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늦여름, 프랑스 북부의 좁은 시골길 곳곳에 붉은 공 표시가 붙었습니다. 그 표시를 따라 군용 트럭이 밤낮없이 한쪽 방향으로만 달렸습니다. 짐칸에는 휘발유와 탄약, 식량이 실려 있었습니다.

전차가 아무리 빨라도 연료가 떨어지면 멈춥니다. 노르망디 상륙 뒤 프랑스를 가로지르던 미군이 맞닥뜨린 문제가 이것이었습니다. 보급과 수송, 정비를 묶어 군수(logistics)라고 부르는데, 레드볼 익스프레스(Red Ball Express)는 2차 대전의 군수가 길 위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잘 보여 줍니다.

이 트럭 길이 왜 생겼고 어떻게 돌아갔는지, 운전대를 잡은 사람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왜 자료마다 숫자가 다른지를 차례로 봅니다.

진격이 보급을 앞지르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국·영국·캐나다군은 교두보를 넓히고 빠져나오는 데 한참 애를 먹었습니다. 7월 중순에는 100만 명 넘는 연합군이 프랑스 땅에 있었지만, 이들이 쥔 땅은 폭 50마일, 깊이 20마일에 그쳤습니다.

판이 바뀐 것은 7월 25일 코브라 작전(Operation Cobra)부터입니다. 미군 보병과 기갑 부대가 산울타리가 얽힌 노르망디를 벗어나 프랑스 중부의 열린 들로 나왔습니다. 그 뒤 패튼(George S. Patton Jr.)이 이끈 제3군의 일부 부대는 한 주에 80마일 넘게 나아가는 일이 잦았고, 연합군은 8월 말까지 파리와 북프랑스의 많은 지역을 해방했습니다.

빠른 진격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많은 경우 앞선 부대가 연료·식량·탄약 보급을 앞질러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2004년 6월 14일 레드볼을 기리는 결의안을 다룬 미 하원 회의에서 캘리포니아의 헌터(Hunter) 의원은 8월 말 파리에 들어갈 무렵 미 제1군과 제3군이 하루에 휘발유 800,000갤런을 쓰고 있었고 예비분도 바닥났다고 말했습니다.

철도와 항구가 막힌 까닭

프랑스에는 철도가 깔려 있었지만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독일군이 프랑스 철도를 쓰지 못하게 하려고 연합군 폭격기가 다리와 증기 기관차, 조차장을 많이 부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연합군도 철도로 보급품을 실어 나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항구 사정도 나빴습니다. 늘어나는 연합군에 필요한 연료·식량·탄약은 대부분 노르망디의 셰르부르(Cherbourg) 항구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거기서 트럭에 실어 좁은 시골길로 샤르트르·라루프·드뢰(Chartres, La Loupe, Dreux)를 잇는 삼각 지대의 미군 보급 집적소까지 날랐습니다.

벨기에의 큰 항구 안트베르펜(Antwerp)은 9월 4일 항만 시설이 거의 온전한 채로 영국군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북해에서 항구로 들어오는 셰르데(Scheldt) 강 어귀를 독일군이 여전히 쥐고 있어 배가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강의 기뢰를 걷어 낸 뒤 첫 호송 선단이 항구에 들어온 것은 11월 28일입니다. 그때까지 항구와 전선 사이의 먼 거리는 바퀴로 메워야 했습니다.

붉은 공 표시의 일방통행 길

미군 지휘관들이 내놓은 답은 트럭 전용 길이었습니다. 이름은 미국 철도에서 급행 우선 열차를 표시하던 붉은 점에서 따왔습니다. 길에도 붉은 공 표시를 달았습니다.

만든 쪽의 이름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하원 결의문에는 육군 자동차 수송 근무단(Army Motor Transportation Service)이, 미 국방부 보도국 기사에는 육군 수송 병과(Army Transportation Corps)가 나옵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The National WWII Museum)의 글에는 이 호송 체계를 실행한 사람으로 플랭크(Ewart G. Plank) 준장이 나옵니다.

레드볼 익스프레스의 짜임을 보여 주는 개념 도표. 왼쪽 상자는 노르망디의 항구 셰르부르로, 배에서 연료·식량·탄약을 내리는 곳이다. 가운데 상자는 샤르트르, 라루프, 드뢰 삼각 지대의 보급 집적소다. 두 상자 사이 위쪽에는 짐을 실은 트럭이 나가는 주황 화살표, 아래쪽에는 돌아오는 트럭의 회색 화살표가 있고 돌아오는 길에는 독일군 포로를 싣는 일이 잦았다고 적혀 있다. 가운데에 호송대만 쓰는 일방통행 길이라는 글이 있고, 화살표 위의 검은 점은 헌병이 지킨 교차로다. 집적소에서 오른쪽으로 제1군(길 약 400마일)과 제3군(길 약 350마일) 상자로 화살표가 뻗는다. 아래에는 끊긴 점선으로 프랑스 철도가 그려져 있고 연합군 폭격으로 다리·기관차·조차장이 많이 부서졌다는 글이 있다. 오른쪽 아래 흐린 점선 상자는 11월 28일까지 배가 들어오지 못한 안트베르펜이다. 지도가 아니며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항구에서 집적소까지 일방통행 고리를 돌고, 집적소에서 두 군으로 나눴습니다. 기관 자료의 설명을 상자와 화살표로만 줄였습니다 (도표)(도표)

길은 노르망디에서 파리로, 나중에는 프랑스 북동부 접경의 전선까지 뻗었습니다. 트럭은 호송대만 쓰는 일방통행 길을 따라 쉬지 않고 고리를 돌았습니다. 교차로마다 헌병이 서서 트럭이 어떤 이유로도 멈추지 않게 했고, 돌아오는 트럭은 독일군 포로를 싣는 일이 잦았습니다.

트럭은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달렸습니다. 2019년 미 육군 기사에 나온 거리는 제1군까지 400마일, 제3군까지 350마일이었습니다. 가장 바쁠 때는 트럭 중대 140개가 길에 늘어섰고, 셰르부르와 샤르트르를 오가는 데 54시간이 걸렸습니다. 운전병은 흔히 두 사람이 한 조였습니다.

계획과 실제는 달랐습니다. 처음 계획은 지프가 이끄는 호송대가 시속 25마일로 차 사이를 60야드씩 띄우고 달리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는 트럭이 혼자 다니는 일이 잦았고, 짐을 싣자마자 셰르부르를 떠나 등화관제 속에서도 시속 60마일 넘게 내달렸습니다.

트럭을 몬 사람들

운전병의 대다수는 흑인 병사였습니다. 2차 대전 동안 많은 지휘관이 흑인 병사는 전투 임무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 근무·지원·보급 임무로 돌렸다고 하원 결의문은 적었습니다. 헌터 의원은 연설에서 이들이 인종에 따라 나뉜 트럭 중대와 병참(quartermaster) 부대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미 국방부 보도국 기사에 적힌 숫자로는 레드볼이 끝날 무렵 유럽에서 복무하던 흑인 병사가 210,209명이었고, 그 가운데 93,292명이 병참 병과에 있었습니다. 운전병이 모두 트럭 운전을 훈련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급한 사정이 이들을 새 일로 떠밀었습니다. 대부분 24세 아래였고 전쟁 전에 트럭을 몰아 본 사람은 적었습니다.

길은 위험했습니다. 사고와 피로, 적 항공기는 운전병이 길에서 맞닥뜨린 위험의 일부였습니다. 병사들은 지뢰가 터질 때를 대비해 운전석 바닥에 모래주머니를 깔았고, 트럭은 엔진 과열과 타 버린 모터, 닳은 타이어로 크게 상했습니다.

운전병들은 속도 제한과 무게 제한, 자기 몸의 피로를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육군은 교대 운전병을 옆자리에 태우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장군은 레드볼을 "생명줄(lifeline)"이라고 불렀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레드볼은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숫자는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아래 도표와 목록은 각 자료에 적힌 값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자료별 숫자를 견주는 도표. 맨 위는 전체 수송량 가로 막대로 단위는 천 톤이다. 2004년 하원 결의문 410 넘게, 국립 2차 대전 박물관(2021) 412 넘게, 미 국방부 보도국 기사(2002) 412.193은 짙은 막대이고, 2004년 존슨 의원 연설 500 가까이, 로드리게스 의원 연설 500은 주황 막대다. 가운데는 흑인 운전병 비율로 70%에서 80%까지의 줄 위에 75%와 80%에 점이 있다. 75%는 박물관(운전병)과 2019년 육군 기사(운전병과 정비병), 75% 가까이 또는 4분의 3은 국방부 보도국 기사와 라슨·헌터 의원 연설, 80%는 로드리게스 의원 연설이다. 아래는 시작일로, 8월 21일 만들고 8월 25일 운행(하원 결의문, 국방부 보도국), 8월 21일 운행 시작(박물관), 8월 25일 배달 시작(2019년 육군 기사)이 적혀 있다. 짙은 색은 기관의 글, 주황은 의원 연설이다
같은 일을 세는 숫자가 자료마다 다릅니다. 자료에 적힌 값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 전체 수송량: 하원 결의문 410,000톤 넘게, 박물관 412,000톤 넘게, 미 국방부 보도국 기사 412,193톤. 의원 연설에서는 존슨(Eddie Bernice Johnson) 의원 500,000톤 가까이, 로드리게스(Rodriguez) 의원 500,000톤.
  • 시작일: 하원 결의문과 국방부 보도국 기사는 8월 21일 만듦, 8월 25일 운행 시작. 박물관은 8월 21일 운행 시작, 2019년 육군 기사는 8월 25일 배달 시작.
  • 6,000이라는 수: 박물관은 트럭 6,000대 넘게, 육군 기사는 운전병 6,000명 넘게, 헌터 의원 연설은 가장 많을 때 차량 6,000대 가까이.
  • 흑인 운전병 비율: 박물관 75%, 육군 기사 운전병과 정비병의 75%, 국방부 보도국 기사 75% 가까이, 헌터 의원 4분의 3, 로드리게스 의원 80%.

결의문 본문은 하원이 표결로 통과시킨 글이고, 의원 연설은 그 결의안을 지지하며 한 개인의 말입니다. 도표에서 두 가지를 색으로 나눈 까닭입니다.

82일 뒤의 끝

레드볼은 82일 동안 달렸다는 데 여러 자료가 일치합니다. 박물관 글에 따르면 운행 중 어느 때든 평균 900대가 길 위에 있었고, 하루 12,000톤으로 추정되는 보급품을 날랐습니다. 짐은 28개 사단에 닿았습니다.

끝난 때는 표현이 엇갈립니다. 국방부 보도국 기사에는 11월 중순, 하원 결의문에는 1944년 11월, 박물관 글에는 11월 말로 나옵니다. 로드리게스 의원의 연설에는 8월 25일부터 11월 16일까지라는 날짜가 있습니다.

1944년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크게 표시), 7월 중순 100만 명 넘는 연합군이 폭 50마일·깊이 20마일의 교두보에 있음, 7월 25일 코브라 작전과 돌파 시작(크게 표시), 8월 21일 레드볼 익스프레스를 만듦(일부 자료는 첫 호송대 출발), 8월 25일 보급 트럭이 하루 24시간 달리기 시작(크게 표시), 8월 말 파리 해방과 2004년 의회 연설이 말한 하루 휘발유 80만 갤런, 9월 4일 안트베르펜을 항만 시설이 거의 온전한 채로 잡았지만 셰르데 강 어귀는 독일군이 쥐고 있음, 11월 중순 레드볼이 끝남(한 의회 연설은 11월 16일, 크게 표시), 11월 말 첫 호송 선단이 안트베르펜 항구에 들어오고(11월 28일) 운전병이 원래 부대로 돌아감. 8월 25일부터 11월 중순까지 옅은 띠에 '82일'이라고 적혀 있다. 맨 아래에 시작일과 끝난 날이 자료마다 다르다는 메모가 있다
노르망디 상륙부터 레드볼이 끝나기까지.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안트베르펜 항구가 열린 뒤 레드볼 운전병들은 원래 부대로 돌아갔습니다. 레드볼이 잘 돌아가자 필요할 때마다 프랑스 곳곳에 비슷한 호송 체계가 여러 개 세워졌습니다.

레드볼이 남긴 것

박물관 글은 1944년의 미 육군을 세계에서 가장 기계화된 군대로, 독일군을 아직 수송을 말에 크게 기댄 군대로 적었습니다. 운전병들의 일은 육군이 널리 알렸고, 1952년에는 같은 이름의 영화도 나왔습니다. 영화는 이야기이고, 이 글의 숫자와 날짜는 기관 자료에서 왔습니다.

2004년 6월 14일 미 하원은 레드볼에 참여한 장병을 기리는 결의안을 3분의 2 찬성으로 통과시켰습니다. 결의문은 이들이 모욕과 이중 잣대를 견디면서도 전쟁에 이바지했다고 적었습니다.

2019년 75주년 때 미 육군 군수참모부장(G-4) 앤드리 피기(Aundre F. Piggee) 중장은 운전병이던 아버지 로런드 피기(Roland Piggee) 병장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는 앞으로의 레드볼은 로봇이 짐을 싣고, 무인 트럭이 호송대에 끼고, 무인 항공기가 보급품을 나르는 모습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재보급량은 늘리고 운전병 수와 호송대의 위험은 줄이는 것이 과제라는 것이 그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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