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 15일, 소련군 사령관 보리스 그로모프가 테르메즈 다리를 건너 아프가니스탄을 나왔습니다. 거의 10년 전인 1979년 12월 말에 시작된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주둔이 그날 끝났습니다. 이 10년이 앗은 목숨은 자료에 따라 수만 명에서 수백만 명까지 다르게 적힙니다.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도 수백만 명이었습니다.

소련은 왜 국경 너머 산악 국가에 군대를 보냈고, 왜 그렇게 오래 머물렀을까요? 실마리는 진입보다 6년 앞선 카불의 정변에 있습니다. 공개된 미국·유엔 기록과 기밀 해제 문서로 그 길을 따라가 봅니다.

연표. 세 줄로 나눴다. 첫 줄 진입까지(1973~1979): 1973년 여름 다우드가 자히르 국왕을 몰아낸 정변, 1978년 4월 28일 할크파 군인들의 집권과 타라키 총리, 1978년 겨울 전국의 무장 반란, 1979년 3월 헤라트 봉기와 소련군을 보내지 않은 결정, 1979년 10월 아민 세력의 타라키 처형, 1979년 12월 12일 손으로 쓴 정치국 결정. 둘째 줄 10년의 전쟁(1979~1988): 1979년 12월 24~27일 소련군 진입과 아민 살해, 1980년 1월 14일 유엔 총회 결의 ES-6/2, 1982년 6월 제네바 간접 협상 시작, 1985년 10월 17일 원칙적 철수 결정, 1986년 미국제 스팅어 공급, 1988년 2월 8일 철수 발표. 셋째 줄 철수와 그 뒤(1988~1996): 1988년 4월 14일 제네바 협정 서명, 5월 15일 발효와 철수 시작, 1989년 2월 15일 마지막 부대가 테르메즈 다리를 건넘, 1992년 소련이 지원한 정부 붕괴, 1992~1996년 무자헤딘 사이 내전, 1996년 9월 27일 탈레반 카불 점령. 상자는 순서만 나타내고 간격은 시간과 맞지 않는다
1973~1996년, 진입 전의 정변부터 철수 뒤 탈레반의 카불 점령까지 주요 날짜 (도표)(도표)

진입 전: 정변과 반란의 6년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군사 관계는 1979년보다 훨씬 오래되었습니다. 1955년부터 모스크바는 아프가니스탄에 군사 훈련과 물자를 대 주었고, 1973년에는 현역 병력의 3분의 1이 소련 땅에서 훈련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1973년 여름, 전 총리 무함마드 다우드가 정변을 일으켜 자히르 국왕을 몰아냈습니다. 정변은 친소련 군부와 정치 세력에 기대고 있었고, 다우드는 1965년 마르크스주의와 모스크바에 대한 충성을 내걸고 세워진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지지도 받았습니다. 이 당은 1967년 카르말이 이끄는 파르참파와 타라키가 이끄는 할크파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1978년 4월 28일, 할크파 군인들이 대통령궁을 공격해 다우드와 그 가족을 처형했습니다. 며칠 뒤 타라키가 총리가 되었습니다. 새 정부는 카불 밖의 부족 지역까지 공산주의 혁명을 넓히려 했고, 1978년 겨울 무렵 이 계획은 전국에서 무장 반란에 부딪혔습니다.

타라키와, 그의 오랜 동지로 혁명 뒤 부총리가 된 하피줄라 아민은 모스크바로 가서 친선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이 조약에는 이슬람 반란이 정권을 위협하면 소련이 직접 군사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1979년 12월: 망설이던 결정

1979년 3월 헤라트에서 격렬한 봉기가 일어났고, 소련 군사 고문 여러 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아프간 지도부는 그해에만 20번 넘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3월에 소집된 정치국 회의의 결론은 장비와 고문은 보내되 소련군은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밀 해제된 정치국 논의를 보면 소련 지도자들은 군대 파견을 매우 꺼렸습니다. 1979년 봄과 여름 내내 그들이 보낸 것은 병력이 아니라 군사 장비였습니다.

상황을 바꾼 것은 카불 안의 권력 다툼이었습니다. 1979년 10월 아민에게 충성하는 세력이 타라키를 처형했고, 모스크바는 분노해 국경에 전투 부대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겨울 아프간 정부군은 군내 반란과 지도부 불안 속에서 정부조차 지키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진입 결정은 정치국원 몇 명이 비밀리에 내렸고, 다른 정치국원은 그 뒤에 승인만 했습니다. 군은 공개적으로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오가르코프 참모총장과 아흐로메예프 차장은 제한된 병력으로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 결정을 보여 주는 문서 증거는 1979년 12월 12일 자로 손으로 쓴 정치국 문서 하나뿐입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진입이 시작되었다고 적었고, 유엔 기록은 12월 27일 소련군이 들어갔다고 적었습니다. 소련군은 아민을 죽이고 파르참파 지도자 바브라크 카르말을 정부 수반에 앉혔습니다. 유엔 기록에 따르면 결국 10만 명 넘는 소련군이 배치되었습니다.

세계의 반응: 유엔 총회와 미국

이 진입은 소련이 동구권 밖의 나라에 군대를 보낸 유일한 경우였고, 세계 거의 모든 곳에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1980년 1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논의 끝에 결의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 교착을 피하려고 문제는 "평화를 위한 단결" 절차를 거쳐 긴급 특별 총회로 넘어갔습니다.

1980년 1월 14일 총회는 결의 ES-6/2를 냈습니다. 결의는 최근의 무력 개입을 강하게 개탄하고, 외국 군대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완전한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피난민이 대규모로 빠져나가는 데에도 깊은 우려를 나타냈습니다.

미국의 대응은 여러 갈래였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브레즈네프에게 강한 어조의 편지를 썼고, 연두교서에서 중동 석유를 지키겠다는 카터 독트린을 밝혔습니다. 경제 제재와 무역 금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불참 촉구, 반군 지원 확대가 뒤따랐습니다. 미국은 진입 전인 1979년 중반, 소련이 바그람 공군기지에 전투 부대를 보낸 뒤 이미 무자헤딘에게 비살상 지원을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이 사건을 부르는 말도 하나가 아닙니다. 군사 기동의 규모와 속도로 보면 "침공"이지만, 국무부 역사실은 1973년부터 커진 소련 지배가 다다른 끝이라는 점에서 "개입"이 더 정확하다고 봅니다. 목적을 두고도 견해가 갈렸습니다. 페르시아만의 유전과 따뜻한 항구를 노린 큰 계획이었다는 주장이 있었고, 남쪽 국경에 닿은 새 사회주의 정부를 지키려는 움직임이었다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길어진 전쟁: 도시 경비에서 전투로

처음 임무는 도시와 주요 시설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임무는 곧 전투로 넓어졌고, 시간이 갈수록 더 커졌습니다. 처음 들어간 병력의 다수는 예비군이었는데, 이들이 반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소련군에게는 게릴라를 상대하는 훈련이 전혀 없었습니다.

산악 지형도 문제였습니다. 반군은 소련군이 오면 산으로 물러났다가, 소련군이 주둔지로 돌아가면 다시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같은 지역에서 작전을 여러 번 되풀이해야 했습니다. 초기 군 보고서들은 소련군이 훈련받은 적 없는 산악 지형에서 싸우는 어려움을 거듭 적었습니다.

소련 지도부는 아프간 사회에서 이슬람이 가진 영향력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정부와 학계에 이슬람 전문가가 매우 적었던 탓도 있었습니다. 군사적 해결이 없다는 인식은 소련 군 지도부에 아주 일찍 찾아왔습니다. 철군은 1980년부터 논의되었지만 실제 조치는 없었습니다.

이 싸움의 무게는 주민에게 가장 크게 얹혔습니다. 공식 임무는 정부에 맞선 세력으로부터 민간인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안보기록보관소의 해설에 따르면 소련군은 지키려던 주민과 싸우게 되는 일이 잦았고, 이는 때로 주민에 대한 무차별 살해로 이어졌습니다. 소련 안에서도 반체제 인사이자 인권 운동가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교착은 뚜렷했습니다. 1982년 미 국방정보국(DIA) 분석은 소련이 교착을 깨려면 병력을 두 배로 늘려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1985년 5월 CIA는 소련과 동맹군의 손실이 반군의 손실보다 크다고 추정했습니다.

무기와 지원: 반군에게 간 것

미국의 지원은 직접 가지 않았습니다. CIA의 비밀 공작은 파키스탄 정보기관을 거쳐 아프간 반군에게 닿았고, 1979년 12월 뒤에 시작되었습니다. 파키스탄은 반군에게 무기와 지원이 지나가는 길목이었고, 미국은 그 지원의 대부분을 댔습니다. 그래서 소련은 아프간 국경을 안정시키려고 이 두 나라와 일종의 타협을 찾았습니다.

미 의회는 모두 합쳐 무자헤딘에게 30억 달러 가까운 비밀 지원을 했습니다. 1987년에는 한 해 군사 지원만 7억 달러 가까이 되어, 파키스탄이 미국에서 받던 지원보다 많았습니다.

대공 무기는 단계적으로 들어갔습니다. 1984년 의회가 아프간 비밀 지원에 5천만 달러를 더 붙였고, CIA는 스위스 설계의 외를리콘 대공 무기를 샀습니다. 이 무기는 소련군의 Mi-24 헬기를 겨냥해 사들인 것이었습니다. 헬기가 어떻게 뜨고 움직이는지는 헬리콥터 로터와 동축반전로터에서 볼 수 있습니다.

1985년에는 영국제 블로파이프 대공 미사일을, 1986년에는 미국제 스팅어 미사일을 넘겼습니다. CIA가 비밀 반군 지원에서 미국제 무기를 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철수: 1985년 결정에서 1989년 다리까지

1985년 집권한 고르바초프는 이 전쟁을 "피 흘리는 상처"라 불렀고, 처음부터 전쟁을 끝내는 일을 가장 앞선 과제 가운데 하나로 삼았습니다. 정치국은 1985년 10월 17일 원칙적으로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일정은 1987년 가을에야 나왔습니다.

고르바초프는 2006년에 낸 책에서 늦어진 까닭으로 적어도 두 가지를 들었습니다. 하나는 철수가 굴욕적인 후퇴로 비칠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떠나기 전에 안정되고 우호적인 아프가니스탄을 남겨 두려는 바람이었습니다.

외교 쪽에서는 유엔이 오래 다리를 놓았습니다. 1982년 6월부터 6년 동안 유엔 사무총장의 대리인 디에고 코르도베스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정부 사이의 간접 협상을 중개했습니다. 소련의 철군 의지가 커지면서 협상은 빨라졌고, 고르바초프는 1988년 2월 8일 철수를 공개 발표했습니다.

1988년 4월 14일 네 나라가 제네바에서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협정은 네 문서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상호 불간섭 협정, 소련과 미국이 서명한 국제 보장 선언, 피난민의 자발적 귀환 협정, 그리고 소련군 철수 일정이 든 상호 관계 협정입니다.

협정 밖에서 미국은 소련이 카불을 돕는 동안 미국도 반군을 도울 수 있다는, 글로 적지 않은 원칙을 세웠고 이를 "적극적 대칭"이라 불렀습니다.

철수 단계 도표. 위쪽 막대는 1988년 5월 14일 신고된 소련군 100,300명을 둘로 나눴다. 왼쪽 1단계는 1988년 5월 15일~8월 15일 땅과 하늘로 귀국한 50,183명, 오른쪽 2단계는 1989년 2월 앞쪽 며칠 동안 항공과 도로 수송대로 나간 나머지다. 아래 상자 네 개는 차례로 1988년 5월 14~15일 100,300명 신고, 약 3분의 2가 전투 병력, 협정 발효. 8월 15일 주요 주둔지 10곳 인계, 50% 남짓 철수. 8월 15일~1989년 1월 1일 멈춤, UNGOMAP이 큰 철수를 보지 못함. 1989년 2월 15일 철수 끝, UNGOMAP은 넷째 문서대로 끝났다고 봄. 지도가 아니며 경로와 위치는 그리지 않았다
유엔 주선단(UNGOMAP)이 기록한 두 단계 철수. 2단계의 크기는 나머지로만 나타냈습니다 (도표)(도표)

협정은 1988년 5월 15일 발효했습니다. 열 나라에서 온 군 장교 50명으로 꾸린 유엔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주선단(UNGOMAP)이 철수를 지켜봤습니다. 5월 14일 소련 측이 신고한 병력은 모든 계급을 합쳐 100,300명이었고, 그 가운데 3분의 2쯤이 전투 병력이었습니다. 소련군은 30개 주 가운데 17개 주에 있었고 주요 주둔지 18곳을 쥐고 있었습니다.

1단계는 석 달 걸렸습니다. 8월 15일까지 주요 주둔지 10곳을 아프간군에 넘겼고, 50,183명이 땅과 하늘로 귀국해 병력의 50% 남짓이 빠졌습니다.

UNGOMAP은 그 뒤 1989년 1월 1일까지 큰 철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철수는 1989년 2월 앞쪽 며칠 동안 항공과 도로 수송대로 이뤄졌고, UNGOMAP은 철수가 협정의 넷째 문서대로 끝났다고 결론지었습니다.

10년이 남긴 것

사람의 피해는 자료마다 숫자가 다릅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이 10년의 대가를 수백만 명의 목숨과 수십억 달러로 적었습니다. 1990년 국가안보기록보관소 문서 모음의 머리글로 쓰인 Steve Galster의 해설문은 1973~1990년 사이 아프간인 100만 명이 죽었고 인구의 3분의 1이 나라 밖으로 떠났다고 썼고, 소련 쪽 희생은 1만 5천~2만 명으로 보았습니다.

피난민 수도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Galster의 해설문은 파키스탄에만 300만 명의 아프간 피난민이 있었다고 적었습니다. UNGOMAP 기록은 파키스탄과 이란에 500만 명까지 사는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Galster는 이 피난을 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결과 가운데 하나로 꼽고, 사람들을 떠나게 한 파괴와 혼란이 주로 소련군과 아프간 정부군의 대규모 공습에서 비롯되었다고 적었습니다. 철수 뒤에도 싸움이 이어져 실제로 고향에 돌아간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철수가 전쟁의 끝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관심은 줄었고, 카불의 미국 대사관은 1989년 1월 비워졌습니다. CIA는 1992년 지원을 끝냈습니다.

같은 해 소련이 지원한 정부가 무너졌습니다. 1986년부터 아프간 정부를 이끈 나지불라는 소련군이 떠난 뒤 3년 안에 권력에서 밀려났고, 뒤에 살해되었습니다. 이어 무자헤딘 세력 사이에 4년의 내전이 벌어졌고, 1993~1994년에 생긴 탈레반이 1996년 9월 27일 카불을 점령했습니다.

소련 안에서도 흔적이 남았습니다. 국가안보기록보관소의 해설은 이 전쟁이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을 무너뜨린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고, 사회가 참전 군인을 주변으로 밀어냈다고 적었습니다. 같은 해설은 대부분의 관찰자가 이 전쟁이 소련 해체로 이어진 내부 흐름을 만들거나 키웠다는 데 동의한다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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