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3월 4일, B-29 폭격기 '디나(Dinah)'가 이오지마의 제1비행장에 비상 착륙했습니다. 섬 북쪽에서는 아직 싸움이 한창이었습니다. 폭격기는 연료를 넣고 다시 떠났고, 이 작은 섬을 폭격기 부대가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그 섬을 얻는 데 미군만 7,000명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몇 주 뒤에는 일본 본토에서 340마일 떨어진 오키나와에서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큰 싸움이 시작됐고, 그곳에서는 주민 10만 명 넘게가 죽었다는 추정도 있습니다. 두 섬은 왜 그렇게 중요했고, 그 값은 누가 어떻게 치렀을까요?
왜 이 두 섬이었나
1944년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 전선의 지휘관들과 합동참모본부 대표들이 전략 회의를 열었습니다. 필리핀의 루손이 먼저였고, 다음은 이오지마가 속한 보닌·화산 열도, 그다음은 오키나와가 속한 류큐 제도였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는 이 두 섬 줄을 일본 심장부로 가는 '디딤돌'에 빗대고, 일본 내부 방어권의 일부였다고 설명합니다.
이오지마는 도쿄에서 남쪽으로 660마일 떨어진 화산섬입니다. 이름은 말 그대로 '유황섬'이고, 도쿄와 마리아나 제도의 미군 폭격기 기지 사이 거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섬의 일본 레이다가 본토에 미군 공습을 미리 알린다고 여겨졌고, B-29는 이 섬을 피해 먼 길을 돌아야 했습니다.
섬을 얻으면 쓸 곳도 분명해 보였습니다. 비행장은 폭격기를 지키는 호위 전투기의 기지가 되고, 부서진 B-29가 내릴 비상 착륙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뒤따를 오키나와 침공의 오른쪽 옆구리를 지키는 것도 목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키나와는 길이 70마일의 섬입니다. 이 섬을 쥐면 본토를 마음껏 폭격하고 보급로를 끊으며, 1945년 가을로 잡힌 본토 침공 '올림픽 작전(Operation Olympic)'의 전진 기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미군과 일본 사이의 마지막 장벽을 없애는 일이었습니다.
이오지마: 검은 모래와 땅굴
작전 이름은 디태치먼트(Operation Detachment), 상륙일은 1945년 2월 19일이었습니다. 제3·4·5해병사단으로 이뤄진 제5상륙군단이 주력이었습니다. 병력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NHHC는 미군 약 60,000명이 일본군 약 21,000명과 맞섰다고 하고, 국립 2차 대전 박물관(The National WWII Museum)은 미 해병 약 70,000명과 일본군 18,000명으로 적습니다.
섬은 넓이 8제곱마일, 돼지갈비 모양입니다. 좁은 남서쪽 끝에 높이 550피트의 휴화산 스리바치산(Mount Suribachi)이 솟아 있었습니다. 섬 가운데 줄에는 완성된 비행장 둘과 짓던 비행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일본군의 싸우는 방식은 1944년 중반부터 바뀌어 있었습니다. 많은 고위 장교가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였고, 피할 수 없는 결과를 늦추면서 상대에게 최대한 큰 대가를 치르게 하기로 했습니다. 해변에서 막는 대신, 잘 지킨 살상 지대를 하나씩 넘게 하는 소모전이었습니다.
1944년 6월 섬에 온 구리바야시 다다미치(Tadamichi Kuribayashi) 장군은 곧바로 방어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공중 감시를 피하려고 많은 공사를 밤에 했습니다. 거점과 벙커, 포진지는 서로를 받쳐 주도록 깊이 묻혔고, 탄약과 식량을 쌓은 땅굴이 이들을 이었습니다. 그는 부하들에게 반자이 돌격을 쓸 만한 방법으로 여기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미 함대가 포격을 시작했을 때 일본 주민은 이미 모두 섬을 떠난 뒤였습니다. 남은 일본 병사들은 마실 물이 모자라 늘 목이 말랐고, 싸우는 자리가 곧 무덤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구리바야시는 아내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말라고 썼습니다.
상륙 전 포격은 짧았습니다. 해병대는 10일을 요청했지만 탄약 보급을 이유로 사흘만 받았고, 그 사흘 동안 효과 있는 포격은 13시간뿐이었습니다. 미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은 이를 "효과 없던 72시간 포격"이라고 부릅니다.
2월 19일 오전 9시, 첫 상륙 부대가 해변에 올랐습니다. 일본군은 첫 파도가 해변에 오르고 함포가 잠깐 멎은 10시까지 쏘지 않았습니다. 해변은 계속 무너져 내리는 검은 모래와 화산재의 가파른 계단이었고, 한 해병은 "헐거운 커피 가루 위를 달리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제5해병사단은 90분 만에 섬을 가로질러 스리바치산을 끊었습니다. 첫날 끝까지 거의 30,000명이 섬에 올랐고, 그날의 사상자는 2,420명이었습니다.
거점을 하나씩 부순 것은 결국 화염방사기와 폭약 꾸러미, 수류탄을 든 작은 해병 팀이었습니다. 이튿날 끝까지 많은 소총 중대가 사상으로 전력의 절반까지 잃었습니다. 한 해병의 말처럼 일본군은 이오지마 '위'가 아니라 '안'에 있었습니다.
스리바치산의 깃발 두 개
2월 23일 아침, 해병 한 중대가 험한 비탈을 올라 정상에 닿았습니다. 오전 10시 30분 무렵 작은 성조기가 오르자 섬 곳곳의 병사들이 그것을 보고 들떴습니다. 그날 오후, 같은 자리에 더 큰 두 번째 깃발이 올랐습니다.
AP 사진기자 조 로젠탈(Joe Rosenthal)이 찍은 것은 이 두 번째 깃발이었습니다. 섬에서는 거의 눈길을 끌지 못했지만 사진은 미국 곳곳의 신문 1면에 실렸고, 1945년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그해 260억 달러 넘게를 모은 전쟁 채권 포스터의 한가운데에도 이 사진이 들어갔습니다.
사진 속 사람이 누구인지는 나중에 고쳐졌습니다. 해병대는 오랫동안 사진에 있다고 알려진 존 브래들리와 르네 개뇬이 실제로는 없었고, 그 자리에 해럴드 슐츠와 해럴드 켈러가 있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 사진을 본뜬 해병대 전쟁기념물은 1954년 11월 10일 봉헌됐고, 1775년부터 목숨을 잃은 모든 해병에게 바쳐졌습니다.
깃발이 싸움을 끝낸 것은 아닙니다. 산 안에는 숨은 일본군이 남아 있었고, 북쪽으로 아흐레 동안 4,000야드를 나아가는 데 미군 사상자 7,000명이 났습니다. 3월 4일 제2비행장이 미군 손에 들어왔고, 같은 날 앞의 B-29가 제1비행장에 내렸습니다.
이오지마가 언제 끝났는지는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NHHC의 이오지마 개요를 보면 3월 14일 점령이 공식 발표됐지만 싸움은 두 주 더 이어졌고, 3월 26일에야 섬이 '확보(secure)'됐다고 선언됐습니다. NHHC 역사가들의 오키나와 글은 3월 16일을 해병대가 조직적 저항이 끝났다고 선언한 날로 적습니다.
일본군 약 21,000명 가운데 포로로 살아남은 사람은 216명이었습니다. 약 3,000명은 섬에 숨어 지냈고, 대부분 8월까지 죽거나 잡히거나 항복했지만 한 무리는 1949년에야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구리바야시는 3월 23일 지휘소에서 자결했고, 그의 유해는 끝내 찾지 못했습니다.
오키나와: 82일의 싸움
해병대가 이오지마의 조직적 저항이 끝났다고 선언한 날, 스프루언스(Raymond A. Spruance) 제독은 이미 기함을 타고 류큐로 가고 있었습니다. 몇 주 사이 1,600척이 넘는 배와 해군 350,000명이 모여 2차 대전에서 가장 큰 상륙 부대를 이뤘습니다. 작전 이름은 아이스버그(Operation Iceberg)였습니다.
3월 26일 미군은 먼저 게라마 제도에 올랐고, 그날부터 자살기 공격도 시작됐습니다. 4월 1일 부활절 일요일에는 사이먼 버크너(Simon Bolivar Buckner Jr.) 중장의 제10군이 오키나와 서쪽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육군 2개 사단과 해병 2개 사단을 앞세운 60,000명 넘는 병력이었고, 해변에서도 첫 목표였던 비행장 둘에서도 저항이 없었습니다.
그 뒤 해병은 북쪽으로, 육군은 남쪽 슈리(Shuri)로 나아갔습니다. 북부는 4월 18일까지 정리됐지만 남부는 달랐습니다. 일본군은 옛 슈리성(Shuri Castle)을 중심으로 높은 능선마다 진지를 세웠고, 동서로 섬을 가로지르는 방어띠가 겹겹이 놓였습니다.
5월 내내 쏟아진 비와 더위가 진격을 더 늦췄습니다. 제10군은 처음 7주 동안 4마일밖에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비가 잦아든 5월 말부터는 남쪽 끝까지 남은 10마일을 4주 만에 밀고 내려갔습니다.
슈리성은 5월 29일 무너졌습니다.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Okinawa Prefectural Peace Memorial Museum)의 설명으로는 일본군이 슈리에서 결전을 피하고 섬 남부로 물러나 소모전을 이어 갔고, 결국 남쪽 끝에 몰려 무너졌습니다. 그 남쪽에는 피난한 주민들이 있었습니다.
화력의 크기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제10군은 105 mm 곡사포탄 110만 발을 쐈고, 해군 함포는 약 600,000발을 섬에 쏟았습니다. 한 일본 병사는 일기에 "우리가 한 발 쏘면 적어도 열 발이 돌아온다"고 적었습니다.
6월 18일 버크너는 해병의 공격을 보러 전선에 갔다가 숨졌습니다. 태평양 전선에서 전사한 미군 장교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이었습니다. 나흘 뒤 일본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Mitsuru Ushijima)가 자결하면서 조직적 저항이 끝났습니다.
6월 22일 제10군 사령부에 성조기가 올랐습니다. 싸움이 시작된 지 82일 만의 승리였습니다. 오키나와현은 9월 7일 항복 문서 서명까지를 오키나와전의 기간으로 잡습니다.
바다 위의 가미카제
땅 위의 싸움이 하루 늦어질 때마다 바다의 함대는 하루 더 가미카제 앞에 놓였습니다. 가미카제의 시작은 1944년 10월 19일입니다. 일본 해군 항공대 조종사 스물네 명이 첫 특별공격대(특공, tokko)를 꾸렸고, 이 부대는 곧 가미카제(kamikaze)로 불렸습니다. NHHC 역사가들은 오키나와에서 일본이 항공기를 보통의 항공전이 아니라 '사람이 이끄는 미사일'로 썼다고 설명합니다.
상륙 닷새 뒤에는 일본 육군과 해군의 가미카제 355대가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4월 초부터 6월 중순까지 이런 큰 합동 공격(기쿠스이, kikisui)이 열 번 있었고, 모두 1,500대 가까이였습니다. 평균 여섯 대에 한 대꼴로 미군 배를 맞혔고, 이와 따로 작은 무리의 공격에 약 400대가 더 쓰였습니다.
함대의 첫 경보는 레이다 피켓(radar picket)이었습니다. 오키나와 둘레에 구축함(destroyer)을 빙 둘러 세워 다가오는 비행기를 먼저 알리게 한 것입니다. 피켓의 작은 배들은 가미카제가 처음 만나는 배였고, 그래서 가장 먼저 공격받았습니다.
해군은 가미카제를 늦췄지만 끝내 다 막지는 못했습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은 침몰한 배를 36척, 손상된 배를 368척으로 셉니다. 같은 박물관의 한 글은 다른 문단에서 잃은 배를 34척, 그 가운데 자살 공격에 당한 배를 26척으로 적습니다.
수병은 4,907명이 죽고 4,824명이 다쳤습니다. 해군 역사에서 처음으로 한 작전의 사망자가 부상자보다 많았고, 전쟁 전체 해군 사망자의 거의 7분의 1이 이 두 달 동안 오키나와 앞바다에서 나왔다는 추정이 있습니다.
영국 항공모함 부대(TF 57)도 제5함대에 들어와 함께 싸웠습니다. 영국의 큰 항공모함 넷이 모두 가미카제에 맞았지만, 강철 갑판이 미국 항공모함의 나무 갑판보다 불에 잘 견뎠습니다.
일본 해군의 마지막 큰 배들도 같은 길을 갔습니다. 4월 6일 도쿠야마를 떠난 전함 야마토(Yamato), 경순양함 야하기, 구축함 8척은 편도 연료만 실었습니다. 이 덴고 작전(Operation Ten-Go)의 목표는 오키나와에 배를 올려 해안에서 끝까지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야마토는 4월 7일 폭탄 5발과 어뢰 10발을 맞고 오후 2시 23분에 가라앉았습니다. 일본 수병 약 3,665명이 죽었고, 그 가운데 약 2,500명이 야마토에 타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항공병 12명을 잃었습니다.
이 출격을 두고 일본의 한 제독은 뒤에 "그때 상식을 지킨 사람이 드물었다"고 돌아봤습니다. 가미카제 조종사의 평균 나이는 18~24세였고, 자살 공격은 훈련이 가장 짧은 신병도 전쟁에 무언가를 보탤 길로 제시됐습니다. 살아남은 한 가미카제 조종사는 이른바 자살 정신이 일본인만의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주민이 겪은 전쟁
두 섬의 가장 큰 차이는 주민입니다. 이오지마 주민은 싸움 전에 모두 섬을 떠났지만, 오키나와에서는 주민이 싸움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오키나와현 평화기념자료관은 이 싸움을 오키나와 사람들의 눈으로 보여 줍니다. 자료관의 설명으로는 침략군이 물자의 우위로 섬 중남부를 공중과 바다에서 무차별 폭격했습니다. 약 석 달 동안 이어진 이 '철의 폭풍'은 주민과 군인 200,000명 넘게의 목숨을 앗고 섬의 풍경까지 바꿨습니다.
남부의 동굴은 피난처였고 덫이었습니다. 주민과 군인이 살려고 동굴에서 동굴로 옮겨 다녔고, 일부 동굴에서는 일본군이 주민을 학살하거나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고 자료관은 적습니다. 굶어 죽은 주민도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를 미국 쪽 박물관 글은 조금 다르게 씁니다. 피난민의 물결이 남쪽 해안으로 물러나는 일본군과 뒤섞였고, 일본의 선전에 넘어가 미군의 잔혹함보다 자결이 낫다고 믿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싸움 마지막 몇 주 동안 남쪽 끝 동굴에 숨어 있던 여자와 아이, 노인 약 80,000명이 밖으로 나왔고, 그 가운데 3분의 1에서 절반이 다쳐 있었습니다.
자료관에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글과 영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괴로운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마음을 닫았던 생존자들이, 다음 세대에 넘기려고 차츰 경험을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숫자 읽기와 엇갈리는 평가
이오지마의 미군 전사자는 NHHC가 6,871명,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이 6,821명으로 적고, 부상자는 두 곳 모두 19,217명입니다. 박물관에 실린 한 글은 미군 전체 사상자를 24,000명 넘게, 섬에 오른 사람 셋 가운데 한 명꼴로 셉니다. 명예훈장은 해병 22명과 수병 5명이 받았고, 니미츠(Chester W. Nimitz) 제독은 "흔치 않은 용기가 흔한 미덕이었다"고 했습니다.
오키나와의 미군 사상자는 49,151명이고, 그 가운데 12,52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습니다. 이와 따로 전투 외 사상자가 육군 15,613명, 해병 10,598명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전투 피로로 무너진 병사들이 들어 있습니다.
일본 쪽 숫자는 더 크게 갈립니다. 박물관의 오키나와 소개 쪽은 일본군 약 90,000명이 죽었고 주민 사망이 150,000명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박물관의 다른 글은 징집된 오키나와 방어 인원까지 일본군 약 110,000명이 전사했고,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주민 100,000명 넘게, 곧 전쟁 전 인구의 3분의 1까지가 죽었다는 추정이 있다고 씁니다.
오키나와현의 '평화의 초석(The Cornerstone of Peace)'에는 2026년 6월 23일 기준으로 242,65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오키나와현 출신 149,703명, 다른 도도부현 출신 78,365명, 미국 14,012명이고, 한국 381명과 북한 82명의 이름도 있습니다. 다만 이 숫자는 오키나와전 사망자 수가 아닙니다. 오키나와현 출신은 만주사변부터 이어진 15년 전쟁 동안 현 안팎에서 숨진 사람까지 새기기 때문입니다.
이오지마의 값을 두고는 지금도 평가가 엇갈립니다. NHHC 개요에 따르면 일본 레이다는 실제로는 본토 방공에 필요한 경보를 줄 수 없었고, 호위 전투기를 띄우는 일도 P-51 조종사에게 1,500해리 왕복이라 몹시 힘들었습니다. 비행장 용량은 항공모함 한 척과 비슷했고, 비상 착륙에 이 섬을 쓴 B-29도 기대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섬의 항공기가 구한 조종사 57명은 섬을 얻으며 잃은 목숨에 비하면 작아 보이며, 그 희생이 정당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이라는 것이 이 개요의 결론입니다.
박물관에 실린 존 커라톨라(John Curatola)의 글은 반대쪽에 무게를 둡니다. 그의 셈으로는 그 뒤 몇 달 동안 B-29 승무원 2,200팀 넘게가 이 섬 활주로에 비상 착륙했고, 한 대에 최대 11명이 타니 24,000명 넘게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해병과 해군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남긴 것
두 섬의 큰 희생은 미국 시민과 지도자들에게 일본 본토 침공이 과연 현실적인가라는 무거운 물음을 남겼습니다. 이오지마의 유혈은 본토 침공에서 더 큰 학살이 일어나리라는 두려움을 낳았고, 오키나와의 참혹함은 본토에서의 끔찍한 사망자를 예고하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의 판단과 잇는 시각도 있습니다. 박물관 글을 보면 6월 초 본토 침공을 논의한 회의에서 트루먼은 "일본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또 하나의 오키나와"를 피하고 싶어 했습니다. NHHC 역사가들은 오키나와의 교훈을 생생히 안고 트루먼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결정해 전쟁을 끝냈다고 씁니다.
항복까지의 길에는 다른 일들도 겹쳤습니다. 미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 DOE)의 역사 자료에 따르면 일본 군 지도자들은 본토 상륙전에서 연합군에 큰 사상을 입히면 협상으로 끝낼 수 있다고 바랐습니다.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뒤, 8월 8일 소련의 선전 포고와 9일 나가사키 원폭 소식이 거의 함께 왔습니다. 그날 밤 어전회의 표결은 3 대 3이었고, 8월 15일 천황의 항복 방송, 9월 2일 미주리함의 항복 조인식이 이어졌습니다.
바다에서는 다른 교훈이 남았습니다. 미 해군 지휘관들은 가미카제를 '원시적인 유도 미사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 유도하는 대함 미사일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해가 걸렸지만, 가미카제는 그 기술이 함대에 얼마나 큰 문제가 될지를 해군 계획가들에게 미리 보여 줬습니다. 스프루언스는 자살기가 얕보아서는 안 되는 매우 효과적인 무기라고 강조했고, 그 뒤의 이야기는 대함미사일: 바다 위 움직이는 목표를 다루는 기술에서 이어집니다.
합동 작전의 어려움도 기록에 남았습니다. 육군의 느린 남진은 해군과의 가장 큰 갈등이었습니다. 니미츠는 "하루에 배를 한 척 반씩 잃고 있다"고 했고, 스프루언스는 육군을 향한 비판을 공개하지 않은 채 전쟁이 끝난 뒤 후회했습니다.
NHHC는 오키나와가 오늘의 해군에게 통합된 해군력, 효과적인 합동 작전, 싸우면서 배우는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운다고 정리합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키나와와 둘레 섬에서 유해 약 10,000구를 수습했지만 해병·육군 약 200명, 수병 600명 넘게, 항공병 약 450명은 아직 행방을 모릅니다.
미국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efense POW/MIA Accounting Agency, DPAA)은 지금도 오키나와의 손실을 추적하며 일본의 유해 수습 작업과도 협력합니다. 오키나와현의 평화의 초석은 국적도, 군인과 민간인도 가리지 않고 이름을 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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