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여름, 영국 서퍽의 베리세인트에드먼즈 사람들은 근처에서 훈련하던 군인들에게서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러시아군에 보낼 물탱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군인들이 아주 비밀스럽게 익히던 것은 궤도로 움직이는 새 장갑 기계였습니다. 그때 둘러댄 낱말 "탱크(tank)"는 지금 이 기계를 부르는 이름과 같습니다.
이 기계는 한 가지 물음에서 나왔습니다. 철조망과 기관총이 지키는 참호선을 사람이 아닌 기계로 넘을 수 있을까. 이 글은 첫 전차가 어떻게 생겨났고, 1916년 솜 전투에서 처음 나섰다가 1917년 11월 캉브레에서 한꺼번에 쓰였을 때 무엇이 되고 무엇이 안 됐는지를 공식 기관과 박물관의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숫자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캉브레에 나선 영국 전차만 해도 "476대"라는 곳과 "400대 넘게"라는 곳이 있고, 사상자 수는 자료마다 몇천 명씩 어긋납니다. 그런 곳은 하나를 고르지 않고 나란히 적었습니다.
철조망과 기관총 앞에서 멈춘 전쟁
1914년 말, 짧게 움직이던 시기가 끝나자 서부 전선은 복잡한 참호 방어 체계로 굳었습니다. 연합군과 독일군은 벨기에 해안에서 스위스 국경까지 이어진 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았습니다. 결과는 교착이었습니다.
뚫고 나갈 길이 필요했습니다. 독일은 1915년 4월 독가스로 그 길을 찾으려 했지만, 대응책이 곧 나왔고 연합군도 같은 무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영국 쪽에서는 "기관총 파괴자"를 바라는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철조망에 구멍을 내고 기관총을 잠재워 보병이 지나가게 해 줄 기계였습니다.
참호가 어떻게 생겼고 왜 4년 가까이 움직이지 않았는지는 같은 묶음의 글 "참호전: 서부전선은 왜 4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나"가 따로 다룹니다.
육상 군함에서 '마더'까지
공병 출신 어니스트 스윈턴(Ernest Swinton) 중령이 장갑 차량을 제안했지만, 육군성은 처음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받아들인 쪽은 뜻밖에도 바다를 맡은 해군 본부(Admiralty)였고, 이름도 "육상 군함(Land Ships)"이었습니다.
1915년 1월 에식스의 슈베리니스에서 시험을 했고, 그해 8월 육상 군함 위원회(Landships Committee)는 몇 번의 실패에도 계획을 이어 가기로 했습니다. 링컨의 포스터(Fosters)사와 영국 해군 항공대(Royal Naval Air Service, RNAS)의 기술자들이 바퀴 달린 트랙터에 미국산 궤도를 붙여 시제품을 만들었습니다. 독일 황태자 빌헬름의 이름을 딴 "리틀 윌리(Little Willie)"입니다.
리틀 윌리는 처음에 농기계용 미국 궤도를 달았는데, 싸움에 쓸 차에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설계자 윌리엄 트리턴(William Tritton)이 새 궤도를 만들었고, 이 궤도는 1차 대전 동안 만든 거의 모든 영국 전차의 본이 됐습니다. 새 궤도를 단 리틀 윌리는 1915년 11월에야 완성됐습니다.
문제는 모양이었습니다. 키 큰 상자 모양 차체로는 독일 참호의 흔한 폭인 3 m 틈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트리턴은 해군의 월터 고든 윌슨(Walter Gordon Wilson) 중위와 함께 서둘러 다시 설계했고, 그렇게 나온 것이 첫 마크 I(Mark I) 중전차의 시제품 "마더(Mother)"입니다.
마더는 차체를 길게 늘인 마름모꼴에 앞뒤로 "뿔"이 튀어나온 모양이었습니다. 몸이 길면 앞이 건너편 가장자리에 걸릴 때 뒤는 아직 이쪽 땅을 딛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영국 전차 박물관(The Tank Museum)이 적은 값은 8피트 참호와 4피트 6인치 흉벽입니다.
마더는 1916년 1월 19일에서 20일로 넘어가는 밤 링컨에서 몰래 시험을 받았습니다. 결과가 좋자 1916년 2월 12일 탄약부 장관(Minister for Munitions)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100대를 주문했습니다. 리틀 윌리는 시제품 하나로 끝났고 영국 밖으로 나간 적이 없지만,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오래 남은 전차로 보빙턴의 전차 박물관에 있습니다.
1916년 9월 15일, 첫 출전
마크 I은 두 갈래였습니다. "수컷(male)"은 6파운드 포 두 문과 기관총을, "암컷(female)"은 기관총만 달았습니다.
승무원은 여덟 명이었고 그 가운데 넷이 차를 몰고 방향을 트는 데 매달렸습니다. 엔진 소리가 커서 명령은 손짓으로 주고받았고, 차 안은 열과 새어 나온 이산화탄소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최고 속도는 길에서 시속 약 4마일, 들판에서는 그 절반쯤이었습니다.
승무원은 육군 곳곳에서 뽑았습니다. 기계에 밝은 사람이 많이 필요해서 오토바이 신문에 광고까지 냈습니다. 부대는 기관총 군단 아래에서 출발해 1916년 5월 1일 "기관총 군단 중분대(Heavy Section, Machine Gun Corps)"라는 이름을 얻었고, 6월에 첫 마크 I을 받았습니다. 물탱크 이야기가 나온 것이 이 훈련 때입니다.
첫 출전은 솜 전투 한가운데인 1916년 9월 15일 플레르-쿠르셀레트 공격이었습니다. 49대가 배정됐습니다. 그날 오전 5시 30분, 모티모어 대위가 이끄는 "데어데블 1"이 델빌 숲 모퉁이를 돌아 나가며 처음으로 싸움에 들어선 전차가 됐습니다.
49대 가운데 실제로 움직인 수는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은 공격이 시작될 때 15대만 무인지대로 들어갔다고 적고, 전차 박물관은 18대가 출발점에 닿았고 그 가운데 9대가 목표에 닿았다고 적습니다. 많은 수가 가는 길에 고장 나거나 구덩이에 빠졌습니다. 플레르 마을은 점령했지만 바라던 큰 돌파는 없었습니다.
이 결정을 두고는 비판이 남았습니다. 몇몇 전차 장교는 너무 적은 전차와 급히 훈련한 사람을 내보내 기습의 이점을 낭비했다고 보았습니다. 전차 박물관도 헤이그(Douglas Haig)가 더 많은 전차와 더 잘 훈련된 승무원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고 적습니다. 보병과 전차가 함께 싸우는 법은 아직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차는 1916년 11월 앙크르 전투에 다시 나왔습니다. 여전히 느리고 고장이 잦았으며, 끈적한 11월의 솜 진흙에 쉽게 빠졌습니다. 1917년 봄과 여름의 아라스, 파스샹달에서도 썼습니다. 솜에서 시작한 이 싸움은 "솜 전투: 첫날 기록이 남긴 질문"에서 더 볼 수 있습니다.
캉브레, 1917년 11월 20일
파스샹달 싸움이 아직 이어지던 때, 영국 사령부는 독일이 차지한 철도 요지 캉브레를 공격하는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캉브레 앞에는 독일이 "지크프리트 진지"라 부르고 영국이 힌덴부르크선(Hindenburg Line)이라 부른 튼튼한 방어선이 있었습니다. 계획은 전차·기병·항공기·포병·보병을 함께 쓰는 "모든 병과(all arms)" 싸움이었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Australian War Memorial, AWM)에 따르면 이 공격에는 보병 6개 사단, 기병 2개 사단, 포 1,000문 넘게, 전차 476대가 나섰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DHM)은 같은 공격을 전투 전차 378대와 보급 전차 98대로 적습니다. 둘을 더하면 476대가 되므로 같은 수를 다르게 나눈 것으로 보입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400대 넘게"라고만 적습니다.
11월 20일 새벽, 공격은 길게 이어지는 포격 대신 10마일 전선에 짧고 강한 포격으로 시작됐습니다. 곧 전차가 보병과 함께 나아갔고, 왕립 항공대 14개 비행대가 참호와 보급 수송대, 포대를 공격했습니다.
힌덴부르크선의 참호는 일부러 넓게 판 것이었고 도랑도 깊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전차가 지붕에 "섶 다발(fascine)"이라는 큰 나뭇가지 묶음을 얹고 갔습니다. 작은 섶 다발 약 75개를 묶은 것으로, 다 만들면 약 1.5톤이었습니다.
도랑에 떨어뜨리면 다리처럼 되어 뒤따르는 전차와 보병이 건넜고, 한 번 떨어뜨린 것은 거둬 다시 쓸 수 없었습니다. 전차 박물관은 이런 큰 섶 다발을 캉브레 전이나 뒤에 쓴 증거는 없다고 적습니다.
첫날의 돌파와 12월의 되밀림
첫날은 그때까지와 다른 날이었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일부 부대가 출발점에서 5마일 넘게 나아갔고, 포로 수천 명을 잡았으며, 힌덴부르크 방어선 세 줄을 모두 뚫었다고 적습니다. AWM은 독일 전선에 폭 거의 10 km, 깊이 6 km의 구멍이 났다고 적고, DHM은 몇 시간 만에 최대 10 km를 나아가 독일 병사 약 1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적습니다. 그랭쿠르 마을까지 전차와 보병이 나아간 약 7,000야드는 개전 뒤 프랑스에서 그때까지 없던 큰 전진이었습니다.
모든 곳이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첫날 오전 10시쯤 플레스키에르 능선에서 잠시였지만 큰 지연이 생겼습니다. 높이 105 m의 낮은 능선이지만 걷는 속도로 오르는 전차에는 오르막이었고, 능선 위에는 독일 야포 포대가 여럿 있었습니다. 함께 공격한 제51 하일랜드 사단은 보병이 전차 약 200 m 뒤를 따르게 했는데, 전차 박물관은 그것이 결과를 바꾸었을지는 의문이라고 덧붙입니다.
이 능선에는 "외로운 포수" 이야기가 따라다닙니다. 혼자 남은 독일 포수가 포 하나로 전차를 적어도 다섯 대 쓰러뜨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속 전차 수는 다섯에서 열여섯으로 늘었지만, 독일 쪽은 그런 일을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전차 박물관이 소개한 연구자 고르친스키는 모두 약 40대가 쓰러졌다고 보면서도, 이를 포 하나가 아니라 여러 포대의 몫으로 봅니다.
성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많은 전차가 고장 나거나 독일 포병에 부서졌고, 큰 돌파를 이어 갈 예비 병력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병력이 아직 파스샹달에 묶여 있었습니다. 독일 예비대가 들어오고 생캉탱 운하가 앞을 막은 것도 첫날 뒤 공격의 기세를 꺾었습니다.
11월 30일 독일군이 큰 반격에 나섰습니다. 독일군은 집중 포격과 박격포, 가스, 그리고 적진으로 스며드는 "돌격대"를 썼습니다. 1917년 말 독일 교리는 자리를 빼앗기면 반격하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독일의 공격도 결국 힘이 다했고, 12월 7일 전투가 끝났습니다.
끝난 자리를 두고 자료의 말이 갈립니다. 국립육군박물관 기록으로는 영국이 처음 얻은 것 가운데 일부만 지켰고, 전차 박물관 기록으로는 북쪽 땅 일부는 지켰지만 남쪽에서 더 물러났습니다. AWM은 독일이 11월 20일 뒤 잃은 땅을 모두 되찾았다고 적고, DHM은 "거의 모두"라고 적습니다.
사상자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영국 쪽은 4만 4,000명에서 약 4만 5,000명으로 비슷하지만, 독일 쪽은 4만 1,000명 넘게, 약 4만 5,000명, 약 5만 명으로 갈립니다. DHM은 양쪽을 합쳐 약 9만 5,000명이라고만 적습니다.
자료마다 포로·실종을 넣는지가 조금씩 달라 정확히 맞지 않습니다. 그 숫자 하나하나가 죽거나 다치거나 붙잡힌 사람이었습니다.
프랑스·독일·미국의 첫 전차
영국만 전차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프랑스는 미국 홀트 트랙터의 궤도 위에 슈나이더(Schneider) C.A.1과 생샤몽(Saint-Chamond)을 만들어 각각 400대씩 생산했습니다. 슈나이더는 1917년 4월 16일 베리오바크에서 처음 싸움에 나섰고, 121대가 보병을 도왔습니다. 생샤몽은 5월 5일 물랭 드 라포에서 처음 쓰였습니다.
두 차 모두 독일 포병과 철갑탄에 크게 당했고, 휴전 때까지 800대 가운데 308대가 싸움에서 부서졌습니다. 프랑스가 기대를 건 것은 더 작고 가벼운 르노 FT(Renault FT)였습니다. 르노 FT는 무장을 360도 돌아가는 포탑 안에 넣은 첫 전차였고, 앞쪽 조종수와 뒤쪽 엔진처럼 오늘날 전차에서도 보이는 배치를 갖췄습니다. 수천 대를 주문했지만 대부분은 전쟁이 끝난 뒤에 완성됐습니다.
독일은 A7V를 만들었습니다. 1918년 4월 24일 아침 A7V 13대가 빌레르브르토뇌와 카시 쪽 영국 전선을 공격했는데, 1차 대전에서 한 작전에 쓴 A7V로는 가장 많은 수였습니다.
이날 처음으로 전차끼리 맞섰습니다. AWM 기록에는 A7V "닉세(Nixe)"가 영국 암컷 마크 IV 두 대를 멈추게 한 뒤 수컷 마크 IV에 크게 부서졌다고 적혀 있습니다. 13대 가운데 10대가 출발선으로 돌아왔고, 다음 날 새벽 빌레르브르토뇌는 호주군 손에 있었습니다.
독일이 쓴 전차 가운데는 영국 전차도 많았습니다. 캉브레 반격 때 독일은 버려진 마크 IV 수십 대를 노획해 약 40대를 고쳐 1918년에 썼고, 독일은 자기 A7V보다 마크 IV를 더 많이 썼습니다. 독일은 전차가 나타나자 첫 세대 대전차 무기도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1917년 11월 전차 군단에 첫 군인으로 조지 패튼(George S. Patton)을 배치했습니다. 1918년 4월 28일 프랑스 부르에서 패튼 중령이 이끄는 제1경전차대대가 만들어졌고, 미국산 전차가 아직 오지 않아 프랑스 르노 전차 25대를 빌려 훈련했습니다. 이 여단은 9월 12일 생미이엘 공세에 르노 전차 144대로 나섰고, 9월 26일부터 11월 2일까지 뫼즈-아르곤에서도 싸웠습니다.
캉브레가 남긴 것, 갈리는 평가
캉브레는 전쟁의 흐름을 당장 바꾸지 못했습니다. 전차 박물관은 캉브레가 연합군의 큰 전략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고 쓰고, DHM도 전선을 크게 바꾸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 강연 안내에서 전차 박물관 큐레이터는 승부로 보면 무승부로 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영국 안에서는 반격의 충격이 컸습니다. 군이 정치 지도부에 반격의 규모를 다 알리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에 조사 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위원회는 독일 공격의 힘과 기습, 방어전 교리가 없었던 점, 다가오는 공격에 대한 정보가 나빴던 점을 꼽았습니다. 전투를 지휘한 빙(Julian Byng) 장군은 일선 병사의 훈련 부족을 들었고, 헤이그는 결과에 대한 최종 책임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도 남은 것이 있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캉브레가 비교적 적은 사상자로 독일 방어를 깊고 빠르게 뚫을 수 있음을 보였고, 동시에 성공을 이어 가려면 더 나은 연락이 필요하다는 것도 보였다고 정리합니다. 전차와 항공기의 첫 대량 투입, 그리고 빠르고 사나운 독일의 반격은 새로운 공세의 가능성을 보였고, 양쪽 모두 1918년에 이를 써 보려 했습니다.
1918년 8월 8일 아미앵이 그 무대가 됐습니다. 롤린슨(Henry Rawlinson)의 제4군은 포 2,000문 넘게, 전차 450대, 항공기 1,900대의 지원을 받아 13개 사단으로 공격했고, 이 공격으로 "백일" 공세가 시작됐습니다. 전차 박물관은 캉브레에서 포병·보병·전차·항공기·군수(logistics)·참모·통신이 한 체계로 움직였고, 그 체계가 아미앵에서 제 힘을 다 냈다고 봅니다.
캉브레는 전차를 처음 대량으로, 한데 모은 힘으로 쓴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그 성과와 여론의 좋은 반응이 영국 육군 안에서 전차 군단의 앞날을 굳혔고, 왕립 전차 연대(Royal Tank Regiment)는 지금도 캉브레를 기념합니다.
평가가 한쪽으로만 흐르지는 않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1918년의 전차도 여전히 적의 사격에 약하고 기계가 믿을 만하지 못했으며, 무기로서 전차의 효과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제대로 알려졌다고 적습니다. 미국에서는 1920년 국방법으로 전차 군단이 독립 병과에서 없어져 보병 아래로 들어갔고, 1940년 7월 10일에야 기갑군(Armored Force)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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