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9월,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한 사절단의 짐 속에 영국이 가장 귀하게 지키던 기술 비밀이 들어 있었습니다. 10 cm 공동 마그네트론(cavity magnetron)이라는 진공관이었습니다. 통 구리 덩어리에 구멍 몇 개를 뚫은 이 장치의 후손은 지금 부엌의 전자레인지 안에서도 돌아갑니다.
구멍 뚫린 구리 덩어리가 왜 그렇게 귀했을까요? 2차 대전 직전의 레이다는 높이 100 m가 넘는 탑에 매달린 거대한 고정 시설이었습니다. 이 글은 그 레이다가 무엇에 막혀 있었는지, 공동 마그네트론이 그 벽을 어떻게 넘었는지, 그리고 "레이다가 전쟁을 이겼다"는 말을 기관들이 어떻게 다루는지 공개 기록으로 따라갑니다.
폭격기에 대한 두려움과 레이다
1920년대에 비행기가 커지고, 멀리, 빨리 날게 되자 다음 전쟁의 큰 무기가 되리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폭격이었습니다. 1932년 영국 총리 스탠리 볼드윈(Stanley Baldwin)이 한 말, "폭격기는 언제나 뚫고 들어온다(the bomber will always get through)"가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이 오래 묵혀 둔 기술 하나를 다시 불러냈습니다. 레이다는 전파 펄스를 보내고 멀리 있는 물체에서 돌아온 메아리를 받습니다. 전파는 빛의 속도로 가므로, 펄스를 보낸 때와 메아리가 돌아온 때 사이의 시간으로 거리를 알 수 있습니다. 원리는 레이다: 전파로 거리와 움직임을 어떻게 알까에서 더 자세히 다룹니다.
생각 자체는 오래됐습니다. 1904년 독일의 크리스티안 휠스마이어(Christian Hülsmeyer)가 이런 장치로 특허를 냈지만 관심을 거의 끌지 못했습니다. 1930년대 후반 공습의 위협이 커지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소련, 영국, 미국까지 적어도 여덟 나라의 연구진이 저마다 따로 레이다를 개발했습니다.
영국에서는 1935년 2월 12일 로버트 왓슨와트(Robert Watson-Watt)가 "무선으로 항공기 탐지하기(Detection of aircraft by radio methods)"라는 메모를 보냈습니다. 훗날 핸버리 브라운(Hanbury Brown)은 이 메모를 "레이다의 출생증명서"라고 불렀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은 레이다를 실용 기술로 처음 키운 것이 1930년대 영국의 과학자와 기술자였다고 적으면서도, 발명 자체는 독일에서 나왔다고 덧붙입니다.
체인 홈: 긴 파장과 높은 탑
1939년 9월 전쟁이 터질 때, 영국의 남쪽과 동쪽 해안을 따라 조기 경보 레이다 기지가 이미 늘어서 있었습니다. 체인 홈(Chain Home, CH)입니다. 가장 급했던 영국은 이 체계를 25 MHz에서 작동하게 설계했고, 그 안테나는 단파 방송국 안테나와 거의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25 MHz의 주파수(진동수, frequency)를 빛의 속도로 나눠 보면 파장(wavelength)은 약 12 m입니다. 이렇게 긴 전파를 쓰려면 안테나도 커야 했습니다. 체인 홈 기지는 높이 100 m가 넘는 강철 송신탑을 세운 거대한 고정 시설이었고, 서식스의 폴링 기지에는 110 m 강철 송신탑 셋과 73 m 나무 수신탑 넷이 서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레이다와 달리 체인 홈 안테나는 돌지 않았습니다. 넓은 빔으로 전파 펄스를 내보내 넓은 지역을 한꺼번에 비추는 방식이었습니다. 탐지 거리는 자료에 따라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IWM은 80마일 거리에서 들어오는 적기를 잡을 수 있었다고 하고, 영국 공군 박물관(RAF Museum)은 절벽과 높은 땅에 기지를 두어 최대 320 km(200마일)까지 볼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낮게 나는 비행기는 체인 홈을 피해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1939년 체인 홈 로(Chain Home Low, CHL)를 개발했습니다. CHL은 도는 안테나로 좁은 빔을 보냈고, 고도는 재지 못했지만 152 m 높이로 나는 비행기를 177 km까지 잡았습니다. 1940년까지 CHL 기지를 더해 체인이 완성됐습니다.
레이다 혼자 싸운 것은 아닙니다. 전투기 사령부 사령관 휴 다우딩(Hugh Dowding)의 이름을 딴 다우딩 체계(Dowding System)가 기술, 지상 방어, 전투기를 하나의 방어망으로 묶었습니다. 레이다는 다가오는 공습의 거리, 방위, 규모, 고도를 어림하게 해 주었고, 이 정보가 사령부를 거쳐 방어망 전체로 퍼졌습니다.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레이다는 늘 정확하지 않았고 들어오는 위협의 전체 그림을 주지 못해, 하늘을 눈으로 지켜보는 감시대(Observer Corps)가 정보를 보탰습니다. 효과는 신호를 읽는 운용병의 솜씨와 판단에 크게 기댔습니다. 체인 홈은 바다 쪽을 보고 있었기에 해안선을 넘은 폭격기는 레이다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레이다 덕분에 전투기가 쉬지 않고 하늘을 지킬 필요가 없어져, 지친 조종사들이 숨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독일은 몇몇 기지를 공격했지만 오래 멈춘 곳은 와이트 섬의 벤트너(Ventnor)뿐이었고, 레이다 기지를 부수는 데 힘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1940년 8월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은 그 공격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영국 도시 폭격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구리 덩어리에 뚫은 구멍
체인 홈은 대체로 잘 돌아갔지만, 긴 파장 때문에 바닷가의 탑에 묶여 있었습니다. 배나 비행기에 실을 만큼 작은 레이다를 만들려면 훨씬 짧은 파장, 곧 마이크로파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1939년에는 먼 거리를 보는 레이다에 필요한 고출력 마이크로파를 어떻게 얻을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출발점은 거의 20년 전 미국의 A. W. 헐(A. W. Hull)이 발명한 마그네트론(magnetron)이라는 전자관이었습니다. 헐의 관에는 뜨거운 필라멘트와 그것을 둘러싼 원통형 판이 있었습니다. 헐은 관에 자기장을 걸어 전자의 길을 휘게 했고, 자기장의 세기로 판에 닿는 전류를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관의 쓸모는 거의 찾지 못했습니다.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물리학자 마크 올리펀트(Mark Oliphant)의 지도 아래 해리 부트(Harry Boot)와 존 랜들(John Randall)이 이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두 사람은 미국, 덴마크, 프랑스, 일본 연구자들의 생각을 엮었습니다. 큰 출력을 견디면서 마이크로파를 효율 좋게 내는 마그네트론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당시 진공관은 대부분 유리로 속을 감쌌습니다. 부트와 랜들은 유리 대신 열을 잘 전하는 통 구리 덩어리로 관의 몸체를 만들고, 그 덩어리에 공동(cavity)이라는 구멍을 뚫었습니다. 그러고는 관 전체를 강한 자기장 속에 넣었습니다.
오르간 파이프의 길이가 음높이를 정하듯, 공동의 크기가 마이크로파의 파장을 정합니다. 실제로는 오르간이 공기의 떨림을 고르는 데 비해, 마그네트론의 공동이 고르는 것은 전파의 파장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1940년 2월 21일, 두 사람은 처음으로 작동하는 공동 마그네트론을 시험했습니다. 9.8 cm라는 아주 짧은 파장에서 400 W가 넘는 출력이 나왔습니다. 그 파장에서 그때까지 누구도 낸 적 없는 출력의 거의 백 배였습니다.
9.8 cm는 체인 홈의 12 m보다 120배쯤 짧은 파장입니다. 5월에는 다른 연구자들이 이 마그네트론을 넣은 레이다로 6마일 밖 잠수함의 잠망경을 잡았습니다.
대서양을 건넌 비밀과 MIT 방사선 연구소
같은 해 미국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1940년 6월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 MIT 총장 칼 콤프턴(Karl Compton), 하버드 총장 제임스 코넌트(James Conant)가 국방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 안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냈습니다. 항공기와 배를 탐지하는 일은 곧 마이크로파 쪽으로 좁혀졌고, 앨프리드 루미스(Alfred Loomis)의 위원회가 맡았습니다.
위원회가 찾은 답은 실망스러웠습니다. 마이크로파가 이론으로는 쓸 만해도, 원하는 주파수에서 충분히 강한 마이크로파 원천이 없었습니다.
1940년 9월, 영국은 헨리 티저드(Henry Tizard)가 이끄는 사절단을 미국에 보냈습니다. 사절단은 가장 귀하게 지키던 기술 비밀인 10 cm 공동 마그네트론을 가져갔고, 미국이 이 장치를 대규모로 개발하도록 설득했습니다. 루미스의 위원회는 영국 쪽과 함께 3주 동안 레이다 개발 계획의 뼈대를 세웠습니다.
연구소는 MIT에 들어섰습니다. 소장은 로체스터 대학의 핵물리학자 리 듀브리지(Lee DuBridge), 부소장은 이시도어 라비(Isidor I. Rabi)였습니다.
이름은 방사선 연구소(Radiation Laboratory), 줄여서 래드 랩(Rad Lab)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바깥에서 보기에 핵물리를 연구하는 곳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지은 것이었습니다. 1940년 12월에는 MIT 6동 옥상에서 초보적인 시험 장치가 벌써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연구소는 빠르게 커졌습니다. 1945년 정점에 3500명이 일했고 한 달에 400만 달러 가까이를 썼습니다. MIT 링컨 연구소의 역사 쪽은 래드 랩이 100개가 넘는 레이다 체계를 개발했고, 그 설계로 산업계에서 15억 달러어치의 레이다가 생산됐다고 적습니다. 항공기 폭격 레이다, 함정 탐색 레이다, 항만·해안 방어 레이다, 사격 레이다, 착륙 유도 레이다, 피아 식별 비컨, 장거리 항법 체계 로란(LORAN)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마이크로파 레이다가 바꾼 것
짧은 파장은 무엇이 좋았을까요? 짧은 파장은 좁은 빔으로 모으기 쉬워서, 먼 물체에서 더 많은 에너지가 되돌아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높은 주파수일수록 해상도가 높다는 점입니다. 대공포와 장거리 함포를 레이다만으로 겨누는 일, 비행기 아래의 지형을 화면에 그리는 일에는 마이크로파가 꼭 필요했습니다.
실험실에서 전장까지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1940년 중반 영국의 실험실 마그네트론에서 래드 랩의 첫 10 cm 실험 추적기까지 1년, 다시 1년 뒤 XT-1 시험 모델이 나왔고, 1943년 중반에는 SCR-584가 생산되어 인도되고 있었습니다. 마이크로파 레이다는 마그네트론이 고출력이면서 대량으로 만들 수 있는 장치가 된 뒤인 1943년에야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차 대전의 공중·해상 전투 대부분은 UHF 이하의 레이다로 치러졌습니다. 미국 초기 장비도 200 MHz였고, 미국이 참전할 때 쓸 수 있던 것은 105 MHz의 SCR-270과 205 MHz의 SCR-268이었습니다. 진주만으로 다가오는 항공기를 SCR-270이 잡아내고도 지휘·통제가 이를 살리지 못한 일은 그 시대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레이다의 쓰임은 전쟁 동안 수십 가지로 늘었습니다. 처음에는 탐조등을, 그다음에는 대공포를 겨눴습니다. 배에서는 밤과 안개 속 항해, 적 함선·항공기 찾기, 사격 지휘에 쓰였고, 비행기에서는 적기와 배를 찾고 항법과 폭격 목표 찾기에 쓰였습니다. 군 기상 담당자들은 레이다로 폭풍을 쫓았습니다.
MIT 링컨 연구소의 역사 쪽은 래드 랩의 가장 결정적인 기여로 두 가지를 꼽습니다. 런던을 노린 V-1의 위협을 사실상 무력화했다는 마이크로파 조기 경보(MEW) 레이다, 그리고 U보트의 위협에서 흐름을 바꿨다는 공대수상 탐색(ASV) 레이다입니다. 같은 쪽이 버데리(Buderi)의 책을 인용해 든 숫자로는, 1942년 11월 U보트에 연합국 배 117척이 당했지만 1943년 9~10월 두 달 동안은 9척만 가라앉았고, 그 사이 ASV 레이다를 단 항공기가 U보트 25척을 격침했습니다.
전쟁 중 레이다를 아주 작게 만든 예도 있습니다. 포탄마다 작은 레이다를 넣어 목표 가까이에서 터지게 한 근접신관(proximity fuze)으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2200만 개가 생산됐습니다. 원리는 근접신관: 직접 맞지 않아도 작동하는 이유에 있습니다.
상대편도 손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독일 기술자들도 레이다를 개발했고, 아마 가장 중요했을 뷔르츠부르크(Würzburg)형은 지름 8 m 접시 안테나로 다가오는 항공기를 찾는 체계의 일부였습니다.
"레이다가 전쟁을 이겼다"는 말
이 말은 자주 들립니다. MIT 링컨 연구소의 역사 쪽은 원자폭탄이 2차 대전을 끝냈지만 전쟁을 이긴 것은 레이다였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고 소개하고, 콤프턴이 래드 랩을 "세계 역사상 가장 큰 협동 연구 기관"이라고 부른 말도 옮깁니다. 많은 역사가가 마그네트론이 준 우위가 전쟁의 여러 국면에서 큰 차이를 만들었다고 본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한 걸음 물러섭니다. IEEE 공학기술사 위키(ETHW)의 2차 대전 레이다 쪽은 레이다가 연합국에 승리를 안겼다는 말을 과장이라고 하면서도, 레이다가 양쪽이 전쟁을 치르는 방식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라고 적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을 두고도 강조점이 다릅니다. ETHW의 레이다 쪽은 체인 홈이 공습을 미리 알려 한정된 방공 자원을 움직일 시간을 줬고, 레이다가 흐름을 바꿨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진다고 씁니다. IWM은 영국에 우위를 준 것이 독일이 레이다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보지 못한 데 있었다고 보고, RAF Museum은 승리를 가져온 것이 레이다였는지 괴링의 오판이었는지를 물음으로 남겨 둡니다.
이 문장들을 나란히 놓으면, 레이다의 몫을 말할 때 장비만이 아니라 신호를 읽은 사람과 상대의 판단까지 함께 이야기된다는 것이 보입니다.
전쟁 뒤: 부엌과 레이저까지
래드 랩은 1945년 12월 31일 문을 닫았고, 일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대학으로 돌아갔습니다. 마그네트론은 남았습니다. 2차 대전 뒤 마이크로파를 내는 데 쓰이는 중요한 마그네트론은 전자레인지 속 것까지 포함해 대부분 공동 마그네트론입니다.
전시의 레이다 연구는 레이저(laser)로도 이어졌습니다. 찰스 타운스(Charles H. Townes)는 1933년부터 1947년까지 벨 연구소에서 일하며 2차 대전 중 레이다 폭격 체계 설계에 깊이 참여했습니다. 전쟁 뒤 그는 전시 레이다 연구의 마이크로파 기술을 분광학에 쓰는 쪽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타운스는 1951년 메이저(maser)를 구상했고, 1954년 초 유도 방출(stimulated emission)로 전자기파를 처음 증폭하고 만들어 냈습니다. 1958년에는 A. L. 숄로(A. L. Schawlow)와 함께 메이저가 빛과 적외선 영역에서도 작동할 수 있음을 이론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이 레이저로 가는 길이었고, 레이저가 무엇인지는 레이저란 무엇인가: 전구 빛과 무엇이 다른가에서 이어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레이다: 전파로 거리와 움직임을 어떻게 알까: 왕복 시간과 도플러 효과로 거리와 속도를 재는 원리를 봅니다.
- 위상배열과 AESA 레이다: 안테나를 돌리지 않고 방향을 바꾼다: 탑과 접시 안테나 다음에 온 레이다를 봅니다.
- 근접신관: 직접 맞지 않아도 작동하는 이유: 포탄 속에 들어간 작은 레이다를 자세히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레이다 뒤에 이어진 무기 기술의 큰 갈림길을 짚습니다.
- 레이저와 고출력 마이크로파: 지향성 에너지 두 가지: 마이크로파와 레이저가 오늘날 무기 기술에서 어떻게 다시 만나는지 봅니다.
- 영국 본토 항공전: 레이다와 관제가 만든 방공망: 체인 홈과 다우딩 체계가 실제 전투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이어 봅니다.
- 대서양 전투: U보트와 호송 선단의 긴 싸움: ASV 레이다가 나선 바다의 싸움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