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월 30일, 남베트남은 설 연휴를 맞고 있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명절이고, 가족이 고향 마을에 모이는 때입니다. 양쪽 모두 휴전을 발표해 둔 그 연휴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수도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 도시 대부분을 한꺼번에 공격했습니다.

공격한 쪽은 몇 주 안에 대부분의 도시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런데 두 달 뒤인 3월 31일 밤, 존슨(Lyndon B. Johnson) 대통령은 북베트남 폭격의 대부분을 멈추고 다음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싸움터의 결과와 미국 안의 여론은 왜 다른 방향으로 갔을까요?

미 국무부 역사실이 펴낸 외교 문서집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와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기록으로 그 두 달을 따라가 봅니다. 모두 미국 쪽 기록이라서, 하노이의 계획과 손실도 미국 기관이 적은 대로만 보인다는 점은 염두에 둡니다.

왜 설날이었나

호찌민(Ho Chi Minh)과 하노이 지도부는 양쪽 군 지도자를 모두 지치게 한 긴 싸움을 끝낼 결정적 승리를 바랐습니다. 큰 도시를 치는 데 성공하면 미국이 협상에 나서거나 아예 물러날 수도 있다고 본 것입니다. 2002년에 FRUS를 엮은 편집자들은 공세의 목표를 넷으로 정리합니다. 미국과 사이공 정부에 맞선 대중 봉기, 남쪽의 불안, 케산(Khe Sanh)에서 미군의 힘을 빼내기, 그리고 앞으로의 평화 협상에서 유리한 자리입니다.

날을 고른 데에도 까닭이 있었습니다. 설은 전통적으로 휴전하는 때였고, 명절을 쇠러 친척 집으로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병력의 움직임이 묻혔습니다. 공세를 맡은 병력은 앞선 몇 주 동안 이미 그 지역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휴전 발표도 서로 달랐습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은 몇 주 전 7일 동안 휴전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고, 남베트남 정부와 연합군은 36시간 휴전을 발표했습니다. 설은 보통 나흘 동안 이어지는 명절입니다.

도시들을 한꺼번에 친 공격

1월 30일 1군단과 2군단 지역 일부에서 공격이 먼저 시작됐습니다. 이어 30일과 31일에 걸쳐 수도와 가장 큰 도시 여섯, 그리고 각 성(省)의 중심 도시인 성도(province capital) 대부분이 공격을 받았습니다. 대상은 주로 사람이 많은 곳과 미군이 많이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숫자는 자료마다 조금 다릅니다. FRUS 편집자 주에는 성도 44곳 가운데 36곳, 군 소재지 242곳 가운데 64곳이 공격받았고, 병력은 처음 58,000명에서 곧 약 84,000명으로 늘었다고 나옵니다. 2월 14일 국무부가 해외 공관에 보낸 전문은 성도 44곳 가운데 38곳, 군 소재지 약 60곳, 병력 60,000명 넘게로 적었습니다.

구정 공세 첫 공격의 범위를 두 자료로 견준 막대 도표. 위 칸은 성도 44곳 가운데 공격받은 곳으로, FRUS 편집자 주는 36곳, 1968년 2월 14일 국무부 전문은 38곳이다. 가운데 칸은 군 소재지로, 편집자 주는 242곳 가운데 64곳, 전문은 약 60곳이다. 아래 칸은 동원 병력으로, 편집자 주는 처음 58,000명에서 곧 약 84,000명, 전문은 60,000명 넘게다. 맨 아래에 편집자 주가 수도와 가장 큰 도시 여섯도 공격 대상으로 꼽았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공세를 두 미국 정부 자료가 조금 다른 숫자로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사이공에서는 공병 조가 미국 대사관 구내와 대통령궁, 떤선녓(Tan Son Nhut) 공항까지 들어갔습니다. 대사관 싸움은 여섯 시간 넘게 이어졌고, 안으로 들어온 19명은 모두 죽거나 다쳤습니다. 옛 왕도 후에(Hue)는 몇 시간의 공격 끝에 넘어갔습니다.

1월 31일 아침,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국방장관은 전화로 대통령에게 첫 판단을 전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발악이 아니라 가진 것을 다 쏟아부은 최대의 노력이고, 큰 손실을 입더라도 적은 상당한 세력으로 남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공세가 바란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공산군 간부들은 주민이 봉기에 호응하고 자신들을 해방자로 맞을 것이라고 들었지만, 그런 반응은 없었습니다. 존슨은 3월 31일 연설에서 공격한 쪽이 30개 넘는 도시 가운데 어느 곳도 계속 장악하지 못했고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후에와 케산, 그리고 세 번의 물결

2월 중순에도 싸움이 끝나지 않은 곳이 있었습니다. 2월 14일에도 사이공 교외와 달랏, 그리고 후에의 한 구역에서는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2월 27일 문서에는 이미 되찾은 후에 성채에서 수많은 주민이 지켜본 의식이 나옵니다.

휠러의 2월 27일 메모에는 후에에서 미군이 싸움의 큰 짐을 지고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한 달 뒤인 3월 26일, 크레이턴 에이브럼스(Creighton Abrams) 장군은 대통령 앞에서 남베트남군 제1사단이 성채의 3분의 2를 되찾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사단의 손실은 기록마다 다르게 남아 있습니다. 3월 26일 회의 기록에는 병력의 3분의 2를 잃었다고 되어 있고, 다음 날 국가안보회의 기록에는 사상자가 10%(소총 대대에서는 30%)였지만 계속 싸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도시의 주민도 싸움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NARA가 공개한 사진 가운데에는 후에의 합동 장례식에서 실종된 남편의 사진을 든 젊은 여성, 끊어진 다리를 지나 강 남쪽으로 피해 온 노인과 아이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케산 기지는 또 다른 무대였습니다. 2월 8일 해병대 부사령관 월트(Walt) 장군은 백악관 보좌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케산을 꽝찌·투아티엔 방어 구역 전체의 북서쪽 닻이라고 불렀습니다. 라오스와 북베트남에서 남쪽으로 들어오는 몇 갈래 자연 통로가 만나는 곳이라는 설명도 붙였습니다.

3월 26일 합동참모본부 의장 얼 휠러(Earle G. Wheeler)는 케산 둘레의 북베트남군 가운데 한 부대가 남쪽으로 물러나고 한 부대가 동쪽으로 옮겼다고 말했습니다. 케산을 두고 한 그의 말은 기록에 따라 조금 다르게 남아 있습니다. 그날 회의 기록에서 그는 케산이 적 두 개 사단을 둘레에 묶어 두는 "쓸모 있는 구실"을 했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국가안보회의 기록에는 케산이 북베트남군의 목적에 쓰인 것 같다는 말로 남아 있습니다.

공세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단계는 5월 4일 작은 도시와 읍들을 동시에 쳤고 6월까지 이어졌으며, 셋째 단계는 8월에 시작해 6주 동안 계속됐습니다. 그 뒤 몇 달 동안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빼앗긴 읍들을 되찾았지만, 그 과정에서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가 많이 났습니다.

1968년 1월부터 8월까지를 두 줄로 나눈 연표 도표. 왼쪽 줄은 전장이다: 1월 25일 1군단 지역 설 휴전 취소, 1월 30일 미군 전역 비상 경계와 첫 공격, 1월 30~31일 동시 공격과 사이공 대사관, 2월 14일 국무부 전문에 사이공 교외·후에·달랏의 싸움이 남아 있음, 2월 27일 문서에 되찾은 후에 성채, 3월 26일 휠러가 말한 케산 둘레 북베트남군 부대의 이동, 5월 4일 둘째 단계(6월까지), 8월 셋째 단계(6주). 오른쪽 줄은 워싱턴이다: 1월 31일 맥나마라의 첫 판단, 2월 27일 휠러 메모(증원 합계 205,179명), 3월 4일 클리퍼드 작업단 초안(먼저 22,000명), 3월 12일 뉴햄프셔 예비선거, 3월 16일 로버트 케네디 출마, 3월 23일 웨스트모얼랜드 육군 참모총장 지명, 3월 25일 현인 회의, 3월 31일 연설(폭격 제한·협상 제안·불출마), 5월 평화 협상 시작.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같은 여덟 달, 전장과 워싱턴에서 일어난 일을 두 줄로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경고는 있었나

이만큼 큰 공세를 미국은 몰랐을까요? FRUS 편집자 주는 미국 정보 공동체가 다가오는 총공세를 어느 정도 미리 알렸지만 자세한 내용까지는 아니었다고 정리합니다. 적의 통신을 읽어 낸 정보는 전보다 큰 규모의 공격이 다가온다는 분명한 경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공격의 정확한 시각까지 예측하기에는 증거가 모자랐습니다.

경고는 실제 조치로도 이어졌습니다. 1월 25일 1군단 지역에서 설 휴전이 취소됐고, 1월 30일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William C. Westmoreland) 주월 미군사령관은 주요 공격 직전에 남베트남 전역의 미군 지휘관에게 비상 경계를 걸었습니다.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대통령 해외정보자문위원회(PFIAB)에 낸 최종 보고는 6월 7일 끝나 11일 대통령에게 올라갔습니다. 이 보고는 큰 정보 실패라는 비난에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다만 워싱턴 수준의 정보 평가는 사이공에서 느낀 만큼의 다급함을 전하지 못했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다르게 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리처드 헬름스(Richard Helms) 중앙정보장은 2월 16일, 공세 이전의 정보가 도시 공격의 정확한 시각과 넓은 규모, 강도를 예측하는 데 모자랐다고 말했습니다. 4월 8일에 나온 중간 보고서에는 공격을 알던 사람 대부분이 적이 선전물과 노획 문서에 적힌 목표를 실제로 이룰 수 있다고는 그리지 못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닉슨 도서관이 공개한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의 메모에는 충격의 일부가 정보를 정확히 분석하지 못한 탓이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경고가 있었어도 남베트남군의 형편은 좋지 않았습니다. 공격이 왔을 때 남베트남군 대부분은 부대 병력의 절반을 설 휴가로 집에 보낸 상태였습니다.

전장의 숫자, 워싱턴의 계산

2월 12일까지 남베트남군은 2,100명 넘게 전사하고 8,000명 가까이 다쳤습니다. 같은 기간 미군은 약 1,000명이 죽고 5,000명이 다쳤습니다. 기습을 당하고 일부는 휴가 중이었지만 공격의 큰 짐을 진 것은 남베트남군이었습니다.

남베트남군을 보는 눈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2월 20일 기준으로 남베트남군 대대 가운데 97개는 싸울 수 있었고 58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휠러는 남베트남군이 긴 공세를 견딜 힘이 있는지 의문이 있다고 적었습니다. 3월 27일 에이브럼스는 기동 대대 149개 가운데 8개만 불만족스러웠고 30개는 두드러졌다고 보고했습니다.

민간인의 피해는 숫자 하나로 담기 어렵습니다. 존슨은 공격과 이어진 싸움으로 50만 명이 피난민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사이공 교외 쩌런(Cholon)에서는 남은 베트콩을 몰아내려던 남베트남군이 거리를 불태웠고, 미국 대사관 쪽의 평가 메모에는 공격한 쪽이 주민 지도자들을 찾아내 죽이거나 끌고 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양쪽의 싸움이 모두 도시 주민에게 짐을 지운 셈입니다.

미군 쪽에서도 1968년은 무거운 해였습니다. NARA가 공개한 국방부 기록에서 사망(또는 사건) 연도가 1968년인 미군 기록은 16,899건으로, 연도별로 가장 많고 앞뒤 해의 11,363건과 11,780건보다도 많습니다. NARA의 표에는 공식 통계가 아닌 참고용 기록 수라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워싱턴의 계산은 2월 27일 휠러의 메모에서 시작됐습니다. 사흘 동안 현지 지휘관들을 만나고 온 그는 공세가 끝나지 않았고, 첫 공격이 열두 곳 남짓에서 거의 성공할 뻔했으며, 1968년이 갈림길의 해가 될 것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여러 곳에서 평정 사업이 멈췄다는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메모에는 장비와 군수(logistics) 이야기도 있습니다. 미군이 빨리 달려가야 할 곳이 늘면서, 전장 손실이 쌓이는 가운데 쓸 수 있는 헬기의 수가 중요해졌습니다. 나라 안의 공중 수송이 점점 더 중요해졌고, 북쪽 1군단의 군수 지원은 아슬아슬했으며, 장비 손실률도 올랐습니다.

병력을 실어 나르는 일도 같은 흐름에 있었습니다. 뒤에서 볼 3월 31일 연설에는 해병대와 공수 병력 약 11,000명을 48시간 안에 비행기로 보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메모의 끝에는 숫자가 있었습니다. 웨스트모얼랜드가 바라는 증원을 세 묶음으로 나누면 즉시 1순위 107,983명, 즉시 2순위 41,796명, 후속 55,400명, 모두 205,179명이었습니다.

3월 4일 클라크 클리퍼드(Clark Clifford) 국방장관의 작업단이 만든 초안에는 이미 승인된 525,000명 위에 205,000명을 더 요청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요청을 다 맞추려면 예비군 약 262,000명을 소집해야 했습니다.

작업단은 우선 22,000명만 더 보내고 나머지 결정은 미루자고 권했고, 이 큰 증원이 1년 뒤 군사 상황을 더 낫게 해 준다는 보장이 없다고 봤습니다. 3월 26일 휠러가 전한 웨스트모얼랜드의 해명은 달랐습니다. 자신은 206,000명을 요청한 적이 없으며, 그것은 우발 계획에서 논의된 여러 묶음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1968년 2~3월 증원 병력 숫자를 한 축척으로 견준 가로 막대 도표. 휠러 메모의 세 묶음은 즉시 1순위 107,983명, 즉시 2순위 41,796명, 후속 55,400명이고 합계 205,179명이다. 그 아래에 3월 4일 클리퍼드 작업단이 먼저 보내자고 권한 22,000명, 몇 주 전 비행기로 48시간 안에 보낸 해병대·공수 병력 약 11,000명, 3월 31일 연설에서 밝힌 지원 병력 약 13,500명이 짧은 막대로 있다. 이미 승인된 약 525,000명은 막대로 그리지 않았다는 메모와, 3월 26일 웨스트모얼랜드가 206,000명을 요청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는 메모가 있다
205,179명이라는 계산과, 실제로 보내기로 한 숫자 (도표)(도표)

미국 대중이 받은 충격은 컸습니다. FRUS 편집자들은 언론 보도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전략적 승리를 거뒀다고 강조했다고 적습니다. 그러면서 돌이켜 보면 그들은 남쪽 간부의 70% 가까이를 잃는 큰 전술적 패배를 당했지만, 바로 뒤의 여론 조사에서는 미국 대중이 전쟁 계속에 대한 지지에서 크게 돌아섰다고 덧붙입니다.

같은 국무부 역사실의 Milestones는 언론의 역할을 다르게 그립니다. 미국 언론의 생생한 보도가 베트남에서의 전반적 승리가 가깝지 않다는 것을 대중에게 분명히 했고, 그것이 정부에 대한 국내 지지를 약하게 했다는 서술입니다. 맥나마라는 공세 첫날 아침에 이미, 국민이 적을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고 느낄 것이고 그런 뜻에서 적이 얻는 것이 있다고 내다봤습니다. 휠러는 3월 26일 미국 언론의 비관을 받아들일 까닭이 없다고 하면서도, 가장 큰 차질은 미국 안에서 일어났고 그것이 적의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습니다.

3월에는 정치가 움직였습니다. 3월 12일 뉴햄프셔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유진 매카시(Eugene McCarthy) 상원의원이 대의원 24표 가운데 4표를 뺀 전부를 얻었고, 나흘 뒤인 16일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상원의원이 출마를 선언했습니다. 3월 23일에는 웨스트모얼랜드가 육군 참모총장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 인사는 맥나마라가 공세 전인 1월 19일에 이미 권한 것이었습니다.

3월 25일 밤, 전직 국무장관과 퇴역 장군들이 포함된 원로 모임 "현인(Wise Men)"이 국무부에 모였습니다. 클리퍼드는 전쟁을 키우는 길, 지금 정책을 이어 가는 길, 폭격과 지상 작전을 줄여 미국의 몫을 줄이는 길의 세 갈래를 설명했습니다. 밤 11시 회의가 끝날 무렵 원로 대부분은 개입을 줄이는 쪽에 서 있었습니다.

3월 31일의 연설과 남은 평가

3월 31일 밤 9시, 존슨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전국 방송으로 연설했습니다. 비무장지대 북쪽에서 적의 증강이 아군 전방 진지를 직접 위협하는 지역을 빼고 북베트남 공격을 멈추라고 명령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공격을 멈추는 지역에는 북베트남 인구의 거의 90%와 영토 대부분이 들어 있었습니다. Milestones는 이 조치를 20도선 위의 폭격 중단과 미군 수의 상한으로 요약합니다.

병력 숫자는 205,179명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존슨은 앞서 승인한 약 525,000명을 다시 확인하고, 몇 주 전 해병대와 공수 병력 약 11,000명을 48시간 안에 비행기로 보냈다고 밝혔습니다. 여기에 합참의 권고로 앞으로 5개월 동안 지원 병력 약 13,500명을 보낼 준비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남베트남은 135,000명을 더 동원하기로 했습니다.

존슨은 애버럴 해리먼(Averell Harriman) 대사를 협상 대표로 지명했습니다. 그리고 연설 끝에 다음 임기의 후보 지명을 구하지도 받지도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협상은 5월에 열렸지만 결실을 맺기까지는 몇 해가 더 걸렸고, 베트남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는 일은 다음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에게 넘어갔습니다.

이 공세를 어떻게 평가할까요? 공세가 끝났을 때 양쪽 모두 손실을 입었고, 양쪽 모두 승리를 주장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의 Milestones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대응이 민족해방전선(NLF) 병력을 거의 다 없애고 잃은 땅을 모두 되찾았다고 정리합니다. 앞에서 본 FRUS 편집자들은 공격한 쪽이 남쪽 간부의 70% 가까이를 잃었다고 적었습니다. NARA는 구정 공세를 베트남전에서 가장 큰 군사 작전의 하나이자 전환점으로 소개합니다.

1967년 9월부터 1968년 10월까지를 다룬 에릭 빌라드(Erik B. Villard)의 책을 소개하는 NARA의 행사 안내는 더 차분합니다. 1968년 10월 무렵 연합군의 처지는 1967년 말보다 조금 나아 보였을 뿐이고, 파리 평화 회담은 멈춰 있었으며, 미국 여론은 전쟁에 분명히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싸움터에서 공격한 쪽은 도시를 지키지 못했고 많은 병력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을 지켜본 미국 안에서는 승리가 가깝지 않다는 인식이 퍼졌고, 워싱턴은 대규모 증원 대신 폭격 제한과 협상 제안을 골랐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구정 공세를 군사 결과와 여론이 엇갈린 공세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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