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6일은 유대교에서 가장 엄숙한 날인 욤 키푸르(속죄일)였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이슬람의 금식 달 라마단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날 14시 5분, 두 나라가 동시에 공습과 포격을 시작했습니다.

6년 전 전쟁에서 크게 이긴 이스라엘군은 첫 이틀 동안 수에즈 운하 앞에서 전차를, 전장 하늘에서 항공기를 잇달아 잃었습니다. 그 뒤에는 보병이 든 대전차 미사일과 땅에서 쏘는 지대공 미사일을 함께 엮은 이집트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3주 뒤 전쟁이 멈췄을 때 이스라엘군은 운하 서쪽에서 이집트 제3군을 에워싸고 있었고, 그 끝에는 미국의 핵 경보까지 있었습니다.

미사일은 정말 전차와 항공기의 시대를 끝냈을까요? 그리고 전장에서 밀린 쪽이 왜 협상에서는 원하던 것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을까요? 미 국무부 역사실의 개관, 미 육군 Combat Studies Institute가 펴낸 George W. Gawrych의 연구서(1996), 유엔 평화유지 기록을 바탕으로 이 두 물음을 따라갑니다.

1967년 뒤 멈춘 협상

1967년 전쟁 뒤 이스라엘군은 수에즈 운하 동쪽의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에 머물렀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1973년 전쟁을, 1967년에 점령한 땅에서 물러나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한 아랍의 좌절이 미국에도 큰 전략적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닉슨 행정부가 깨닫게 한 사건으로 봅니다.

그 사이 협상은 여러 번 막혔습니다. 1969년 12월까지 소련·이집트·이스라엘이 모두 미국의 "로저스 계획"을 거부했습니다. 운하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 "소모전(War of Attrition)"은 1970년 8월 7일에야 멈췄습니다.

1971년 2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군이 운하 동쪽에서 물러나면 운하를 다시 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1972년 7월에는 소련 군사 고문단을 이집트에서 내보냈습니다. 그래도 판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닉슨과 키신저는 군사 균형으로 보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지 않으리라 믿었고, 미국 정보기관 다수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1970년 8월 7일부터 1979년까지의 연표 도표. 점 색으로 전쟁 전, 첫 며칠, 전환점, 휴전과 그 뒤를 나눴다. 1970년 8월 7일 휴전으로 수에즈 운하의 소모전이 끝남, 1972년 7월 사다트가 소련 군사 고문단을 내보냄, 1973년 10월 6일 14시 5분 이집트와 시리아가 동시에 공습과 포격을 시작함, 10월 7일 이스라엘 공군이 첫 27시간에 항공기 30대를 잃음, 10월 8~10일 이스라엘군이 시리아군을 골란 고원에서 밀어냄, 10월 14일 고개 쪽으로 나선 이집트 공격이 실패하고 미국 공수 항공기가 닿기 시작함, 10월 15~16일 이스라엘군이 운하 서쪽으로 건넘, 10월 22일 유엔 안보리 결의 338이 휴전을 요구함, 10월 24~25일 브레즈네프의 메시지와 미국의 핵 경보, 결의 340과 유엔 비상군(UNEF II), 1974년 1월 18일 이집트-이스라엘 병력 분리 협정(시리아-이스라엘은 1974년 5월 31일), 1974년 3월 아랍 산유국이 석유 금수를 풂,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조약
소모전의 끝에서 평화 조약까지, 욤 키푸르 전쟁 연표. 간격은 날짜 비율이 아닙니다 (도표)(도표)

10월 6일, 운하를 건너다

사다트가 노린 것은 시나이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Gawrych의 연구서에 따르면 이집트군은 능력에 맞춘 "제한된 목표"의 전쟁에 나섰고, 사다트는 전략 지형을 차지하거나 이스라엘군을 무너뜨리기보다 이스라엘에 손실을 많이 입히는 데 초점을 두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돌려주게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압력뿐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습니다. 전쟁은 협상의 판을 흔들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확실한 경보가 닿은 것은 10월 6일 새벽 4시 30분 직후였습니다. 경보는 공격 시각을 18시로 알렸지만 실제 계획은 14시였습니다. 공격은 이스라엘 예비군이 막 동원을 시작한 때 닥쳤습니다. 참모총장은 시리아에 대한 선제 공습을 권했지만, 국방장관 모셰 다얀은 미국과 국제 사회의 반응과 이스라엘이 침략자로 찍힐 일을 들어 반대했고 골다 메이어 총리가 다얀의 편을 들었습니다.

14시 5분에 시작된 포격에는 포 2,000문이 나섰고, 운하 동쪽의 이스라엘 방어선인 바르레브 선(Bar-Lev Line)의 거점들에 53분 동안 쏟아졌습니다. 14시 20분에는 첫 물결 8,000명이 고무보트 1,000척으로 운하를 건넜습니다.

그다음은 바르레브 선의 모래 둑이었습니다. 공병 70개 조는 나무배 위에서 양수기에 단 호스로 물을 뿜어 이 모래 둑을 허물었습니다. 다음 날까지 무거운 다리 10개가 모두 쓸 수 있게 됐습니다.

공격 부대는 전투병 10만 명 넘게와 전차 1,020대였습니다. 이들은 나흘에 걸쳐 운하 동쪽으로 12~15 km 깊이의 교두보를 세웠습니다. 10월 7일 새벽 운하 동쪽에는 이미 이집트군 약 5만 명과 전차 400대가 있었습니다. 이집트 장군들의 회고록을 따른 Gawrych의 집계로, 첫날 이집트 쪽 손실은 전사 280명, 항공기 15대, 전차 20대였습니다.

보병의 대전차 미사일

이스라엘군은 전차를 중심으로 짜인 군대였습니다. 이집트는 여기에 소련제 대전차 무기 두 가지로 맞섰습니다. 하나는 대전차 유도미사일(anti-tank guided missile, ATGM)인 Sagger이고, 다른 하나는 무유도 대전차 무기 RPG-7입니다. 둘 다 병사가 들고 다니는 보병 무기입니다.

Sagger의 정식 이름은 9K11 Malyutka입니다. 1963년에 나온 소련 첫 휴대용 대전차 유도무기로, 1세대 방식을 씁니다. 사수가 표적을 보면서 미사일을 손으로, 흔히 조이스틱으로 이끌고, 명령은 대체로 미사일 뒤에 달린 선으로 전해집니다. 쏜 순간 길이 정해지는 RPG-7과 달리, 날아가는 동안 진로를 고칠 수 있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집트의 계획에서 중요한 것은 무기 한 가지가 아니라 짜임이었습니다. 이 무기를 든 보병이 포병과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이스라엘 전차의 역습을 막는 주역을 맡았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기갑 부대에는 이런 보병을 누를 보병·박격포·포병이 모자랐습니다. Gawrych는 공중 지원이 없고 포병과 보병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나이의 이스라엘 전차병들이 취약해졌다고 적고, 그 원인으로 지나치게 기갑에 기운 교리를 듭니다.

결과는 숫자로 드러났습니다. 10월 7일 오전이 끝날 무렵 시나이의 한 이스라엘 기갑 사단은 개전 때 291대이던 전차가 약 100대로 줄었습니다. 남쪽의 한 기갑 여단은 100대에서 23대가 됐습니다. 방공과 대전차 미사일을 든 보병을 바탕으로 한 대공세가 현대전의 새로운 시도였고 이스라엘군의 허를 찔렀다는 것이 Gawrych의 평가입니다.

이스라엘 부대 세 곳의 전차 수를 개전 때와 10월 7일까지로 나란히 견준 막대그래프. 시나이의 한 기갑 사단은 291대에서 10월 7일 오전이 끝날 무렵 약 100대, 시나이 남쪽의 한 기갑 여단은 100대에서 23대, 골란 남쪽의 바라크 기갑 여단은 90대에서 15대. 숫자는 미 육군 연구서(Gawrych, 1996)의 값이고, 각 부대가 그때 아직 가진 전차 수다
첫 이틀 동안 줄어든 이스라엘 부대 세 곳의 전차 수 (도표)(도표)

대전차 유도무기가 세대마다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대전차 유도무기: 로켓과 유도미사일의 차이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땅에서 쏜 미사일의 우산

이집트 공군은 이스라엘 공군보다 약했습니다. 그 빈자리를 메운 것이 땅에서 쏘는 미사일이었습니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SAM-2, SAM-3, SAM-6, SAM-7 지대공 미사일과 ZSU-23-4 대공포로 통합 방공망을 짰습니다. SAM-6과 ZSU-23-4는 차량에 실려 기갑 부대를 따라갈 수 있었고, SAM-7은 병사 한 명이 들고 다니는 보병 무기였습니다.

이 우산에는 끝이 있었습니다. 소모전 끝 무렵 운하 가까이 옮긴 미사일 덕분에 방공 범위는 시나이 쪽으로 약 20 km까지 닿았습니다. 그러나 시나이 안쪽의 세 고개(비르 기프가파·기디·미틀라)까지 덮으려면 50~55 km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군은 첫 교두보를 운하 동쪽 12~15 km로, 우산 안에 묶어 두었습니다.

땅에서 쏘는 미사일로 전장 위 하늘에서 대등함을 얻고, 공군은 제공권을 두고 이스라엘 공군과 정면으로 맞붙는 일을 피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수에즈 전선의 방공 우산을 그린 개념 그림. 실제 지도가 아니다. 왼쪽부터 운하 서쪽, 수에즈 운하, 운하 동쪽(시나이)이 띠로 놓여 있다. 운하 서쪽에서 솟은 점선 반원이 방공 범위로, SAM-2, SAM-3, SAM-6, SAM-7, ZSU-23-4라고 적혀 있고 1970년부터 시나이 쪽으로 약 20 km 들어간다. 반원 안 운하 바로 동쪽에 교두보 막대가 있고 아래 자에 첫 교두보 12~15 km라고 적혀 있다. 오른쪽 멀리 비르 기프가파·기디·미틀라 고개를 나타낸 삼각형이 있고, 아래 자에 고개까지 덮으려면 50~55 km가 필요하다고 적혀 있다. 거리는 미 육군 연구서(Gawrych, 1996)의 값이다
교두보를 방공 우산 안에 둔 1973년 이집트의 계획을 그린 개념도. 실제 지도가 아닙니다 (도표)(도표)

10월 7일 오후 4시, 이스라엘군 참모총장 엘라자르는 공군이 개전 첫 27시간 동안 항공기 30대를 잃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집트 방공망은 전장 위의 이스라엘 공군을 대부분 묶어 두었고, 공군의 주력은 더 위급하던 골란 전선으로 돌려졌습니다. 새로 등장한 이동식 SAM-6이 특히 골치였지만, 큰 피해를 준 것은 미사일 한 종류보다 빽빽하게 겹친 화력 전체였다고 Gawrych는 정리합니다.

땅에서 쏘는 미사일이 레이다, 교전 통제, 발사대로 어떻게 짜이는지는 지대공 미사일: 하늘을 지키는 지상 시스템에서 이어집니다.

흐름이 바뀐 열흘

북쪽 골란 고원의 첫 이틀도 위태로웠습니다. 시리아군은 골란 남쪽에서 이스라엘의 바라크 기갑 여단을 전차 90대에서 15대로 줄였습니다. 이스라엘군은 10월 8일부터 시리아군을 전쟁 전의 경계선 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했고, 10월 10일까지 골란 고원에서 밀어냈습니다. 그 뒤에는 시리아 안으로 20 km를 들어가 다마스쿠스에서 40 km 안쪽까지 갔습니다.

강대국도 움직였습니다. 소련이 이집트와 시리아에 무기를 다시 대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10월 9일까지 미국에 같은 일을 요청했습니다. 닉슨이 동의했고, 무기를 실은 미국 항공기가 10월 14일부터 이스라엘에 닿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싸우는 동안 무기와 물자를 대고 옮기는 일을 군수(logistics)라고 부릅니다.

같은 10월 14일, 시나이에서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시리아의 호소를 받은 사다트는 골란 전선에서 이스라엘의 눈을 돌리려고 교두보 밖 고개 쪽으로 공세를 명령했습니다. 이집트군은 그날 오후 이른 시각 교두보로 물러났고, 파괴된 전차 약 250대를 남겼습니다. 이스라엘 정보의 추정은 280대였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 쪽에도 새 미사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막 들어온 TOW(관으로 쏘고 광학으로 추적하며 선으로 유도하는 대전차 미사일)입니다. 첫 TOW는 1970년에 미 육군에 배치됐고, 이스라엘군은 10월 11일 TOW 교관을 빠르게 기르는 과정을 열었습니다. 대전차 미사일은 한쪽만의 무기가 아니었던 셈입니다.

이어 이스라엘군이 운하를 거꾸로 건넜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그 날짜를 10월 16일로 적고, Gawrych는 15일 17시에 작전이 시작돼 16일 6시 43분에 첫 전차가 뗏목으로 건넜다고 적습니다. 운하 서쪽으로 넘어간 이스라엘군은 끝내 이집트 제3군의 병력 3만~4만 명과 전차 300대를 에워쌌습니다.

휴전, 그리고 핵 경보

10월 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과 소련이 함께 낸 결의 338을 채택했습니다. 휴전과 함께 1967년의 결의 242를 이행하기 시작하라는 내용이었고, 다음 날 결의 339가 이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그래도 싸움은 이어졌습니다. 사다트가 휴전을 강제할 군대를 보내 달라고 미국과 소련에 직접 호소하자, 미국은 반대했고 소련은 동의했습니다.

10월 24일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핫라인으로 닉슨에게 두 나라가 함께 이집트에 군대를 보내자고 제안했습니다. 미국이 거절하면 일방적인 조치를 검토하겠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소련은 공수 사단 7개에 경보를 걸었고, 미국은 10월 25일 핵 전력에 세계 경보를 걸었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이때 미국이 쿠바 미사일 위기 뒤 어느 때보다 소련과의 핵 대결에 가까이 갔다고 적습니다.

위기를 푼 것은 유엔이었습니다. 10월 25일 결의 340은 즉각 휴전과 10월 22일 위치로의 복귀를 요구하고,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뺀 회원국의 병력으로 제2차 유엔 비상군(UNEF II)을 세웠습니다. 유엔의 기록은 이 평화유지군의 설립과 파견이 위기를 사실상 끝냈다고 적습니다. 에워싸인 제3군의 포위는 1974년 2월에 풀렸습니다.

전쟁은 석유 시장으로도 번졌습니다. 아랍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은 미국이 이스라엘군에 다시 무기를 대는 데 맞서 미국에 석유 금수를 걸었습니다. 유가는 먼저 두 배, 다시 네 배로 뛰었고, 금수는 1974년 3월에야 풀렸습니다.

치른 값과 남긴 것

인구 300만 명 남짓의 이스라엘에서 2,800명 넘게 죽고 적어도 7,500명이 다쳤으며 약 500명이 포로가 됐습니다. 이스라엘군은 이때 처음으로 전투 스트레스로 쓰러진 병사를 많이 겪었습니다. 죽지 않은 사상자 가운데 정신과 환자의 비율은 자료에 따라 12.3%에서 23.1%였고, 이스라엘군은 전쟁 뒤 사단 의무대대에 정신과 팀을 두는 교리를 새로 만들었습니다. 일부 예비군 부대는 1974년 4월까지 동원이 풀리지 않았고, 그렇게 오래 복무하는 동안 생계가 어려워진 예비군도 있었습니다.

누가 이겼는지는 보는 자리에 따라 다르게 적힙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지만 미국에 큰 값을 치르게 했다고 씁니다. Gawrych는 많은 서방 관찰자가 이스라엘의 군사적 승리로 본 반면 이스라엘 사회는 대체로 더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적고, 더 약한 쪽이 더 강한 상대와 두 강대국의 태도를 바꾸게 만들었다는 점에 무게를 둡니다.

협상의 문은 실제로 열렸습니다. 이스라엘은 1974년 1월 18일 이집트와, 5월 31일 시리아와 병력 분리 협정을 맺었습니다. 전쟁은 키신저의 "왕복 외교"와 1979년 이스라엘-이집트 평화 조약으로 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사다트는 그 외교로 또 한 번의 큰 전쟁 없이 시나이 전체를 돌려받았습니다.

군대도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1982년까지 상비군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대전차·지대공 미사일로 거둔 아랍의 전술적 성공이 이스라엘군 교리의 결함을 드러냈다는 반성 속에 자주포가 크게 늘었고, 공군은 방공 위협에 더 힘을 쏟으며 공중 조기경보 통제기(AWACS) 장비를 사고 무인기를 만들었습니다. 전차는 그 뒤에도 이스라엘군의 중심에 남았습니다.

바다 건너 미 육군도 이 전쟁을 깊이 들여다봤습니다. 미 육군대학 전략연구소의 Douglas V. Johnson II는 1973년 전쟁을 미 육군 생각의 전환점으로 봅니다. 나토의 유럽 방어와 바로 맞닿은 사건이었고, 소련 군사 기술이 서방을 따라잡았다는 신호였다는 것입니다. 3년 뒤 나온 야전 교범 FM 100-5는 돈 스태리 장군의 이 전쟁 분석을 반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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