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3월 17일 밤, 부시 미국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사담 후세인과 두 아들에게 48시간 안에 이라크를 떠나라고 했습니다. 거부하면 군사 충돌이 생긴다는 말도 붙였습니다. 사흘 뒤 전쟁이 시작되었고, 4월 9일에는 바그다드 피르도스 광장의 사담 후세인 동상이 쓰러졌습니다.
쿠웨이트에서 바그다드까지는 600 km가 넘습니다. 연합군은 개전 뒤 3주가 안 되어 그 길 끝에 닿았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이유로 앞세운 대량살상무기는 끝내 나오지 않았고, 수도가 무너진 뒤의 혼란은 훨씬 길게 이어졌습니다.
이 글은 전쟁이 왜 시작되었는지, 침공이 어떤 계획으로 얼마나 빨리 흘러갔는지, 대량살상무기와 전후 준비를 미국과 영국의 공식 조사가 어떻게 정리했는지를 따라갑니다. 백악관 보존 사이트의 연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원문, 미 의회조사국(CRS) 보고서, 미국 이라크 조사단 보고서, 영국 이라크 조사 보고서, 세계보건기구(WHO) 자료를 바탕으로 했습니다.
왜 전쟁이 되었나
1991년 걸프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라크 문제는 닫히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미국은 다른 나라들과 함께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eapons of mass destruction, WMD) 계획을 걱정했습니다. 유엔 사찰단은 1998년 철수하기 전까지 이라크에서 상당한 양의 WMD를 찾아 없앴고,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 북부와 남부 하늘에 비행 금지 구역을 두었습니다.
1998년은 한 고비였습니다. 그해 12월 미국과 영국은 이라크의 WMD 제조·사용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목적을 내걸고 '사막의 여우(Desert Fox)' 작전을 벌였습니다. 같은 해 미국 의회는 이라크 반정부 단체를 지원할 수 있게 하는 이라크 해방법을 통과시켰습니다.
2001년 9·11 테러는 WMD가 테러 조직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다는 걱정을 키웠습니다. 2002년 9월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은 상대가 공격하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선제 행동을 앞세웠습니다. 10월에는 의회가 대통령에게 이라크에 무력을 쓸 권한을 주었습니다.
2002년 11월 8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 1441호를 채택했습니다. 결의는 이라크가 앞선 결의들의 의무를 중대하게 위반해 왔고 지금도 위반 상태라고 결정하면서, 군축 의무를 지킬 "마지막 기회"를 주고 사찰 체제를 강화했습니다. 위반을 이어 가면 "심각한 결과"를 맞을 것이라는 경고도 되새겼습니다.
이 결의가 무력 사용을 허가한 것일까요? 의회조사국 보고서는 이 표현이 유엔 기준으로 강했지만, 대부분의 관찰자는 이라크가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무력이 허가되는 '자동성'까지 뜻한다고 보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미 행정부는 이라크의 협조가 모자라다고 판단했으면서도 무력 사용을 명시한 두 번째 결의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일부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걱정이 그 까닭으로 보도되었습니다.
3월 17일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정권이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갖고 숨기고 있다는 것을 정보가 "의심의 여지 없이" 보여 준다고 말했습니다. 화학·생물·핵무기 계획, 장거리 미사일 개발, 알카에다 지원이 행정부가 내세운 주된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그때 미국 정부의 주장이었고, 전쟁 뒤의 조사가 이 주장을 어떻게 판단했는지는 아래에서 봅니다.
더 작은 군대, 더 빠른 계획
계획의 출발점은 1990년대에 만들어 둔 이라크 전쟁 계획 1003-98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미군 40만~50만 명과 긴 사전 전개 기간을 잡았습니다.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 11월 말 이 계획을 보고받은 럼즈펠드 국방장관은 병력이 더 적고 더 빨리 움직이는 완전히 새로운 판을 요구했습니다.
2002년 초에 나온 '생성된 출발(Generated Start)' 계획은 공중 공격과 지상 공격을 거의 함께 시작하고, 병력을 약 27만 5천 명까지 늘려 가게 했습니다. 봄에는 더 작은 병력과 짧은 일정의 '달리는 출발(Running Start)'이 나왔는데, 지상전을 1만 8천 명으로 시작할 수도 있는 안이었습니다. 여름에는 두 안을 섞은 계획이 승인되어 '5-11-16-125'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이름의 숫자는 날짜 수입니다. 대통령 통보 5일, 병력 이동 11일, 공중전 16일, 전체 작전 최대 125일입니다. 날짜가 바뀐 뒤에도 이름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런 흐름은 압도적 병력을 강조한 파월 독트린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공군 쪽은 걸프 전쟁처럼 10~14일의 공중전을 먼저 하자는 의견을 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상군을 일찍 넣은 것은 이라크군의 허를 찌르려는 뜻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병력은 그 뒤로도 줄었습니다. 2003년 1월 29일 육군 지휘관들은 사단 둘만 이끌고 이라크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쪽 길도 막혔습니다. 4보병사단은 터키를 지나 북부 전선을 열 계획이었지만, 3월 1일 터키 의회가 터키 땅을 쓰게 하는 안을 거부했습니다.
4보병사단의 장비를 실은 배는 몇 주 동안 터키 앞바다에서 기다리다 페르시아만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단 병력이 이라크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바그다드의 동상이 쓰러진 뒤인 4월 12일이었습니다.
실제로 모인 병력은 얼마였을까요? 보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페르시아만 지역의 미군은 육상과 해상을 합쳐 34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이라크 안의 미군은 주요 전투 중에 약 25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다른 나라도 병력을 보냈습니다. 영국군은 의회조사국 보고서에 4만 7천 명 넘게, 영국 조사 보고서에는 처음 정점이 약 4만 6천 명으로 적혀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약 2천 명, 폴란드는 바스라 근처에 특수부대 200명을 두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은 개전 연설에서 35개가 넘는 나라가 기지 사용, 정보·군수, 전투 부대 파견 같은 지원을 한다고 밝혔습니다.
바그다드까지 3주
미국 동부 시간 3월 19일 밤, 부시 대통령은 연합군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목표를 치기 시작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의회조사국 보고서 하나는 이날 지도부를 겨눈 공습으로 공세가 시작되었다고 적고, 다른 보고서는 최후통첩이 끝난 직후인 3월 20일을 공개 개시일로 적습니다. 첫 공격은 사담 후세인이 바그다드 근처 도라 농장에 있다는 정보를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배에서 쏜 토마호크 미사일이 바그다드의 지도부 시설을 친 데 이어, 3월 20일 새벽 F-117 두 대가 그곳을 쳤습니다.
그날 밤 연합 지상군이 쿠웨이트 사막에서 이라크 남부로 넘어갔습니다. 다음 날인 3월 21일에는 공군과 해군이 더 큰 규모로 공습했는데, '충격과 공포(shock and awe)'라고 불린 공격입니다. 이라크는 유정 몇 곳에 불을 지르고 쿠웨이트 쪽으로 미사일 몇 발을 쏘았지만, 대부분 패트리엇 미사일에 요격되었습니다.
지상전은 두 갈래로 바그다드를 향했습니다. 육군 제5군단은 유프라테스강 서쪽 길을, 해병 제1원정군은 이란 국경에 가까운 동쪽 길을 맡았습니다. 해병대 지휘 아래 있던 영국 제1기갑사단은 이라크 둘째 도시 바스라를 맡았습니다.
동쪽에서는 해병대가 국경 너머 항구 도시 움카스르를 먼저 차지했습니다. 북쪽으로 올라가던 해병대 주력은 길목 도시 나시리야에서 저항을 만났고, 거센 모래 폭풍까지 겹쳤습니다. 영국군은 바스라에 한꺼번에 들어가지 않고 몇 주에 걸쳐 저항을 줄여 간 끝에 4월 6일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서쪽에서는 3보병사단이 남부를 빠르게 지나 4월 4일 사담 국제공항에 닿았습니다. 4월 5일과 7일에는 바그다드로 빠르게 치고 들어가는 기갑 돌입, 이른바 '선더 런(thunder run)'을 두 번 했습니다. 뒤따른 101공수사단은 힐라, 나자프, 카르발라 같은 도시에서 싸웠습니다.
북쪽에서는 3월 26일 173공수여단 약 1,000명이 낙하산으로 내렸습니다. 특수부대와 173공수여단, 수송기로 옮긴 미군 기갑 부대는 쿠르드 비정규군과 함께 모술, 키르쿠크, 티크리트를 차지했습니다.
4월 9일 피르도스 광장의 동상이 쓰러지자 이라크 안팎의 많은 사람이 옛 정권이 끝났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작전 27일째인 4월 15일까지 연합군은 이라크의 모든 큰 도시를 상대적으로 장악했고, 이라크의 정치·군 지도부는 무너졌습니다.
5월 1일 부시 대통령은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함에서 이라크의 주요 전투 작전이 끝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임무는 계속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때 옛 정권은 다 해체되지는 않았지만 이라크의 영토와 자원, 주민을 더는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1991년과 무엇이 달랐나
1991년 걸프 전쟁에서는 몇 주 동안 공습으로 이라크군을 먼저 약하게 만든 뒤 지상군이 움직였습니다. 2003년에는 공중 공격과 지상 공격이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지상군도 1991년 '사막의 폭풍' 때보다 작았습니다. 이라크군이 10년 전보다 수도 적고 능력도 떨어졌고, 미군은 훨씬 나아졌다는 평가를 반영한 것입니다.
순서는 마지막 순간에 두 번 바뀌었습니다. 이라크가 남부 유정을 일부러 부술 수 있다는 걱정이 커지자 지상군의 출발을 예정된 공습보다 앞당겼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담 후세인의 위치 정보를 따라 개시 직전에 더해진 도라 농장 공격이었습니다.
빠른 진격에는 대가도 따랐습니다. 사담 페다인 같은 준군사 부대가 후방 도시에서 게릴라식 공격을 했습니다.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길게 늘어진 보급선을 지키는 데 예상보다 많은 힘을 써야 했습니다.
제5군단장 월리스 중장은 3월 말 기자들에게 "우리가 싸우는 적은 워게임에서 상대한 적과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쿠웨이트에서 바그다드까지 600 km가 넘는 거리는 군수와 통신에도 부담이 되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병력이 너무 적다는 비판도 이때 나왔습니다. 비판자들은 국방부 민간 지도부가 정밀 공중 공세의 효과를 지나치게 높게 보고 지상군 배치를 줄였다고 보았습니다. 작은 지상군과 첨단 무기에 기대려는 생각이 군사 계획을 이끌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1991년과 다른 장면은 또 있었습니다. 그때 같은 대규모 항복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미 국방부는 이라크군 6,000명 넘게 포로가 되었고, 더 많은 수가 그냥 자리를 떠났다고 보았습니다.
특수부대는 공식 개시 전에 이미 이라크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서부의 기지와 WMD가 의심되는 시설을 확보했고, 북부에서는 쿠르드 페슈메르가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국방 전문가 크레피네비치는 주요 전투에 참가한 특수부대를 "거의 1만 명"으로 추정했습니다.
바그다드가 무너진 뒤
옛 정권이 통제를 잃자 바그다드와 여러 도시에서 넓은 약탈이 일어났습니다. 정부 건물과 옛 정권 지도자의 집뿐 아니라 일부 상점과 문화 기관도 털렸습니다. 이라크 국립박물관 책임자들은 수천 년 된 유물 17만 점을 약탈자가 가져가거나 부쉈다고 알렸습니다.
지키는 사람이 없는 무기고도 털렸습니다. 일부 관찰자와 연합군 참가자는 연합군에게 불법 행위를 다 막을 병력이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전후 준비가 전투 준비만큼 꼼꼼하지 않았다는 데는 대부분의 관찰자가 동의합니다. 계획은 경찰 같은 이라크 공무원이 전쟁 다음 날 일터로 돌아올 것이라고 가정했고, 전력망 같은 기반 시설이 크게 망가진 상태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전후를 맡을 조직도 바뀌었습니다. 2003년 1월 20일 대통령 지시로 만든 재건·인도지원처(Organization for Reconstruction and Humanitarian Assistance, ORHA)는 퇴역 중장 제이 가너가 이끌었습니다. 5월 9일에는 브레머 대사가 이라크의 법적 행정 권한을 쥔 연합군 임시행정처(Coalition Provisional Authority, CPA)를 이끌러 바그다드에 왔습니다.
브레머 대사는 뒤에 처음부터 끝까지 병력이 더 많았어야 했다고 말했습니다. 반론도 있습니다. 병력이 무엇을 할지가 먼저 정해지지 않으면 "몇 명이 필요한가"는 그리 뜻 있는 물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담 후세인은 2003년 12월 13일 저녁, 고향 티크리트 밖 농가 근처에서 미군에게 붙잡혔습니다. 다음 날 부시 대통령은 체포가 이라크 폭력의 끝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뒤의 반란과 증파는 다음 글의 이야기입니다.
대량살상무기는 어디에 있었나
전쟁 동안 화학·생물 무기는 쓰이지 않았습니다. 2007년 7월 판 의회조사국 보고서까지도 화학·생물·핵무기의 비축분이나 생산 시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조사단(Iraq Survey Group, ISG)이 2004년에 낸 종합 보고서는 전쟁 전과 다른 그림을 내놓았습니다. 이라크의 WMD 능력은 1991년에 사실상 파괴되었고, 1991~2003년 사담 후세인의 첫째 목표는 유엔 제재를 푸는 것이었습니다. 조사단은 그가 제재를 끝내면서도 제재가 풀리면 WMD를 다시 세울 능력은 지키려 했다고 판단했습니다.
2004년 10월 7일 부시 대통령은 이 보고서가 정보기관이 있다고 믿었던 무기가 이라크에 없었다는 데이비드 케이의 앞선 결론을 확인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대통령은 보고서가 사담 후세인의 의도와 무기 개발 능력에 관한 새 정보를 담았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2016년에 나온 영국의 이라크 조사 보고서는 영국의 결정을 따로 살폈습니다. 조사는 그때 외교적 선택지가 다 쓰이지 않았으므로 군사 행동이 최후의 수단이 아니었다고 보았습니다. 정보 판단에서 이라크에 화학·생물·핵무기나 그 계획이 더는 없을 수 있다는 가설은 한 번도 검토되지 않았고, 침공 뒤에는 큰 비축분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고 적었습니다.
정부 쪽의 답도 같은 보고서에 실려 있습니다. 블레어 총리가 이끈 영국 정부는 군사 행동을 지지하기로 했고, 의회가 그 선택을 승인했습니다. 증거가 나오지 않자 블레어 총리는 사담 후세인의 전략적 의도, 안보리 결의 위반, 군사 행동이 세계의 비확산 노력에 준 좋은 영향을 들어 결정을 변호했습니다.
조사 보고서는 이 침공이 다른 나라의 침략이나 벌어지고 있는 인도적 재난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다른 무력 사용과 달랐다고 적습니다. 영국의 참전 결정도 되풀이되기 어려운 특별한 사정이 겹친 결과였다고 보았습니다.
남은 숫자와 남은 물음
이 전쟁의 희생자 수는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이라크 정부와 WHO는 9,345가구를 면담한 전국 조사로, 2003년 3월부터 2006년 6월까지 이라크인 15만 1천 명이 폭력으로 숨졌다고 추정했습니다. 불확실성을 감안한 범위는 10만 4천~22만 3천 명이고, 침공 뒤 첫해에는 하루 평균 128명이 폭력으로 숨졌다고 보았습니다.
이 추정은 언론 보도를 걸러 센 Iraq Body Count의 세 배이고, 2006년 앞서 나온 더 작은 가구 조사보다는 네 배쯤 낮습니다. WHO는 가구 조사 결과를 조심해서 읽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미국 쪽 숫자도 있습니다. 2011년 12월 오바마 대통령은 거의 9년 동안 이라크에서 전쟁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150만 명 넘는 미국인이 이라크에서 복무했고, 눈에 보이는 상처만 쳐도 3만 명 넘게 다쳤으며, 4,500명 가까이 숨졌다고 했습니다.
바그다드까지 3주가 걸리지 않은 전쟁은 그렇게 9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공식 기록이 남긴 물음은 크게 둘입니다. 정보가 있다고 믿은 무기는 왜 없었는가, 그리고 빠른 승리 뒤의 준비는 왜 모자랐는가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이라크 반란과 증파: 전쟁이 끝난 뒤의 전쟁: 2003년 5월 뒤 반란이 커진 과정과 2007년 증파를 다룹니다.
- 걸프 전쟁(1991): 사막의 방패에서 사막의 폭풍까지: 몇 주의 공습 뒤 지상전을 한 앞선 전쟁입니다.
- 정밀유도폭탄: 평범한 폭탄에 무엇이 더해질까: 레이저 점을 따라가는 키트와 위성항법 키트의 차이를 봅니다.
- 순항미사일: 비행기와 무엇이 비슷할까: 날개와 엔진으로 날아가는 미사일의 원리입니다.
- 지대공 미사일: 하늘을 지키는 지상 시스템: 날아오는 위협을 땅에서 막는 체계입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긴 보급선이 왜 부담이 되는지 이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