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1월 9일, 갈리폴리 반도 끝의 헬레스 곶(Cape Helles)에서 마지막 영국군이 배에 올랐습니다. 그들이 떠난 랭커셔 상륙지(Lancashire Landing)는 1915년 4월 25일 영국군이 처음 오른 W 해안이었습니다. 그사이 8개월 동안 연합군은 반도의 발 디딜 자리만 겨우 지켰고, 앞으로는 거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 전역은 원래 상륙 작전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계획은 전함만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뚫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해군 작전이 왜 상륙으로 바뀌었고, 상륙한 군대가 왜 그 자리에 묶였는지 따라갑니다. 기뢰와 숨은 곡사포, 질병과 보급 같은 그 시대의 조건, 자료마다 다른 사상자 숫자, 튀르키예와 호주·뉴질랜드에 남은 서로 다른 기억도 함께 봅니다.

왜 다르다넬스 해협이었나

다르다넬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좁은 물길로, 길이가 60마일쯤 됩니다. 해협을 지나면 마르마라해로 들어가고, 연합국은 그 너머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지금의 이스탄불)를 노렸습니다. 1914년 10월 말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으로 전쟁에 들어간 것도 결국 이 해협이 닫힌 일에서 비롯됐습니다.

그보다 앞서 1914년 8월 2일 오스만 제국과 독일은 러시아에 맞선 동맹을 맺었습니다. 오스만은 영국·프랑스와는 다툼이 없었고, 러시아를 오랜 적으로 봤습니다.

1914년 말 서부 전선의 움직임은 멈춰 있었습니다. 연합국의 일부 지도자는 다른 곳에 새 전선을 열어 교착을 깨자고 했습니다. 해군장관 처칠(Winston Churchill)을 비롯한 영국의 많은 이는 오스만을 전쟁에서 빼내면 독일이 약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러시아를 돕고, 수에즈 운하와 중동의 석유 이익을 지키고, 망설이던 불가리아·그리스 같은 발칸 나라를 연합국 편으로 끌어올 수 있다고 봤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은 이 구상이 오스만이 약해서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 기대고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호주와 뉴질랜드 병사들도 이 계획에 들어갔습니다. 1914년 8월 뽑힌 호주 제국군 대부분은 수에즈 운하를 지키려 이집트로 갔고, 카이로 근처에서 4개월 반 동안 훈련했습니다. 그 뒤 뉴질랜드·영국·프랑스 군과 함께 다르다넬스를 뚫으려는 영국 해군 작전을 도우러 갈리폴리로 떠났습니다.

경고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IWM의 영상 해설에 따르면 영국 제국방위위원회는 1906년 이 작전을 검토했고, 요새와 기뢰밭 때문에 매우 위험하다고 보아 1907년까지 실행할 수 없는 안으로 정했습니다. 1915년에는 이 검토가 잊혀 있었습니다.

1915년 2월부터 1916년 1월까지 한 장의 연표

갈리폴리 전역 연표 도표. 위쪽 막대는 1915년 2월부터 1916년 1월까지를 달 단위 비율로 그렸고, 해군 작전(2월 19일~3월 18일), 상륙과 교착(4월 25일~8월 6일 전), 8월 공세, 교착과 철수 결정, 철수(12월~1916년 1월 9일)로 나뉜다. 번호 표시가 아래 목록과 맞는다. 1914년 8월 2일 오스만-독일 동맹, 1914년 10월 말 오스만 참전, 1914년 11월 첫 포격, 1915년 2월 19일 바깥 요새 포격, 3월 18일 해전, 4월 25일 헬레스·안작 상륙과 쿰 칼레 견제, 같은 날 잠수함 AE2 해협 진입(4월 30일 침몰), 5월 19일 오스만 공격과 며칠 뒤 짧은 휴전, 8월 6일 공세와 수블라 상륙·론 파인, 10월 해밀턴 교체와 불가리아 참전, 11월 철수 결정, 12월 안작·수블라 철수(IWM 영상 해설 18~19일, AWM 19~20일), 1916년 1월 9일 헬레스에서 마지막 철수
갈리폴리 전역 연표. 위 막대는 달 단위 비율대로 그렸습니다 (도표)(도표)

해군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일찍 시작됐습니다. 정식 선전 포고도 나오기 전인 1914년 11월에 첫 포격이 있었고, 이 포격은 오히려 오스만에 공격 자리를 알려 준 셈이 됐습니다. 본격적인 공격은 1915년 2월 19일 영국·프랑스 전함이 해협 입구의 바깥 요새를 포격하면서 시작됐습니다.

3월 18일 해전에서 연합국 함대는 크게 물러섰고, 4월 25일 육군이 반도에 올랐습니다. 8월 6일에는 새 공세가 시작됐지만 이것도 막혔습니다. 철수는 12월 안작(Anzac)과 수블라(Suvla)에서 시작해 1916년 1월 헬레스에서 끝났습니다.

3월 18일: 함대만으로 해협을 뚫으려던 날

함대는 주로 드레드노트 이전에 지은 구식 전함으로 꾸려졌고, 최신 드레드노트 퀸 엘리자베스(HMS Queen Elizabeth)와 순양전함 인플렉서블(HMS Inflexible)이 더해졌습니다. 전함 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IWM의 영상 해설은 구식 전함을 영국 9척과 프랑스 4척으로 세고, 호주 상원 보고서는 3월 18일 좁은 곳의 요새를 공격한 연합국 전함을 17척으로 적습니다.

기뢰밭을 치우는 일은 민간 저인망 어선 35척이 맡았습니다. 배에는 이런 일을 해 본 적 없는 민간 선원이 탔습니다.

해협 방어를 단순하게 그린 도표. 위쪽은 실제 지도가 아니라 네모와 선으로 그린 그림이다. 왼쪽 에게해에서 오른쪽 마르마라해로 이어지는 좁은 물길이 있고, 입구와 가장 좁은 곳에 고정 요새, 그 사이 물길을 가로지르는 기뢰선 여러 줄, 물길 양쪽 언덕 뒤에 숨은 이동식 곡사포가 있다. 밤에 새 기뢰를 까는 배 누스레트, 기뢰를 치우는 민간 저인망 어선 35척, 들어오는 전함 줄이 표시돼 있다. 아래쪽은 탄도 비교 그림이다. 함포는 평평한 직선에 가깝게 날아가 언덕에 막히고, 곡사포는 포탄을 높이 올려 호를 그리며 언덕 뒤로 떨어뜨린다. 영국 전쟁박물관 영상 해설의 설명을 따른 그림이라는 메모가 있다
해협은 어떻게 지켜졌나: 요새, 기뢰선, 숨은 곡사포를 단순하게 그린 그림 (도표)(도표)

맞은편의 방어는 몇 겹이었습니다. 해협 입구와 가장 좁은 곳에 고정 요새가 있었고, 그 사이 물길에 기뢰밭이 여러 줄 깔려 있었습니다. 누스레트(Nusret)라는 배는 밤에 나와 새 기뢰를 깔 수 있었습니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이동식 곡사포였습니다. 숨은 자리에서 배를 쏘고는 다른 자리로 옮겨 갔습니다.

그날 함대가 들어서자 요새는 함포 사격에 잠잠해졌습니다. 그러나 소해선이 앞으로 나가자 곡사포의 사격이 쏟아졌고, 민간 선원이 탄 어선들은 물러났습니다. 전함들이 대신 나아갔습니다.

프랑스 전함 골루아(Gaulois)가 크게 맞아 빠졌고, 부베(Bouvet)는 폭발해 2분 만에 가라앉았습니다. 부베의 승조원 약 700명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10%쯤이었습니다.

곧 영국 전함 두 척이 기뢰에 맞아 뒤에 가라앉았고, 인플렉서블도 크게 부서졌습니다. 함대는 물러났습니다. 상원 보고서는 이날 오션(Ocean)·이레지스터블(Irresistible)·부베를 잃고 골루아·쉬프랑(Suffren)·인플렉서블이 좌초하거나 포격을 맞았으며, 영국·프랑스 수병 700명이 죽고 튀르키예 쪽은 병사 40명을 잃었다고 적습니다.

하루 사이에 전함의 3분의 1이 가라앉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된 셈입니다. 새 계획이 나왔습니다. 이언 해밀턴(Ian Hamilton)이 이끄는 육군이 반도를 차지해 해안의 포대를 없애고, 그다음 해군이 해협을 지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4월 25일 상륙: 헬레스와 안작

상륙군은 지중해 원정군(Mediterranean Expeditionary Force)이었습니다. 영국 29사단, 호주·뉴질랜드 군단(Australian and New Zealand Army Corps, ANZAC), 영국 해군사단, 국방 의용군 부대, 인도군 소수에 프랑스 1개 사단이 더해졌습니다. 규모는 IWM의 영상 해설에서 약 7만 명, 호주 상원 보고서에서 7만 5,000명입니다. 이들 모두 실전 경험이 없었습니다.

계획은 두 갈래였습니다. 29사단은 반도 끝 헬레스 곶의 다섯 해안에, 안작은 서쪽 해안 가바 테페(Gaba Tepe) 근처의 해안 한 곳에 오르기로 했습니다. 프랑스군은 해협 건너 아시아 쪽 쿰 칼레(Kum Kale)에 견제 상륙을 하고, 안작은 반도를 가로질러 헬레스로 오는 증원을 끊을 참이었습니다.

맞은편에는 오스만 제5군이 있었습니다. 지휘관은 앞서 튀르키예군 현대화를 맡았던 독일 장군 리만 폰 잔더스(Liman von Sanders)였고, 사단급에는 독일 장교와 함께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같은 튀르키예 지휘관이 있었습니다. 해안에는 얇은 선만 두고 중앙의 예비대로 반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가 썼다고 전하는 지도가 호주 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AWM)에 남아 있는데, 이 지도에는 주력이 반도 끝, 북쪽의 좁은 목 볼라이르(Bulair), 해협 아시아 쪽에 있고, 안작이 오른 아리 부르누(Ari Burnu)는 얇게 지켜졌습니다.

헬레스에서는 해안마다 사정이 달랐습니다. S·X·Y 해안은 저항이 거의 없었지만 안쪽으로 나아가지 못해 시간을 잃었습니다. 두 주 상륙지인 V·W 해안에서는 튀르키예 보병 2개 중대가 두꺼운 철조망과 절벽 위의 사격으로 막아서 사상이 매우 컸습니다.

V 해안에서는 석탄 운반선을 고친 리버 클라이드(River Clyde)를 일부러 얕은 곳에 올려 병사들을 내렸습니다. 그날 성공한 것은 쿰 칼레의 프랑스 견제 공격뿐이었습니다.

안작 쪽은 어둠 속에서 보트가 엉뚱한 자리에 닿았습니다. 계획보다 1마일쯤 북쪽이었고, 넓은 평지 대신 가파른 절벽과 골짜기가 앞을 막았습니다. 엄호를 맡은 호주 3여단은 4,000명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첫 능선을 올랐지만 케말이 짠 오스만의 반격에 막혀 높은 곳을 차지하지 못했고, 철수 대신 "파고들어 버티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첫날의 사상은 누구도 정확히 모릅니다. AWM은 호주인 사망자를 아마 650명, 부상을 합친 사상자를 약 2,000명으로 봅니다. 의료 지원은 그날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서도 공식으로 인정된 사망은 350명뿐이었고, 호주 대중은 상륙의 "성공"만 들었습니다.

교착은 곧 굳어졌습니다. 5월 19일 오스만군의 큰 공격에서 사상은 오스만 쪽이 1만 명에 이르렀고 호주·뉴질랜드 쪽은 600명쯤이었습니다. 며칠 뒤 양쪽은 죽은 이를 묻으려고 짧은 휴전을 했습니다. 어느 쪽도 상대를 밀어내지 못했습니다.

8월 공세와 조용한 철수

7월 해밀턴은 새 6개 사단을 받았고, 반도 위쪽 수블라만에 세 번째 상륙을 하기로 했습니다. 8월 6일 공세가 시작됐습니다. 안작 쪽에서는 호주군이 론 파인(Lone Pine)을 차지했고, 네크(the Nek)에서는 경기병이 뚫을 수 없는 방어로 돌격했습니다. 뉴질랜드군은 추누크 바이르(Chunuk Bair) 언덕을 이틀 지켰지만 큰 반격에 밀려났습니다.

공세가 막힌 데에는 두 가지 사정이 있었습니다. 밤에 공격하던 부대가 미로 같은 골짜기에서 길을 잃었고, 수블라에서는 포병 지원을 기다리는 사이 오스만 증원이 높은 곳을 먼저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달의 공격은 땅을 거의 얻지 못했습니다.

10월에 해밀턴이 물러나고 찰스 먼로 장군이 왔습니다. 먼로는 반도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같은 달 불가리아가 동맹국 편으로 참전하면서 독일은 튀르키예까지 곧장 가는 철도를 얻었고, 중포를 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11월 키치너(Kitchener)가 현지를 다녀간 뒤 철수가 정해졌습니다.

철수는 들키지 않아야 했습니다. 연합군은 총을 한 발도 쏘지 않는 밤을 미리 여러 번 두어, 상대가 조용함에 익숙해지게 했습니다. 빈 상자를 해안에 내리고, 부대를 해안에서 돌려 걷게 하고, 빈 막사에 불을 켜 두었습니다. 위 깡통의 물이 아래 깡통으로 떨어져 무게가 차면 방아쇠가 당겨지는 자동 사격 소총도 이때 쓰였습니다.

안작과 수블라에서는 병사 8만 3,000명, 포 186문, 말과 노새 4,600마리가 빠져나갔습니다. 날짜는 IWM의 영상 해설에서 12월 18~19일, AWM 백과에서 12월 19~20일로 하루 어긋납니다. 1월에는 같은 방법으로 헬레스에서도 빠져나왔고, 1월 9일 마지막 부대가 떠났습니다. 이 철수는 전역에서 가장 잘 풀린 작전이었습니다.

기뢰, 곡사포, 잠수함, 그리고 파리: 그 시대의 조건

3월 18일의 큰 손실은 기뢰에서 나왔습니다. 기뢰를 치우려면 소해선이 들어가야 하고, 소해선을 지키려면 숨은 포를 없애야 했습니다. 그런데 함포는 거의 평평한 직선으로 날아갑니다. 협곡이나 언덕 뒤에 숨은 포를 맞히려면 포탄을 높이 올려 호를 그리며 떨어뜨리는 포가 필요합니다.

물속에서도 시도가 있었습니다. 호주 잠수함 AE2는 4월 25일 상륙 때 해협에 들어가 적 선박을 공격하고 작은 견제를 맡았습니다.

바닥에 부딪히고 좌초하고 기뢰 줄을 여러 번 긁으면서도 튀르키예 배 한 척에 어뢰를 쐈고, 이튿날 아침 마르마라해에 닿았습니다. 4월 30일 어뢰정의 공격을 받아 조종을 잃자 승조원들은 배를 스스로 가라앉혔습니다. 포로가 된 승조원 가운데 4명이 포로 생활 중 죽었습니다.

땅 위에서는 보급이 늘 모자랐습니다. 갈리폴리는 영국군 대부분이 있는 서부 전선 다음 순서였습니다. 도착한 물자는 튀르키예 포의 사거리 안에 쌓였고, 쌓을 자리도 좁았습니다.

무엇보다 튀르키예 진지를 크게 부술 만한 포와 고폭탄이 늘 모자랐습니다. 갈리폴리의 교착은 군수(logistics)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영국군 사상의 대부분은 싸움이 아니라 병 때문이었습니다. 거친 날씨, 깨끗한 물의 부족, 파리 떼, 험한 땅이 겹쳤습니다. 안작 쪽은 오물을 버리거나 죽은 이를 묻을 자리조차 없었고, 여름의 파리가 시신과 쓰레기와 음식 사이를 오가며 이질을 퍼뜨렸습니다. IWM은 영국군 사상 21만 3,000명 가운데 14만 5,000명이 병 때문이었다고 셉니다.

숫자와 기억: 같은 전역을 보는 여러 눈

자료별 숫자 비교 도표. 맨 위는 나라별 사망자 막대로, 호주 전쟁기념관(AWM) 학교 자료 표의 값(오스만 제국 86,700, 영국 26,054, 프랑스 9,787, 호주 8,709, 뉴질랜드 2,721, 인도 1,358, 뉴펀들랜드 49)과 호주 상원 보고서에 실린 증언의 값(튀르키예 87,000, 영국 22,000, 프랑스 10,000, 호주 8,700, 뉴질랜드 2,700)을 나란히 그렸다. 같은 막대 비율이다. 그 아래 사망자의 다른 값: AWM 순회 전시 대영제국·프랑스 44,000과 튀르키예 적어도 85,000, AWM 백과 호주 8,141(사상 26,111). 전체 사상: IWM 개요 50만 명 넘음, AWM 학교 자료 50만 명에 이를 수도, 상원 보고서 약 45만 명 사상, IWM 영상 해설 연합군 115,000과 오스만 186,000, IWM 영국군 사상 213,000 가운데 병 145,000. 맨 아래 작은 표: 3월 18일 전함 수(IWM 영상 해설 영국 9척·프랑스 4척 구식 전함과 최신함 2척, 상원 보고서 17척), 원정군 규모(IWM 영상 해설 약 70,000, 상원 보고서 75,000), 안작·수블라 철수(IWM 영상 해설 12월 18~19일, AWM 백과 12월 19~20일)
같은 전역, 다른 숫자. 박물관과 의회 자료의 값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갈리폴리의 사상자 수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AWM 학교 자료의 표는 사망자를 오스만 제국 8만 6,700명, 영국 2만 6,054명, 프랑스 9,787명, 호주 8,709명, 뉴질랜드 2,721명, 인도 1,358명, 뉴펀들랜드 49명으로 적습니다. 호주 상원 위원회에 나온 증언은 튀르키예 8만 7,000명, 영국 2만 2,000명, 프랑스 1만 명, 호주 8,700명, 뉴질랜드 2,700명쯤이라고 했고, 튀르키예의 공식 사망자는 8만 7,000명이지만 더 많을 수 있다는 증언도 있었습니다.

같은 AWM 안에서도 값이 갈립니다. 백과는 호주 사상자를 2만 6,111명, 그 가운데 사망을 8,141명으로 적고, 순회 전시 소개는 대영제국·프랑스군 사망 4만 4,000명과 튀르키예 병사 사망 적어도 8만 5,000명을 적습니다. 다친 이와 아픈 이까지 합친 전체 사상은 IWM 개요에서 50만 명이 넘고, AWM 학교 자료에서 50만 명에 이를 수도 있으며, 상원 보고서에서 약 45만 명입니다. IWM 영상 해설은 연합군 11만 5,000명, 오스만 18만 6,000명이라는 다른 셈을 씁니다.

숫자 뒤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원 보고서는 쓰러진 연합군의 3분의 1쯤이 무덤을 찾지 못한 것으로 추정되고 튀르키예군은 그 비율이 훨씬 높으며, 호주인 4,200명은 끝내 찾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튀르키예에서 이 전역은 "차낙칼레 전투(Çanakkale Savaşı)"입니다. 튀르키예가 1차 대전의 다섯 전역에서 거둔 유일한 승리였고, 갈리폴리에서 19사단을 지휘한 케말은 뒤에 튀르키예 공화국의 첫 대통령이 됐습니다. AWM의 전시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크게 기린 날이 영국 해군을 물리친 3월 18일, 곧 "승리의 날"이었다고 적습니다. 그곳에서 죽은 보통 병사들은 "순교자"로 불리고, 옛 전장에는 높이 40 m의 차낙칼레 순교자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전장은 지금 국립공원입니다. 1973년 튀르키예 정부는 반도 남쪽 끝 33,000 ha를 국립공원으로 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전쟁 뒤 이곳에는 영연방 전쟁 묘지와 기념물이 30곳 넘게 세워졌고, 75주년에는 안작 코브(ANZAC Cove)가 튀르키예의 지명이 됐습니다. 오늘날 옛 전장을 찾는 사람은 튀르키예인이 더 많습니다.

호주와 뉴질랜드에서는 해마다 4월 25일을 안작 데이(Anzac Day)로 지킵니다. AWM은 상륙 이야기가 낳은 안작 전설이 그 뒤 넓어지고 꾸며지고 굳어졌으며 때로 도전받았다고 적습니다. AWM 백과에는 갈리폴리가 전쟁의 흐름에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는 문장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정치가 흔들렸습니다. IWM의 영상 해설은 1915년의 포탄 부족 위기와 함께 갈리폴리 실패가 영국 정부를 무너뜨려 애스퀴스(Henry Asquith) 총리의 자유당이 보수당과 연립하게 됐고, 처칠은 이 일로 자리를 잃었다고 설명합니다.

1917년 3월 20일 하원에서 애스퀴스는 막 공개된 다르다넬스 위원회 보고서를 두고 발언했습니다. 보고서는 여러 정치인과 해군·육군 인물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다뤘지만, 증언 원문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공개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IWM 영상 해설은 실패한 상륙에서 얻은 교훈이 2차 대전의 횃불·허스키·오버로드 작전에 쓰였다는 해석도 내놓습니다.

IWM은 이 전역을 1차 대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일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한쪽에는 나라를 지킨 승리의 기억이, 다른 쪽에는 젊은 나라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대한 물음이 함께 남았습니다. 연합국이 기대한 해협은 끝내 열리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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