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2월, 독일 도시 드레스덴에 영국과 미국의 폭격기 1,200기 넘게 날아들어 네 차례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유럽 전쟁의 마지막 몇 달이었습니다. 이 공습은 지금도 2차 대전에서 가장 논란이 큰 연합군 공격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도시를 불태운 폭격은 전쟁을 끝내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됐을까요. 그리고 그만한 희생을 치를 만한 일이었을까요. 전쟁이 끝난 뒤 지금까지, 두 물음 모두 답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전략폭격이 무엇을 노렸고 어떻게 도시 폭격으로 바뀌었는지, 전쟁 직후의 조사와 그 뒤의 평가가 어디서 갈리는지 공개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폭격기가 전쟁을 끝낸다는 생각
전략폭격(strategic bombing)은 적이 싸울 힘 그 자체를 노립니다. 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독일 폭격은 핵심 산업과 수송, 군사 표적을 부수고 독일이 싸울 힘을 약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치 독일을 상대로 한 이 공세는 전쟁에서 가장 길고 격렬한 전략폭격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생각에는 전쟁 전부터 이어진 기대가 깔려 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장거리 중폭격기로 전략폭격 전쟁을 치르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폭격기 마피아(Bomber Mafia)'라 불린 미 육군 장교들은 낮에 정밀하게 폭격해 적지 깊숙한 공장과 군사 시설을 친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도시 폭격은 연합군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독일 공군(Luftwaffe)은 1940년 9월부터 1941년 5월까지 영국을 길게 폭격했습니다. 이 블리츠(Blitz)는 영국 전체의 일상을 바꿔 놓았고, 영국 민간인 4만 3,000명 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장을 노리다 도시를 노리기까지
1939년 영국 폭격기 사령부(RAF Bomber Command)는 실전 폭격 대대 23개, 항공기 280기로 시작했고, 처음에는 엄격히 군사 표적만 쳤습니다. 낮에 나선 초기 공격에서 폭격기는 적 전투기에 쉬운 표적이었습니다. 1939년 12월 18일에는 빌헬름스하펜 앞바다의 선박을 치러 간 웰링턴 폭격기 22기 가운데 12기가 격추됐습니다.
1940년 프랑스 침공 뒤 영국 공군은 밤에 독일 산업, 특히 합성 석유 공장을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승무원들은 공장 하나, 정유소 하나를 좀처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특정 공장을 골라 친다는 계획은 실제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흔히 그 갈림길로 1941년 8월의 버트 보고서(Butt Report)를 꼽습니다. 보고서가 정밀폭격의 실패를 드러내 도시와 민간인의 사기를 겨냥하는 쪽으로 돌아서게 했다는 설명입니다. 영국 공군 항공우주력연구센터의 학술지 『Air Power Review』에 실린 피터 리(Peter Lee)의 글은 이 설명이 다소 거칠다고 봅니다. 보고서보다 한 달 넘게 앞선 1941년 7월 9일 지령에 이미 독일 수송망을 흐트러뜨리고 민간인 전체, 특히 산업 노동자의 사기를 꺾는 데 힘을 모으라는 말이 들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1942년 2월 14일의 지령은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작전의 주목표를 적 민간인, 그 가운데서도 산업 노동자의 사기에 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서 해리스(Arthur Harris)가 폭격기 사령부를 맡은 것은 그 뒤인 2월 23일입니다. 리는 표적이 공장에서 사기로 옮겨 간 일이 해리스가 오기 전에 이미 일어났다고 적습니다.
그해 영국 전시 내각은 정밀폭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역 폭격(area bombing)'을 승인했습니다. 공장과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를 함께 부수려고 도시 전체를 겨냥하는 방식입니다. 승리 직전처럼 보이던 적을 꺾으려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해리스는 이것으로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5월 30일 밤 쾰른에 폭격기 1,000기를 보내 큰 대중적 지지를 얻었습니다.
미국은 다른 길로 들어섰습니다. 1943년 1월 카사블랑카 회의에서 영국과 미국은 연합 폭격 공세(Combined Bombing Offensive)를 정했습니다. 미 제8공군은 낮에 정밀폭격을 하고, 영국 공군은 밤에 같은 표적을 지역 폭격하는 '24시간' 공세였습니다.
값은 비쌌습니다. 1943년 10월 '검은 주간(Black Week)' 한 주 동안 제8공군은 폭격기 148기와 승무원 약 1,500명을 잃었습니다. 그 손실은 공격에 나선 항공기의 13% 가까이였습니다.
1944년이 되자 연합 폭격 부대는 독일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독일의 연료 공급을 노린 공세가 성공했습니다. 해리스는 그 사이에도 도시 공격이 결정적일 것이라 믿고 이어 갔습니다. 1945년에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석유와 교통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연료가 떨어진 독일 군사 기구는 멈춰 섰습니다.
함부르크, 드레스덴, 도쿄
1943년 7월 말과 8월 초의 사흘 밤, 영국 공군이 폭격한 함부르크를 화염 폭풍(firestorm)이 휩쓸었습니다. 미국 전략폭격 조사단 보고서의 표현으로는 아마 전쟁에서 가장 파괴적인 단일 도시 공격이었습니다. 도시 집의 약 3분의 1이 부서졌고, 독일 추정으로 6만~10만 명이 숨졌습니다. 그 뒤 어떤 도시 공습도 함부르크만큼 독일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1945년 2월 13~14일의 드레스덴 공습에는 영국 폭격기 사령부와 미 제8공군이 함께 나섰습니다. 폭탄과 소이탄 4,000톤 가까이가 떨어졌고, 화염 폭풍이 도시를 부쉈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은 사망자를 최대 2만 5,000명으로 적습니다. 『Air Power Review』의 피터 그레이(Peter W Gray) 글도 약 2만 5,000명이라는 추정을 들면서, 사상자 숫자가 논쟁되고 고쳐지고 반박돼 왔다고 덧붙입니다.
드레스덴은 유독 오래 이야기됩니다. 그레이는 이 공습이 다른 공습을 다 합친 것보다 더 격한 논쟁을 불렀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자신은 드레스덴이 그 자체로 전략 표적이었고, 산업과 교통 연결 때문에 독일에서 일곱째로 큰 이 도시가 공격받을 처지였다고 주장합니다.
태평양에서는 1945년 3월에 폭격 방식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미국 B-29 폭격기는 고폭탄 대신 소이탄을 싣고 밤에 일본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IWM 학예사는 일본 집 대부분이 나무와 대나무로 지어져 있었고, 지휘관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가 화공 폭격이 큰 민간인 희생을 낳으리라는 것을 알았다고 설명합니다. 논란이 큰 결정이었습니다.
1945년 3월 9~10일 밤, B-29 279기가 도쿄를 불태웠습니다. IWM은 도쿄 중심부 16제곱마일이 불타고 10만 명 가까이 숨졌다고 적습니다. 히로시마 원폭의 추정 사상자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조사단은 도쿄의 가장 붐비는 지역 15제곱마일이 잿더미가 됐고, 그 뒤 어떤 도시 공격도 그만큼 파괴적이지 않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일본 도시 공격은 그 뒤로도 이어졌습니다. 조사단 집계로 도시 66곳에 폭탄 10만 4,000톤이 떨어졌고, 이 도시들의 시가지 약 40%가 부서졌습니다. 일본 도시 인구의 약 30%가 집과 살림을 잃었습니다.
전쟁 직후의 조사: 전략폭격 조사단
조사는 전쟁이 끝나기 전에 시작됐습니다. 미국 전략폭격 조사단(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 USSBS)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1944년 11월 3일 전쟁장관이 세웠습니다. 편제는 민간인 300명, 장교 350명, 사병 500명이었습니다. 유럽 요약 보고서는 1945년 9월 30일, 태평양 요약 보고서는 1946년 7월 1일 날짜로 나왔습니다.
유럽 요약의 결론은 짧고 단호합니다. 연합군 항공력은 서유럽 전쟁에서 결정적(decisive)이었다는 것입니다. 유럽 요약은 항공력이 적군을 떠받친 경제를 사실상 무너뜨렸다고 적으면서도, 그 붕괴의 효과가 전선에 다 닿기 전에 연합군 지상군이 적을 휩쓸었다는 단서를 붙였습니다.
도시 공격만 떼어 보면 그림이 달라집니다. 1944년 가을 전까지 영국 공군의 도시 공격은 독일 전쟁 생산의 흐름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고, 독일의 전쟁 생산은 전체로 계속 늘었습니다. 공습을 받은 도시의 생산은 한동안 꺾였다가 몇 주 안에 상당히 되살아났습니다. 1944년 가을부터의 지역 공습은 다른 요인이 너무 많아 그 효과만 따로 잴 수 없지만, 의미가 컸던 것은 틀림없다고 보고서는 덧붙입니다.
조사단이 더 무겁게 본 것은 기초 산업이었습니다. 1944년 5월부터 독일의 석유 소비는 생산을 넘었고, 조사단은 수송 공격을 독일 경제를 완전히 흐트러뜨린 결정타라고 불렀습니다. 독일 쪽도 군수 공장이나 도시보다 석유·화학·철강·전력·수송에 대한 공격을 훨씬 더 걱정했습니다. 한편 독일이 핵심 전쟁 산업을 다시 세우고 돌린 속도와 재주는 연합군의 예상을 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조사 결과 독일 사람들의 사기는 공습 속에서 떨어졌고, 무엇보다 전쟁이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경찰국가에서 불만과 드러난 반대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었고, 노동자들은 대체로 계속 일했습니다.
태평양 요약은 한 걸음 더 나간 의견을 냈습니다. 일본의 항복을 여러 원인 가운데 어느 하나에 정확히 돌리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면서도, 원폭이 없었더라도 일본 상공의 제공권이 무조건 항복을 끌어낼 만한 압력을 줄 수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1945년 12월 31일 전에는 확실히, 11월 1일 전에는 아마 일본이 항복했으리라는 것이 조사단의 '의견(opinion)'이었습니다. 원폭도, 소련의 참전도, 침공 계획도 없었다고 가정해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조사단이 모은 응답에서 일본이 이길 수 없다고 믿은 사람은 1944년 12월 10%, 1945년 3월 19%, 6월 46%, 항복 직전 68%로 늘었습니다. 그렇게 믿게 된 사람의 절반 넘게 원폭이 아닌 공습을 주된 까닭으로 꼽았습니다.
IWM 학예사의 설명은 결이 다릅니다. 소이탄 공습이 일본에 큰 피해를 주었는데도 전쟁은 이어졌고, 연합군 기획자들은 무조건 항복을 얻는 유일한 길이 원자폭탄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원폭 투하를 둘러싼 판단은 「맨해튼 계획과 히로시마·나가사키」 글에서 따로 다룹니다.
그 뒤의 평가: 효과를 둘러싼 논쟁
보고서가 나온 뒤에도 논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IWM은 폭격기 마피아가 전쟁 전에 내건 대담한 주장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일이 항공력만으로 패하지는 않았다고 적습니다. 독일 경제에 준 영향은 아직 논쟁 중이지만, 제8공군이 독일 공군에 다시 일어서지 못할 타격을 주는 데 도운 것은 틀림없다는 평가도 함께 둡니다.
영국 폭격기 사령부를 두고는 다시 평가하자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로버트 엘러스(Robert Ehlers)는 『Air Power Review』에 실은 글에서, 1990년대까지는 폭격기 사령부의 공세를 다른 곳에 썼어야 할 자원을 삼킨 비싼 실패로 보는 시각이 거의 모두였다고 적습니다. 엘러스 자신은 그와 달리 폭격기 사령부가 독일 전쟁 경제에 치명적 피해를 주었다고 주장합니다. 도시 공격만 놓고는 결정적이지 않았지만 독일에 심각한 어려움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가 드는 근거 가운데 하나는 방어에 묶인 자원입니다. 그의 글에 따르면 독일 전쟁 생산 전체에서 대공포가 차지한 몫이 1940년 1분기 14%에서 1943년 1분기 29%로 커졌습니다. 독일인의 사기에 대해서는 끝내 꺾이지 않았지만 쉼 없는 폭격이 분명히 떨어뜨렸다고 봅니다.
반대 방향의 비판도 있습니다. IWM이 소개하는 한 견해는 항공력만으로 유럽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신화가 쓸데없는 군인과 민간인의 죽음을 낳았다고 주장합니다. 논쟁이 갈리는 곳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폭격이 독일의 전쟁 수행을 얼마나 흔들었는가, 그리고 그 희생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입니다.
옳았나: 도덕과 책임을 둘러싼 논쟁
효과와 별개로, 민간인이 사는 도시를 겨냥한 일 자체를 두고도 의견이 갈립니다. 드레스덴 공습 몇 주 뒤 대중 사이에 불편한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1945년 3월 28일 처칠(Winston Churchill)은 이즈메이 장군과 공군 참모총장에게 메모를 보냈습니다. 그레이의 글이 옮긴 문장은 이렇습니다. "테러를 늘리려는 목적만으로, 다른 명목을 내세워 독일 도시를 폭격하는 문제를 다시 볼 때가 왔다고 본다."
메모는 "드레스덴의 파괴는 연합군 폭격 수행에 대한 심각한 의문으로 남는다"고도 적었습니다. 해리스는 드레스덴이 군수 공장이 모인 곳이자 온전한 정부 중심지, 동쪽으로 가는 핵심 교통 지점이었다고 반박했습니다. 공군 참모총장 찰스 포털(Charles Portal)이 해리스를 강하게 지지했고, 처칠은 메모를 거두었습니다. 4월 1일에 나온 덜 날 선 새 메모에는 드레스덴이라는 말이 없었습니다.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지도 갈립니다. 리는 해리스만큼 대중과 군, 학계의 의견을 가르는 군인은 드물다고 적습니다. 어떤 이에게 해리스는 히틀러의 제국과 맞선 거대한 싸움의 영웅이고, 다른 이에게는 이긴 편에 섰기에 기소를 피한 전범입니다. 리 자신은 1945년 1월 27일 뒤의 폭격, 특히 드레스덴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처칠에게 가장 크고 폭격기 승무원에게 가장 작다고 봅니다.
처칠의 메모를 다르게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리의 글이 함께 소개하는 올리버 할러(Oliver Haller)는, 전쟁 뒤 복구와 배상에 쓸 산업 시설까지 부수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인도적으로도 말이 안 된다는 판단이 메모의 바탕이었다고 봅니다.
미국 쪽의 사정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제8공군의 정밀폭격 교리는 민간인 희생을 피하려 했지만 정확도가 낮아 부수 피해를 피할 수 없었고, 제8공군은 여러 번 영국 공군과 함께 도시를 지역 폭격했습니다. IWM은 전쟁이 끝난 뒤 미국이 이 도시들 폭격을 둘러싼 대중과 정치의 불편함에서 거리를 둘 수 있었다고 적습니다. 반면 연합군 승리에 크게 이바지하고 승무원 5만 5,000명 넘게 잃은 폭격기 사령부는 오늘까지 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숫자 읽기
희생을 숫자로 적는 일부터 쉽지 않습니다. 독일 민간인 사망만 해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조사단 유럽 요약의 개요에 실린 추정은 민간인 사망 약 30만 명, 부상 78만 명, 집을 잃은 사람 750만 명입니다.
보고서 뒷부분은 독일 공식 통계가 1943년 1월부터 1945년 1월까지의 공습 사망을 25만 253명으로 적었지만 너무 낮다고 보고, 전쟁 전체의 사망을 최소 30만 5,000명으로 다시 추정했습니다. 이 숫자에는 독일 민간인뿐 아니라 외국인과 공격받은 도시의 군인도 들어 있습니다. IWM은 연합군 폭격으로 숨진 독일 민간인을 50만 명 넘게 적습니다.
도시별 숫자도 갈립니다. 도쿄 3월 9~10일 공습의 경우 IWM 기준 사망은 10만 명 가까이, 조사단 기준 첫 공격의 사상자는 약 18만 5,000명입니다. 조사단의 숫자는 숨진 사람과 다친 사람을 합친 것입니다. 일본 전체로는 9개월의 공습(원폭 포함)으로 민간인 사상자 약 80만 6,000명, 그 가운데 사망 약 33만 명이 나왔습니다.
폭격하던 쪽의 희생도 컸습니다. 조사단 집계로 유럽에서 공중 작전 중 잃은 사람은 미국 7만 9,265명, 영국 7만 9,281명이고, 영국 수치는 잠정치입니다. 폭격기 사령부의 희생은 IWM 기준 승무원 사망 5만 5,000명 넘게, 그레이 글 기준 사망·실종 5만 명입니다. 제8공군의 사망자는 IWM 기준 2만 6,000명입니다.
폭탄의 양도 세는 범위에 따라 다릅니다. 영국과 미국이 독일의 도시·공장·군사 표적에 떨어뜨린 폭탄은 IWM 기준 140만 톤 넘게, 유럽 전쟁에서 연합군 항공력이 떨어뜨린 폭탄 전체는 조사단 기준 270만 톤 가까이입니다. 숫자가 서로 다르다고 희생이 작아지지는 않습니다. 어느 자료를 보든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남긴 것
전쟁이 끝나고 30여 년 뒤, 국제 규칙이 이 문제를 직접 다뤘습니다. 1977년 6월 8일의 제네바 협약 제1추가의정서 제51조는 민간인 주민과 개별 민간인을 공격 대상으로 삼지 못하게 하고, 민간인 사이에 공포를 퍼뜨리는 것을 주목적으로 한 폭력이나 위협을 금지합니다. 도시처럼 민간인이 모인 곳에서 뚜렷이 떨어진 여러 군사 목표를 하나로 묶어 폭격하는 것도 무차별 공격에 들어갑니다. 2차 대전 때는 없던 조항입니다.
정밀함을 둘러싼 물음도 남았습니다. 조사단은 독일의 경험이 공습 표적을 신중하게 고르는 일이 중요함을 보여 준다고 적었습니다. 폭탄을 겨냥한 곳에 떨어뜨리는 문제가 그 뒤 정밀유도무기(precision-guided munition, PGM)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정밀유도폭탄」 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도시 폭격이 전쟁을 끝냈느냐는 물음에 공개 기록은 한 줄로 답하지 않습니다. 조사단은 항공력을 결정적이라 불렀지만 1944년 가을 전의 도시 공격은 생산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적었습니다. 그 뒤의 연구자들은 효과와 도덕을 두고 지금도 서로 다른 결론을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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