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7일 오후, 두만강 건너 북간도의 긴 골짜기 봉오동에서 총성이 울렸습니다. 넉 달 뒤 10월에는 청산리의 숲에서 엿새 동안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맞붙어 이긴 전투로 교과서에 나오는 두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두 전투에서 일본군이 몇 명이나 쓰러졌는지 물으면 답이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157명이라는 자료도, 1명이라는 자료도 있고, 청산리는 1,200여 명에서 3,300명까지 갈립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신편 한국사』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을 나란히 놓고, 두 전투가 왜 일어났고 어떻게 흘러갔으며 무엇을 남겼는지 따라갑니다.
국경 너머의 독립군
나라를 잃을 무렵부터 간도와 연해주로 옮겨 간 의병 출신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고 독립군 기지를 세웠습니다. 1919년 3·1운동은 이 움직임에 불을 붙였습니다. 간도의 독립군 부대는 이때부터 훨씬 활발해졌습니다.
두 전투의 중심인물은 홍범도와 김좌진입니다. 홍범도는 포수 출신입니다. 1907년 9월 일제가 「총포급화약류단속법」으로 포수들의 총을 거둬들이자, 그해 11월 산포대를 조직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1910년 간도로 건너가 포수단을 만들었고, 3·1운동 뒤인 1919년 3~6월 사이 대한독립군을 창설했습니다.
김좌진은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가 1907년 장교가 된 사람입니다. 그가 이끈 대한군정서는 임시정부의 요구로 이름을 바꾼 부대이고, 서간도의 서로군정서와 구별해 흔히 북로군정서라고 불렸습니다. 북로군정서는 왕청현 서대파구의 밀림에 본부를 두고 사관연성소를 세워 독립군을 길렀습니다.
이 무렵 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 국경의 일본 군경 시설을 치고 돌아오는 국내진입작전을 되풀이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그 가운데 한 번에서 시작됩니다.
1920년 6월, 봉오동
6월 4일 새벽, 30명가량의 독립군 소부대가 삼둔자에서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이들은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의 일본 헌병 순찰 소대를 격파하고 날이 저물자 돌아왔습니다. 보복에 나선 일본군 1개 중대와 헌병은 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러 무고한 한인 주민을 죽였고, 독립군이 이들을 공격했습니다. 6월 7일의 봉오동 전투는 전날 벌어진 이 삼둔자 전투에서 비롯됐습니다.
두만강을 지키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월강추격대대'를 꾸려 중국 땅인 북간도로 들어왔습니다. 보병 두 중대에 기관총 1소대, 헌병과 경찰이 더해진 편성이었습니다. 6월 7일 새벽 온성의 하탄동에서 강을 건넌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 봉오동으로 향했습니다.
봉오동은 오늘날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15리 떨어진, 25리에 이르는 긴 골짜기입니다. 그 안에 하촌·중촌·상촌 세 한인 마을이 있었습니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신민단, 군무도독부의 연합부대는 주민을 미리 산속으로 피신시키고 골짜기 둘레의 고지에서 기다렸습니다.
하촌에 들어온 일본군은 미처 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죽이고 마을을 짓밟았습니다. 오후에 일본군 본대가 상촌 가까이 이르자 홍범도가 총공격 신호탄을 쏘았습니다. 골짜기에 갇힌 일본군은 3시간을 버티다 물러갔습니다.
누가 지휘했는지도 자료마다 조금 다르게 적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홍범도를 총지휘관으로 씁니다. 백과사전 「봉오동전투」 항목에서는 연합 부대를 다시 짤 때 최진동이 사령관, 홍범도가 연대장이었습니다. 다만 항목은 그것이 형식이었고 실제로 승리를 이끈 사람은 홍범도였다고 설명합니다.
훈춘사건과 일본군의 간도 출병
봉오동의 패배는 일본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임시정부 군무부는 이 승리를 '독립전쟁의 제1회전'이라 선언했고,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습니다. 일본은 그 전부터 중국 쪽과 함께 독립군을 수색하려 했지만 북간도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길림성장을 비롯한 일부 중국 관리들이 이 수색에 반대하고 일본 쪽 움직임을 독립군에 미리 알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1920년 8월까지 간도의 독립군을 쓸어버리는 계획을 세워 두었습니다. 남은 것은 국경을 넘을 구실이었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10월의 훈춘사건을 일본이 의도적으로 꾸민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일본군이 중국 마적 장강호에게 돈과 무기를 주어 일본 영사관 분관이 있던 훈춘을 습격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10월 2일 새벽, 마적 400여 명이 훈춘성을 공격했습니다. 이 난동으로 중국군 70여 명과 한인 7명이 숨졌고, 비어 있던 일본 영사관 분관이 불탔습니다. 일본인 경찰 가족과 부녀자 9명도 살해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군은 사건 당일부터 중국 당국과 미리 협의하지 않고 간도로 들어갔습니다. 주력인 제19사단 9천 명에 블라디보스토크의 제14사단 4천 명, 관동군 1,200명 등이 더해져 모두 2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기관총과 대포 같은 무거운 무기도 함께였습니다.
1920년 10월, 청산리의 엿새
일본군이 오기 전에 중국군 쪽에서 '토벌' 방침을 전해 들은 독립군 부대들은 화룡현의 이도구·삼도구 쪽 산림으로 옮겼습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10월 중순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 이르렀습니다. 도착한 날을 백과 항목은 10월 10일경, 『신편 한국사』는 10월 12~13일로 적습니다. 근처 이도구에는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지휘관들은 싸움을 피하기로 했습니다. 큰 교전이 중국 정부의 반감을 사고 일본군을 더 불러들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이 회의를 『신편 한국사』는 10월 10일 묘령에서 열린 것으로, 백과 항목은 10월 19일의 회의로 적습니다. 일본군이 바짝 다가오자 김좌진 부대는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보고 싸우기로 했습니다.
청산리 계곡은 동서로 약 25 km에 이르고, 좌우는 사람과 말이 다니기 어려울 만큼 숲이 우거졌습니다. 10월 21일 오전 9시쯤, 일본군 추격대가 좁은 골짜기 길을 따라 백운평으로 들어오자 매복해 있던 북로군정서가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뒤따른 일본군 본대도 물러났습니다. 백과 「청산리대첩」 항목은 이때 일본군이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겼다고 적습니다.
같은 날 오후, 가까운 완루구에서는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에 둘러싸였다가 빠져나왔습니다. 같은 항목에 따르면 다음 날 새벽까지 이어진 싸움에서 일본군 한 부대 400여 명이 전멸했고, 그 까닭은 양쪽 군복 색이 거의 같아 일본군이 자기 편을 독립군으로 잘못 알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쪽 보고의 숫자는 이와 크게 다릅니다. 숫자는 아래 절에서 자료별로 다시 봅니다.
22일 새벽에는 김좌진 부대가 천수평의 일본군 기병 중대를 쳤습니다. 이어 어랑촌 부근 고지에서 하루 종일 일본군의 공격을 막았고, 홍범도 부대도 와서 힘을 보탰습니다. 그 뒤 독립군은 고동하를 따라 물러나며 작은 싸움을 이어 갔습니다. 25일 밤 고동하 골짜기의 야영지가 습격당했지만 독립군은 역습한 뒤 새벽에 안도현 쪽으로 떠났습니다.
이렇게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10여 차례 벌어진 싸움을 합쳐 청산리 전투, 또는 청산리대첩이라고 부릅니다.
독립군은 어떻게 무장했나
독립군은 맨손으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내외 동포가 낸 의연금으로 시베리아에서 최신식 무기를 대량으로 사들였습니다. 북로군정서는 대종교에서 군자금을 받아 무기를 갖췄고, 사관연성소에서 훈련받은 연성대가 있었습니다.
백과 「청산리대첩」 항목은 북로군정서의 병력을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포함한 약 1,600명, 무기를 소총 1,300정·권총 150정·기관총 7문으로 적습니다. 홍범도 부대는 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 등 일곱 단체가 모인 약 1,400명이었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병력을 확인하기에 자료의 한계가 있다고 전제하고, 여덟 부대를 합쳐 모두 2,000명 정도로 봅니다.
이 무기와 식량은 간도의 한인 사회가 떠받쳤습니다. 대한국민회는 한 집에 10원, 재산의 10분의 1을 군자금으로 모았습니다. 가난한 농민이 중심인 한인 사회는 살림이 넉넉지 않았는데도 무기 살 돈을 내고 군량과 옷을 맡았습니다. 일본군의 움직임을 알려 주는 일도 이들의 몫이었습니다.
넉넉한 군대는 아니었습니다. 대한군정서 총재 서일은 임시정부에 보낸 보고에서 "3일간의 전투에 糧道가 俱絶되어 다만 5∼6塊의 감자로써 餓腸을 僅充"했다고 적었습니다. 식량 길이 끊겨 감자 대여섯 알로 주린 배를 채웠다는 말입니다.
맞은편 일본군은 기관총과 대포를 갖춘 정규군이었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독립군이 이긴 직접적인 까닭으로 먼저 희생을 각오한 싸움 의지를 들고, 이어 숲과 계곡의 지형을 살려 유리한 고지를 먼저 차지한 점을 꼽습니다. 간도 한인 사회의 뒷받침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바탕으로 따로 듭니다.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로 읽으면 됩니다.
전과 숫자를 어떻게 읽을까
『신편 한국사』는 청산리를 두고 한국·일본·중국 자료마다 내용이 달라 실제 전과를 가늠하기 어렵다고 하면서도, 독립군이 크게 이겼다고 적은 점은 대개 같다고 봅니다. 갈리는 것은 숫자입니다.
봉오동에서 임시정부 군무부는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독립군은 4명이 전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이 숫자가 승리를 널리 알리는 과정에서 다소 부풀려진 것으로 보면서도, 『독립신문』과 상하이의 신문 기사로 볼 때 150여 명을 사살한 것은 사실로 확인된다고 적습니다. 반면 일본군의 전투 보고서는 자기 쪽 전사자와 부상자를 각각 1명으로, 독립군 30여 명을 '사살'했다고 적었습니다.
청산리는 차이가 더 큽니다. 일본군 전사자는 군무부 발표로 1,257명, 『독립신문』으로 1,200여 명, 박은식의 기록으로 2,000여 명입니다. 전투에 직접 참가한 이범석은 회고록에서 일본군 사상자를 3,300명으로 셌습니다.
일본 쪽 보고에는 백운평에서 병졸 3명이 전사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일본 쪽 기록이 이렇게 참패를 숨기고 피해를 줄여 적었다고 봅니다. 다만 간도 주재 일본 총영사는 본국에 보낸 비밀 전보에서 "다소 실패로 끝났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독립군의 피해도 하나가 아닙니다. 백과 항목은 전사 100여 명, 일본군 정보 기록은 백운평 16명·어랑촌 60명 정도 전사, 이범석은 대한군정서만 전사 60여·부상 90여·실종 200여 명으로 적었습니다. 『신편 한국사』는 임시정부 파견원 안정근의 보고 등을 근거로 350여 명 안팎으로 추산합니다.
이 숫자들은 모두 누군가 어떤 목적을 갖고 남긴 기록입니다. 승리를 알리려던 쪽은 크게, 패배를 숨기려던 쪽은 작게 적었을 수 있습니다. 숫자를 하나만 외우기보다 그 옆에 누가 적었는지를 함께 붙여 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경신참변과 그 뒤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과 그 뒤, 간도의 한인 마을에 닥친 것은 승리의 잔치가 아니었습니다. 1920년 일본군은 간도에 사는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했습니다. 이를 경신참변이라 부릅니다.
백과 「경신참변」 항목은 훈춘사건을 구실로 들어온 일본군이 독립군을 쓸어버린다는 명목으로 초토화 작전을 벌였다고 먼저 씁니다. 그리고 청산리에서 크게 진 일본군이 그 보복으로 가리지 않고 사람을 죽였다고 덧붙입니다.
집이 불타고 가축을 빼앗긴 마을은 폐허가 됐습니다. 이 일은 만주에서 선교하던 외국인 선교사들을 통해 바깥에 알려졌습니다. 항목은 현지를 취재하러 간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을 일본군이 암살했다고 적습니다.
희생자의 수는 끝내 다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항목은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27일 동안 학살된 한국인을 3,469명으로 적고, 서너 달 이어진 학살의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숫자 하나하나가 간도에 살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독립군은 일본군을 피해 북쪽의 밀산으로 옮겨 갔습니다. 1920년 12월 열 개 부대가 모여 3,500명 규모의 대한독립군단을 꾸렸고, 지도자들은 1921년 정월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로 갔습니다. 김좌진은 소련으로 가는 데 반대했습니다.
1921년 6월 22일, 자유시(오늘날 러시아 스바보드니)에서 소련 적군이 독립군에게 무장 해제를 명령하고 저항하는 이들을 사살하거나 붙잡는 자유시사변이 일어났습니다. 그 배경에는 독립군 해체를 요구한 일본과 볼셰비키 사이의 협상, 그리고 고려공산당 두 파의 대립이 겹쳐 있었습니다.
두 지휘관의 끝도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김좌진은 러시아군의 지휘를 거부하고 만주로 돌아와 1925년 신민부를 조직했지만 1930년 1월 산시참의 정미소에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홍범도는 1937년 한인 강제 이주로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옮겨져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 1943년 76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해는 2021년 광복절에 돌아와 대전현충원에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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