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0월 9일, 부산항을 떠난 해병 부대가 남베트남의 캄란만에 상륙했습니다. 베트남에 간 한국군 전투부대 가운데 맨 앞이었던 청룡부대입니다. 그 뒤 1973년 3월 마지막 부대가 돌아오기까지, 30만 명이 넘는 한국 군인이 베트남을 거쳐 갔습니다.

이 파병은 지금도 한 가지 이야기로 모이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동맹에 대한 신의이자 경제 성장의 발판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전투 수당과 고엽제, 그리고 베트남 민간인 피해 의혹이 남은 전쟁입니다. 파병이 어떤 협상과 표결을 거쳐 정해졌는지, 몇 명이 갔고 어떻게 돌아왔는지, 무엇이 아직 논쟁인지를 한국과 미국의 공개 기록으로 따라가 봅니다.

왜 한국은 베트남에 갔나

정부가 내세운 명분은 두 가지였습니다. 한국전쟁 때 참전한 우방에 보답한다는 것, 그리고 베트남 전선이 한국 전선과 곧바로 이어져 있다는 안보 판단입니다. 미국에 이어 남베트남 정부도 파병을 요청하자, 정부는 이 명분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었습니다.

미국 쪽에도 사정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 뒤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하면서 '많은 깃발(Many Flags)' 정책을 내걸고 자유진영 나라들에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글은 한국군이 미군보다 유지비가 싸고, 같은 아시아인이며, 한국전쟁 경험이 있어 선호됐다고 설명합니다. 미국 안에서 반전 시위가 거세져 병력을 모으기 어려워지자 요청은 더 강해졌습니다.

한국 정부에도 계산이 있었습니다. 우리역사넷의 글은 대규모 파병을 한·미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봅니다. 군대를 보내 한반도에 있는 미군의 규모를 지키고, 한미 동맹을 다지며, 미국의 원조를 늘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했을 때부터 파병을 제안했습니다.

1965년 무렵에는 미국이 본토의 예비 병력과 해외 주둔군 일부를 베트남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주한 미군 2개 사단도 언제 남베트남으로 옮겨 갈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진 빚을 갚을 기회로 여기는 마음과, 원조와 미국의 관여에서 영향력을 키울 기회라는 계산이 함께 있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의료진에서 두 개 사단까지

첫 파병은 총보다 의료와 교육이었습니다. 1964년 9월 11일, 제1이동외과병원 요원 130명과 태권도 교관단 10명, 모두 140명이 해군 LST 편으로 부산항을 떠나 22일 사이공에 닿았습니다. 병원은 붕타우에 자리 잡았고, 교관단은 사관학교와 보병학교에서 남베트남군을 가르쳤습니다.

이듬해에는 건설과 후방 지원을 맡는 2,000명 규모의 비전투부대가 뒤따랐습니다. 평화를 상징한다는 뜻에서 비둘기부대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부대는 1965년 3월 10일 인천항을 떠나 16일 사이공에 도착했고, 사이공 동북쪽 22 km 지점의 디안에 주둔했습니다.

전투부대의 길은 1965년 5월 17~18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열렸습니다.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브라운(Winthrop G. Brown) 주한 미국 대사에게 내놓았던 요구 사항이 이 자리에서 대부분 타결됐습니다. 국회는 8월 13일 수도사단(맹호부대)과 제2해병여단(청룡부대)의 파병을 의결했습니다.

청룡부대는 10월 3일 부산을 떠나 10월 9일 캄란만에 상륙했습니다. 맹호부대 본대는 10월 16일 부산항을 떠나 10월 22일 퀴논항에 닿았습니다. 「베트남전쟁 파병」 항목은 수도사단이 '11월 1일까지' 퀴논에 도착했다고 적습니다.

가로 연표 도표. 1961년부터 1973년까지 축 위에 점이 찍혀 있다. 1961년 11월 박정희의 미국 방문 때 파병 제안, 1964년 9월 의료진과 태권도 교관단 140명, 1965년 3월 비전투부대인 비둘기부대 2,000명, 1965년 10~11월 제2해병여단과 수도사단, 1966년 3월 브라운 각서(4일)와 국회 표결 95 대 27 대 3(20일), 1966년 4~10월 제26연대와 제9사단, 1971년 12월~1972년 4월 1단계 철수, 1973년 1월 28일 휴전과 3월 23일 철수 완료.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한국군이 베트남에 있던 기간이 옅은 띠로 칠해져 있다
1961년에서 1973년까지 한국군 베트남 파병의 주요 시점 (도표)(도표)

브라운 각서와 국회 표결

1965년 12월, 미국은 전투부대를 더 보내 달라고 공식 요청했습니다.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에 간 이동원 장관에게 러스크 미국 장관이 요청을 건넸습니다. 이동원 장관은 지난번에 합의한 장비 현대화 약속이 아직 지켜지지 않았다며 '선 약속이행, 후 증파'를 내세웠고, 러스크 장관은 '선 증파, 후 약속이행'으로 맞섰습니다. 미국은 1966년 1월 1일과 2월 22일 두 차례 험프리 부통령을 특사로 보냈습니다.

미국이 무엇을 내놓았는지는 미국 외교문서(FRUS)에 남아 있습니다. 1966년 1월 27일 국무부가 주한 대사관에 보낸 전보에는 한국에 건넬 편지 초안이 실려 있습니다. 편지의 기본 원칙은 한국의 방위가 약해지지 않을 것, 새 경제 부담이 없을 것, 한국에 순이익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추가 병력에는 맹호사단과 같은 수준의 해외 수당을 주고, 사상자 보상금은 한·미 합동 위원회가 정한 비율의 두 배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브라운 대사가 이 편지를 건넨 뒤인 2월 1일, 이동원 장관은 정부가 제안을 "원칙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알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동남아 순방에서 2월 17일 돌아온 뒤에 발표하기를 바랐습니다. 한국 정부는 2월 28일 1개 연대와 1개 사단을 더 보낸다고 공개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약속을 문서로 정리한 것이 브라운 각서입니다. 1966년 3월 4일자로 브라운 대사가 이동원 외무장관에게 보낸 비망록이고, 군사 협조와 경제 지원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군사 쪽에는 국군 현대화 장비, 추가 병력의 장비와 경비, 공군 C-54기 4대, 주월 한국군 전원의 해외 근무수당, 두 배의 사상자 보상금이 들어 있습니다. 경제 쪽에는 한국군에 필요한 물자·용역·장비를 될 수 있는 한 한국에서 사고, 수출 진흥 기술 원조를 늘리며, 이미 약속한 1억 5천만 달러 AID 차관에 더해 차관을 더 준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각서가 나오기 전에 한국 정부는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를 10개 항으로 내놓았습니다. 미국은 전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두 칸 도표. 제목은 '브라운 각서, 1966년 3월 4일'이고 미국 대사가 한국 외무장관에게 보낸 두 부분짜리 비망록이라는 설명이 있다. 왼쪽 파란 칸 '군사 지원'에는 국군 현대화 장비, 추가 병력의 장비와 경비, 공군 C-54기 4대, 주월 한국군 전원의 해외 근무수당, 한미 합동 위원회가 정한 비율의 두 배인 사상자 보상금이 있다. 오른쪽 초록 칸 '경제 지원'에는 한국군에 필요한 물자·용역·장비를 될 수 있는 한 한국에서 구매, 수출 진흥 기술 원조 강화, 이미 약속한 1억 5천만 달러에 더한 추가 AID 차관이 있다. 아래에 한국이 먼저 10개 항의 요구를 냈고 미국이 일부를 받아들였다는 메모와, 백과 항목에서 줄여 옮긴 것이며 각서 전문이 아니라는 메모가 있다
브라운 각서의 두 부분. 백과 항목에 실린 항목 가운데 일부를 줄여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국회의 문턱은 낮지 않았습니다. 야당인 민중당 지도부는 병력을 더 보내면 한국의 방위가 약해진다며 반대했고,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같은 걱정이 나왔습니다. 3월 20일, 새벽 3시까지 이어진 토론 끝에 국회는 찬성 95, 반대 27, 기권 3으로 증파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틀 전인 3월 18일, 브라운 대사는 워싱턴에 경고를 보냈습니다. 한국은 병력을 끝없이 대 줄 수 있는 곳이 아니며, 한국이 이미 이만큼 간 것을 두고 국민의 걱정이 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국 국방부는 남베트남에 가는 병력이 모두 4만 명을 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 상태였습니다.

증파가 정해지자 수도사단 제26연대가 4월에 퀴논에 상륙했습니다. 그날을 「백마부대 파병」 항목은 4월 19일로, 「베트남전쟁 파병」 항목은 4월 15일로 적습니다. 제9사단(백마부대)은 10월 8일까지 닌호아 일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로써 주월 한국군은 군단급으로 커져 독자적인 작전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몇 명이 갔고 몇 명이 돌아오지 못했나

숫자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한 번에 베트남에 있던 병력을 「베트남전쟁 파병」 항목은 1972년 초 47,860명으로, 「전쟁」 항목은 4만 8000명으로 적습니다. 다녀온 사람 전체는 「국군」 항목이 8년간 31만 2853명, 우리역사넷이 30만 명이 넘는다고 적습니다.

두 종류의 숫자를 섞으면 안 됩니다. 한 번에 머문 병력은 5만 명이 안 됐지만, 8년 동안 베트남을 거쳐 간 사람은 30만 명을 넘었습니다. 1972년 초 다른 연합국들이 100여 명의 상징적인 병력만 남겼을 때도 한국군은 47,860명을 유지했고, 1972년 후반부터는 미국 지상군보다 많아져 참전국 가운데 가장 큰 병력이 됐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수도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전쟁」 항목은 4,800여 명의 인명 희생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적고, 브라운 각서를 다룬 항목은 5천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적습니다. 사상자라는 말에는 다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어서, 두 숫자를 같은 것으로 읽기는 어렵습니다.

표 도표. 자료별로 한 번에 베트남에 있던 병력, 다녀온 전체 인원, 희생을 적었다. 「베트남전쟁 파병」 항목: 47,860명(1972년 초). 「전쟁」 항목: 4만 8000명, 4,800여 명의 인명 희생. 「국군」 항목: 8년간 31만 2853명. 브라운 각서를 다룬 항목: 4만 7,872명('참가'로 적음), 5천여 명의 사상자. 우리역사넷: 30만 명 넘게. 숫자가 없는 칸은 줄표로 비웠다. 아래에 사상자는 다친 사람을 포함할 수 있고 인명 희생은 사망만 센다는 메모가 있다
한 파병, 여러 숫자. 자료마다 적힌 병력과 희생 (도표)(도표)

철수

미국은 1969년 7월부터 병력 일부를 빼면서 "베트남 전쟁은 베트남인이 수행하게 한다"는 베트남화 정책을 폈습니다. 한국의 1단계 철수는 1971년 12월 4일 제2해병여단부터 시작해 1972년 4월 1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때 돌아온 인원을 「베트남전쟁 파병」 항목은 9,476명으로, 「전쟁」 항목은 1만 명으로 적습니다. 두 개 보병사단을 중심으로 한 전투 병력 3만 7천여 명은 휴전 때까지 남았습니다.

휴전 협정에는 모든 외국 군대가 휴전 뒤 60일 안에 베트남에서 철수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휴전은 1973년 1월 28일에 시작됐습니다. 3월 23일 후발대 118명이 비행기로 떠나면서 한국군은 모든 부대의 철수를 마쳤습니다. 휴전 뒤 마지막 철수 작전으로 돌아온 인원은 3만 6856명이었습니다.

베트남 특수: 경제에 남긴 것

파병은 경제에도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한국이 무역과 무역 밖의 부문에서 얻은 외화는 약 1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파병 협상으로 얻은 5억 2000만 달러의 미국 공공 차관은 사회간접자본을 넓히는 데 들어갔고, 2억 4000만 달러의 상업 차관은 1970년대 수출 산업의 중심이 된 중화학공업 설비 투자에 쓰였습니다.

베트남에 간 기술자와 기업은 건설·토목·항만·물류 일의 노하우를 쌓았습니다. 특히 건설토목 산업은 뒷날 중동 건설 특수를 누릴 힘을 이때 길렀습니다. 브라운 각서를 다룬 항목은 미국의 지원 덕분에 제2차 경제개발계획의 목표를 훨씬 넘는 연평균 12%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평가합니다. 군도 커져서, 예비사단이 전투사단이 되고 준전투사단 하나가 새로 생겼습니다.

평가가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외환을 늘리고 공공시설 투자 자금을 마련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습니다. 그러나 대외무역 구조와 국내 경제 구조가 뒤틀리고 특정 신생 대기업 자본이 떠올랐다는 비판도 나왔습니다. 한국 사회가 베트남전쟁을 '베트남 특수'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끝나지 않은 논쟁

파병을 둘러싼 논쟁은 몇 갈래로 이어져 왔습니다. 여기서 인용하는 백과 항목과 우리역사넷 글에는 집필자의 견해이며 기관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다는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미국 외교문서는 당시 미국 정부가 주고받은 전보와 그 편집자 주입니다.

용병 논쟁. 1970년 미국 상원의 사이밍톤 청문회에서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수호보다 경제적 이익 때문에 참전했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대 견해도 분명합니다. 「베트남전쟁 파병」 항목은 파병이 조약상의 의무가 아니라 '자유 우방에 대한 신의'에서 시작됐다고 봅니다. 군사 원조와 전투 수당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그것을 목적으로 한 파병은 아니었고, 한국군이 독자적인 지휘권 아래 작전했으므로 '용병'은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수당과 보상. 같은 수당도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 보입니다. 1966년 국무부 전보의 편지 초안에서 미국 쪽은 해외 수당이 한국 안 병력이 받는 봉급의 최대 30배이고 남베트남군 봉급의 약 4배라고 적었습니다. 우리역사넷의 글은 정부와 기업이 군인과 노동자에게 충분히 보상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사병의 전투수당은 미군의 4분의 1에 불과했고, 전사 보상금은 당시 직장인 1년치 월급을 조금 넘는 정도였으며, 송금하고 환전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높은 수수료를 뗐다는 것입니다.

고엽제. 많은 한국 참전 군인이 고엽제 피해 같은 후유증에 시달렸습니다. 1999년에는 1만 6천여 명의 피해자가 미국 제조사 다우케미칼과 몬산토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고엽제 피해자 문제는 베트남의 한국인 2세 문제와 함께 파병이 한국 사회에 남긴 부정적 영향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민간인 피해 의혹. 가장 무거운 논쟁입니다. 우리역사넷의 글은 민간인 사이에 숨은 게릴라를 찾아내야 하는 작전 속에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고, 구정 공세 직후 중부 지역에서 특히 심했다고 설명합니다. 한국군과 관련해서는 빈딘성 하미 마을과 꽝남성 퐁니·퐁넛 마을 사례가 알려지고 있다고 적습니다. 2018년에는 시민사회단체들이 주도해 피해자가 직접 원고로 나선 시민평화법정이 모의재판 형식으로 열렸습니다.

다툼은 실제 법정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2023년 2월 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1968년 2월 12일 퐁니 마을에서 살아남은 응우옌티탄(Nguyen Thi Thanh)이 낸 소송에서 국가가 약 3천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습니다. 한국 법원이 이 일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법원은 당시 한국·남베트남·미국 사이의 협정 때문에 책임질 수 없다는 정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정부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은 2월 17일 국회 위원회에서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절대 없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고, 정부 측 변호인은 범인이 한국군 군복을 입은 공산군이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보도됐습니다. 정부는 3월에 항소했습니다. 미군 문서와 생존자들의 말로는 그날 퐁니·퐁넛에서 70명 넘는 사람이 숨졌습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이 전쟁을 특수나 한미 동맹의 눈으로만 보아 왔습니다. 최근에는 참전한 사람들이 겪은 피해와 남긴 가해, 그리고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함께 따지는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베트남 전쟁 한눈에: 1955년부터 1975년까지: 한국군이 들어간 전쟁 전체의 흐름
  • 통킹만 사건: 기밀 해제 문서가 말하는 것: 미국이 북베트남 폭격을 시작한 계기
  • 사이공 함락(1975): 베트남 전쟁의 끝: 한국군이 철수하고 2년 뒤의 결말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먼 곳에 보낸 군대를 계속 움직이게 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