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빠르게 지나가는 비행기를 포탄 한 발로 정확히 맞힌다고 생각해 봅시다. 포탄이 날아가는 동안 비행기도 움직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는 이런 직접 맞히기가 그 시대 기술을 크게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꼭 맞히지 않고, 표적 가까이에서 터지게 하면 어떨까요? 근접신관(proximity fuze)은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나온 장치입니다. VT 신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1940년 여름의 출발부터 1943년 첫 실전, 그리고 전쟁 뒤의 이야기까지 따라가 봅니다.

신관과 근접신관: 맞히는 대신 가까이에서

포탄이나 폭탄 안에는 폭약이 들어 있습니다. 근접신관은 그 폭약을 표적 가까이에서 터뜨리는 신관(fuze)입니다.

존스홉킨스대 응용물리연구소(APL)가 1962년에 낸 역사 글은 이 장치를 "항공기를 파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포탄을 터뜨리는 장치"로 소개합니다. 그런 장치는 오랫동안 만들 수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VT는 'variable time'의 머리글자이고, VT 신관은 근접신관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입니다.

왜 굳이 가까이에서 터뜨리려 했을까요? 미 국립표준국(NBS)이 맡은 과제를 정리한 NIST의 역사 자료는 두 가지 까닭을 듭니다. 첫째, 직접 맞히기는 흔히 어렵고, 표적 가까이에서 터지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둘째, 표적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서 터질 때 피해가 더 클 때가 많습니다.

두 칸 개념 도표. 왼쪽 칸은 점선으로 날아간 탄이 항공기 모양 표적에 닿아야 하는 직접 맞히기를, 오른쪽 칸은 표적 둘레의 점선 원 안에 들어온 탄이 표적에 닿기 전에 그 자리에서 터지는 근접신관을 나타낸다
직접 맞히기와 근접신관의 생각 차이: 앞의 것은 탄이 표적에 닿아야 하고, 뒤의 것은 표적 가까이에 오면 그 자리에서 터집니다. 거리와 크기는 실제 값이 아닌 개념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과녁 맞히기 놀이에 빗대 볼 수 있습니다. 한가운데 점을 맞혀야만 점수를 주는 놀이와, 점 둘레의 원 안에만 들어와도 점수를 주는 놀이의 차이입니다. 실제로는 다릅니다. 놀이에서는 심판이 원을 보고 판정하지만, 근접신관은 표적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탄에 실린 장치가 스스로 알아채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개발 이야기

출발점은 1940년 여름입니다. 1940년 6월 27일 미국에 국방연구위원회(National Defense Research Committee, NDRC)가 세워졌고, 그 아래 Section T라는 반이 근접신관 찾기를 맡았습니다. 1940년 8월 중순에는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답이 하나로 정해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연구진은 빛을 쓰는 광전 방식, 소리를 쓰는 음향 방식, 전파를 쓰는 방식의 세 가지 가능성을 함께 살폈습니다. 초기 작업은 카네기 연구소의 지자기과에서 몇 안 되는 과학자가 해냈습니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가로 시간 축 위에 여덟 사건을 위아래로 번갈아 적은 연표. 1940년 6월 국방연구위원회 설립, 1940년 8월 세 방식 탐색, 1941년 2월 NBS 첫 시연, 1941년 9월 시험 사격 성공, 1942년 1월 생산 계약 준비, 1942년 3월 APL 설립, 1943년 1월 첫 실전 기록, 1945년 8월 누적 생산 집계
미국의 근접신관 개발 연표. 공개 역사 자료에 나온 연·월만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일은 곧 두 갈래로 나뉘었습니다. Section T의 일 가운데 포탄 신관이 아닌 사업은 모두 국립표준국(NBS)으로 옮겨 갔습니다. NBS의 과제는 회전하지 않고 날개로 자세를 잡는 탄약에 쓸 신관이었고, 그 대상은 로켓, 폭탄, 박격포탄이었습니다. NBS 쪽의 개념은 1941년 2월에 처음 시연되었습니다.

포탄 쪽도 빠르게 나아갔습니다. 1941년 9월까지 완성된 신관이 시험 사격에서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1942년 1월에는 미 해군 5인치 포에 쓸 기본형 신관의 생산 계약을 쓸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1942년 3월 10일에는 과학연구개발국(Office of Scientific Research and Development, OSRD)과 존스홉킨스대가 계약을 맺었습니다. APL이 세워진 날도 이날이고,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들어간 지 석 달 뒤였습니다. APL이 받은 과제는 함정이 적의 항공 공격을 더 잘 막아 낼 방법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조직 도표. 위의 국방연구위원회 Section T 상자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왼쪽은 포탄 신관을 맡은 APL로 해군 5인치 포의 대공포탄과 뒤의 지상 포병, 오른쪽은 그 밖의 사업을 맡은 NBS로 날개 안정식 탄약인 로켓·폭탄·박격포탄을 적었다
2차 세계대전 때 근접신관 개발은 포탄 쪽(APL)과 로켓·폭탄·박격포탄 쪽(NBS)으로 나뉘어 진행되었습니다 (도표)(도표)

첫 신관은 남태평양에서 5인치 포를 갖춘 함정들로 먼저 보내졌습니다. APL 기술 회보는 1943년 1월 5일 일본 항공기 한 대가 근접신관으로 격추되었다고 적습니다. 대서양과 지중해 쪽 도입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로 약 여섯 달 일부러 늦췄습니다.

규모도 컸습니다. APL 기술 회보는 생산 과정을 돌아보는 대목에서 1945년 8월 14일까지 모두 22,073,481개의 신관이 생산되었다고 적습니다. NBS가 맡은 로켓·폭탄용까지 이 수에 들어 있는지는 그 글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근접신관의 개발과 제조는 전쟁에서 가장 잘 지켜진 비밀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NBS가 맡은 신관도 전선에 나갔습니다. 로켓과 폭탄용 신관은 대량 생산되어 전쟁 끝 무렵 널리 쓰였습니다. 박격포탄용은 본격 생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 중요했나: 공개 자료가 말하는 의미

이 신관이 당시에 어떤 의미였는지는 전쟁 중과 그 뒤에 남은 평가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평가는 세 갈래이고, 말한 쪽이 저마다 다릅니다.

먼저 개발 기관의 서술입니다. APL은 자기 역사를 소개하는 쪽에서, 이 레이다 근접신관이 태평양에서 대공포탄의 효과를 크게 높였고 뒤에는 유럽 상륙 때 지상 포병의 효과도 높였다고 씁니다. 그 쪽에는 이 개발 성과가 원자폭탄, 레이다와 함께 전쟁에서 가장 값진 세 기술 개발 가운데 하나로 뒤에 평가되었다는 문장도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평가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다음은 해군 지휘부의 말입니다. APL 기술 회보는 당시 미 함대 사령관이 VT 신관의 개발을 "연합국의 승리에 크게 이바지한 큰 과학적 성과"라고 말했다고 옮깁니다.

셋째는 신관을 실제로 쓴 부대의 결론입니다. NIST 자료가 옮긴 군의 결론에 따르면, 전쟁이 끝날 무렵 사용 부대들의 폭탄·로켓용 신관에 대한 태도는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신관이 얼마나 쓸모 있을지 의심하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여러 전역의 전투 경험이 그 시각을 바꾸었고, 전쟁이 끝날 때 부대들은 이 신관을 매우 반겼습니다.

세 평가는 모두 신관을 만든 기관이나 쓴 군 쪽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숫자로 잰 효과라기보다 당사자들이 남긴 판단으로 읽는 편이 알맞습니다.

전쟁 뒤: 기관과 기록

전쟁이 끝나고도 근접신관 일은 이어졌습니다. NIST의 역사 쪽은 근접신관을 NBS의 대표적 전시 개발 가운데 하나로 꼽습니다. 1953년에는 그 무렵 1,600명에 이르던 NBS의 근접신관 집단 전체가 육군부로 옮겨 갔습니다.

기록 가운데에는 오래 묶여 있던 책도 있습니다. NBS 직원들이 전쟁 끝에 정리한 근접신관 단행본 한 권은 1940년 무렵부터 1945년까지의 작업을 모은 것입니다. 이 책은 기밀 등급이었다가 1960년에야 해제되었습니다.

근접신관의 핵심 생각은 간단합니다. 탄을 표적에 맞히는 대신, 표적 가까이 왔다는 것을 탄이 알아채고 그 자리에서 터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이 생각은 1940년 여름에 연구로 시작되어, 1943년 1월에는 첫 실전 기록으로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