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6월 18일 저녁, 지금의 벨기에 땅인 워털루 마을 근처에서 프랑스 근위대가 멈칫하다 무너졌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은 이 전투가 23년 동안 이어진 전쟁을 끝냈다고 적습니다. 23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1792년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권력을 쥔 것은 1799년이었습니다.
그러니 "나폴레옹 전쟁"은 한 사람의 이름을 달았지만, 그 사람보다 먼저 시작된 전쟁입니다. 이 긴 전쟁을 떠받친 장치는 둘이었습니다. 스무 살 청년을 제비뽑기로 부르는 징병, 그리고 큰 군대를 작은 군대 여럿으로 나눈 군단입니다.
두 장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바다와 이베리아반도와 러시아의 눈밭에서 어디까지 통했는지를 연표 한 장 위에서 짚어 봅니다. 사망자 수가 자료마다 크게 다른 까닭도 함께 봅니다.
혁명에서 시작된 전쟁, 언제부터 셀까
1791년 유럽의 군주국 여럿이 동맹을 맺어 프랑스에 맞섰습니다. 혁명의 생각이 번지는 것을 막고 군주정을 지키려는 시도였습니다. 1792년 프랑스가 이 동맹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동맹 전쟁(Koalitionskriege)이 시작됐고, 이 전쟁은 1815년에야 끝났습니다. 독일 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의 교육 자료는 1799년부터 이 전쟁들을 프랑스의 새 권력자 이름을 따 나폴레옹 전쟁이라고도 부른다고 설명합니다.
시작 해를 다르게 잡는 곳도 있습니다. 영국 왕립박물관 그리니치(Royal Museums Greenwich)는 트라팔가르 해전을 소개하며 나폴레옹 전쟁을 1803~1815년으로 적습니다. 1792년부터 세면 23년, 1803년부터 세면 12년입니다. 혁명기의 전쟁까지 이어서 세는지에 따라 길이가 달라집니다.
전쟁이 내내 이어진 것도 아닙니다. 프랑스는 1792년부터 1815년까지 몇 번의 짧은 평화를 빼고는 전쟁 속에 있었습니다. 그사이 1804년 5월 18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인의 황제로 선포됐습니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한 장의 연표
1805년은 바다와 땅에서 정반대의 결과가 난 해입니다. 10월 21일 트라팔가르 앞바다에서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이겼습니다. 그리고 6주 뒤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이 러시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을 크게 이겼습니다.
독일 땅의 지도는 이때부터 빠르게 바뀌었습니다. 1806년 7월 여러 독일 제후가 라인 동맹을 맺어 나폴레옹의 보호 아래 들어가면서 신성 로마 제국에서 빠졌습니다. 황제 프란츠 2세는 제국이 사라졌다고 선언하고 몇 세기 된 왕관을 내려놓았습니다. 그해 10월 프로이센군은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졌고, 1807년 틸지트 협상 뒤 프로이센 왕국은 전의 절반 크기로 줄었습니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의 경제를 공격하기로 하고, 대륙 나라들이 영국 상품에 항구를 닫게 하려 했습니다. 영국과 계속 교역하던 포르투갈이 문제가 됐습니다. 1807년 11월 프랑스군이 리스본을 차지했습니다. 1808년 2월에는 스페인으로 들어가 곧 마드리드까지 손에 넣었고, 5월에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으로 앉혔습니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은 니멘 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갔습니다. 이 원정이 무너진 이듬해인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에서 나흘 동안 싸움이 벌어졌고, 19일에 승부가 났습니다. 1814년 4월 초 연합군이 파리에 들어가자 나폴레옹은 퇴위해 엘바 섬으로 갔습니다.
이야기는 한 번 더 이어집니다. 1814년 9월부터 열강이 빈 회의에서 전후 질서를 논의하던 중, 나폴레옹은 1815년 3월 1일 1,000명과 함께 프랑스에 다시 내렸습니다. 6월 18일 워털루에서 진 뒤 그는 남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남은 삶을 보냈습니다.
징병: 스무 살 청년을 제비뽑기로
1792년 전쟁이 터지자 혁명 정부에는 더 많은 병사가 필요했습니다. 1793년 프랑스는 총동원령(levée en masse)을 내렸고, 독일 역사박물관은 이를 징병의 첫 형태로 봅니다.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나폴레옹 재단(Fondation Napoléon)에 실린 Alain Pigeard의 글에 따르면 1793년 징집은 기대한 30만 명 가운데 16만 5,000명을, 총동원은 예정한 100만 명 가운데 42만 5,000명을 모으는 데 그쳤습니다.
제도를 다시 짠 것이 1798년 9월 5일 통과된 징병법, 흔히 주르당 법(loi Jourdan-Delbrel)이라 부르는 법입니다. 20~25세 시민을 다섯 개 나이 계층으로 나눠 부르게 했습니다. 법을 만든 위원회의 중심이던 주르당 장군의 생각은 "많이 부르되 실제로 복무하는 사람은 적게"였습니다. 이 법은 그 뒤 두 세기 동안 프랑스군 모병의 바탕이 됩니다.
방식은 이랬습니다. 스무 살 청년들의 이름을 명부에 올리고, 그 가운데서 제비뽑기로 징집병(conscrit)을 골랐습니다. 뽑힌 사람은 징병 검사 위원회 앞에서 신체검사를 받았고, 복무 기간은 5년이었습니다.
종이 위의 제도와 실제는 달랐습니다. 법을 시행하자 따르지 않는 징집병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법 통과 뒤 첫 징집에서 기대한 수는 20만 명이었지만, 고향을 떠난 사람은 72,618명, 부대에 실제로 닿은 사람은 51,000명이었습니다.
돈으로 빠질 길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법으로 막혔던 대리 복무가 1802년부터 허용됐습니다. 대리인의 값은 평균 2,000~10,000프랑으로 들쭉날쭉했고, 가난한 농민이나 농업 노동자에게는 2~10년 치 수입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길을 쓴 사람은 1807~1811년 징집병의 4% 정도였고, 제정 말에는 1~2%로 줄었습니다.
징집의 무게는 해마다 달랐습니다. 1805~1809년에는 부르는 수가 아직 제한적이었고, 1810~1811년부터 늘다가 1812~1813년에 가장 무거워졌습니다. 1812년 9월 1일부터 1813년 11월 20일까지 15개월 동안 소집된 사람은 1,527,000명이었습니다. 다만 이것은 부른 수이고, 모두가 부대에 들어가 싸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정 전체로는 약 220만 명이 이 제도로 불려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지만 갈수록 무겁고 미움받는 제도가 됐습니다. 1814년 루이 18세는 첫 조치 가운데 하나로 징병을 없앴지만, 1818년 3월 10일 구비옹 생시르 법으로 다시 살렸고 이 틀은 1872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부른 청년들을 군인으로 만드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연대마다 신병을 가르치는 보충 대대가 생겼고, 고참 부사관들이 소총(1777년형을 1801년에 고친 것, 길이 1.51 m, 무게 4.37 kg) 다루는 법부터 병사·소대·대대 단위 훈련까지 맡았습니다. Jean-Paul Bertaud의 글에 따르면 1805년 국방부는 전시 병력을 526,918명으로 잡았고, 그 절반 넘게가 갓 들어온 징집병이었습니다.
군단: 큰 군대를 작은 군대 여럿으로
수십만 명을 한 덩어리로 움직이기는 어렵습니다. 프랑스군은 먼저 사단(division)이라는 단위를 썼습니다. 1793년에 생긴 사단은 보병·기병·포병 연대를 한데 묶은 부대였습니다.
1805년 무렵부터 이 사단 여럿을 다시 묶어 군단(corps d'armée)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장군 한 명이 보병 사단 2~3개, 기병 여단 하나, 포병 분견대 하나를 거느리는 짜임입니다. 큰 군대 하나를 각자 보병과 기병과 포병을 갖춘 작은 군대 여럿으로 나눈 셈입니다.
다만 군단은 무엇이든 혼자 하는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승부를 가를 기병과 포병의 예비대를 따로 두려고, 사단과 군단에 붙이는 기병·포병의 수를 일부러 적게 했습니다. 1805년에 12,187명이던 근위대(Garde impériale)도 나폴레옹 혼자 지휘하는 "군대 안의 작은 군대"였습니다.
가장 무거운 주먹은 흉갑 기병(cuirassier)이었습니다. 앞뒤를 쇠판으로 가리고 권총 두 자루와 곧은 군도를 든 무거운 기병으로, 적의 진형에 충격을 줘 전선을 깨면 보병이 그 틈을 이용했습니다. 1805년에는 12개 연대 8,472명이었습니다. 33,202명의 경기병은 정찰과 추격을 맡았습니다.
왜 이렇게 짰을까요? Jean-François Brun은 2023년 나폴레옹 재단 인터뷰에서, 나폴레옹이 빠르게 한 점에 모이는 기동을 하려고 군단이라는 새 단계를 만들었고, 이를 지휘할 참모부인 대본영(Grand Quartier Général)도 꾸렸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 조직상의 앞섬과 황제의 전술 능력이 초기 전역에서 프랑스가 우세했던 까닭이라고 봅니다.
이 장치에는 값이 따랐습니다. 빠르게 움직이려면 짐이 가벼워야 했고, 그래서 수송대를 줄이고 "현지에서 먹고 사는" 방식에 기댔습니다. Brun에 따르면 이 방식은 부유한 독일 땅에는 잘 맞았지만 1807년 폴란드에서 이미 어려웠습니다. 대육군(Grande Armée)은 서유럽에서 비교적 짧은 정규전을 치르도록 짜인 원정군이었습니다.
군단을 "나폴레옹의 발명"이라고만 부르기도 어렵습니다. Brun은 군단을 나폴레옹이 만든 것으로 보지만, 그 재료인 사단은 1793년부터 있었습니다. 상대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적이 같은 혁신을 받아들이면서 1809년 무렵부터 전쟁은 점점 어려워졌고, 1814년에는 사람과 물자의 차이를 전술로 메울 수 없었습니다.
나눠 움직이는 군대는 연락이 끊기면 약해집니다. 1815년 6월 16일 리니와 카트르브라에서 같은 날 싸움이 벌어졌을 때, 참모 업무가 서툴러 프랑스 군단 하나가 두 전장 사이를 오가기만 하고 어느 쪽도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은 그 일이 없었다면 프로이센군의 패배가 더 컸을 수 있다고 봅니다.
바다, 반도, 눈밭: 한계가 드러난 곳
징병과 군단은 땅 위의 장치였습니다. 바다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1805년 10월 21일 트라팔가르에서 영국 함대는 수에서 밀렸습니다. 연합 함대는 약 3만 명과 대포 2,632문, 넬슨의 함대는 1만 8,000명과 2,148문이었습니다.
포격이 멈춘 오후 5시 30분까지 연합 함대의 배 17척이 붙잡히고 1척은 불타는 잔해가 됐습니다. 영국 쪽은 449명이 죽고 1,217명이 다쳤고, 프랑스·스페인 쪽은 4,408명이 죽고 2,545명이 다쳤으며 약 2만 명이 포로가 됐습니다. 넬슨은 오후 1시 15분 빅토리호(Victory)에서 총에 맞아 4시 30분에 숨졌습니다.
그런데 왕립박물관 그리니치는 이 승리가 전쟁의 큰 흐름에는 영향이 작았다고 평가합니다. 6주 뒤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에서 이겨 유럽에서의 우위를 굳혔습니다. 그래도 트라팔가르는 바다의 지배자라는 영국의 평판을 굳혔고, 1809년 영국 해군에는 732척에 14만 명 넘게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1808년 7월 바일렌에서 프랑스군 약 1만 2,000명이 항복했고, 이것이 그때까지 지지 않던 프랑스군의 첫 좌절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거두자 스페인 사람들이 분노했고 게릴라에 대한 지지가 커졌습니다.
1812년 이베리아의 프랑스군은 35만 명이 넘었지만, 그 가운데 20만 명은 앞선 전투가 아니라 보급선을 지켰습니다. 종이 위의 병력은 많아도 결정적 승리에 필요한 만큼을 한곳에 모으지 못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이 싸움을 "스페인 궤양(Spanish Ulcer)"이라 불렀습니다. 1813년 비토리아 전투로 스페인에서 프랑스의 지배는 사실상 끝났습니다.
민간인의 고통은 한쪽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웰링턴은 가져간 것에 값을 치르게 했지만 그의 군대에서도 약탈은 늘 규율 문제였고, 1812년 4월 요새 도시 바다호스를 성벽 너머로 쳐들어가 함락한 뒤 연합군 병사들이 민간인 수백 명을 죽였습니다.
러시아에서는 같은 약점이 더 크게 드러났습니다. Marie-Pierre Rey에 따르면 1812년 6월 1년 넘는 준비 끝에 니멘 강가에 약 44만 명이 모였고, 나폴레옹은 열두 군단의 병력을 손수 꼼꼼히 정했습니다. 이 군대는 옛 프랑스 출신, 새로 제국에 붙은 지역의 징집병, 동맹국 부대가 섞인 스무 나라의 군대였습니다.
식량과 말먹이가 모자라자 먹을 것을 찾던 병사들이 부대에서 점점 멀어졌고, 많은 이가 매복과 습격에 쓰러졌습니다. 7월 13일 빌뉴스에서 나폴레옹이 요구한 옷 목록에는 겨울을 견딜 따뜻한 옷이 없었습니다. 그는 6월 1일 편지에 "석 달이면 끝날 것"이라고 썼습니다.
6개월이 채 안 돼 니멘 강을 다시 건넌 병사는 6만 명이 안 됐습니다. Brun은 전장이 너무 넓었고, 모스크바에서 물러날 때 이미 자원이 바닥난 올 때의 길을 그대로 써야 했던 것을 실패의 까닭으로 듭니다.
몇 명이 죽었나: 자료마다 다른 숫자
이 전쟁의 사망자 수는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쓰는 숫자는 나폴레옹 재단이 최근 연구를 묶어 낸 정리 글에서 왔습니다. 나폴레옹의 역사를 전문으로 다루는 재단의 자료이므로, 숫자가 어떤 연구에서 나왔는지까지 함께 적습니다.
첫 본격적인 셈은 1830년대에 나왔습니다. 제정 때 징병국을 맡았던 Hargenvilliers는 1804~1815년 프랑스군의 손실을 170만 명으로 잡았고, 이 숫자는 오래 받아들여졌습니다. 1916년 Bodart와 1930년 Meynier는 이를 지나치다고 보고, 죽거나 실종된 사람을 80만~100만 명으로 다시 셌습니다.
역사인구학 연구자 Jacques Houdaille는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육군 병적부에는 연대별로 동원된 사람 한 명 한 명과 그 운명이 적혀 있습니다. 그는 약 300만 건의 병적부를 500분의 1로 표본 조사해, 15년 동안 90만~100만 명이 죽었다는 결과를 냈습니다. 그 가운데 50% 가까이가 1812~1814년에 몰렸습니다.
죽음의 자리는 전장보다 병원이었습니다. 전장에서 숨진 사람은 소수였고, 대다수는 병원에서 상처나 병으로 죽었습니다. 같은 기간 프랑스에서 동원된 사람은 약 220만 명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군대의 손실은 더 컸다고 추정되지만, 추정의 폭이 100만 명에서 250만 명 넘게까지 벌어집니다. 가운데 값은 약 200만 명입니다. 민간인 사망자는 셈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1808~1814년 스페인의 경우 최근 연구는 인구 1,200만 명 가운데 21만 5,000~37만 5,000명, 곧 2.4~4.2%가 죽었다고 봅니다.
빈 회의, 그리고 남은 것
1814년 9월부터 열린 빈 회의는 무너진 질서를 다시 짰습니다. 독일 역사박물관은 열강이 옛 지도를 되돌리기보다 나라와 자원과 사람을 나눠 대륙에 안정된 세력 균형을 만들려 했다고 설명합니다. 1812년 러시아를 지켜 낸 알렉산드르 1세는 1814년 3월 연합군을 이끌고 파리에 들어갔고, 빈 회의에서 러시아의 목소리를 키웠습니다.
워털루 뒤 유럽에는 크림 전쟁(1854~1856)이라는 짧은 끊김을 빼면 1914년까지 전반적인 평화가 이어졌습니다. 대서양 건너편에서는 1812년부터 1815년까지 영국과 미국이 전쟁을 치렀고, 군사적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독일 땅의 변화는 특히 컸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300개 넘는 영역이 더 큰 나라들로 합쳐졌습니다. 점령된 나라들에게 이 전쟁은 곧 프랑스 점령에서 벗어나는 싸움이 됐고, 1813년 무렵부터의 싸움은 해방 전쟁(Befreiungskriege)이라고도 부릅니다. 19세기 독일 역사학은 이 전쟁에서 독일 민족이 태어났다고 봤는데, 이것은 그 시대 역사가들의 해석입니다.
두 장치도 남았습니다. 징병의 틀은 한때 없어졌다가 되살아나 프랑스 모병의 바탕으로 이어졌습니다. Brun은 조직만 놓고 보면 군단이 19~20세기 근대 군대의 뼈대가 됐다고 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트라팔가르 해전: 넬슨이 전열을 끊은 날 — 바다에서 영국이 이긴 하루를 자세히 봅니다.
- 아우스터리츠 전투: 세 황제의 전투 — 군단 체제가 땅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결과를 낸 전투입니다.
- 1812년 러시아 원정: 대육군은 왜 돌아오지 못했나 — 44만 명이 6만 명 아래로 줄어든 반년을 따라갑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 "현지에서 먹고 사는" 군대가 부딪힌 보급 문제를 오늘의 말로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 새 기술이 전쟁을 바꾼 20세기 이후의 순간들을 모았습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 무기 기술의 다른 갈래인 레이저 무기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