이 많다고 적습니다. 숫자가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도 그 물음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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