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4월, 튀니지의 한 언덕에서 영국군이 독일 전차 한 대를 거의 온전한 채로 손에 넣었습니다. 서방 연합국이 완전한 상태로 붙잡은 첫 티거 I, '티거 131'입니다. 국왕 조지 6세와 처칠이 직접 보러 왔고, 전차는 런던으로 실려 가 호스가즈 퍼레이드에 놓였습니다.
그보다 넉 달 앞선 1942년 12월, 미국 디트로이트 공창에서는 노동자 5,000명이 한 달 동안 셔먼 907대를 만들어 기록을 세웠습니다. 소련은 생산 흐름이 끊길까 봐 T-34의 개량을 미뤄 오다가, 1943년 무렵 새 독일 전차에 밀리자 새 포탑을 얹은 T-34/85를 만들었습니다. 같은 전쟁의 세 전차는 이렇게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세 전차가 어떤 생각에서 태어났고 무엇이 달랐는지, 숫자와 명성이 자료마다 어떻게 갈리는지 박물관 기록으로 따라가 봅니다.
전차가 싸움의 중심이 된 전쟁
1차 대전에서 전차를 처음 대규모로 쓴 나라는 영국이었습니다. 그러나 2차 대전 무렵 전차를 싸우는 방식 깊숙이 녹여 넣은 쪽은 독일군이었고, 전쟁 초반의 주도권도 독일에 있었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은 2차 대전에 그 전에도 그 뒤에도 없던 규모의 기갑 충돌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1942년 엘 알라메인과 1943년 쿠르스크처럼 전쟁의 고비가 된 싸움에도 전차가 있었습니다.
전쟁 후반에는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독일군에게는 티거처럼 무장이 강한 전차가 있었지만, 연합국은 공업력을 바탕으로 더 많은 전차를 내보냈습니다. 연합국의 전차 설계와 기갑 운용도 함께 나아졌습니다. 세 전차의 차이는 이 흐름 안에 놓고 보아야 잘 보입니다.
T-34: 1941년의 놀라움
T-34/76은 1940년에 처음 배치된 소련의 중형 전차입니다. 영국 전차 박물관(The Tank Museum)은 이 전차의 화력, 장갑 방호, 기동성이 고르게 균형을 이뤘다고 평가합니다. 76.2 mm 포는 그때 쓰이던 어느 전차에도 밀리지 않았고, 두껍고 비스듬히 기울인 장갑은 그 무렵의 대전차 무기에 잘 뚫리지 않았습니다.
1941년 6월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소련 기갑의 양과 질에 놀랐습니다. 독일의 폰 클라이스트(von Kleist) 장군은 T-34/76을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전차"라고 불렀습니다. 전차 박물관에 따르면 히틀러는 T-34를 본뜨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로 나온 전차가 1943년 쿠르스크에서 처음 싸운 판터(Panther)입니다.
우위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43년에 이르자 T-34/76은 새 독일 전차들에 밀렸습니다. 그때까지 소련은 생산을 멈춰 전선으로 가는 전차 수를 줄이는 개량은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온 T-34/85는 더 큰 새 포탑에 85 mm 포를 달고 포탑 앞 장갑을 두껍게 했으며, 포탑 안에 세 사람이 들어갈 자리를 두었습니다. 차체의 나머지는 거의 그대로였습니다.
셔먼: 많이 만들고 쉽게 고치는 전차
M4 중형 전차의 설계는 1941년 4월에 시작됐습니다. 시제는 그해 9월에 나왔고 생산은 1942년 2월에 시작됐습니다. 엔진, 변속기, 현가장치는 앞선 M3 그랜트를 따랐지만, 차체 위에 주포를 단 완전 회전 포탑을 얹은 점이 달랐습니다.
셔먼이 무엇을 하려고 만든 전차였는지는 자주 오해됩니다. IWM 학예사 존 델러니(John Delaney)는 셔먼이 처음부터 다른 전차와 싸우려고 설계된 전차가 아니었다고 설명합니다. 셔먼의 주된 몫은 보병 지원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생산이 먼저였습니다. 델러니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한 해 45,000대의 전차를 원했고, 그래서 만들기 쉽고 단순하고 빨리 만들 수 있는가가 전장의 생존성과 화력보다 앞서는 결정들이 이어졌습니다. 주요 변형 다섯과 그 아래 변형들이 미국의 주요 공장 10곳에서 나왔지만, 가능한 곳에서는 같은 기계·전기 장비를 썼습니다. 변속기와 차동장치, 최종 감속기가 든 앞부분은 한 덩어리여서 통째로 떼어 내고 새것을 달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떠맡은 것은 자동차 공업이었습니다. 1940년 중반 미국 정부가 크라이슬러 사장 K. T. 켈러(K. T. Keller)에게 전차를 만들 수 있느냐고 묻자, 켈러는 "예"라고 답한 뒤 "어디 가면 하나 볼 수 있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정부가 공장을 짓고 크라이슬러가 전차를 만든 디트로이트 공창은 1942년 7월부터 셔먼을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1945년 8월까지 이 공창에서 나온 전차는 셔먼을 포함해 모두 22,234대였습니다.
평판에는 그늘도 있었습니다. 셔먼은 불이 잘 붙는다는 말 때문에 라이터 상표를 딴 "론슨(Ronson)"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델러니는 분석 결과 셔먼이 관통당했을 때 60~80%의 경우 불이 붙었고, 그 원인이 탄약을 둔 자리였다고 설명합니다.
그 끝에 나온 방법이 젖은 탄약 보관(wet stowage)이었습니다. 탄약을 전차 바닥에 박은 장갑 상자에 넣고, 포탑에도 그런 상자를 하나 두었습니다.
포도 시간이 지나며 모자라게 됐습니다. 1943년 무렵에는 셔먼의 이중 목적 75 mm 포가 독일 무기에 밀렸습니다. 영국 룰워스 기지의 한 장교가 영국의 17파운드포를 셔먼에 다는 생각을 냈고, 이것이 셔먼 파이어플라이(Firefly)입니다. 파이어플라이는 실전에서 성공했지만 장갑은 그대로여서 여전히 취약했고, IWM의 설명으로는 늘 수가 모자랐습니다.
티거: 두꺼운 장갑과 88 mm 포
독일군은 전쟁 전부터 중전차를 원했습니다. 1940년 프랑스에서의 전투 경험을 분석하자 앞으로의 전장에는 더 강한 포와 더 두꺼운 장갑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새 중전차를 두고 헨셸(Henschel)과 포르셰(Porsche)가 겨뤘고, 포탑은 크루프(Krupp)가 만든 88 mm 포탑을 쓰기로 했습니다.
1942년 4월 20일, 히틀러의 생일에 시제 티거가 히틀러 앞에서 시연됐습니다. 그해 시험에서 포르셰 전차는 엔진과 구동계를 믿을 수 없고 귀한 구리를 너무 많이 쓴다는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계약은 헨셸의 설계가 따냈고, 1942년 동안 더 다듬어져 티거 I이 됐습니다.
만드는 방식도 미국과 달랐습니다. 티거 I은 카셀의 헨셸 공장에서 조립했는데, 이 공장은 부품을 만들어 철도로 보내는 큰 회사망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차체와 포탑의 장갑판은 에센의 크루프가, 엔진은 프리드리히스하펜의 마이바흐(Maybach)가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같은 생산 라인 대신 아홉 단계로 나눠 조립했고, 한 대에 모두 14일쯤 걸렸습니다.
전장에 나온 티거 I은 1942년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연합군 전차병들에게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앞 장갑은 100 mm였고 주포는 88 mm였습니다. 다만 믿음성이 떨어지고 불이 쉽게 붙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티거 I은 동부 전선에서 처음 싸운 뒤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큰 전선 모두에 나왔습니다.
연합군 쪽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1943년에는 티거에 맞서려고 강력한 17파운드 대전차포가 서둘러 전장에 나갔습니다.
나란히 놓고 보기
세 전차를 한 표에 놓으면 차이가 눈에 들어옵니다. 박물관마다 적어 둔 변형이 달라서, 같은 기준으로 잰 값은 아닙니다. 아래 표는 전차 박물관과 미국 국립 2차 대전 박물관(National WWII Museum)이 적은 값을 변형 이름과 함께 옮긴 것입니다.
무게만 보아도 차이가 큽니다. T-34/76은 26.5 t, 셔먼 M4A3는 68,000 lb 넘게(약 31 t), 티거 I은 57 t입니다. 티거 I은 T-34/76보다 두 배 넘게 무거웠습니다. 승무원은 T-34/76이 4명, 셔먼 M4A3와 티거 I이 5명입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읽을지는 보는 자리에 따라 다릅니다. IWM은 노르망디 전투를 설명하며 독일 전차와 자주포가 수는 적었지만 대체로 무장이 더 좋았고, 판터와 티거의 장갑이 셔먼과 크롬웰보다 훨씬 두꺼웠다고 적습니다. 델러니는 셔먼이 화력, 생존성, 기동성은 모두 보통이었지만 믿음성과 생산의 쉬움, 야전 정비의 쉬움은 훨씬 나았다고 정리합니다.
델러니는 셔먼과 독일 중전차를 견주는 일을 대량 생산 가족 차와 페라리를 견주는 일에 빗댔습니다. 직선 속도로는 페라리가 이기지만, 값과 만드는 속도로는 가족 차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설계 목적의 차이를 잘 보여 주지만, 전차는 자동차와 달리 전장에서 서로 맞서는 무기였다는 점까지 담지는 못합니다.
National WWII Museum의 셔먼 설명에도 두 면이 함께 있습니다. 셔먼은 독일 전차보다 화력이 밀릴 때가 많았고 티거, 판터, 킹 티거에는 크게 밀렸습니다. 그래도 정비가 쉬워 전장에서 바로 고칠 때가 많았습니다.
숫자와 신화
몇 대를 만들었는지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National WWII Museum은 1942~1945년에 셔먼이 5만 대 넘게 만들어졌다고 적습니다. 전차 박물관의 소장 전차 쪽에는 T-34/76이 35,467대, T-34/85가 50,000대로 나오는데, T-34/85 값에는 전쟁 뒤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에서 만든 것까지 들어 있습니다. 폴란드 한 곳에서 1951~1955년에 만든 것만 약 1,380대입니다.
티거는 숫자 자체가 작습니다. 전차 박물관의 기사에는 티거 I을 1942년 7월부터 1944년 8월까지 1,347대 만들었다고 나오지만, 소장 전차 쪽 제원 칸에는 1,354대로 적혀 있습니다. 뒤를 이은 티거 II도 기사에는 490대, 소장 쪽에는 1944년 1월부터 1945년 3월까지 489대로 나옵니다.
명성과 실제 사이에도 거리가 있었습니다. 전차 박물관은 티거의 명성이 사실보다 신화에 더 기대고 있다고 씁니다. 연합군 전차병은 티거를 만날까 두려워했지만 실제로 마주칠 일은 매우 드물었고, 전쟁의 흐름을 바꿀 만큼 티거가 전장에 많았던 적은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판터도 생산이 느려 러시아, 이탈리아, 북서유럽 어디에서도 싸움에 큰 차이를 만들 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연합군은 티거의 잠재력에 놀라 하나를 꼭 손에 넣으려 했습니다. 그 첫 온전한 표본이 티거 131입니다. 1943년 4월 24일 튀니지 메제즈엘바브(Medjez el Bab)와 몽타르노(Montarnaud) 사이의 174고지에서 영국군 제142대대 왕립기갑군단(RAC)과 셔우드 포리스터스(Sherwood Foresters) 제2대대가 이 전차를 붙잡았습니다.
남긴 것
세 전차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았습니다. T-34/85는 동유럽을 지나 독일로 들어간 소련군의 진격을 이끌었고, 전쟁 뒤에는 40개 넘는 나라에서 수십 년 동안 쓰였습니다. 델러니는 전후 프랑스군에서 셔먼이 노획한 판터보다 훨씬 오래 쓰였고, 마지막 일선 셔먼 부대가 2003년 칠레군에서 물러났다고 설명합니다.
박물관에도 흔적이 남았습니다. 영국은 1940년 마이클 듀어(Michael Dewar)가 이끄는 전차 사절단을 워싱턴에 보냈고, 1941년 3월 무기 대여법(Lend-Lease Act)이 발효됐습니다. 이 법으로 넘어온 첫 셔먼은 듀어를 기려 MICHAEL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런던 호스가즈 퍼레이드에 전시된 뒤 지금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셔먼으로 전차 박물관에 있습니다. 티거 131은 1951년부터 박물관 소장품이 됐고, 1990년대 초에 세운 계획에 따라 2004년에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복원됐습니다.
오늘날의 주력전차(main battle tank, MBT)를 화력, 방호, 기동의 균형으로 읽는 이야기는 주력전차: 성능은 포 크기로만 결정될까에서 이어집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주력전차: 성능은 포 크기로만 결정될까: 전쟁 뒤의 전차를 화력·방호·기동의 균형으로 읽습니다.
- 복합장갑과 반응장갑: 전차 표면의 블록은 무엇일까: 전차 겉면에 붙은 블록이 무엇인지 봅니다.
- 최초의 전차와 캉브레 전투: 참호를 넘으려는 기계: 1차 대전에서 전차가 처음 나온 이야기입니다.
- 쿠르스크 전투: 거대한 전차전의 기록과 신화: 판터가 처음 싸운 1943년의 큰 전차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