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5월 31일 오후 2시 28분, 덴마크 유틀란트 앞 북해에서 영국 경순양함 갈라테아(Galatea)가 첫 포를 쐈습니다. 이틀에 걸친 이 싸움에는 양쪽 합쳐 배 250척과 약 10만 명이 얽혔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은 이 싸움을 1차 대전에서 가장 큰 해전이라고 부릅니다.
유틀란트 해전(Battle of Jutland)은 영국과 독일의 드레드노트 전함 함대가 실제로 맞붙은 단 한 번의 싸움이었습니다. 영국은 더 많은 배와 사람을 잃었는데, 독일 함대는 그 뒤 다시는 북해에서 영국에 진지하게 도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긴 것일까요? 이틀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차례로 보겠습니다.
건함 경쟁과 봉쇄의 바다
1차 대전이 터지기 전, 영국과 독일은 군함을 더 많이 짓는 경쟁을 벌였습니다. 1906년 영국은 포 10문과 증기 터빈, 두꺼운 장갑을 갖춘 새 전함 드레드노트(Dreadnought)를 진수했습니다. IWM 학예사의 설명에 따르면 이 배 때문에 출발선이 같아져, 두 나라 모두 함대를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해군은 북해를 지키며 독일 항구로 가는 배를 막고 원자재와 식량을 압수했습니다. 독일은 영국으로 가는 배를 노려 맞섰습니다. 1914년 독일 대양함대(High Seas Fleet)는 북해에 면한 영국 도시 그레이트야머스, 스카버러, 하틀풀을 습격했고, 이 일은 1915년 1월 도거 뱅크(Dogger Bank) 해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도 1916년까지 두 해군의 주력끼리 크게 부딪친 적은 없었습니다. 영국 대함대(Grand Fleet)는 스코틀랜드 북쪽 오크니 제도의 스캐파 플로(Scapa Flow)에, 독일 대양함대는 자기 항구에 머물렀습니다.
셰어의 덫과 해독된 암호
1916년 초 독일 대양함대의 지휘를 라인하르트 셰어(Reinhard Scheer) 제독이 맡았습니다. 영국 함대는 수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셰어는 영국 함대를 나눠 그 일부만 없애려 했습니다. 노린 것은 로사이스(Rosyth)에 있던 데이비드 비티(David Beatty) 중장의 순양전함 함대였습니다.
계획은 이렇습니다. 프란츠 히퍼(Franz Hipper) 중장의 순양전함 정찰 부대가 먼저 나가 비티의 배를 끌어냅니다. 두 순양전함 부대가 싸우는 동안 셰어의 본대가 다가와, 존 젤리코(John Jellicoe) 제독의 대함대가 오기 전에 비티를 없앤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 함대가 노린 것은 영국의 북해 봉쇄를 깨고 독일 상선이 다시 바다로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국에는 숨은 패가 있었습니다. 1914년 8월 26일 독일 경순양함 마그데부르크(Magdeburg)가 핀란드만 어귀에서 좌초했고, 독일 암호책 사본 셋이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런던으로 전해졌고, 11월까지 영국은 독일 해군의 전문을 푸는 법을 알아냈습니다.
1916년 5월 30일 초저녁, 영국 해군성은 독일 함대가 이튿날 아침 출항한다는 정보를 받고 젤리코와 비티에게 출항을 명령했습니다. 밤 10시 30분 대함대가 스캐파 플로를 떠났고, 비티의 함대도 곧이어 로사이스를 떠났습니다. 히퍼의 순양전함은 31일 새벽 1시에, 셰어의 본대는 2시에 바다로 나섰습니다. 덫을 놓으러 나간 쪽보다 덫을 알고 나간 쪽이 먼저 움직인 셈입니다.
5월 31일 오후: 남쪽으로, 다시 북쪽으로
첫 만남은 우연이었습니다. 오후 2시 독일 경순양함 엘빙(Elbing)이 덴마크 기선 한 척을 보고 구축함(destroyer) 둘을 보냈고, 같은 배를 살피던 비티의 경순양함 갈라테아가 2시 28분 첫 포를 쐈습니다. 날씨는 독일 쪽에 유리했습니다. 독일 배는 짙은 안개와 구름에 가렸고, 영국 배는 밝은 하늘을 등져 또렷이 보였습니다.
오후 3시 45분 '남쪽으로 달리기(Run to the South)'가 시작됐습니다. 히퍼는 비티를 셰어의 본대 쪽으로 끌어가려고 남동쪽으로 돌았고, 3시 48분 두 순양전함 부대가 포문을 열었습니다. 4시 무렵 히퍼의 기함 뤼초(Lützow)의 포탄이 비티의 기함 라이언(Lion)의 Q 포탑을 부쉈습니다. 몇 분 뒤 인디파티게이블(Indefatigable)이 폰 데어 탄(Von der Tann)의 포탄에 맞아 폭발하며 가라앉았고, 1,000명 넘게 숨졌습니다.
4시 26분에는 퀸 메리(Queen Mary)가 직격을 받아 탄약고가 터지며 두 동강 났고, 1,200명 넘게 숨졌습니다. 비티는 이때 기함 함장에게 "오늘 우리 배들은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4시 33분 상황이 뒤집힙니다. 비티 함대 남쪽 끝의 윌리엄 굿이너프(William Goodenough) 준장이 이끄는 경순양함 전대가 셰어의 본대를 발견했습니다. 4시 40분 비티는 북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번에는 비티가 독일 함대를 젤리코의 대함대 쪽으로 끌고 가는 '북쪽으로 달리기(Run to the North)'였습니다.
신호 혼선 탓에 비티 휘하의 제5전함전대는 14분 동안 독일 함대 쪽으로 더 갔습니다. 돌아선 뒤에는 순양전함 함대의 뒤를 막았고, 네 척 가운데 세 척이 크게 부서졌지만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저녁: 함대가 마주치다
대함대보다 앞서 보낸 순양전함 부대의 경순양함 체스터(Chester)는 독일 경순양함 넷의 포화를 받았습니다. 이 배의 포 하나를 맡았던 소년병 잭 콘월(Jack Cornwell)은 크게 다치고도 자리를 지켰고, 6월 2일 그림즈비의 병원에서 숨졌습니다. 16살이었습니다. 그는 죽은 뒤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았고, 이 훈장을 받은 사람 가운데 가장 어렸습니다.
오후 6시 15분 젤리코는 함대를 펼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전함들은 4척씩 6줄로 달리던 순항 대형에서 몇 마일 길이의 한 줄로 바뀌었고, 이 복잡한 움직임에서 충돌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목표는 'T자 긋기(crossing the T)'였습니다. 다가오는 적 함대의 앞머리를 가로질러 지나가면, 가로지르는 쪽은 포 대부분을 한쪽 옆으로 쏠 수 있고 적은 앞선 배의 앞쪽 포로만 응사할 수 있습니다.
6시 30분 영국 함대가 처음으로 독일 함대의 T를 그었습니다. 그 직후 영국 순양전함 인빈시블(Invincible)이 폭발해 두 동강 났습니다. 호러스 후드(Horace Hood) 소장을 비롯해 1,000명 넘게 숨졌고 살아남은 사람은 6명이었습니다. 영연방 전쟁묘지위원회(Commonwealth War Graves Commission, CWGC)에 따르면 조금 앞선 6시 20분에는 순양함 디펜스(Defence)가 폭발해 승조원 904명이 모두 숨졌습니다.
셰어는 함대가 통째로 무너질 것을 걱정해 6시 35분 함대 전체를 반대쪽으로 돌렸습니다. 독일어로는 '전투 반전(Gefechtskehrtwendung)'이라 부르는 움직임입니다. 나쁜 시정 속에서 독일 함대는 4분 만에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6시 55분 셰어는 다시 돌아섰고, 7시 10분 젤리코가 두 번째로 T를 그었습니다.
7시 13분 셰어는 이미 크게 부서진 순양전함들에게 대함대를 향해 돌격하라고 명령했고, 곧 세 번째로 함대를 돌렸습니다. 이어 구축함들이 한꺼번에 어뢰를 쏘며 물러나는 본대를 가렸습니다. 7시 22분 젤리코는 어뢰를 피해 방향을 틀었습니다. 다시 쫓기 시작했을 때 독일 함대는 이미 보이지 않았고 포가 닿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밤과 귀항
날이 저물자 젤리코는 밤 전투를 피하려 했습니다. 독일 해군이 밤 전투 경험이 더 많고 장비도 낫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The National Archives, TNA)의 교육 자료는 영국 함대가 적의 잠수함과 기뢰밭을 걱정해 뒤쫓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젤리코는 '밤에 싸울 뜻 없음'이라는 신호를 냈지만, 대부분의 수병은 밤새 전투 위치를 지켰습니다.
셰어는 가장 짧은 길로 집에 가려 했고, 두 함대의 길은 밤사이 엇갈렸습니다. 작은 배들끼리 짧고 거친 전투가 여러 번 벌어졌지만, 그 소식은 젤리코에게 닿지 않았습니다. 6월 1일 0시 20분, 자기 전대와 떨어진 영국 장갑순양함 블랙 프린스(Black Prince)가 독일 전함 대열로 잘못 들어갔다가 포격을 받고 가라앉았습니다. 900명 전원이 숨졌습니다.
독일 쪽도 배를 잃었습니다. 크게 부서진 뤼초는 독일 해군이 스스로 가라앉혔습니다. 새벽 2시부터 2시 15분 사이의 마지막 야간 전투에서는 드레드노트 이전 세대의 구식 전함 포메른(Pommern)이 어뢰에 맞아 승조원 전원과 함께 가라앉았습니다.
오전 11시 젤리코는 대함대를 스캐파 플로 쪽으로 돌렸습니다. 퀸 메리와 인디파티게이블을 잃었다는 사실은 가라앉은 지 17시간이 지나서야 비티의 연락으로 젤리코에게 전해졌습니다. 독일 대양함대 대부분은 6월 1일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에 독일 항구에 닿았습니다.
전함, 순양전함, 구축함: 그 바다의 배들
이 해전에는 영국 군함 151척과 독일 군함 99척이 나왔습니다. 배의 종류마다 맡은 일이 달랐습니다. 하나씩 보면 이렇습니다.
전함(battleship)은 가장 무거운 포와 가장 두꺼운 장갑을 가진 배였습니다. 포격에는 잘 견디지만 크고 비교적 느려서 작은 배의 어뢰에 약했습니다. 영국은 전함 28척을 냈고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순양전함(battlecruiser)은 새로운 설계였습니다. 장갑을 덜어 내는 대신 빠른 속도와 무거운 포를 택한 배입니다. 느린 배를 쫓아가 잡고, 전함의 큰 포가 닿지 않는 거리에 머물 수 있게 하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영국은 9척을 냈고 그 가운데 3척이 가라앉아 3,320명이 숨졌습니다. 영국 전사자의 절반이 넘는 숫자입니다.
순양함(cruiser)은 앞에서 정찰하고, 전함을 구축함의 어뢰 공격에서 지켰습니다. 영국 순양함은 34척이 싸워 3척이 가라앉았습니다.
구축함은 가장 빠른 군함이었지만 장갑이 없어 포격에 약했고, 대신 큰 배도 가라앉힐 수 있는 어뢰를 실었습니다. 영국 구축함은 79척 가운데 8척이 가라앉았습니다. 가라앉은 구축함 넷에서 173명이 독일 해군에 구조돼 포로가 됐습니다.
하늘의 몫은 아주 작았습니다. 수상기 모함 엥가딘(Engadine)에서 뜬 수상기 한 대가 30분 남짓 날며 독일 배를 찾아 알린 것이 이 해전에서 항공기가 한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국 순양전함 셋은 왜 그렇게 한꺼번에 터졌을까요? 6월 2일 대함대 사령관이 해군성에 보낸 전보는 인디파티게이블이 탄약고에서 터진 포탄으로, 퀸 메리는 "아마 같은 까닭으로" 가라앉았고, 인빈시블은 탄약고의 포탄이나 기뢰나 어뢰로 폭발했다고 적었습니다. 나중의 해군 내부 보고는 세 배가 큰 타격을 받기 전에 터졌다는 점에서 불길이 포탑 탄약고에 닿았다고 추론했습니다. 그리고 장약을 포까지 나르는 방식에 잘못이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의견"이라고 적었습니다.
같은 위험을 막아 낸 배도 있었습니다. 라이언의 Q 포탑에 불이 났을 때, 크게 다친 해병대 프랜시스 하비(Francis Harvey) 소령이 탄약고에 물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라이언은 살아 돌아왔지만, 이 배에서만 99명이 숨졌습니다. 살아 돌아온 영국 배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입니다.
숫자 읽기와 누가 이겼나
숫자부터 보면 영국의 손실이 컸습니다. IWM은 영국 14척, 독일 11척을 잃었고 영국 약 6,000명, 독일 약 2,500명이 숨졌다고 적습니다. 전사자 수는 자료마다 조금 다릅니다. TNA 교육 자료는 영국 6,077명과 독일 2,551명, CWGC는 영국 6,097명과 독일 2,551명이라고 적었습니다.
양쪽 모두 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TNA 교육 자료에 따르면 독일은 더 많은 배를 가라앉혔다고 했고, 영국은 셰어가 먼저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났다고 했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는 독일 해군이 더 큰 영국 함대에 입힌 피해를 근거로 승리를 주장했지만, 전략으로는 영국의 성공이었다고 정리합니다. 독일 대양함대가 북해에 묶여 영국의 해상 우위가 전쟁 끝까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CWGC는 역사가들이 지금도 누가 이겼는지 논쟁한다고 적고, 독일의 전술적 승리이자 영국의 전략적 승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고 소개합니다. IWM은 양쪽이 바란 결정적 승리는 없었다고 봅니다. 다만 영국은 다음 날 다시 싸울 준비가 됐고, 독일은 완전한 파괴는 피했지만 다시는 영국의 북해 지배에 진지하게 도전하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지휘관을 보는 눈도 갈립니다. IWM은 젤리코가 너무 신중했고 더 공격적으로 나섰어야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적습니다. 반대로 그를 변호하는 쪽은 함대를 잃을 위험이 컸다는 점을 듭니다. 처칠은 젤리코를 "오후 한나절에 전쟁을 질 수 있는 양쪽의 유일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남긴 것
IWM은 이 해전이 영국의 해상 우위와 항로 통제를 굳혀 해상 봉쇄를 이어 가게 했고, 그 봉쇄가 1918년 독일의 패배에 이바지했다고 설명합니다. 셰어는 카이저 빌헬름 2세에게 낸 보고에서 무제한 잠수함전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TNA 교육 자료는 대양함대가 남은 전쟁 동안 항구에 머물며 잠수함(U-boat)에 기댔고, 영국은 결국 호송 선단으로 그 위협을 이겨 냈다고 적습니다.
두 영국 지휘관의 길도 바뀌었습니다. 젤리코는 1916년 11월 제1해군경이 돼 다시는 바다의 작전에 나서지 않았고, 비티가 대함대 지휘를 이어받았습니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도 이 해전은 깊이 연구됐습니다. NHHC에 따르면 미국은 1917년 4월에야 참전했지만, 유틀란트는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의 미 해군대학(U.S. Naval War College)에서 집중 연구 대상이 됐고 그 경험이 워게임 규칙에 영향을 줬습니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CWGC는 바다에서 숨진 많은 이에게 바다 말고는 무덤이 없다고 적습니다. 포츠머스, 플리머스, 채텀의 해군 기념비에 유틀란트의 전사자 이름이 1차 대전의 다른 영국 해군 전사자와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유틀란트에서는 빅토리아 십자 훈장이 넷 나왔고 그 가운데 셋은 죽은 뒤에 주어졌습니다.
구축함 샤크(Shark)의 함장 로프터스 존스(Loftus Jones)도 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샤크는 어뢰에 맞아 가라앉았고, 살아남은 6명은 밤늦게 중립국 덴마크의 기선에 구조됐습니다. 해군이 낸 공개 성명은 세 순양전함을 잃었다고 밝히며 전사자들이 "영광스럽게 죽었다"고 적었습니다. TNA 교육 자료는 이 첫 반응이 뒤에 장약 운반 방식의 잘못이라는 결론으로 바뀌어 간 과정을, 기록을 읽고 따져 볼 물음으로 내놓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트라팔가르 해전: 넬슨이 전열을 끊은 날: 유틀란트보다 약 110년 앞선 범선 시대의 해전입니다.
- 러일전쟁과 쓰시마 해전: 동아시아를 바꾼 전쟁: 전쟁사 묶음에서 함께 읽을 만한 다른 해전 이야기입니다.
- 구축함과 호위함: 같은 군함인데 이름은 왜 다를까: 구축함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고 오늘 무엇을 맡는지 봅니다.
- 사격통제체계: 센서와 무장 사이의 연결고리: 오늘의 군함에서 센서와 무장을 잇는 사격통제를 다룹니다.
- 중어뢰: 경어뢰와는 무엇이 다를까: 이 해전에서 큰 배를 위협한 어뢰가 오늘 어떤 무기인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