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의 비행장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각 이집트군을 이끄는 아메르 원수는 시나이의 부대를 둘러보러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고, 공습 때문에 한 시간 넘게 내려앉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땅 위에 서 있던 이집트 항공기들이 잇달아 부서졌습니다.
싸움은 엿새 뒤인 6월 10일에 멈췄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가자 지구, 요르단강 서안, 동예루살렘, 골란 고원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 전쟁이 "6일 전쟁(Six-Day War)"으로 불리는 까닭입니다.
첫날의 공습은 어떻게 준비됐고, 그 하루가 나머지 닷새를 어떻게 바꿨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큰 승리가 왜 평화로 이어지지 않았을까요? 미 국무부 역사실의 개관, 미 육군 Combat Studies Institute가 펴낸 George W. Gawrych의 연구서 두 권(1990, 1996), 유엔 기록으로 이 물음들을 따라갑니다.
1967년 5월, 3주 동안의 위기
1956년 수에즈 전쟁 뒤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유엔 비상군(United Nations Emergency Force, UNEF)이 10년 넘게 머물렀습니다. 그동안에도 국경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파타(Fatah) 같은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이 이스라엘 안을 공격했고, 1966년 11월 이스라엘이 요르단 서안의 마을 사무(Samu')를 공격하자 미국은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유엔 결의에 찬성했습니다.
1967년 봄에는 이스라엘이 시리아에 강하게 보복하고 있었고, 시리아 지도자들은 이집트가 나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4월 7일에는 이스라엘과 시리아 전투기가 큰 공중전을 벌여 시리아 항공기 6대가 떨어졌습니다.
불씨를 키운 것은 사실이 아닌 정보였습니다. 5월 13일 소련 관리들이 시리아와 이집트 정부에 이스라엘이 시리아 국경에 병력을 모았다고 알렸습니다.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은 이튿날 총동원을 명령하고 많은 병력을 시나이로 보냈습니다. 6월이 되자 시나이의 이집트군은 6개 사단, 약 10만 명과 전차 900대에 이르렀습니다.
5월 16일 저녁, 이집트군은 유엔 비상군 사령관에게 국경 감시 초소에서 물러나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부대는 이집트 정부가 동의하는 동안에만 이집트 땅에 있을 수 있었습니다.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는 요청을 따르겠다고 이집트에 알렸고, 철수는 5월 19일에 시작됐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경 공격이 다시 일어나거나 티란 해협(Strait of Tiran)이 이스라엘 배에 닫히면 이를 전쟁 사유로 보겠다고 미리 밝혀 두었습니다. 5월 22일, 나세르는 해협을 닫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 앞에는 반갑지 않은 선택지 셋이 놓였습니다. 1957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해협 봉쇄를 전쟁 행위로 다루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존슨 대통령은 시간을 벌면서, 여러 해양 국가가 함께 해협으로 "탐색 부대"를 보내는 "레가타(Regatta)" 계획에 지지를 구했지만 얻지 못했습니다.
5월 30일에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카이로에서 이집트와 상호 방위 조약에 가서명했습니다. 요르단이 아랍 연합에 들어오자 이스라엘이 공격에 나서야 한다는 압력은 더 커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엔 비상군 철수가 받아들여진 뒤 이미 예비군 6만~7만 명을 동원해 두었습니다.
존슨은 이스라엘에 선제공격을 하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실제로 움직일 무렵에는 대통령의 참모 여럿이 이스라엘이 "혼자 가는" 편이 미국의 이익에 낫다고 결론을 내린 뒤였습니다. 6월 4일, 이스라엘 정치 지도부는 이집트와의 전쟁을 승인했습니다.
공군에 걸었던 군대
이스라엘의 전쟁 계획에는 1956년의 기억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그해 이스라엘군은 영국·프랑스와 손잡고 시나이 반도 전체를 차지했지만, 미국이 앞장선 국제 사회의 규탄과 압력 끝에 점령지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때 참모총장이던 모셰 다얀은 1967년 6월 1일 국방장관이 되자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가자 지구와 시나이 북동부만 차지해, 티란 해협을 다시 여는 협상의 카드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다얀은 목표를 수에즈 운하 앞까지 시나이 전체로 넓혔습니다. 주된 군사 목표는 이집트군을 되도록 많이 부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의 맨 앞에 선 것이 공군이었습니다. 1956년 전쟁에서 하늘을 쥔 덕분에 사막의 지상 작전이 훨씬 수월했다는 것이 이스라엘군 지휘부가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그 뒤 공군을 으뜸 군으로 키워, 1967년에는 국방 예산의 절반이 공군으로 갔습니다.
그 돈으로 Mirage IIIC, Mystère IVA, Super Mystère 같은 프랑스제 최신 항공기를 샀습니다. 1958~1966년 공군 사령관 에제르 바이츠만(Ezer Weizman)은 조종사를 뽑고 훈련하는 기준을 높였고, 가장 뛰어난 젊은이들이 공수부대 대신 공군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사 전략의 한가운데에는 선제 공습(preemptive air strike)이 있었습니다. 먼저 상대 공군을 땅 위에서 부숴 제공권(air superiority)을 얻고, 그다음 공군으로 지상 작전을 돕는다는 생각입니다. 제공권은 전장 위 하늘을 한쪽이 쥐고 있어 상대 항공기의 방해를 크게 받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두 일을 한 몸처럼 하려면 공군과 지상군이 훨씬 긴밀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1956년 전쟁 뒤 공군 지휘부는 텔아비브의 총사령부로 옮겨, 공군 사령관이 참모총장과 한 지붕 아래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지상군도 큰 전차 부대가 앞장서 빠르게 나아가는 군대로 다시 짜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주력전차(main battle tank, MBT)가 있었습니다.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 공군이 이집트 비행장을 치기 시작했을 때, 이집트군은 방어 태세를 지키며 이스라엘의 첫 타격을 받아 낸다는 명령을 받고 있었습니다. 공습은 이집트 지휘부가 자리를 비운 때 닥쳤습니다. 아메르 원수와 공군 사령관 등 고위 장교들은 시나이로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고, 시나이의 주요 지휘관들은 비르 알타마다(Bir al-Thamada)에 모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메르는 이스라엘 시각으로 9시 30분에야 총사령부로 돌아왔습니다. 이 글의 시각은 모두 이스라엘 시각입니다. 이집트 시각은 한 시간 늦습니다.
공습의 결과는 책마다 숫자의 모양이 다릅니다. Gawrych의 1990년 연구서는 세 시간의 폭격 뒤 이스라엘 조종사들이 이집트 공군의 85%를 부쉈다고 쓰고, 1996년 연구서는 주로 프랑스제 항공기를 몬 이스라엘 조종사들이 이집트 항공기 304대를 땅 위에서 부쉈다고 씁니다. 이스라엘 공군은 이어서 더 작은 요르단과 시리아 공군에도 비슷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 결과는 항공기만으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1996년 연구서는 그 바탕으로 뛰어난 정보, 자세한 계획, 높은 훈련 수준을 꼽습니다.
지상전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기록이 엇갈립니다. 아랍 밖의 저자들은 이스라엘 샤론(Sharon) 사단의 선두가 8시 15분, 공군이 공격을 시작한 지 약 30분 뒤에 국경을 넘었다고 씁니다. 이집트 쪽은 그보다 한 시간 반 앞에 이미 국경 충돌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하늘을 쥔 뒤 이스라엘 공군의 일은 바뀌었습니다. 이집트 공군이 땅 위에서 부서지자 이스라엘 조종사들은 지상군을 돕는 "날아다니는 포병(flying artillery)"이 됐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기갑 교리는 보병·포병과 함께 싸우는 제병협동(combined arms)을 소홀히 했지만, 1967년에는 그 결함이 이스라엘군의 발목을 잡지 않았다고 Gawrych(1990)는 봅니다.
엿새의 흐름
첫날 공군이 세 나라 공군을 치는 동안 이스라엘 지상군은 시나이로 큰 공세를 폈습니다. 시나이 동부의 라파(Rafah)와 아부 아게일라(Abu Ageila)를 뚫은 뒤에는, 보병 지원이 거의 없는 전차 중심 기갑 여단이 사막을 가로지르는 진격의 앞에 섰습니다.
같은 날 오후 다얀은 요르단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셋째 날 아침 후세인 국왕은 요르단군의 서안 전면 철수를 승인했습니다. 넷째 날 이스라엘 부대가 수에즈 운하에 닿았고, 나세르는 패배를 인정했습니다. 마지막 이틀은 시리아의 골란 고원을 차지하는 싸움이었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개전 이튿날인 6월 6일 결의 233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결의는 관련 정부들에 첫걸음으로 즉시 휴전하고 그 지역의 모든 군사 활동을 멈추라고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처음부터 휴전을 바랐습니다. 소련이 끼어들어야 할 만큼 큰 아랍의 패배를 막으려는 뜻이었습니다. 한편 이집트와 다른 몇 아랍 나라는 미국이 이스라엘을 도왔다고 비난하며 미국과 외교 관계를 끊었습니다.
휴전과 결의 242
6월 10일 싸움이 멈췄을 때 지도는 크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시나이 반도, 가자 지구, 서안, 동예루살렘, 골란 고원이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들어갔고, Gawrych(1996)의 계산으로 이스라엘이 다스리는 땅은 네 배가 됐습니다.
전쟁 뒤 미국의 생각은 "땅과 평화의 교환(land for peace)"으로 굳어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물러나는 대신 아랍 이웃 나라들과 평화 협정을 맺는다는 생각입니다.
1967년 11월 22일 유엔 안보리는 결의 242를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 결의는 전쟁으로 땅을 얻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조하고, 두 원칙을 함께 담았습니다. 하나는 "최근 분쟁에서 점령한 영토로부터" 이스라엘군이 물러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교전 상태를 끝내고 그 지역 모든 나라가 안전하고 인정된 경계 안에서 위협 없이 평화롭게 살 권리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결의에는 난민 문제의 공정한 해결도 들어 있습니다. 이 결의를 이스라엘과 아랍은 서로 다르게 읽었습니다. 그래도 결의 242는 그 뒤 아랍-이스라엘 분쟁을 풀려는 미국의 모든 노력의 바탕으로 남았다고 미 국무부 역사실은 정리합니다.
치른 값과 남긴 것
Gawrych(1996)에 따르면 개전 때 이스라엘군은 병력 25만 명, 전차 1,000대, 전투기 275대였습니다. 이집트·요르단·시리아 연합은 병력 30만 명, 전차 2,000대 가까이, 전투기와 폭격기 500대 넘게를 갖고 있었습니다.
손실도 무거웠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사 983명, 부상 4,517명, 실종 15명이었습니다. 이집트의 사상자는 1만 명이 넘었고, 이집트는 공군의 85%와 지상 장비의 80%를 잃었습니다. 요르단은 기갑의 80%를 잃고 전사 700명, 부상과 실종 6,000명을 냈으며, 시리아의 숫자는 요르단보다 조금 낮았습니다.
싸움에 휘말린 것은 군인만이 아니었습니다. 본국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던 유엔 비상군 일부가 가자의 전투에 휘말려 유엔군 15명이 숨졌습니다.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사업 기구(UNRWA) 책임자가 6월 말 현지 방문까지 담아 낸 1967년 보고는 적어도 15만 명이 요르단강 서안을 떠났고, 그 가운데 8만~10만 명은 예전에 UNRWA에 등록된 난민일 수 있다고 추정했습니다. 시리아에서도 8만 명 안팎이 살던 곳을 떠났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전장의 승리는 컸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습니다. Gawrych(1996)는 1967년의 전장 성과가 어느 아랍 나라와도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고, 오히려 아랍의 결의를 굳혔다고 봅니다. 이스라엘이 그 승리를 정보·공군·기갑이라는 세 기둥에 세웠고, 다음 전쟁에서도 아랍군이 1967년처럼 싸우리라 기대했다는 것도 그의 해석입니다.
전쟁 뒤 이스라엘군은 기갑에 더 무게를 두었고, 보병과 포병은 그만큼 뒤로 밀렸습니다. 보병 여단 여럿이 기갑 부대로 바뀌었습니다. 공군 전투기는 1967년 275대에서 1972년 여름 432대로 늘었고, 이스라엘에 무기를 대는 주된 나라는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7년이 채 안 된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1967년의 교훈이 그 전쟁에서 어떻게 시험받았는지는 다음 글에서 이어집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욤 키푸르 전쟁(1973): 대전차 미사일과 지대공 미사일의 충격. 6년 뒤 같은 나라들이 다시 맞선 전쟁입니다.
- 주력전차: 성능은 포 크기로만 결정될까. 1967년 사막을 가로지른 전차가 무엇으로 평가되는지 봅니다.
- 공대공 미사일: 미사일의 눈은 무엇을 볼까. 하늘을 두고 다투는 무기의 원리입니다.
- 통합방공과 센서 융합: 여러 센서를 하나의 그림으로. 땅에서 하늘을 지키는 체계가 어떻게 짜이는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