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7일, 중국 시안. 석 달 동안 특수 훈련을 받은 한국 청년들을 국내로 들여보낼 작전을 두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미국 전략첩보기구(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의 책임자 도노반(William B. Donovan) 소장이 한자리에 앉았습니다. 이틀 뒤쯤 일본이 항복한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작전은 끝내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이 청년들이 속한 군대가 한국광복군입니다. 1940년 중국 충칭(중경)에서 창설된 임시정부의 군대로, 줄여서 광복군이라고 부릅니다. 군대를 갖지 못한 정부가 어떻게 군대를 만들었는지, 병사는 어디서 왔고 중국·영국·미국과는 어떤 관계였는지를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신편 한국사』 50권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을 바탕으로 따라갑니다.
군대 없는 정부의 오랜 숙제
임시정부는 처음부터 군대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만들어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했고, 연말에는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를 세웠습니다. 만주의 독립군을 관할 아래 두려는 뜻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역 사이의 차이와 재정의 어려움 등으로 이 계획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1930년대에 길이 조금 열렸습니다. 김구는 1934년 뤄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두어 군사 간부를 길렀습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만들고, 초급 장교를 기르고 1개 연대 규모의 군대를 꾸린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 계획에 얼마나 무게를 두었는지는 예산에서 보입니다. 『신편 한국사』의 주석은 군사위원회가 잡은 사업비 37만 원이 임시정부 1년 예산의 65%였다고 적습니다.
그래도 계획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일본군 점령지가 넓어지면서 임시정부가 중국 여러 곳을 옮겨 다녀야 했기 때문입니다. 군대 창설은 임시정부가 중국의 임시 수도 충칭에 자리를 잡은 뒤에야 이루어졌습니다.
1940년 9월, 충칭의 창설식
창설 준비는 세 갈래였습니다. 병사를 모으는 일, 돈을 마련하는 일, 그리고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는 일입니다. 돈은 주로 미국에 사는 동포들에게 도움을 청해 마련했고, 미주 동포들은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남의 나라 땅에서 군대를 꾸리려면 그 나라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중국에 낸 계획의 핵심은 광복군을 한중연합군으로 삼아 중국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편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제스(장개석)는 이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던 이청천·유동열·이범석·김학규 등이 창설위원회를 맡아, 총사령부를 먼저 꾸리고 이를 바탕으로 1년 안에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방안을 세웠습니다.
1940년 9월 15일, 김구 이름으로 「한국광복군 선언문」이 나왔습니다. 선언문은 광복군이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되찾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혔습니다. 이틀 뒤인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중국 쪽 인사와 여러 나라 외교사절이 지켜보는 가운데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이 열렸습니다. 이날이 광복군의 창설일입니다.
총사령은 이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습니다. 백과사전은 총사령을 지청천으로 적습니다. 본명은 지대형이고, 이청천이라는 이름도 썼습니다.
총사령부 간부와 지대장은 모두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해 싸우던 군사 간부였습니다. 광복군은 독립군 출신을 뼈대로 태어난 군대였습니다.
창설 직후의 부대 편성은 두 자료가 조금 다르게 적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총사령부와 3개 지대(支隊)를 두고 제1지대장 이준식, 제2지대장 공진원, 제3지대장 김학규를 임명했다고 씁니다. 백과사전 「한국광복군」 항목은 4개 지대로, 제2지대장 김학규, 제3지대장 공진원, 제5지대장 나월환을 적습니다.
병력은 어디서 왔나
광복군에게 급한 문제는 병사였습니다. 지휘할 간부는 있었지만 실제 병력이 될 사람이 없었습니다. 눈을 돌린 곳은 일본군이 점령한 화북 지방이었습니다. 베이징·톈진·스자좡 등 화북에는 약 20만 명의 한인이 옮겨 와 살고 있었습니다.
임시정부는 1939년 7월 국무회의에서 일본군 점령지의 한인 청년을 모집하기로 하고 군사특파단을 꾸렸습니다. 특파단은 그해 11월 전선 가까운 시안으로 갔습니다. 대원들이 몰래 점령지로 들어가 거점을 만들고 청년들을 데려오는 이 일을 초모(招募) 활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이를 "일종의 비밀지하공작"이라고 표현합니다.
광복군은 병력 모집 기구로 징모분처 다섯 곳을 두었습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창설 1년여 만에 병력이 300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모집한 청년들은 한국청년훈련반·한국광복군훈련반에서 일정 기간 군사 훈련을 받은 뒤 광복군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무장 세력이 합류하면서 덩치가 커졌습니다. 먼저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이 1939년 11월 11일 충칭에서 30여 명으로 결성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있었습니다. 이 부대는 시안을 거점으로 일본군 후방에서 모집 활동을 벌여 1940년 말 대원이 10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전지공작대는 1941년 1월 광복군에 들어와 제5지대가 되었고, 『신편 한국사』의 서술로는 이때 광복군이 4개 지대를 갖추었습니다.
두 번째는 조선의용대였습니다.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을 대장으로 결성된 이 부대는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첫 군사 조직이었습니다. 창립 때 100여 명이던 대원은 1940년 2월 330여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런데 1941년 3월과 5월에 걸쳐 대원 약 80%가 황하를 건너 화북으로 옮겨 갔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중국 당국은 한국 독립운동의 무장 세력을 확실하게 손에 쥐려 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1942년 4월 20일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합치기로 결의했습니다. 5월 15일에는 중국 군사위원회가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으로 보내고 조선의용대를 제1지대로 바꾸라는 명령을 냈습니다. 이로써 중국 관내의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모두 광복군 아래로 모였습니다.
백과사전은 이때 4개 지대였던 광복군이 2개 지대로 다시 짜였다고 적습니다. 화북으로 간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1942년 7월 조선의용군으로 따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전쟁 막바지에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청년들이 들어왔습니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1944년 학도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가 시행되면서 4,385명의 한국 청년이 강제로 일본군에 편입되었고, 그 가운데 일부가 탈출해 광복군으로 넘어왔습니다. 탈출 학병 50명은 1945년 1월 말 충칭에 닿았습니다. 1945년 6월에는 안후이성 부양에서 모집을 맡던 징모 제6분처가 제3지대가 되어, 광복군은 모두 3개 지대를 갖추었습니다.
중국의 지원과 「9개 준승」
광복군은 중국의 양해와 협조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가까운 관계였던 만큼 제약도 컸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광복군이 중국 군사위원회에 "사실상 예속되어" 중국군과 함께 활동했다고 씁니다.
그 관계를 문서로 묶은 것이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입니다. 1941년 11월 15일 중국 군사위원회가 임시정부에 요구한 이 아홉 조항은 광복군의 관할과 행동을 제한했습니다. 백과사전은 이것을 중국이 창설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활동을 규제하려 한 조처로 설명합니다. 제1·2항은 광복군이 중국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지휘를 받고, 임시정부는 이름으로만 통수권을 갖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돈 문제도 얽혀 있었습니다. 중국의 원조는 1941년 12월 6만 원에서 1944년 100만 원으로 늘었습니다. 그러나 백과사전은 당시 인플레이션 때문에 사실상 의미 없는 증액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임시의정원에서는 9개 준승을 없애자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오랜 협상 끝에 1945년 4월 4일 새 군사 협정인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이 맺어졌고, 5월 1일부터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광복군의 통수권은 임시정부에 있고, 재정 원조는 차관으로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습니다. 군대의 지휘권을 되찾은 것은 해방 넉 달 전이었습니다.
연합군과 함께: 인도·버마와 OSS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자, 임시정부는 12월 10일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이름으로 일본에 대한 선전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때부터 광복군의 방향은 연합군과 함께 싸우는 쪽으로 정해졌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연합군과 함께 대일전쟁을 벌여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국의 지위를 얻는 것을 임시정부의 전략으로 봅니다.
영국과의 협력은 인도·버마 전선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버마는 연합군이 중국에 전쟁 물자를 보내는 주요 통로였는데,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그 길이 끊겼습니다. 일본군과 맞선 영국군에게는 일본어를 하는 사람이 필요했고, 영국군이 광복군에 이를 요청했습니다. 광복군은 영어와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공작대원 9명을 뽑아 1943년 8월 인도 캘커타로 보냈습니다.
대원들은 4개월 동안 영어와 방송 기술 교육을 받은 뒤 1944년 초 영국군 여러 부대에 나뉘어 배속되었습니다. 이들이 맡은 일은 적군을 향한 방송, 포로 심문, 적 문서 번역 같은 정보 활동이었습니다. 이 활동은 영국군이 버마의 수도 랑군(양곤)을 되찾는 1945년 7월까지 이어졌습니다.
미국과의 협력은 OSS를 통해서였습니다.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려는 광복군의 뜻과, 한국인을 대일 첩보 활동에 쓰려는 미국의 이해가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둘의 합작은 독수리작전(Eagle Project)이라는 이름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광복군 대원을 뽑아 첩보 훈련을 하고 한반도에 들여보내 적의 후방에서 공작을 편다는 계획이었습니다.
1945년 4월 김구가 이 계획을 최종 승인했고, 5월부터 석 달 과정의 OSS 훈련이 시작되었습니다. 훈련은 두 곳에서 열렸습니다. 시안에서는 사전트(Clyde B. Sargent) 대위가 맡아 제2지대에서 뽑힌 김준엽·장준하 등 50명이 제1기생으로 훈련받았습니다. 안후이성 리황에서는 윔스(Clarence N. Weems) 대위가 제3지대 대원 윤영무·김영일 등 20여 명을 훈련했습니다.
국내진공작전, 실행 직전의 멈춤
1945년 8월 4일, 시안의 제1기생 훈련이 끝났습니다. 제2지대는 곧바로 이들을 국내로 들여보내는 국내진입작전을 준비했습니다. 8월 7일 시안에서 김구와 이청천·이범석 등 광복군 간부, 그리고 OSS의 도노반 소장이 함께한 작전회의가 열렸습니다. 도노반은 이 자리에서 "오늘부터 아메리카합중국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사이에 적 일본에 항거하는 비밀공작이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대원들의 국내 투입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신편 한국사』에 따르면 광복군이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것은 대략 8월 9일 무렵이었습니다. 출동 준비가 갖추어진 바로 그때였습니다. 김구는 이 소식을 두고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라고 개탄했습니다.
광복군은 곧바로 이범석을 책임자로 국내정진대를 꾸렸습니다. 정진대는 8월 18일 OSS 쪽과 함께 비행기로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가 시안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국내로 들어가려는 구상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김구는 옌안(연안)에 있던 조선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에게 양쪽의 무장 세력인 광복군과 조선의용군을 압록강에서 합류시켜 국내로 들어가자고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제의나 시도에서 그쳤습니다. 『신편 한국사』 개요의 집필자는 그래도 그 의도와 구상까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해방 뒤의 광복군
일본이 항복한 뒤 광복군은 중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 나왔던 한국 청년들을 받아들이며 군대를 키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도 무장 해제를 요구했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광복군도 무장을 내려놓은 채 귀국했고, 백과사전에 따르면 1946년 6월 해체되었습니다. 귀국한 대원 가운데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들어가 활동했습니다. 총사령 지청천은 1945년 귀국 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지냈고, 참모장 이범석은 초대 국무총리와 국방부장관을 지냈습니다.
광복군이 남긴 것을 두고 두 자료는 이렇게 씁니다. 백과사전 「한국광복군」 항목의 집필자는 국내진공작전이 실현 직전에 무산되면서 전후 한국 독립 문제에서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없어졌다고 봅니다. 『신편 한국사』는 한민족의 힘만으로 일본과 전면전을 벌이거나 일본을 패망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보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워 전후 연합국의 지위를 얻으려 한 것을 그때 택할 수 있던 최선의 전략으로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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