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22일 저녁, 콩피에뉴 숲에 나무 객차 한 칸이 놓였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1차 대전 휴전이 서명된 객차였고, 히틀러가 일부러 박물관에서 꺼내 같은 자리로 옮겨 오게 한 것이었습니다. 22년 전에는 독일이 조건을 들었지만, 이번에는 프랑스 대표가 독일의 조건에 서명했습니다.

독일이 서쪽으로 공격을 시작한 지 43일째였습니다. 1차 대전 4년 동안 참호 앞에서 이루지 못한 일을 어떻게 이렇게 짧게 해냈을까요. 이 글은 1939년 9월의 선전포고에서 아르덴 숲과 스당의 뫼즈강, 덩케르크를 거쳐 콩피에뉴까지를 독일·영국·프랑스의 공식 기관과 박물관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숫자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덩케르크에서 구한 군인만 해도 "33만 8,226명"이라는 기록과 "37만 명 가까이"라는 기록이 있고, 독일 전차가 바다에 닿은 날도 하루씩 어긋납니다. 이런 값은 자료 이름과 함께 나란히 둡니다.

선전포고 뒤의 긴 기다림

1939년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9월 3일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그런데 독일-프랑스 국경에서는 큰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9월에 프랑스군이 독일 자르 지역에 잠깐 들어갔다가 물러난 뒤로, 양쪽은 겨울 내내 진지를 파고 마주 보기만 했습니다.

가끔 작은 충돌과 선전전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시기는 "가짜 전쟁(Phoney War)"으로 불렸고, 독일 자료는 "앉은 전쟁(Sitzkrieg)"이라 적습니다. 그사이 영국 원정군(British Expeditionary Force, BEF)은 겨울 동안 39만 명으로 늘어 프랑스와 벨기에에 연합군과 함께 자리 잡았습니다.

프랑스가 기댄 것은 마지노선(Maginot Line)이었습니다. 1차 대전 직후 프랑스 정부는 독일의 새 침입을 막으려고 알자스·로렌의 독일 국경을 따라 방어 체계를 계획하게 했습니다. 1936년부터는 군 현대화를 앞세워야 해서 공사가 거듭 줄었고, 몇몇 벙커는 1940년 공세 직전에야 끝났습니다.

전쟁이 나자 마지노선 뒤에는 20개 넘는 사단이 1939년 9월부터 1940년 5월까지 싸울 준비를 한 채 머물렀습니다. 그런데 이 요새 줄은 벨기에와의 국경까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독일이 돌아갈 길은 그 북쪽에 있었습니다.

1939년 9월 3일부터 1940년 6월 22일까지의 연표 도표. 점 색으로 배경, 황색 작전(5월), 바다 철수, 적색 작전과 휴전(6월)을 나눴다. 1939년 9월 3일 영국·프랑스 선전포고, 1939년 9월~1940년 5월 가짜 전쟁, 1940년 4월 9일 덴마크·노르웨이 침공, 5월 10일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 공격과 아르덴 진격 시작, 5월 13일 스당과 북쪽 샤를빌·몽테르메에서 뫼즈강 건넘, 5월 15일 네덜란드 항복, 5월 19~20일 아브빌과 해협 해안 도착(자료마다 날짜 다름), 5월 21일 아라스의 영국 공격, 5월 24일 히틀러가 정지 명령 승인, 5월 26일 다이너모 작전 시작, 5월 28일 벨기에 항복, 6월 4일 다이너모 작전 끝, 6월 5일 적색 작전으로 솜강·엔강 공격, 6월 14일 무방비 도시 파리에 독일군 들어감, 6월 17일 페탱의 휴전 요청, 6월 18일 드골의 BBC 방송, 6월 22일 콩피에뉴 숲에서 휴전 서명
선전포고에서 콩피에뉴 휴전까지, 1939~1940년 연표. 간격은 날짜 비율이 아닙니다 (도표)(도표)

두 쪽의 계획

독일의 공격 계획은 1939년 가을부터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중장이 짰습니다. "낫질(Sichelschnitt)"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계획은 세 집단군에 몫을 나눴습니다. B집단군은 중립국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치고, 프랑스·영국군이 벨기에로 들어오면 A집단군이 숲이 빽빽한 아르덴(Ardennes)을 지나 프랑스 해협 해안까지 나아가며, C집단군은 마지노선을 따라 작은 견제 공격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위험한 계획이었습니다. 길이 적고 숲이 빽빽한 아르덴은 차량 부대가 들어가기 어려운 곳으로 여겨졌고, 브라우히치(Walther von Brauchitsch)가 이끈 육군 최고사령부(OKH)는 이 계획을 처음에 거부했습니다. 고위 장교들 사이에 논쟁이 뜨거웠지만 히틀러는 이 계획을 붙들었고 결국 승인했습니다.

작전은 두 단계였습니다. 먼저 황색 작전(Fall Gelb)으로 연합군 주력을 북프랑스와 벨기에로 끌어들여 크게 에워싸고, 이어 적색 작전(Fall Rot)으로 프랑스 깊숙이 남쪽으로 내려가 파리를 노리는 것입니다. English Heritage는 대부분의 독일 지휘관이 놀랄 만큼 두 작전이 대체로 계획대로 흘러갔다고 적습니다.

연합군의 움직임은 독일의 예상대로였습니다. 프랑스·영국군은 벨기에군을 도우러 벨기에로 들어갔고, 프랑스 제1집단군과 영국 원정군은 딜(Dyle)강의 방어 진지에 자리 잡았습니다. 북쪽 공격은 강했지만 실제로는 연합군의 주력과 가장 좋은 부대를 북쪽으로 끌어내는 견제였습니다.

네모와 화살표로만 그린 1940년 독일 계획의 개념 그림. 실제 지도가 아니고 축척도 맞지 않는다. 왼쪽이 서쪽 해협 해안, 오른쪽이 독일이다. 위 칸 네덜란드·벨기에 평야에는 B집단군이 서쪽으로 공격해 연합군을 북쪽으로 끌어내고(1), 왼쪽의 프랑스·영국군이 동쪽으로 벨기에에 들어가 딜강 선에 선다(2). 가운데 칸 아르덴(빽빽한 숲, 좋은 길이 적음)으로는 A집단군의 주력이 지나 5월 13일 스당에서 뫼즈강을 건너고(3), 휘어져 위쪽 왼편의 아브빌 근처 해안(5월 19~20일)으로 나아간다(4). 아래 칸 마지노선 앞에서는 C집단군이 작은 견제 공격만 한다. 아래 상자: 5월 말 북쪽의 연합군이 남쪽과 끊기고, 남은 길은 덩케르크를 거치는 바닷길(다이너모 작전, 5월 26일~6월 4일)뿐이다
1940년 독일 계획을 네모와 화살표로만 그린 개념도. 실제 지도가 아니며 축척과 다릅니다 (도표)(도표)

5월 10일, 북쪽의 공격

1940년 5월 10일 독일은 네덜란드·벨기에·룩셈부르크로 한꺼번에 들어갔습니다. 네덜란드는 1차 대전 때처럼 전쟁 밖에 있기를 바라며 벨기에나 연합군과 방어 계획을 함께 세우지 않았습니다. 9개 사단과 대부분 낡은 비행기 125대로는 혼자 버티기 어려웠습니다.

로테르담이 폭격당한 뒤, 네덜란드는 다른 도시에서 같은 참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으려고 5월 15일 항복했습니다. 5월 중순까지 네덜란드의 전사자는 2,890명, 부상자는 6,900명이었습니다.

벨기에 22개 사단의 대부분은 국경 지대에 있었고, 그 뒤로 알베르 운하를 따라 안트베르펜과 에방에말 요새 사이에 둘째 방어선이 있었습니다. 두 선은 공격 첫날 독일 제6군에게 뚫렸습니다. 5월 18일까지 리에주·브뤼셀·안트베르펜이 점령됐습니다.

남쪽 룩셈부르크에서는 저항이 거의 없었습니다. 길에 차단물 약 60곳을 두었지만, 가볍게 무장한 경찰력 1,300명은 공격군에 맞서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독일 주력은 이 나라를 지나 벨기에의 아르덴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르덴 숲과 스당

아르덴은 숲이 빽빽한 산지라서 큰 부대가 빨리 지나기 어렵다고 여겨진 곳입니다. 프랑스군은 이 자연 장애물을 믿었습니다. 룬트슈테트(Gerd von Rundstedt)의 A집단군은 공격을 시작하자 빠르게 나아갔습니다.

길을 나눠 쓴 방식이 눈에 띕니다. 산지를 지나는 잘 닦인 길은 빠른 전차 부대에 맡기고, 보병은 옆길로 뒤따랐습니다.

몇 개 사단이 이 숲으로 들어갔는지는 한 박물관 안에서도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DHM)의 아르덴 쪽은 A집단군 45개 사단, 벨기에 쪽은 44개 사단으로 적습니다. 맞은편 아르덴과 전선 가운데에 프랑스가 둔 사단은 두 쪽 모두 18개입니다.

5월 13일 공격의 선두가 산지 끝에 닿았습니다. 그날 스당(Sedan)에서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의 전차 부대가 뫼즈(Meuse)강을 건넜고, 북쪽의 샤를빌과 몽테르메에서도 다른 부대가 강을 건넜습니다. 같은 날 독일 제4군과 제12군은 디낭에서 스당 사이 뫼즈강 서쪽 기슭에 섰습니다.

아르덴을 빠져나오자 앞에는 해협 해안까지 넓은 프랑스 후방이 열려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독일 공격의 중심이 룩셈부르크와 아르덴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습니다.

바다까지, 그리고 아라스

스당을 뚫은 독일군은 북프랑스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달렸습니다. 이를 막을 연합군의 전략 예비대도, 힘 있는 반격도 없었습니다. 벨기에와 플랑드르에 들어가 있던 연합군 수십만 명은 뒤쪽 연결이 모두 끊길 처지가 됐습니다.

바다에 닿은 날은 자료마다 하루쯤 다릅니다. DHM의 개관 쪽은 전차 부대가 5월 19일 강 하구의 아브빌(Abbeville)에 닿았고 하루 뒤 해협 해안까지 나아갔다고 적습니다. 같은 박물관의 덩케르크 쪽은 구데리안의 전차 부대가 해안에 닿은 날을 5월 20일로, English Heritage는 스당을 건넌 지 "꼭 일주일 뒤"로 적습니다.

5월 21일 영국군은 아라스(Arras)에서 반격에 나섰습니다. 처음 계획은 영국 제5·제50사단과 제1군 전차여단이 아라스에서 남쪽으로 치고, 베강(Maxime Weygand)이 이끄는 더 큰 프랑스군이 북쪽으로 쳐서 독일군을 둘로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격 이틀 전 베강이 자기 몫을 취소했고, 프랭클린(Harold Franklyn) 소장은 목표를 독일군을 아라스에서 밀어내는 데로 줄였습니다.

몇 주 동안 거의 쉬지 않고 움직인 영국 전차는 네 대에 한 대꼴로 고장 나 있었습니다. 그래도 21일 오후 두 갈래로 나선 공격은 처음에 독일군을 놀라게 했습니다. 느리지만 장갑이 두꺼운 마틸다(Matilda) 전차는 작은 대전차 무기에 끄떡없었습니다.

이 구역의 독일 기갑사단들은 곧 다시 짜였습니다. 대공포로 쓰던 88 mm 포를 전차 잡는 데 돌려 써서 마틸다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기갑 부대는 10마일을 뚫고 들어가 독일군 수백 명을 잡았지만, 바꿀 수 없는 전차 수십 대를 잃었고 프랭클린은 결국 공격을 멈췄습니다.

공격은 에르빈 롬멜(Erwin Rommel)의 선봉을 꺾는 데 근처도 가지 못했습니다. English Heritage는 이 반격이 잠깐 성공했지만 뒤를 받칠 병력이 모자라 실패했다고 봅니다.

정지 명령과 덩케르크

5월 24일 히틀러는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가 내린 정지 명령(Haltebefehl)을 승인했습니다. 갇힌 연합군을 눈앞에 두고 독일 전차 부대가 멈춰 선 것입니다. 왜 멈췄는지는 설명이 하나가 아닙니다.

DHM은 독일 지휘부 안의 사정을 듭니다. 히틀러와 장군들은 진격이 너무 빨라 스스로 놀랐고, 다음 수를 두고 생각이 갈렸습니다. 브라우히치와 할더(Franz Halder)는 갇힌 연합군에 결정타를 가하자고 했지만, 룬트슈테트는 전차 부대를 아끼고 다시 짜려 했고 히틀러는 독일 공군만으로 적을 없앨 수 있다는 괴링(Hermann Göring)의 장담도 믿었습니다.

미국 National WWII Museum의 글은 아라스를 봅니다. 히틀러와 많은 장군이 아라스 공격을 크게 보고 더 큰 공격의 전조일까 걱정해, 해안 쪽 작전 지원을 줄여서라도 아라스의 영국군을 막으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글쓴이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아라스 공격이 "영국군을 살리는 데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씁니다.

두 설명 모두 정지 명령이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군에 덩케르크로 물러날 시간을 주었다고 봅니다. 독일군은 5월 25일 불로뉴를, 다음 날 칼레를 차지했고, 덩케르크(Dunkirk)가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항구로 남았습니다.

영국 해군의 버트럼 람지(Bertram Ramsay) 중장은 5월 19일부터 바다로 구출할 계획을 짜고 있었고, 5월 26일 저녁 다이너모 작전(Operation Dynamo)이 시작됐습니다. 도버성의 람지 사령부가 해군 전투함과 상선, 온갖 작은 민간 배를 덩케르크로 오가게 했습니다.

조건은 나빴습니다. 덩케르크의 큰 부두는 독일군 공격으로 쓸 수 없었고, 남은 것은 항구 동쪽의 가는 방파제와 북쪽 해변이었습니다. 해변이 완만해 만조에도 구축함이 해안 1마일 안으로 들어올 수 없어, 군인들을 작은 배로 실어 날라야 했습니다. 첫날 구한 사람은 8,000명뿐이었습니다.

흔히 작은 배들이 대부분을 구했다고 기억하지만, English Heritage는 이를 오해라고 적습니다. 3분의 2가 넘는 23만 9,465명이 방파제를 거쳐 빠져나왔고, 해변에서 구한 사람은 9만 8,761명이었습니다. 작은 배들도 중요한 몫을 했지만 가장 큰 몫은 해군, 특히 구축함들이 맡았습니다.

작전은 6월 4일 이른 새벽에 끝났습니다. English Heritage는 그날이 끝날 때까지 영국군과 연합군 33만 8,226명이 잉글랜드에 내렸다고 적습니다. DHM은 6월 4일까지 37만 명 가까이, 그 가운데 프랑스군 약 13만 9,000명이 철수했다고 적습니다.

자료별 숫자 비교 도표. A칸 6월 4일까지 덩케르크에서 철수한 군인: English Heritage 프랑스 함락 쪽 33만 8,226명, English Heritage 다이너모 기념 쪽 33만 명 넘게, 독일역사박물관 37만 명 가까이(프랑스군 약 13만 9,000명 포함). B칸 아르덴과 전선 가운데의 사단 수: 독일역사박물관 아르덴 쪽 독일 A집단군 45개, 벨기에 쪽 44개, 두 쪽 모두 프랑스 사단 18개. C칸 독일 전차가 해협 해안에 닿은 때: 독일역사박물관 개관 쪽 5월 19일 아브빌·하루 뒤 해안, 됭케르크 쪽 5월 20일 해안, English Heritage 5월 13일 뫼즈강을 건넌 지 꼭 일주일 뒤. D칸 독일역사박물관의 전역 전체 손실: 독일군 약 2만 7,000명 전사·1만 8,400명 실종·약 11만 1,000명 부상, 프랑스군 약 9만 2,000명 전사·20만 명 부상, 연합군 포로 190만 명. 덧붙여 English Heritage는 6월에 제51하이랜드 사단 1만 명 넘게가 포로가 됐다고 적는다
같은 전역, 다른 숫자. 독일·영국 기관의 값과 표현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군인들은 무거운 장비를 거의 다 버리거나 부수고 떠났습니다. 구출은 사기를 올리려 "기적"으로 알려졌지만, 처칠은 6월 4일 "전쟁은 철수로 이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사이 5월 28일 벨기에가 항복했습니다. 전투에서 군인 7,500명을 잃은 뒤였습니다.

6월: 파리와 콩피에뉴

6월 5일 독일은 둘째 단계인 적색 작전을 솜강과 엔강을 건너는 공격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프랑스 육군은 싸움과 포로, 덩케르크 철수로 25만 명 넘게, 전체 병력의 10%를 잃은 상태였습니다. 연합군 총사령관 베강은 두 강을 따라 급히 방어선을 꾸렸고, 이 선은 "베강선"으로 불렸습니다.

베강선이 뚫리자 프랑스군은 새 방어선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독일 공군의 공격과 피란민 행렬로 막힌 길 때문에 질서 있게 물러날 수도 없었습니다. 6월 14일 독일 제18군이 "무방비 도시"로 선언된 파리에 싸움 없이 들어갔고,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물러났습니다.

마지노선도 무사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다른 부대가 요새들을 프랑스 쪽에서 쳤고, 요새는 하나씩 떨어졌지만 몇몇은 7월까지 버텼습니다. 6월 17일 베르됭을 지난 구데리안의 전차 부대가 스위스 국경에 닿아 마지노선과 프랑스 육군 대부분을 에워쌌습니다.

영국은 6월 10일부터 25일까지 사이클(Cycle)·에어리얼(Aerial) 작전으로 브르타뉴와 서프랑스 항구에서 영국·캐나다·프랑스·폴란드·체코 군인과 민간인 19만 2,000명을 더 구했습니다. 6월 17일 생나제르 앞바다에서는 독일 항공기의 공격으로 랭커스트리아(Lancastria)호가 가라앉아 3,000~6,000명이 숨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제51하이랜드 사단 1만 명 넘게는 빠져나오지 못하고 포로가 됐습니다.

6월 16일 폴 레노(Paul Reynaud)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페탱(Philippe Pétain)은 다음 날 독일에 휴전을 청했습니다. 같은 6월 17일, 6월 5일 국방·전쟁 차관에 임명됐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은 런던에서 BBC 방송을 청했습니다. 6월 18일 저녁 10시(영국 서머타임), 그의 호소가 방송됐습니다.

프랑스 국립문서보관소가 전하는 이 호소에서 드골은 숫자보다 훨씬 더 독일의 전차와 비행기, 전술이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프랑스 저항의 불꽃은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녹음은 남지 않았고, 그때 이 방송을 들은 사람은 비교적 적었습니다.

6월 22일 오후 6시 50분(독일 서머타임), 콩피에뉴 숲에서 독일의 빌헬름 카이텔(Wilhelm Keitel)과 프랑스의 샤를 욍치제르(Charles Huntziger) 장군이 휴전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히틀러가 1918년의 객차를 옮겨 온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협정은 프랑스가 이탈리아와도 휴전에 합의해야 효력을 낸다고 적었습니다.

협정 원문이 적은 조건은 이렇습니다. 그어 둔 선의 북쪽과 서쪽 프랑스 땅은 독일군이 점령하고, 프랑스 군대는 국내 질서에 필요한 부대만 남기고 무장을 해제합니다. 함대는 정해진 항구에 모여 독일·이탈리아의 통제 아래 동원을 풀고, 독일은 그 함대를 전쟁에 쓸 뜻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점령군 유지비는 프랑스가 내고, 독일 수용소의 프랑스군은 평화 조약 때까지 포로로 남습니다.

DHM은 이 조건이 프랑스가 두려워한 것보다 온건했다고 봅니다. 식민지는 그대로 두었고, 국내 질서를 위해 10만 명의 군대를 둘 수 있었습니다. 남쪽의 비점령 지역에는 1940년 7월부터 비시(Vichy)에 페탱의 새 정부가 자리했습니다. 알자스와 로렌은 국법상은 아니어도 사실상 독일에 병합됐습니다.

전차, 무선, 비행기

이 싸움은 흔히 "전격전(Blitzkrieg)"으로 불립니다. English Heritage는 이를 결정적인 한 곳(중점, Schwerpunkt)에 압도적인 힘으로 치고, 빠른 전차·포병·보병·항공기의 공격을 잇달아 이어 가는 방식으로 설명합니다. 핵심은 적이 다시 짜고 반격할 틈을 주지 않는 혼란이었고, 길게 늘어난 독일의 보급·연락선을 연합군이 끊을 수 있다는 위험도 함께 안고 있었습니다.

무전기도 큰 몫을 했습니다. 독일군은 가장 작은 야전 부대까지 무전기를 갖춰 연합군보다 빨리 움직이고 대응할 수 있었습니다. 공군과 지상군이 바짝 맞춰 움직인 것도 컸고,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Stuka)"는 그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다만 전차 한 대 한 대가 늘 앞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라스에서 영국 마틸다 전차는 작은 대전차 무기에 끄떡없었고, 독일군은 대공포였던 88 mm 포를 돌려 쓰고서야 이를 막았습니다.

왜 그렇게 빨리 무너졌나

1914~1918년 독일 제국 육군이 진지전에서 끝내 이루지 못한 일을, 1940년의 독일군은 적은 손실로 아주 짧은 시간에 해냈습니다. DHM은 독일 141개 사단이 기습에 힘입어 군사력에서 대등한 상대를 몇 주 만에 이겼다고 적습니다. 힘의 크기보다 기습을 앞에 둔 설명입니다.

다른 자료는 다른 곳에 무게를 둡니다. English Heritage는 독일의 통신과 공지 협동을 들고, 기동에 밀려 혼란에 빠진 연합군이 함께 움직이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드골이 방송에서 꼽은 전차와 비행기, 전술도 이 목록에 들어갑니다.

프랑스 쪽 판단도 거론됩니다. DHM은 프랑스 지휘부가 지나기 어렵다고 여긴 아르덴을 차량화된 독일군이 뚫고 나오는 경우를 전략 계획에 넣지 않은 것이 치명적이었다고 봅니다. 마지노선에 대해서도 결국 프랑스 방어에 별로 보탬이 되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독일 쪽도 모든 것을 내다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슈타인의 계획은 처음에 육군 최고사령부에서 거부당했고, 대부분의 독일 지휘관은 작전이 계획대로 흘러간 데 놀랐습니다. 많은 사람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 이 "번개 같은 승리(Blitzsieg)" 뒤에 히틀러는 독일 안에서 인기의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휴전 뒤에 남은 것

DHM은 서부 공세 동안 독일군 약 2만 7,000명이 죽고 1만 8,400명이 실종됐으며 약 11만 1,000명이 다쳤다고 적습니다. 프랑스군은 약 9만 2,000명이 죽고 20만 명이 다쳤습니다. 독일의 포로가 된 연합군은 190만 명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둘로 나뉘었습니다. 북쪽과 대서양 해안은 파리에 자리한 독일 군정 아래 들어갔고, 비시 정부는 국토의 약 40%와 식민지를 맡았습니다. 프랑스는 점령 비용으로 하루 2,000만 라이히스마르크를 내야 했습니다.

점령은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1942년 3월 프랑스에서 유대인 강제 이송이 시작됐고, 프랑스 당국도 등록과 억류로 이에 협조했습니다. 프랑스에서 끌려간 유대인 약 7만 6,100명이 나치의 학살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영국은 혼자 남았습니다. 덩케르크와 약 3주 뒤의 프랑스 항복으로 영국은 고립됐고 곧 침공당할 위협 아래 놓였습니다. 히틀러는 온건한 휴전 조건으로 영국이 평화 제안에 응하기를 바랐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1940년 7월 16일 잉글랜드 침공 준비를 명령했습니다.

덩케르크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영국 원정군을 다시 세우는 바탕이 됐고, 드골의 망명 프랑스군을 이루는 바탕도 됐습니다. 영국 정부는 6월 28일 드골을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로 인정했습니다. 비시 정부는 1942년 말 독일·이탈리아군이 남프랑스를 차지하면서 사실상 힘을 잃었고, 프랑스 해방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뒤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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