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에는 낡은 지팡이 하나가 있습니다. 주인 모건 존스(Morgan Jones)는 랑군 동물원의 회계원이었고, 1942년 이 지팡이를 짚고 랑군에서 인도의 임팔까지 600마일을 걸었습니다. 산맥과 강을 건너는 길이었습니다.

그해 버마를 떠난 피란민은 수십만 명이었습니다. 몬순 비 속에서 굶주림과 탈진, 질병으로 숨진 사람이 끔찍하게 많았습니다. 그런데 2년 뒤, 바로 그 임팔에서 일본군의 큰 공세가 꺾였습니다. 포위된 부대들은 끊긴 도로 대신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급으로 버텼습니다.

IWM이 1941~1945년으로 묶는 버마 전역(Burma Campaign)은 2차 대전에서 영국의 가장 긴 지상 전역이었습니다. 길이 거의 없는 정글과 산에서 군대를 먹이고 옮기는 일은 어떻게 승패와 이어졌을까요? 후퇴와 재편, 하늘 보급, 임팔·코히마의 포위전, 1945년의 재점령을 차례로 따라가 봅니다.

왜 버마였나

버마는 지금의 미얀마입니다. 영국령 인도의 일부였다가 1937년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됐습니다. 가운데에는 넓은 평야가 있지만, 국경 쪽은 빽빽한 정글에 덮인 높은 산맥이 둘러쌉니다.

영국에 버마는 원자재의 중요한 원천이었습니다. 1930년대 중일 전쟁이 터진 뒤에는 수도 랑군(Rangoon)에서 나가는 도로와 철도가 중국 남서부 윈난의 국민당군에게 미국의 군사 원조를 나르는 길이 됐습니다. 영국 제국과 중국을 잇는 단 하나의 보급 도로, 버마 도로(Burma Road)도 이 나라를 지났습니다.

일본의 셈은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버마를 차지하면 중국을 바깥 원조에서 끊을 수 있었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 NAM)의 연표는 일본 15군이 앞선 공격의 옆구리를 지키고 중국으로 가는 미국 보급로를 끊으려고 버마로 들어왔다고 적습니다.

땅과 날씨도 이 전쟁의 한 편이었습니다. 양쪽 군인 모두 거친 정글과 험한 지형, 몬순 비, 질병과 싸워야 했습니다. 버마의 몬순은 5월에 와서 10월까지 이어집니다.

버마 전역 연표 도표. 네 칸으로 나뉜다. 1942년 후퇴: 1월 일본군의 버마 침공 시작, 후퇴 중 시탕 다리가 너무 일찍 무너져 병력이 갇힘, 3월 8일 랑군 함락, 5월 연합군이 인도 국경에 닿고 몬순으로 싸움이 멈춤, 9월 1차 아라칸 공세 명령. 1943년 다시 짜기: 2~5월 친디트의 첫 원정(롱클로스)이 하늘 보급을 받음, 아라칸 공세 실패 뒤 슬림의 새 14군, 11월 동남아시아 사령부(SEAC) 출범. 1944년 포위전: 2월 4일 어드민 박스가 포위돼 하늘 보급을 받음, 3월 써즈데이 작전으로 친디트 여단을 공수, 3월 8일 임팔·코히마 싸움 시작(우고 작전), 4월 5~18일 코히마가 하늘 보급으로 버티고 18일 구원군 도착, 5월 17일 미치나 비행장 점령, 6월 22일 임팔 포위가 풀림, 7월 일본군 철수. 1945년 재점령: 1~2월 일본군을 이라와디강까지 밀어냄, 3월 메이크틸라·만달레이 점령, 3월 27일 아웅 산의 버마 국민군이 일본에 맞섬, 5월 3일 랑군 점령, 9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시아 일본군 항복. 파랑은 연합군, 주황은 일본군, 초록은 하늘 보급이나 공수.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1942년의 후퇴부터 1945년의 항복까지. 영국 전쟁박물관, 국립육군박물관, RAF 박물관 자료의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1942년: 인도까지의 긴 후퇴

1942년 1월 일본군이 버마를 침공했습니다. 버마의 영국 쪽 병력은 정원에 못 미치는 두 사단뿐이었습니다. 후퇴하던 혼란 속에서 시탕(Sittang)강의 다리가 너무 일찍 무너져 인도군 수천 명이 강 건너편에 갇혔고, 3월 8일 수도 랑군이 일본군에 넘어갔습니다.

연합군은 북쪽으로 물러나 중부 버마를 지키려 했습니다. 중국 5군과 6군이 합류해 전선의 동쪽 끝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연합군은 수십만 명의 민간인과 함께 인도 쪽으로 물러났습니다.

후퇴는 다섯 달 동안 험한 땅 1,000마일(1,600 km)을 싸우며 걸은 길이었습니다. NAM은 이를 영국 군사사에서 가장 긴 후퇴로 꼽습니다. 연합군이 인도 국경에 닿은 것은 1942년 5월이었고, 곧 몬순이 와서 싸움이 멈췄습니다.

인도 쪽 사정도 나빴습니다. 벵골 지방은 이때부터 기근으로 빠져들었고, 이 기근은 결국 200만~300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1943년: 실패와 다시 짜기

첫 반격은 해안에서 나왔습니다. 인도 사령관 아치볼드 웨이벌(Archibald Wavell) 장군은 1942년 9월 아라칸(Arakan) 해안을 공격해 아키아브(Akyab)섬의 일본군 비행장을 차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영국·인도군은 여기서 일본군의 방어 벙커를 처음 만났고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벙커가 너무 단단해 영국 장교들이 콘크리트로 지은 줄 잘못 알았을 정도입니다.

IWM은 실패한 아라칸 공세를 연합군이 꼭 들어야 했던 경종으로 봅니다. 연합군은 부대를 다시 짜서 윌리엄 슬림(William Slim) 장군이 이끄는 새 14군을 만들었습니다. 병사들의 사기를 되살리는 일과 함께 질병을 막는 엄격한 새 규칙, 군수(logistics)의 새 방법이 들어왔습니다. 1943년 11월에는 루이스 마운트배튼(Louis Mountbatten) 제독 아래 동남아시아 사령부(South East Asia Command, SEAC)가 생겨 작전 지휘를 넘겨받았습니다.

같은 해 2월에는 전혀 다른 실험도 있었습니다. 오드 윈게이트(Orde Wingate) 준장이 이끈 친디트(Chindits)가 롱클로스(Longcloth) 작전으로 처음 버마에 들어간 것입니다. 목적은 일본군의 병참선을 흐트러뜨리고 장거리 침투 전술을 시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일곱 개 종대가 걸어서 일본군 뒤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다리와 철도를 부수고 후방을 흔들다가 5월에 물러났고, 그동안의 보급은 하늘에서 받았습니다. IWM은 이 습격의 군사적 효과는 작았다고 볼 수 있지만 심리적 효과는 컸다고 평가합니다. 하늘 보급을 받으며 정글에서 살아남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대가도 컸습니다. 친디트는 사상자가 많았고 병에 걸린 사람도 많았습니다.

하늘로 나르는 보급

그룹 캡틴 데릭 그루콕(Deryck Groocock)은 버마에서 다코타(Dakota) 수송기를 몰았습니다. 1995년 영국 공군 역사학회 심포지엄에서 그는 자신을 "마지못해 다코타 조종사가 된" 사람으로 소개했습니다. 그의 설명으로는 제공권을 얻은 뒤 지상군을 거의 모두 하늘로 보급할 수 있었고, 철도와 도로, 배가 다닐 강이 거의 없는 땅에서 이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보급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지상군에 닿았습니다. 비행기가 내려앉아 짐을 내리는 공중 착륙과, 날면서 떨어뜨리는 공중 투하입니다. 착륙은 되도록 있던 비행장에 했지만, 지상군이 손수 닦은 활주로에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루콕은 다코타 같은 항공기가 없었다면 이 작전들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힘든 기후에서 오래 일한 정비 인원의 몫도 함께 꼽았습니다.

몬순을 보는 눈도 바뀌었습니다. 1944년 전에는 5월부터 10월까지의 몬순 동안 작전을 하기 어렵다고 여겼지만, 1944년에 이 생각이 모두 바뀌었습니다.

방침도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일본군이 병참선을 끊으면 영국군이 물러났고, 몬순에는 작전이 거의 멈췄습니다. 이제는 끊겨도 그 자리에서 버티며 하늘 보급에 기대고, 가장 힘든 조건에서도 싸우는 것이 방침이 됐습니다. 슬림은 포위된 부대가 하늘로 보급을 받는 방어 '박스(box)'를 만들게 했습니다.

1944년 2월 아라칸의 싸움이 그런 예입니다. 2월 4일 공세를 연 일본군은 빼앗은 보급품에 기대어 신즈웨야(Sinzweya)의 영국군을 둘러쌌고, 이곳이 '어드민 박스(Admin Box)'로 불렸습니다. 영국군은 물러나지 않고 땅을 파고 들어가 하늘에서 보급을 받았습니다.

버마 전역의 보급로를 네모와 선으로 그린 개념도. 왼쪽 인도 칸에는 아삼의 비행장과 레도, 디마푸르·코히마·임팔이 위아래로 이어진 도로(1944년 코히마에서 끊김), 인도의 공군 기지(다코타와 C-46 같은 수송기)가 있다. 가운데 버마 칸에는 미치나, 만달레이, 메이크틸라, 수도 랑군과 일본군 뒤의 친디트가 있다. 오른쪽 위 중국 칸은 중국 남서부 윈난이다. 랑군에서 중국으로 가는 점선 화살표는 버마 도로로, 미국 원조를 나르다 1942년 일본이 버마를 차지하며 끊겼다는 메모가 있다. 아삼에서 중국으로 크게 휘는 파란 화살표는 1942년부터의 험프 공수로, 약 500마일(800 km)을 15,000 ft(4,500 m)까지의 산 위로 날았다는 메모가 있다. 보라색 선은 1942년 말 시작된 레도 도로로 미치나를 거쳐 중국으로 간다. 초록 화살표는 인도의 기지에서 코히마, 임팔, 친디트, 메이크틸라 쪽으로 가는 하늘 보급이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다
땅길이 끊긴 자리를 하늘길과 새 도로가 메웠습니다. 지도가 아니라 흐름을 보여 주는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버마 도로가 끊긴 뒤 중국으로 가는 길은 하늘에 남았습니다. 인도 아삼(Assam)에서 윈난의 험한 산을 넘는 이 하늘길을 사람들은 '혹'이라는 뜻의 '험프(the Hump)'라고 불렀습니다. RAF 박물관 전시에 따르면 비행 거리는 500마일(800 km)이었지만, 짐을 가득 실은 수송기의 한계에 가까운 15,000 ft(4,500 m)의 산쑹(Santsung) 산맥을 넘어야 했습니다. 같은 박물관의 연구원 글은 그 산맥을 파트카이(Patkai) 산맥으로 적습니다.

길은 험했습니다. 비행기를 흔들어 부술 만큼 거센 적란운이 있었고, 외딴 정글에 떨어지면 구조될 가망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도 양은 크게 늘었습니다. 미 항공수송사령부(Air Transport Command)가 1942년 7월 한 달에 나른 짐은 85톤이었지만, 1945년 7월에는 한 달에 71,000톤이 하늘로 중국에 갔습니다. 미국 수송기들이 나른 연료와 탄약, 물자는 모두 650,000톤이었습니다.

땅길도 새로 놓았습니다. 1942년 말 미국은 아삼의 레도(Ledo)에서 도로를 닦기 시작했고, 이 길은 결국 1,079마일 길이가 됐습니다. 미국 국립 2차 대전 박물관(The National WWII Museum)에 따르면 중국·버마·인도(China-Burma-India, CBI) 전역에 배치된 군인 약 25만 명 가운데 15,000명이 레도 도로를 지었고, 그 60%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습니다. 이 박물관은 험프 공수가 형편을 덜어 줬지만 길게 보면 모자랐다고 설명합니다.

1944년 3월 친디트가 다시 들어갔습니다. 써즈데이(Thursday) 작전이라 불린 둘째 원정은 첫 원정보다 여섯 배 컸고, 약 2만 3천 명이 투입됐습니다. 이번에는 RAF와 미 육군 항공대의 수송기가 두 여단의 선두를 일본군 뒤로 날라 갔습니다.

그루콕의 설명으로는 첫 비행은 3월 5/6일 밤으로 잡혔고 착륙지 셋을 쓸 계획이었습니다. 마지막 정찰에서 한 곳이 막혀 있어 착륙지를 하나로 줄였고, 글라이더를 많이 잃었습니다. 그래도 활주로가 생겼고, 곧 다코타가 병력과 노새, 보급품을 정기적으로 날랐습니다.

미국의 1 항공 코만도 그룹(First Air Commando Group)은 1944년 3월 생겨 친디트를 엄호하고 타격하고 실어 나르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부대에는 시코르스키 R-4 헬리콥터도 몇 대 있었습니다. 3월 24일 윈게이트가 비행기 사고로 숨진 뒤, 친디트는 장비도 훈련도 맞지 않는 소모전에 끌려들었습니다.

북쪽에서는 미군 보병도 정글을 걸었습니다. 프랭크 메릴(Frank Merrill) 준장의 이름을 딴 '메릴의 머로더스(Merrill's Marauders)', 정식 이름 5307 혼성부대(임시)입니다. 이 부대는 1944년 2월 처음 싸웠고, 5월 17일 미치나(Myitkyina) 비행장을 차지했습니다. 8월 3일 미치나 점령을 도운 뒤 8월 초에 해체됐고, 적만큼 환경이 이 부대에 큰 피해를 줬습니다.

미치나는 미국의 스틸웰(Stilwell) 장군이 이끈 X군과, 중국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중국군 여러 사단인 Y군이 함께 차지했습니다. 이로써 버마 도로를 다시 열 길이 생겼습니다.

1944년: 임팔과 코히마

1944년 3월 일본 15군이 인도 북동쪽 국경으로 나아갔습니다. 우고(U-Go) 작전입니다. 목적은 영국의 버마 침공을 앞질러 막는 것이었고, 임팔 평야의 영국 보급 기지를 빼앗고 코히마에서 디마푸르와 임팔을 잇는 도로를 끊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임팔을 얻으면 중국으로 가는 하늘 보급도 흔들 수 있었습니다.

이 계획을 낸 사람은 무타구치 렌야(Renya Mutaguchi) 중장이었고, 그는 일본군 세 사단과 인도 국민군(Indian National Army) 한 사단을 이끌었습니다. 싸움은 3월 8일부터 7월 18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수비 쪽은 하늘로 병력을 보탰습니다. 아라칸에 있던 5인도사단과 그 장비가 이틀 만에 임팔로 날아왔습니다. 이 공수의 출격 수는 RAF 박물관 연표에 748회, 그루콕의 발표에 758회로 조금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코히마의 싸움은 작은 산등성이 위에서 벌어졌습니다. 일본군 15,000명 앞에 선 수비 병력을 IWM은 급히 꾸린 1,500명으로 적습니다. NAM은 휴 리처즈(Hugh Richards) 대령이 비전투원이 많던 2,500명의 수비대에서 급히 부대를 꾸려 개리슨 힐(Garrison Hill) 둘레의 좁은 방어선을 지켰다고 설명합니다.

4월 5일부터 18일까지 코히마에서는 이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근접전이 벌어졌습니다. 한 곳에서는 두 편 사이가 마을 테니스 코트의 폭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4월 18일 영국 2사단의 구원군이 닿았을 때 방어선은 가로세로 350미터로 줄어 있었습니다.

4월 초 고립된 뒤 수비대는 하늘에서 떨어뜨린 보급품에 기대야 했습니다. IWM이 가진 FSD 힐 사진을 보면 나무마다 보급 투하에 쓴 낙하산 조각이 걸려 있습니다.

임팔은 4월 5일부터 포위돼 있었습니다. 5·17·20·23인도사단이 버텼고, 6월 22일 구원군이 임팔의 4군단과 만나면서 포위가 풀렸습니다. NAM에 따르면 이 싸움 동안 RAF는 보급품 약 19,000톤과 병력 12,000명 넘게를 날라 들이고, 사상자 약 13,000명을 실어 냈습니다.

일본 쪽의 말도 남아 있습니다. 일본군 이치다(Ichida) 소장은 1945년, 연합군의 하늘 보급 덕분에 버마의 지상군이 물러나지 않고 자리를 굳혔고 그래서 일본의 침투·포위 전술이 헛일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일본군의 계획은 연합군의 보급 창고를 빨리 빼앗는 데 기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자 병사들은 산속에서 굶주렸습니다. 1944년 7월 물러날 때까지 일본군이 입은 손실을 IWM은 5만 명 넘는 사상자로 적고, 대부분이 굶주림과 질병 때문이었다고 설명합니다. NAM은 85,000명이던 일본 15군이 53,000명을 전사·실종으로 잃었다고 적습니다.

영국 쪽도 임팔에서 12,500명, 코히마에서 4,0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1945년: 이라와디를 건너 랑군으로

1945년 1~2월 슬림의 14군은 일본군을 이라와디(Irrawaddy)강까지 밀어냈습니다. 33군단이 만달레이(Mandalay)로 가는 동안 4군단은 일본군 뒤쪽의 메이크틸라(Meiktila)로 내달렸습니다. 4군단은 강을 건너 다리목을 넓힌 뒤 메이크틸라의 일본 보급 기지를 차지했고, IWM은 이 도하를 2차 대전에서 가장 긴 적전 도하로 소개합니다.

3월 중순 만달레이가 떨어질 무렵 일본군은 대부분 무너져 있었습니다. 연합군은 남쪽 랑군으로 내달렸습니다. 4군단이 랑군을 30마일(48 km) 앞둔 5월 초, 랑군은 하늘과 바다로 들어온 합동 작전에 점령됐습니다. 날짜는 5월 3일로, 몬순이 오기 직전이었습니다.

IWM의 큐레이터 이언 기쿠치(Ian Kikuchi)는 이 시기 슬림이 기갑·포병·보병의 작전에 항공력을 묶었다고 설명합니다. 비행기는 근접 지원과 보급에, 그리고 필요한 곳에 병력을 하늘로 넣는 기동에 쓰였습니다. 기만으로 의도를 숨기는 일도 함께였습니다.

하늘 보급은 이 진격에서도 이어졌습니다. 그루콕의 발표에 따르면 진격하는 동안 하루 톤수는 처음 예상의 두 배가 넘는 1,800톤까지 올랐습니다. 1월 2일부터 랑군이 떨어진 5월 1일까지 14군이 하늘로 받은 것은 210,000톤이었고, 같은 기간 도로로 온 것은 5,500톤, 친드윈(Chindwin)강 물길로 온 것은 38,700톤이었습니다.

버마 사람들의 편도 바뀌었습니다. 1942년 일본이 훈련·무장시킨 버마 방위군(Burma Defence Army)이 생겼고 지휘관은 아웅 산(Aung San)이었습니다. 이 군대는 1943년 8월 버마 국민군(Burma National Army, BNA)으로 다시 짜였습니다. 1945년 3월 27일 연합군과 몰래 협상한 아웅 산은 버마 국민군을 이끌고 일본에 맞서는 전국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 봉기는 연합군의 중부 버마 진격과 때를 같이했고, 버마의 전시 편을 크게 바꿨습니다. 1945년 9월 12일, 마운트배튼은 싱가포르에서 동남아시아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숫자와 남은 기억

버마 전역의 숫자를 자료별로 견준 막대 도표. A칸은 1945년 1월 2일부터 5월 1일까지 14군이 받은 보급으로, 하늘로 210,000톤, 친드윈강 물길로 38,700톤, 도로로 5,500톤이다(참전 다코타 조종사 그루콕의 1995년 발표). B칸은 미 항공수송사령부의 험프 공수로, 1942년 7월 한 달 85톤, 1945년 7월 한 달 71,000톤, 전체 650,000톤이다(RAF 박물관 온라인 전시). C칸은 1944년 임팔·코히마의 손실로, 일본군 사상자 5만 명 넘게(영국 전쟁박물관), 전사·실종 53,000명(국립육군박물관), 전사·부상 거의 6만 명(영국 전쟁박물관 사진 쪽), 잃은 병력 6만 명 넘게(국립육군박물관 극동 쪽), 영국군 사상자 임팔 12,500명과 코히마 4,000명(국립육군박물관)이다. 일본 15군의 병력이 85,000명이었고 일본군 손실 대부분이 굶주림과 질병 때문이었다는 메모가 있다. 칸마다 눈금이 다르다
보급의 양과 손실의 수. 자료마다 센 범위가 달라 합치지 않고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이 전역의 숫자는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임팔·코히마의 일본군 손실만 해도 IWM의 사진 쪽은 "거의 6만 명의 전사·부상", NAM의 극동 전역 쪽은 "6만 명 넘게"로 적습니다. 앞에서 본 5만 명 넘는 사상자, 53,000명의 전사·실종과 견주면 무엇을 셌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집니다.

이 전쟁은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불렸고, 그곳 병사들은 '잊힌 군대'라고 불렸습니다. NAM은 본국 사람들의 경험과 멀었고 당시 신문에서도 자주 뒤로 밀렸다는 점을 그 까닭으로 듭니다. 기쿠치 큐레이터는 런던에서 랑군까지 5,000마일이 훨씬 넘고, 인도와 버마의 일이 영국에서는 비교적 적은 사람에게만 닿았다고 설명합니다.

14군의 전투 병력은 대부분 인도인이나 아프리카인이었습니다. 기쿠치는 제국이 끝난 뒤 영국에서 이들의 몫이 잘 보이지 않게 됐다고 말합니다. 그는 버마의 전쟁을 기억하는 일이 영국이 유럽 해방만이 아니라 아시아의 제국을 지키고 되찾으려고도 싸웠다는 것을 기억하는 일이라고 덧붙입니다.

오늘 코히마 전쟁묘지에는 영연방 군인 1,400명 넘게 묻혀 있습니다. 신앙에 따라 화장된 힌두교·시크교 병사 900명 넘게는 묘지 안 코히마 화장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묘지 땅에는 그 테니스 코트의 윤곽이 남아 있습니다.

2사단 기념비에는 영어로 이런 비문이 있습니다. "집에 가거든 우리 이야기를 전하고 말해 주오. 그대들의 내일을 위해 우리는 오늘을 바쳤다고." 숫자 바깥에는 피란길에서 쓰러진 민간인과 산속에서 굶주린 일본 병사들의 이야기도 함께 남아 있습니다.

버마는 1948년 1월 4일 독립했습니다. 그보다 앞선 1947년 7월 19일, 아웅 산과 행정위원회 위원 여럿은 정적 우 소(U Saw)가 꾸민 음모로 암살됐습니다. 1947년 10월 영국과 버마는 권력 이양과 독립 조건을 확정하는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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