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4월 22일 늦은 오후, 벨기에 이프르(Ypres, 지금의 이퍼르)의 참호 위로 노란빛이 도는 초록색 구름이 흘러왔습니다. 독일군이 풀어 놓은 염소 가스였습니다. 그날 프랑스군 전선이 몇 킬로미터나 무너졌지만, 며칠 뒤 두 군대는 다시 같은 참호에서 마주 섰습니다.

독가스는 참호의 교착을 깨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병사들의 몸과 마음에 오래 남는 상처를 냈고, 전쟁이 끝난 뒤 "이 무기만은 다시 쓰지 말자"는 약속을 낳았습니다. 그 약속은 1925년에 한 번, 1993년에 다시 한 번 조약이 됐습니다.

이 글은 1차 대전에서 독가스가 어떻게 쓰이고 막아졌는지, 피해 숫자가 왜 자료마다 다른지, 그리고 두 조약이 무엇을 금했고 무엇을 남겼는지를 공개 기록으로 봅니다.

1915년 4월, 이프르

서부전선은 참호전에 갇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교착을 깨려는 새 무기가 여럿 나왔고, 독가스도 그 하나였습니다.

화학무기금지기구(Organisation for the Prohibition of Chemical Weapons, OPCW)는 화학무기를 쓴 첫 대규모 공격을 1915년 4월 22일 이프르로 꼽습니다. 캐나다 보훈부(Veterans Affairs Canada) 자료에 따르면 독일군은 이날 염소 가스 160톤을 풀었습니다. 구름은 프랑스군 참호 위로 흘러갔고, 바로 옆 캐나다군의 왼쪽에는 프랑스 45(알제리) 사단이 있었습니다.

프랑스군 방어는 무너졌습니다. 연합군 전선에 생긴 틈을 캐나다 보훈부는 6.5 km, 공중보건 학술지에 실린 Fitzgerald(2008)의 논문은 6 km로 적습니다. 같은 논문은 몇 분 만에 프랑스·알제리 병사 1000명 넘게가 죽고 약 4000명이 다쳤다고 씁니다.

그런데 독일군은 이 틈을 크게 넓히지 못했습니다. 독일은 처음부터 제한된 공세만 계획했고 예비대가 모자랐습니다. 독일 부대는 3.25 km쯤 나아간 뒤 멈춰 참호를 팠고, 며칠 안에 두 군대는 다시 같은 진지에서 마주 섰습니다.

이틀 뒤인 4월 24일, 두 번째 가스 공격이 이번에는 캐나다군 전선을 향했습니다. 병사들은 젖고 진흙 묻은 손수건으로 숨을 쉬며 버텼습니다. 캐나다 보훈부는 이 48시간 동안 캐나다군 6,035명, 곧 세 명 가운데 한 명이 사상자가 됐고 그 가운데 2,000명 넘게가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염소에서 머스터드까지

이프르 뒤로 독가스는 한쪽만의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1915년 중반에는 양쪽 모두 염소를 썼고, 1916년 중반에는 염소에 포스겐(phosgene)을 섞어 썼습니다.

영국이 처음 가스를 쓴 1915년 9월 로스(Loos)에서는 가스 상당 부분이 바람에 밀려 영국군 쪽으로 되돌아왔습니다. 1916년부터는 가스를 포탄에 담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이 꼽은 1차 대전의 가스는 염소, 머스터드, 브롬, 포스겐이고, 가장 많이 쓴 쪽은 독일군이었습니다. 염소와 포스겐은 폐를 상하게 하는 가스였습니다. 염소는 폐를 강하게 자극했고, 오래 마시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17년 7월, 독일군이 머스터드 가스(mustard gas)를 썼습니다. 전쟁 후반에야 나왔지만 결국 다른 가스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화학 사상자를 냈습니다.

머스터드는 폐를 자극하는 가스와 달리 닿은 곳마다 큰 물집을 냈습니다. 노출이 많으면 눈을 영구히 다칠 수 있었으나 그런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뿌려진 뒤에도 그 자리에 가라앉아 땅을 오염시켰습니다.

가스는 사람을 죽이기보다 다치게 하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Fitzgerald 논문에 따르면 염소나 포스겐 공격은 병사가 제대로 준비하고 장비를 갖췄다면 사망이 비교적 적었습니다. 그래도 미국 원정군(American Expeditionary Forces, AEF)의 가스 피해자는 전선을 떠나 평균 염소 60일, 포스겐 45.5일을 회복에 썼습니다. IWM은 가스가 기대만큼 결정적인 무기가 되지 못했다고 평가합니다.

솜 마스크에서 방독면으로

처음 막는 방법은 초라했습니다. 영국군이 처음 받은 천 마스크는 입과 코를 묶는 모슬린 조각이었고 대체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1915년에는 소다에 적신 솜 얼굴 패드가 지급됐습니다.

1915년 7월, 영국 의무대는 머리 전체를 덮는 양모 두건을 만들었습니다. 앞에 운모로 된 작은 창이 있어 밖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병사들은 이런 초기 마스크가 쓰기 어렵고 불편하며 쉽게 망가진다고 느꼈습니다.

1916년에 나온 영국의 상자형 방독면(small box respirator)은 달랐습니다. 새 가스가 나오면 그에 맞게 고칠 수 있었기 때문에 머스터드까지 포함해 전쟁 내내 쓰인 대부분의 가스를 막았습니다. 1918년이 되면 숯이나 약품으로 공기를 거르는 방독면이 흔해졌습니다.

마스크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선을 따라 징과 종이 걸렸고, 보초는 가스가 오면 그것을 울려 알렸습니다. 1915년 말에는 가스가 몸뿐 아니라 마음을 겨누는 무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편의 병사들이 가스전을 올바른 무기가 아니며 인간성의 선을 넘었다고 느꼈다고 Fitzgerald는 씁니다.

피해는 군인에게만 가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전선 가까운 마을과 도시로도 가스를 실어 갔습니다. 공식 민간인 사상자는 약 5200명이지만, Fitzgerald는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봅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1차 대전의 가스 피해는 몇 명이었을까요? 자료를 나란히 놓으면 숫자가 서로 다르고, 무엇을 세는지도 다릅니다.

자료별 1차 대전 가스 피해 숫자 비교 가로 막대 도표. 위 묶음은 사망: OPCW 9만 명 넘는 병사, Fitzgerald(2008) 약 9만 명. 아래 묶음은 사망 밖의 피해와 전체 사상: OPCW는 사망자 말고 100만 명 가까이가 눈멀거나 다쳐 전장을 떠났다고 적고, Fitzgerald는 사상자 130만 명 넘게라고 적는다. 맨 아래에 IWM의 한 줄: 가스 사상자 가운데 곧바로 죽은 사람은 3%뿐이었다. 자료마다 세는 범위가 다르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전쟁, 다른 숫자. 사망만 세는지, 다친 사람까지 세는지가 자료마다 다릅니다 (도표)(도표)
자료사망다친 사람·전체 사상가스의 양
OPCW9만 명 넘는 병사사망 말고 100만 명 가까이가 눈멀거나 다쳐 전장을 떠남약 124,200톤을 퍼뜨림
Fitzgerald(2008)약 9만 명사상자 130만 명 넘게124,000톤 넘게 생산
IWM곧바로 죽은 사람은 가스 사상자의 3%수십만 명이 전쟁 뒤에도 여러 해 고통(적지 않음)

사망 쪽은 "9만 명 넘게"와 "약 9만 명"으로 가깝습니다. 다친 사람 쪽은 한 자료가 사망자 밖의 부상자를, 다른 자료가 사망을 포함한 전체 사상자를 셉니다. 가스의 양도 한 곳은 전장에 퍼뜨린 양, 다른 곳은 생산한 양입니다.

나라별 숫자도 있습니다. Fitzgerald 논문에 따르면 영국군의 화학 사상자 약 186,000명 가운데 80% 넘게가 머스터드 하나로 생겼고, 사망률은 약 2.6%였습니다. 미국 원정군은 전투 사망 52,800명 넘게 가운데 약 1500명이 가스로 다친 끝에 죽었습니다.

표의 숫자 뒤에는 살아남은 뒤의 삶도 있습니다. 가스에 노출된 많은 병사와 공장 노동자가 잦은 병과 숨쉬기 어려움 때문에 전쟁 뒤 일을 하기 힘들었습니다.

전쟁 전의 약속은 왜 막지 못했나

독을 무기로 쓰지 말자는 약속은 1차 대전보다 훨씬 오래됐습니다. 독성 물질은 수천 년 동안 무기로 쓰였지만, 잔인하고 공정하지 않다는 낙인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첫 국제 합의는 1675년 프랑스와 독일이 스트라스부르에서 맺은 독 탄환 금지였습니다.

1874년 브뤼셀 협약은 독과 독 무기, 불필요한 고통을 주는 무기를 금했지만 발효되지 못했습니다. 1899년 7월 29일 헤이그에서는 "질식성 가스에 관한 선언"이 나왔습니다. 당사국은 질식성·유해 가스를 퍼뜨리는 것만이 목적인 투사물을 쓰지 않기로 했고, 1907년 두 번째 헤이그 협약은 독과 독 무기의 금지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런데도 1차 대전에서는 독성 화학 물질이 전례 없는 규모로 쓰였습니다. Fitzgerald는 동맹국과 경쟁국 사이의 의심과 이해관계가 이런 약속의 쓸모를 대체로 줄였다고 봅니다. 헤이그의 약속이 있었는데도 전쟁 끝까지 124,000톤 넘는 가스가 생산됐습니다.

1925년 제네바 의정서: 사용만 금지

전쟁이 끝나자 새 약속이 나왔습니다. 1919년 6월 28일의 베르사유 조약 171조는 질식성·독성 가스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독일에서 그 제조와 수입을 엄격히 금한다고 적었습니다. 화학전의 참상을 본 대중의 실망이 전후 협상을 이끌었습니다.

1675년부터 2023년까지 화학무기 금지 약속과 사용을 한 줄로 놓은 연표 도표. 1675년 스트라스부르 독 탄환 금지 합의, 1874년 브뤼셀 선언(발효되지 않음), 1899년 헤이그 질식성 가스 선언, 1907년 두 번째 헤이그 협약, 1915~1918년 1차 대전의 가스 사용(빨간 띠, 1915년 4월 22일 이프르와 1917년 7월 머스터드 표시), 1919년 베르사유 조약 171조, 1925년 6월 17일 제네바 의정서 채택, 1928년 2월 8일 발효, 1968년 제네바 군축 논의 시작, 1972년 생물무기금지협약 서명 개방, 1980년 화학무기 작업반, 1993년 1월 13일 파리 서명 개방, 1997년 4월 29일 화학무기금지협약 발효, 2013년 OPCW 노벨 평화상, 2023년 7월 7일 신고 비축분 폐기 확인
약속, 전쟁, 다시 약속.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1925년 5월 4일부터 6월 17일까지 국제연맹 주관으로 제네바에서 무기 거래를 다루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에서 따로 나온 문서가 제네바 의정서(Geneva Protocol)입니다. 의정서는 전쟁에서 질식성·독성 가스를 쓰는 일이 문명 세계의 여론에 비난받아 왔다고 적고, 그 금지를 세균을 쓰는 전쟁 방법까지 넓혔습니다.

의정서는 1925년 6월 17일 채택돼 1928년 2월 8일 발효했습니다. 유엔 군축실(UNODA) 조약 데이터베이스에는 서명국 38개국, 당사국 146개국이 올라 있습니다.

이 의정서에는 큰 빈틈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쓰는 것만 금했을 뿐 개발·생산·보유는 금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나라가 가입하지 않은 나라에는 쓸 수 있고, 화학무기로 공격받으면 똑같이 되갚을 수 있다는 유보를 달고 서명했습니다. 뒤에 일부 나라는 이 유보를 거두고 사용을 완전히 금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빈틈은 곧 드러났습니다. 1920~30년대에는 여러 나라가 화학무기를 썼고, 1930년대 말 강력한 신경 가스가 발견되면서 관심이 다시 커졌습니다.

2차 대전의 강대국들은 큰 화학전을 예상했지만 유럽 전장에서는 화학무기가 쓰이지 않았고, 그 까닭은 역사가들이 지금도 논쟁합니다. 냉전 동안 미국과 소련은 수만 톤의 화학무기를 쌓아 두었습니다.

화학무기금지협약과 OPCW

화학무기는 1968년에야 제네바 군축 회의에서 다시 진지하게 다뤄졌습니다. 1972년 서명에 열린 생물무기금지협약은 당사국이 화학무기 협상을 이어 가도록 했습니다. 1980년 군축회의가 화학무기 작업반을 만들었고, 1980년대 말 강대국 관계가 나아지고 1988년 이라크 할라브자 화학 공격이 일어나고 걸프전 때 화학전 위협이 널리 알려지면서 협상에 힘이 붙었습니다.

1992년 군축회의가 협약 초안을 채택했습니다. 화학무기금지협약(Chemical Weapons Convention, CWC)은 1993년 1월 13일 파리에서 서명에 열렸고, 사흘 동안 130개국이 서명했습니다. 1996년 10월 31일 헝가리가 65번째로 비준하자 180일 뒤인 1997년 4월 29일 발효했습니다.

1925년 제네바 의정서와 1993년 화학무기금지협약을 나란히 놓은 비교 도표. 일곱 줄(개발, 생산, 획득, 비축, 보유, 이전, 사용)에서 제네바 의정서는 '사용'에만 표시가 있고, 화학무기금지협약은 일곱 줄 모두에 표시가 있다. 아래 세 줄(비축분·생산 시설 폐기, 검증과 불시 사찰, 이행 기구)은 제네바 의정서에 없고 화학무기금지협약에는 있으며 이행 기구 칸에 OPCW가 적혀 있다. 제네바 의정서 쪽 아래에 '많은 나라가 되갚을 권리를 남기는 유보를 달았다'는 메모가 있다
사용만 막은 조약과 갖는 것까지 막은 조약 (도표)(도표)

두 조약의 차이는 금지 목록에서 바로 보입니다. 제네바 의정서가 "쓰지 말라"에 머물렀다면, 화학무기금지협약은 화학무기의 개발·생산·획득·비축·보유·이전·사용을 모두 금합니다. 당사국은 가진 비축분과 그것을 만든 시설, 과거에 다른 당사국 땅에 버리고 간 화학무기까지 없애기로 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지 확인하는 장치도 생겼습니다. 특정 독성 화학 물질과 그 원료 물질을 목록으로 묶어 검증하고, 다른 나라를 의심하는 당사국은 불시 사찰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이 "챌린지 사찰(challenge inspection)"은 언제 어디서나 받아야 하며 거부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 일을 맡은 곳이 OPCW입니다. 당사국총회, 집행이사회, 기술사무국의 세 기관으로 이뤄지고, 첫 당사국총회는 1997년 5월 6일 열렸습니다. OPCW는 화학무기를 없애려는 폭넓은 노력으로 201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2023년 7월 7일, OPCW는 당사국이 신고한 비축분의 마지막 화학무기가 폐기됐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날 미국 켄터키주 블루그래스 시설에서 미국 신고 비축분의 마지막 탄약이 없어졌습니다. 1997년부터 OPCW가 폐기를 검증한 비축 화학무기는 72,304.34톤이고, 회원국은 193개국입니다.

일이 다 끝난 것은 아닙니다. 같은 발표에서 OPCW 사무총장은 아직 네 나라가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고, 오래되고 버려진 화학무기를 찾아 없애야 하며, 최근의 사용과 위협을 보면 화학무기가 다시 나타나지 않게 막는 일이 계속 우선 과제라고 말했습니다. OPCW는 1·2차 대전이 남긴 오래되고 버려진 화학무기가 지금도 많은 나라의 문제라고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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