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8월 7일 아침,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Guadalcanal)섬 북쪽 해변에 미 해병대가 내렸습니다. 노린 것은 일본이 룽가(Lunga) 곶에 거의 다 지어 놓은 비행장 하나였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는 이 상륙을 미 해군이 태평양에서 처음 벌인 공세 상륙 작전으로 적습니다.

그 활주로를 두고 여섯 달 동안 땅과 바다와 하늘에서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해전만 일곱 번이었고, 섬 둘레 바다에는 가라앉은 배가 쌓였습니다. 손바닥만 한 활주로 하나가 왜 그토록 중요했을까요? 일본이 섬에 온 까닭부터 1943년 2월의 철수까지 차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라바울과 호주 사이의 섬

1942년 봄의 솔로몬 제도는 영국이 다스리던 곳이었습니다. 일본은 뉴브리튼섬 라바울(Rabaul)의 전략 기지를 지키려고 5월 3일 툴라기(Tulagi)를, 6월 8일 바로 옆 과달카날을 점령했습니다. 툴라기 점령일은 1949년 미 해병대 전사에는 5월 4일로 적혀 있어, 자료에 따라 하루가 다릅니다.

과달카날을 차지한 목적은 지원 기지와 비행장이었습니다. 6월 말 측량이 끝났고, 7월 초부터 룽가 곶에서 활주로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이 발판은 뉴기니와 호주 쪽으로 내려가려는 일본의 남진도 뒷받침했습니다.

미국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섬 근처의 연안 감시원들이 먼저 알렸고, 미국 정찰기가 그 보고를 확인했습니다. 일본이 룽가 평야에 비행장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달 만에 짠 반격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이긴 뒤, 미 함대 사령관 겸 해군 작전부장 어니스트 킹(Ernest J. King) 제독은 태평양에서 해군이 지휘를 이끌게 했습니다. 당장 공세에 나서는 것에 대한 육군의 반대도 넘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워치타워(Watchtower) 작전은 한 달이 안 되는 사이에 구상과 계획을 마쳤고, 해군과 해병대만으로 짜였습니다.

서두른 만큼 빈 곳이 많았습니다. 제1해병사단장 알렉산더 반데그리프트(Alexander Vandegrift) 장군은 적어도 여섯 달은 훈련하기를 바랐습니다. 과달카날의 지도도, 솔로몬 제도의 까다로운 바다를 그린 해도도 모자랐습니다.

킹은 "구두끈 하나로라도" 상륙은 한다고 밀어붙였습니다. 해병들은 이 작전을 '슈스트링(Shoestring) 작전', 우리말로 '구두끈 작전'이라고 비꼬아 불렀습니다.

암호명도 붙었습니다. 작전 전체는 워치타워, 과달카날이라는 장소는 '선인장(CACTUS)'이었습니다. 수송선 19척과 구축함(destroyer)을 고쳐 만든 수송선 4척에 해병 거의 19,000명이 탔습니다.

상륙, 그리고 사보섬의 밤

8월 7일 제1해병사단이 과달카날에 내렸습니다. 섬의 일본 수비대는 주로 건설 부대였고, 기습을 당해 거의 맞서지 못했습니다. 해병대는 짓다 만 활주로를 차지하고 둘레에 방어선을 쳤습니다. 이 상륙에는 뉴올리언스의 히긴스(Higgins) 회사가 만든 새 상륙정이 쓰였습니다.

바다 건너 툴라기와 플로리다섬에서는 싸움이 더 거셌고, 해병대는 8월 9일까지 두 섬을 장악했습니다. 그사이 바다에서는 일이 틀어졌습니다. 항공모함 부대를 이끈 프랭크 잭 플레처(Frank Jack Fletcher) 제독이 솔로몬의 좁은 바닷길에 머무는 항공모함이 위험하다고 걱정해 8월 8일 부대를 물린 것입니다.

8월 9일 새벽 2시 직전, 일본 순양함 7척과 구축함 1척이 라바울과 카비엥에서 뉴조지아 해협을 따라 내려왔습니다. '슬롯(the Slot)'이라고도 불린 바로 그 바닷길입니다. 호주 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AWM)은 연합군의 정보와 경계가 실패해, 상륙 선단을 지키던 부대가 사보(Savo)섬 근처에서 기습당했다고 설명합니다.

연합군은 호주 순양함 1척과 미국 순양함 3척을 잃었습니다. 연합군 사망자는 1,023명, 부상자는 709명이었고 일본의 피해는 가벼웠습니다. 이 사보섬 해전(Battle of Savo Island)은 단일 함대 교전에서 미 해군이 겪은 가장 나쁜 패배로 꼽힙니다.

호주 중순양함 캔버라(Canberra)는 그 부대의 맨 앞에 있었습니다. 2분이 안 되는 사이 24발을 맞았고, 곧 전력이 끊겨 한 발도 쏘지 못했습니다. 함장 프랭크 게팅(Frank Getting) 대령을 포함해 84명이 숨졌습니다. 73명은 그 자리에서, 11명은 살아남았다가 뒤에 숨졌습니다.

캔버라는 생존자를 옮긴 뒤 미국 구축함의 어뢰로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은 때는 AWM 백과에 "이튿날", AWM 보도자료에 8월 9일 오전 8시 무렵으로 서로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같은 백과의 집계로는 이 해전에서 호주 해군 84명, 미 해군 939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숨졌습니다.

일본 함대는 수송선을 치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NHHC는 미카와 군이치(Mikawa Gunichi) 중장이 수송선까지 부쉈다면 과달카날 전역과 태평양 전쟁의 다음 국면이 달라졌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항공모함이 떠나 항공 엄호가 사라지자 해군은 섬으로 가는 수송을 멈췄고, 고립된 해병대는 노획한 일본 쌀과 말린 생선으로 버텼습니다.

헨더슨 비행장을 지킨 넉 달

반데그리프트는 활주로에 미드웨이 해전의 해병 비행사 로프턴 R. 헨더슨(Lofton R. Henderson) 소령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공사에는 일본이 남긴 장비를 썼습니다. 낡았지만 대부분 멀쩡했고, 일본이 8월 7일 도착할 자기 비행기를 위해 쌓아 둔 연료 400드럼도 있었습니다.

8월 19일, 날마다 이어진 공습 속에서 활주로 공사가 끝났습니다. 이튿날 섬 남쪽 200마일 바다의 항공모함 롱아일랜드(Long Island)에서 해병 전투기 19대와 급강하 폭격기 12대가 떠서 헨더슨 비행장에 내렸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섬의 항공 부대가 '선인장 항공대(CACTUS Air Force)'입니다. 해병대, 해군, 육군 비행기가 섞인 부대였습니다.

땅 위의 첫 큰 싸움은 8월 21일의 테나루(Tenaru) 전투였습니다. 8월 18일 타이부 근처에 내린 이치키(Ichiki) 대령의 부대와 해병대가 맞붙었습니다. 약 900명의 일본 부대는 거의 모두 죽거나 다쳤고 15명이 포로가 됐습니다. 해병대는 34명이 전사하고 75명이 다쳤습니다.

9월 12일에는 가와구치(Kawaguchi) 여단이 헨더슨 비행장 남쪽의 작은 언덕을 쳤습니다. 이틀 동안 일본군이 몇 번이고 올라왔다가 소총과 기관총, 박격포 사격에 밀려났습니다. National WWII Museum의 글은 공격 쪽 사상자를 700명 넘게, 해병대 사상자를 135명으로 적습니다. 이 언덕은 뒤에 에드슨 능선(Edson's Ridge), 또는 '피의 능선'으로 불렸습니다.

10월에는 더 큰 공세가 왔습니다. 그에 앞서 미 해군은 상륙 뒤 가장 큰 병력 수송으로 육군 제164보병연대 대부분을 섬에 내렸습니다. 일본 제17군은 10월 23일부터 나흘 동안 비행장 둘레 여러 곳을 쳤고, 해병과 육군 병사들이 이를 물리쳤습니다.

박물관 글은 이때 일본의 손실을 3,500명으로 적습니다. 그 뒤 일본군은 다시는 헨더슨 비행장에 그만큼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낮에는 비행기, 밤에는 군함

과달카날 둘레 바다의 싸움은 낮과 밤이 달랐습니다. 거의 날마다 미국 수송 선단이 들어와 사람과 물자를 내렸고, 밤마다 일본이 같은 일을 했습니다. 1949년 해병대 전사는 밤에 병력을 실어 나른 일본 배들을 '도쿄 급행(Tokyo Express)'이라고 부릅니다.

8월 23~25일의 동부 솔로몬 해전에서는 양쪽 배가 서로를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공격은 모두 항공모함과 육상 기지의 비행기가 했습니다. 뚜렷한 승자는 없었지만 일본은 많은 비행기와 숙련 조종사를 잃었고, 섬으로 갈 증원도 늦어졌습니다.

10월 26일 산타크루즈 제도 앞바다에서는 미국이 항공모함 호닛(Hornet)을 잃고 다른 1척도 크게 부서졌습니다. 비행기도 81대를 잃었습니다. 일본은 비행기 99대를 잃고 항공모함 둘이 부서져 물러났습니다. NHHC는 일본이 전술적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지만 숙련 조종사의 손실을 메우지 못했고, 그 뒤 일본 항공모함은 이 전역에 크게 나서지 못했다고 정리합니다.

밤에는 순양함과 구축함이 맞섰습니다. 10월 11일 밤 에스페란스(Esperance) 곶 해전에서는 노먼 스콧(Norman Scott) 소장의 순양함 4척과 구축함 5척이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러 오던 일본 함대를 기습했습니다. 일본은 순양함과 구축함을 1척씩, 미국은 구축함 1척을 잃었습니다.

그사이 일본 보급 선단은 섬에 닿았습니다. 전략적 결과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이 해전은 사보섬의 패배 뒤 미 해군의 사기를 크게 올렸습니다.

11월 12~15일의 과달카날 해전(Naval Battle of Guadalcanal)은 며칠에 걸친 공중전과 해전의 묶음이었습니다. 일본은 병력 7,000명을 태운 선단을 보내며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하려 했습니다. 미 해군은 포격을 막고 수송선 대부분을 가라앉혔지만, 대니얼 캘러헌(Daniel J. Callaghan)과 스콧 두 소장이 전사했습니다.

이 해전에서 미국은 경순양함 2척, 구축함 4척, 비행기 35대를 잃었습니다. 일본은 전함 2척, 중순양함 1척, 구축함 3척, 수송선 11척, 비행기 64대를 잃었고, 섬의 연합군을 몰아내려던 마지막 큰 시도도 여기서 끝났습니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경순양함 주노(Juneau)에 함께 탔던 설리번 다섯 형제가 이 해전 뒤 배와 함께 모두 숨졌습니다. 형제 가운데 조지는 배가 가라앉을 때 살아남았지만 닷새 뒤 바다에서 숨졌습니다.

11월 30일 타사파롱가(Tassafaronga) 해전의 결과는 엇갈렸습니다. 미국 부대가 일본 구축함 1척을 가라앉혔지만, 일본 배들이 쏜 어뢰에 미국 순양함 1척이 가라앉고 3척이 크게 부서졌습니다. 일본 배들은 빠져나갔지만 싣고 온 보급품과 병력은 내리지 못했습니다.

가라앉은 배가 하도 많아 섬 둘레 바다에는 '아이언바텀 해협(Ironbottom Sound)'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바닥에 쇠가 깔린 바다라는 뜻입니다.

과달카날 전역 연표 도표. 첫 줄은 1942년 5월부터 8월까지: 5월 3일 일본의 툴라기 점령(자료에 따라 4일), 6월 8일 과달카날 점령, 7월 초 활주로 공사, 8월 7일 미 해병대 상륙, 8월 9일 사보섬 해전, 8월 20일 첫 비행기 도착, 8월 21일 테나루 전투, 8월 23~25일 동부 솔로몬 해전. 둘째 줄은 9월부터 11월까지: 9월 12일 능선 공격, 10월 11일 에스페란스 곶 해전, 10월 23일부터 나흘 동안의 10월 공세, 10월 26일 산타크루즈 해전, 11월 12~15일 과달카날 해전, 11월 30일 타사파롱가 해전. 셋째 줄은 12월부터 1943년 2월까지: 12월 9일 육군이 지휘를 넘겨받음, 1월 2일 제14군단, 1월 14일 일본 후위 대대 상륙, 1월 29~30일 렌넬섬 해전, 2월 7일 밤 마지막 일본군 철수, 2월 9일 전역 끝. 땅의 싸움, 바다의 싸움, 그 밖의 일이 색으로 나뉘고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1942년 5월부터 1943년 2월까지. 해전은 일곱 번이었고 땅의 싸움은 비행장 둘레에 모였습니다 (도표)(도표)

그 시대의 도구: 비행장, 상륙정, 레이다, 무전기

헨더슨 비행장을 지키는 동안 미국은 섬 위에 비행기를 둘 수 있었습니다. 일본 비행기는 550마일 떨어진 라바울에서 날아와야 해서, 표적 위에 머무는 시간이 몇 분뿐일 때가 많았습니다.

섬 비행장을 바다에 뜬 항공모함에 견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다릅니다. 비행장은 가라앉지 않지만 자리를 옮길 수도 없습니다. 에스페란스 곶 해전과 11월의 과달카날 해전 때 일본 함대가 맡은 일도 헨더슨 비행장 포격이었습니다.

비행장을 가운데 둔 개념도. 오른쪽 아래에 과달카날섬과 헨더슨 비행장이 있고, 미국이 섬 위에 비행기를 둘 수 있었다는 메모가 있다. 왼쪽 위 멀리 라바울이 있고, 두 곳 사이가 550마일이며 일본 비행기는 표적 위에 몇 분만 머물 때가 많았다는 메모가 있다. 두 곳 사이의 좁은 바닷길은 '슬롯'이라고 적혀 있다. 아래쪽에는 낮과 밤의 띠가 있어, 낮에는 미국 수송 선단이, 밤에는 일본 배들이 사람과 물자를 내렸다는 메모가 있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비행장 하나가 왜 중심이 됐을까. 거리와 낮·밤의 흐름만 남긴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사람을 배에서 해변으로 옮긴 것은 히긴스 회사의 상륙정이었습니다. 다만 태평양에서 처음 해 본 상륙이었던 만큼 실수도 많았습니다. 해변에 내린 사람과 물자를 섬 안쪽으로 옮길 수단이 처음에는 모자랐습니다.

레이다는 아직 새 장비였습니다. 타사파롱가에서 미국 부대는 비교적 새것이던 수상 탐색 레이다로 일본 배들을 먼저 찾아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 배들이 재빨리 쏜 93식 '롱 랜스(Long Lance)' 어뢰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적을 먼저 찾는 것과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 같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보급도 바다 위의 기술 문제였습니다. 타사파롱가 무렵부터 일본 해군은 구축함으로 섬에 보급했고, 해안 가까이에서 풀어 놓을 보급 드럼통을 줄줄이 묶어 실었습니다. 미국의 항공 공격은 이 보급을 여러 번 막았습니다.

가장 작은 도구가 큰 몫을 하기도 했습니다. 연안 감시원(coastwatcher)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평생을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숲으로 들어가 비밀 무전기로 일본의 움직임을 땅, 바다, 하늘 할 것 없이 지켜보고 알렸습니다. 일본의 비행장 계획을 미국 정찰기가 확인하기 전에 먼저 알린 것도 이들이었습니다.

말라리아와 보급

미군은 적과 함께 더위, 모기, 질병, 빽빽한 숲, 낯선 땅과도 싸웠습니다. 말라리아는 8월 셋째 주에 처음 나타났고, 10월 둘째 주까지 제1해병사단에서만 700건 넘게 보고됐습니다. 예방약 아타브린을 먹이라는 명령이 9월 10일 나왔지만, 약을 먹는 일에서 장교와 병사 모두의 온전한 협조는 얻을 수 없었습니다.

1949년 해병대 전사에 실린 제1해병사단의 입원 표는 이 무게를 숫자로 보여 줍니다. 8월 900건이던 입원은 10월 2,630건, 11월 2,413건이 됐고, 12월 10일까지 합계 8,580건이었습니다. 제2해병사단과 항공 부대, 육군은 뺀 숫자입니다.

결국 육군이 해병대를 교대하기로 했습니다. 그 무렵 해병들은 말라리아에 심하게 걸렸고, 모자란 식사의 영향도 뚜렷했습니다. 12월 9일 섬의 지휘는 반데그리프트에게서 육군 알렉산더 패치(Alexander M. Patch) 소장에게 넘어갔고, 같은 날 제1해병사단이 호주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1943년 1월 2일에는 섬의 모든 지상군이 패치가 지휘하는 제14군단(XIV Corps)으로 묶였습니다.

철수와 숫자 읽기

1942년 12월 말 일본 대본영은 과달카날에서 물러나자는 건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습니다. 철수 작전 '케(Ke)'는 1943년 1월 말에 시작하기로 했고, 일본 해군은 1월 14일 후위를 맡을 대대 하나를 새로 섬에 내렸습니다.

1월 29~30일 렌넬(Rennell)섬 해전에서는 미국 순양함 시카고(Chicago)가 일본 비행기의 공격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동부 솔로몬에서 일본이 거둔 마지막 전술적 성공이었습니다. 섬 위의 미 육군은 일본군의 움직임을 공세 준비로 잘못 읽어 바로 뒤쫓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일본군은 2월 7일 밤 구축함 부대에 실려 섬을 떠났습니다. 미국 정부의 전후 평가는 전역 기간을 1942년 8월 7일부터 1943년 2월 9일까지로 적습니다.

사람의 손실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NHHC는 미군 7,100명이 숨지고 거의 8,000명이 다쳤으며 일본은 적어도 19,200명이 숨졌다고 적습니다. 1949년 해병대 전사는 육군과 해병대만 세어 미국 사상자를 6,111명, 그 가운데 전사·실종을 1,752명으로 적었습니다. 해군 숫자는 1949년 3월까지도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National WWII Museum은 솔로몬 전역 전체로 연합군 약 7,100명과 일본 31,000명을 듭니다. 배는 연합군 29척과 일본 38척, 비행기는 연합군 615대와 일본 683대를 잃었다고 적습니다.

일본 쪽 숫자는 특히 불확실합니다. 1949년 해병대 전사는 적의 사상자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고 보고, 일본 쪽 자료의 추정을 옮겼습니다. 그 표에서 섬에 들어온 일본 지상군은 37,680명, 빠져나간 사람은 정상 전출 2,100명을 포함해 9,100명, 잃은 사람은 28,580명입니다. 철수 인원 추정만 해도 7,000명에서 13,000명까지 갈립니다.

과달카날 전역의 숫자를 자료별로 견준 막대 도표. 미국 쪽 사망자는 7,100명(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전 군), 약 7,100명(National WWII Museum, 연합군·솔로몬 전역), 1,752명(1949년 해병대 전사, 육군·해병대의 전사·실종만, 해군 제외). 일본 쪽은 적어도 19,200명 사망(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지상군 추정 손실 28,580명(1949년 해병대 전사가 옮긴 일본 쪽 추정), 31,000명(National WWII Museum). 아래 띠는 배와 비행기 손실로, 연합군 배 29척·비행기 615대, 일본 배 38척·비행기 683대(National WWII Museum). 맨 아래에는 일본군 철수 인원 추정이 7,000명에서 13,000명까지 갈리고 일본 쪽 자료의 표는 9,100명이라는 메모가 있다
사람과 배와 비행기의 손실. 세는 범위와 자료가 달라 숫자를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남긴 것

NHHC는 미드웨이와 함께 과달카날의 연합군 승리가 아마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뒤 일본은 수세에 섰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일본 쪽 인사들도 비슷한 말을 남겼습니다. 1949년 해병대 전사가 옮긴 전후 심문에서 나가노 오사미 원수는 과달카날·툴라기 작전을 공세에서 수세로 바뀐 전환점으로 꼽고, 그 까닭으로 미국만큼 빨리 병력을 늘리지 못한 것을 들었습니다.

도조 내각의 서기관장 호시노 나오키는 일본 전시 경제의 달력을 "과달카날 이후"로 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갈림길이었다"는 한 일본 장교의 말도 전해집니다.

양쪽 모두 준비가 덜 된 싸움이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1949년 전사는 미국도 이런 공세를 이어 갈 준비가 다 되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미드웨이 해전의 결과와 지나치게 넓어진 전선 탓에 일본은 더 준비가 덜 됐다는 것입니다. 그 뒤 두 해 반 동안 미군은 길버트 제도, 마셜 제도, 마리아나 제도, 이오지마, 오키나와를 차례로 차지했습니다.

기록에는 섬 주민의 몫도 남아 있습니다. 과달카날과 둘레 섬의 주민들은 원주민 경찰대원, 노동자, 연안 감시원의 정찰병과 조수로 미군을 크게 도왔습니다. 경찰대에서 25년을 일하고 1941년 4월 은퇴한 부자(Vouza) 원사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부자는 일본군에 붙잡혀 미군에 관한 정보를 대라는 요구를 거부했고, 고문을 받은 채 죽도록 버려졌습니다. 그는 밤에 적진을 지나 해병대가 지키던 앨리게이터 개울 어귀까지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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