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4일 오전 8시, 일본군 선두 부대가 배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우라항을 떠났습니다. 오후 5시 부산 앞바다에 닿은 이들은 그날로 부산포에 들어왔고, 이튿날 동래가 무너졌습니다. 조선 조정에 첫 소식이 닿은 것은 난이 시작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 2일, 일본군 선두가 서울에 들어왔습니다.

그 뒤로 전쟁은 6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한 달이 안 되어 서울을 잃은 나라가 어떻게 버텼을까요. 바다의 수군, 고을마다 일어난 의병, 압록강을 건너온 명나라 군대가 각자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 사이에는 몇 해에 걸친 강화 교섭과 1597년의 두 번째 침입이 있습니다.

이 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를 연표와 숫자로 따라갑니다. 길잡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임진왜란」, 「정유재란」, 「징비록」 항목입니다. 쓴 사람과 쓴 해가 다른 항목이라 날짜와 병력이 서로 다른 곳이 있고, 그런 곳은 나란히 놓고 읽습니다.

전쟁의 이름과 범위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나서 임진왜란,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있어서 정유재란이라고 부릅니다.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하면 정유재란까지 묶어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의 침입을 가리킵니다.

이 전쟁은 나라마다 이름이 다릅니다. 일본에서는 '분로쿠·케이초의 역',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이라고 부릅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한 곳에서 '조일전쟁'이라는 말도 씁니다.

전쟁 전의 조선과 일본

전쟁 전 조선은 안으로 지쳐 있었습니다. 연산군 이후 네 차례의 사화와 훈구·사림의 다툼이 이어졌고, 선조가 즉위한 뒤에는 당쟁이 더 거세졌습니다.

조선 초기에 만든 국방 체제도 무너져 있었습니다. 비변사라는 합의 기관을 두었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이가 남쪽과 북쪽의 침입에 대비하자며 십만양병설을 내놓았으나, 나라 재정이 약해 이루지 못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고 나라를 하나로 묶었습니다. 그는 대마도주를 시켜 조선이 사신을 보내게 하려 했습니다. 그 속뜻은 조선과 동맹을 맺어 명나라를 치는 데 있었습니다. 일본은 서양에서 들어온 새 무기 조총을 대량으로 만들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1590년 3월 통신사를 보냈습니다. 정사는 황윤길, 부사는 김성일, 서장관은 허성이었습니다. 이듬해 3월 돌아온 두 사람의 보고는 정반대였습니다. 서인인 황윤길은 일본이 병선을 많이 준비하고 있어 반드시 전쟁이 날 것이라 했고, 동인인 김성일은 침입할 낌새를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조정은 김성일의 의견을 따라 각 도에서 성을 쌓는 등 서두르던 대비까지 멈추게 했습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당시 정쟁이 격해져 사실이 어떤지를 묻기보다 자기 당의 사절을 감싸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씁니다. 왜관에 머물던 일본인들이 하나둘 돌아가 왜관이 텅 빈 뒤에야 조정은 무기를 고치고 성을 손보기 시작했습니다.

1592년 봄: 부산에서 평양까지

연표 도표. 세 칸으로 나뉜다. 첫 칸은 1차 침입(1592년~1593년 봄): 4월 14일 부산 상륙, 4월 29일 왕이 서울을 떠나기로 함, 5월 2~3일 일본군 서울 도착, 5월 4~8일 수군 첫 출동, 6월 평양 함락과 의병 봉기, 7월 한산도와 명 1차 원군 실패, 10월 1차 진주성, 12월 이여송 압록강 건넘, 1593년 1월 평양 탈환과 벽제관, 2월 12일 행주, 4월 18일 일본군 서울 철수. 가운데 칸은 강화 교섭(1593~1596): 1593년 6월 2차 진주성, 8월 훈련도감, 1594·1596년 반란, 1596년 책봉과 교섭 결렬. 셋째 칸은 2차 침입(1597~1598): 1597년 1월 선봉 상륙, 7월 15일 또는 16일 칠천량, 8월 16일 남원 함락, 9월 5일 또는 7일 직산, 9월 16일 명량, 12월 울산왜성 공격 실패,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사망, 명군 네 길 공격, 11월 18일 노량과 이순신 전사, 1599년 명군 철수 시작, 1600년 9월 마지막 명군 철수
7년을 세 토막으로. 백과 항목에 적힌 달과 날을 그대로 옮겼고, 값이 둘인 곳은 기록이 서로 다른 곳입니다 (도표)(도표)

일본군은 아홉 개 부대, 곧 9번대로 나뉘어 건너왔습니다. 「임진왜란」 항목에 실린 숫자로 육군 정규 병력이 15만 8700명, 배에 탄 수군이 9,000명, 후방 경비가 1만 2000명이었고, 전체는 20여 만 명이었습니다.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1번대가 부산포에 들어왔고, 부산진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일본군은 몇 갈래로 나뉘어 북쪽으로 올라왔습니다. 상주에서는 순변사 이일이 군사를 모았으나, 밤새 마을을 돌며 불러 모은 수백 명은 군사 훈련을 받아 본 적 없는 농민들이었고, 고니시 부대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크게 졌습니다. 충주에서는 신립이 8,000여 군사로 탄금대에 강을 등지고 진을 쳤습니다. 일본군은 길을 나누어 조총을 쏘며 밀고 들어왔고, 군대 전체가 무너지자 신립은 달천강에 몸을 던졌습니다.

충주에서 졌다는 소식이 4월 29일 서울에 닿자, 선조는 그날 밤 서쪽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대신들은 평양으로 옮겨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자고 아뢰었고, 같은 무렵 둘째 아들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고니시 부대가 5월 2일,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3일 서울에 닿았습니다.

서울을 떠난 사이 궁궐이 불탔습니다. 누가 불을 냈는지는 기록이 갈립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왕이 떠나자 난민이 노비 문서를 맡은 장례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고 이때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모두 탔다고 적습니다. 고니시 부대를 따라온 종군 승려의 일기 『서정일기』에는 5월 7일 경복궁이 다 탔다고 나옵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이것으로 일본군이 경복궁을 태웠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옮겼습니다. 고니시 부대는 6월에 평양을 차지했고, 가토 부대는 함경도로 들어갔습니다. 근왕병을 모으러 북쪽으로 갔던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는 함경도에서 조정에 등을 돌린 백성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 넘겨졌습니다.

바다와 고을에서 바뀐 흐름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곳은 바다였습니다. 전쟁 직전 조선의 판옥선은 250여 척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경상도 쪽 수군은 초반에 거의 다 잃었고, 경상좌수사 쪽에는 전선 4척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조선 수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아래의 배들이 중심이 되었고, 지휘는 이순신이 맡게 되었습니다.

1592년 5월 4일부터 8일까지의 첫 출동에서 이순신 함대는 옥포 등에서 적선 37척을 불태우거나 깨뜨렸습니다. 두 번째 출동의 사천 해전부터는 거북선이 쓰였습니다.

7월에는 견내량에 머물던 일본 선단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 학익진을 폈고, 뒤이은 안골포 해전까지 합쳐 조선이 제해권을 쥐었습니다. 제해권은 바닷길을 누가 마음대로 쓰느냐를 뜻합니다. 이로써 일본군이 서해로 나아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땅에서는 의병이 일어났습니다. 6월 이후 여덟 도 곳곳에서 의병과 승려들의 의승군이 봉기했습니다. 의병에는 양반부터 천민까지 섞여 있었고, 의병장은 대개 벼슬을 지냈던 사람, 그 가운데서도 문관 출신이 많았습니다.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불렸고, 묘향산의 늙은 승려 휴정(서산대사)은 수천 명의 제자로 승군을 일으켰습니다.

1593년 정월 명나라 진영에 알린 전국 의병의 수는 2만 2600여 명이었습니다.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수였고, 의병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1592년보다는 많이 줄어든 숫자입니다. 1592년 10월에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군사와 관리, 백성과 힘을 합쳐 1차 진주성 싸움에서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명나라 군대와 길어진 강화 교섭

가로 막대 도표. 자료에 적힌 병력 수를 어느 항목의 값인지와 함께 놓았다. 1592년 일본 육군 정규 병력 158,700명, 같은 해 배에 탄 일본 수군 9,000명, 1597년 일본군 141,500명(「임진왜란」)과 140,000명(「정유재란」), 1592년 명 1차 원군 5,000명, 1592년 말 이여송의 군대 43,000여 명, 1598년 명군 네 길 병력을 더한 64,400명, 1593년 1월 알린 조선 의병 22,600여 명(관군의 4분의 1). 아래에 기록된 숫자일 뿐 전투력을 잰 것이 아니라는 메모가 있다
자료에 적힌 병력 수. 막대마다 어느 항목의 값인지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선조는 피난길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했습니다. 첫 원군은 요양부총병 조승훈이 이끈 5,000명이었습니다. 이들은 명 조정이 보낸 군대가 아니라 국경을 지키던 병사였고, 7월 15일 평양에 닿아 성을 쳤다가 크게 졌습니다. 그 뒤 명은 심유경을 보내 고니시와 화의를 논의하게 했습니다.

1592년 12월 이여송이 4만 3000여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1593년 1월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했고, 고니시 부대는 얼어붙은 대동강을 건너 물러났습니다. 휴정이 이끈 의승군도 이 싸움에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남쪽으로 내려가던 이여송은 서울 북쪽 벽제관 남쪽 고개에서 일본군의 매복에 크게 지고 개성으로 물러났습니다.

1593년 2월 12일, 서울의 일본군이 한꺼번에 행주산성을 공격했습니다. 전라감사 권율과 의승장 처영이 이를 물리쳤습니다. 이 싸움은 김시민의 진주 싸움, 이순신의 한산도 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삼대첩으로 꼽힙니다.

일본군은 의병, 명군, 보급의 어려움, 돌림병까지 겹쳐 싸울 뜻을 잃었습니다. 화의에 따라 4월 18일 서울에서 물러나 남쪽 바닷가로 내려갔고, 서생포에서 웅천 사이에 성을 쌓고 교섭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교섭 도중이던 1593년 6월에는 진주성을 다시 공격했습니다. 2차 진주성 싸움에서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이 전사했고, 성이 떨어지며 성안의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섭은 몇 해를 끌다 깨졌습니다. 도요토미가 내건 조건은 「임진왜란」 항목에 네 가지로 나옵니다. 명 황녀를 일본의 후비로 보낼 것, 무역 증표인 감합인을 되살릴 것,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넘길 것,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볼모로 보낼 것입니다. 「정유재란」 항목은 화평 조건이 일곱 개 조항이었다고 쓰고 그중 황녀와 남부 4개도를 듭니다.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안 심유경 등은 이를 숨긴 채 명 황제와 도요토미를 함께 속이며 교섭을 이어 갔습니다. 1596년 명나라 사신이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문서와 금도장을 전하자, 도요토미는 이를 받지 않았습니다. 「정유재란」 항목은 1596년 9월 오사카 회견에서 교섭의 속임수가 드러나 결렬되었다고 적습니다.

1597년 다시 온 전쟁과 1598년의 끝

1597년 정월, 1만 4500명의 선봉이 다시 바다를 건넜습니다. 3월 중순부터 대군이 잇달아 들어왔는데, 전체 병력을 「임진왜란」 항목은 14만 1500명, 「정유재란」 항목은 14만 명으로 적습니다. 이번 침략의 첫째 목표는 호남, 곧 전라도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다를 지키던 이순신은 이 무렵 하옥되었고, 원균이 뒤를 이었습니다.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거의 다 무너졌습니다. 날짜는 「임진왜란」 항목의 표가 7월 15일, 「정유재란」 항목 본문이 7월 16일입니다.

땅에서는 8월 16일 남원이 함락되었고 전주는 싸움 없이 일본군에 넘어갔습니다. 「정유재란」 항목은 이 전쟁이 전라도 지역을 철저히 짓밟는 일로 이어졌다고 적습니다. 남원, 영광, 진원, 금구, 김제 같은 고을에서 수만 명이 코를 베이는 일을 당했습니다.

북쪽으로 올라오던 일본군은 직산에서 명군에 막혔습니다. 날짜는 「임진왜란」 항목 본문이 9월 5일, 같은 항목의 표와 「정유재란」 항목이 9월 7일입니다. 9월 16일에는 다시 수군을 맡은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습니다. 그 뒤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까지 남해안을 따라 성을 쌓고 나누어 머물렀습니다.

「정유재란」 항목에 따르면 그해 12월 명의 양호가 이끈 4만여 명이 권율의 1만여 명과 함께 울산왜성을 쳤으나 함락하지 못했습니다. 1598년에는 명군이 네 길로 나뉘어 울산, 사천, 순천을 동시에 쳤습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동로 2만 4000, 중로 1만 3500, 서로 1만 3600, 진린의 수군 1만 3300이라는 숫자를 적습니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일본군은 죽음을 숨기고 돌아오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물러나기 시작했습니다. 11월 18일 밤, 순천의 고니시 부대를 구하러 시마즈의 배 500여 척이 노량으로 왔습니다.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이끈 조명 연합 함대가 이를 맞았고, 이순신은 이 싸움에서 총탄에 맞아 전사했습니다.

명군도 1599년부터 물러나기 시작했고, 서울에 남았던 2만 4000명이 1600년 9월 완전히 떠났습니다. 이렇게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세를 돌린 힘을 두 항목은 조금 다르게 강조합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명의 원조도 있었지만 이순신의 제해권 장악과 전국의 의병 활동이 국면을 바꾼 결정적인 힘이었다고 봅니다. 「정유재란」 항목은 1597년 뒤의 흐름을 명군의 반격, 곧 직산 전투와 1598년 네 길 공격, 그리고 명량 해전을 중심으로 적습니다.

그 시대의 무기와 군사 제도

이 전쟁의 무기에서 가장 자주 이름이 나오는 것은 조총입니다. 일본은 서양에서 들어온 조총을 대량으로 만들어 전쟁을 준비했고, 탄금대 싸움을 적은 대목에도 조총이 나옵니다. 조선군의 오랜 주무기는 활과 화살, 창과 칼, 그리고 총통, 완구, 화전이었습니다.

바다의 싸움에서는 배의 차이가 이야기됩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수군이 잇달아 이긴 까닭 가운데 하나로 조선 전선이 일본 전선보다 튼튼하고 화력이 앞섰다는 점을 듭니다. 한산도에서도 각종 총통을 쏘아 싸움을 열었습니다.

전쟁 중에 새 무기도 나왔습니다.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이 무렵 발명되었습니다. 비격진천뢰는 선조 때 군기시의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포탄으로, 남아 있는 비격진천뢰가 보물로 지정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습니다. 조선은 항복한 일본군에게서 조총 제조와 염초를 얻는 기술을 배워 실전에 썼고, 불랑기라는 무기를 본떠 쓰기도 했습니다.

군대를 꾸리는 방식도 바뀌었습니다. 척계광의 병서 『기효신서』를 얻어 절강 무예를 본받았고, 1593년 8월 훈련도감을 두어 삼수병을 기르게 했습니다. 지방에는 속오군을 두고 교관을 보내 무예를 가르쳤습니다. 무기만이 아니라 병사를 훈련하는 틀까지 손본 것입니다.

전쟁을 버티게 한 또 하나는 곡식이었습니다. 명군이 들어온 뒤 조선 정부는 나라 안 곡식을 조선 관군보다 명군에 먼저 나누었고, 곡식을 모으는 데 백성의 희생이 따랐습니다. 바닷길 수송은 정유재란 때 명군이 두 번째로 오면서 많이 쓰였습니다. 오늘날 군대가 군수(logistics)라고 묶어 부르는 일이 이때도 전쟁의 한 축이었습니다.

남은 상처와 기록

비교 도표. 여섯 줄에 같은 일을 자료마다 다르게 적은 값을 나란히 놓았다. 경복궁을 누가 태웠나: 『선조수정실록』은 왕이 떠난 뒤 난민이 불을 질렀다고, 일본군 종군 승려의 일기는 5월 7일 다 탔다고 적고 항목은 일본군이 태웠다고 유추한다. 칠천량: 「임진왜란」 표 7월 15일, 「정유재란」 본문 7월 16일. 직산: 「임진왜란」 본문 9월 5일, 「임진왜란」 표와 「정유재란」 9월 7일. 1597년 일본군: 141,500명과 140,000명. 도요토미의 강화 조건: 네 가지와 일곱 개 조항. 경작지: 170만 결에서 54만 결로, 3분의 1로(두 값은 서로 가깝다)
같은 전쟁, 다른 기록. 어느 자료의 값인지 함께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전쟁이 남긴 피해는 컸습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전쟁 전 170만 결이던 전국의 농지가 54만 결로 줄었다고 적고, 「정유재란」 항목은 경작지가 3분의 1로 줄었다고 적습니다. 결은 조선에서 농지를 세던 단위입니다. 두 값은 대체로 같은 크기의 감소를 말합니다.

궁궐과 많은 건물, 책과 미술품이 불타거나 약탈되었습니다. 역대 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가운데 전주사고만 남았습니다.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 강제로 농사를 짓거나 노예로 팔렸습니다. 끌려간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활자와 책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나라 안의 질서도 흔들렸습니다. 공을 세우거나 곡식을 바친 대가로 서얼이 벼슬길에 오르고 노비가 풀려나는 등 신분의 벽이 느슨해졌습니다. 「정유재란」 항목은 노비 문서가 사라지고 곡식을 바치면 벼슬을 주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신분 체제가 크게 흔들렸다고 씁니다. 전쟁 중에는 1594년 송유진의 난, 1596년 이몽학의 난 같은 반란도 일어났습니다.

영향은 조선 밖으로도 번졌습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일본에서 제후 세력이 크게 약해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나라 안을 쉽게 장악했다고 봅니다. 명나라는 대군을 보내느라 국력을 크게 써서 재정이 어지러워졌고, 만주의 여진이 세력을 키울 틈을 얻었습니다. 두 항목 모두 이것을 명에서 청으로 나라가 바뀌는 계기로 적습니다.

이 전쟁을 지금 읽을 수 있는 것은 기록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전쟁 초 도체찰사로 장수들을 감독했던 유성룡은 벼슬에서 물러난 뒤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일을 『징비록』으로 남겼습니다.

'징비'는 『시경』의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에서 따온 말입니다. 책은 1647년에 간행되었고, 1695년에는 일본 교토에서도 다시 찍혔습니다. 1712년 조정은 『징비록』을 일본으로 내보내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경복궁이 불탄 경위, 칠천량과 직산의 날짜, 병력 수처럼 같은 일을 서로 다르게 적은 기록도 많습니다. 한 기록만 보면 다른 기록이 보지 못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이 글의 숫자에 항목 이름을 붙여 둔 까닭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이순신과 한산도 대첩: 학익진 기록 읽기: 1592년 바다의 흐름을 바꾼 한산도 해전을 기록으로 자세히 읽을 글입니다.
  • 명량 해전: 13척 기록과 울돌목: 1597년 9월 16일의 해전을 다룰 글입니다.
  • 거북선: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과 모르는 것: 사천 해전부터 쓰인 배를 다룰 글입니다.
  • 임진왜란의 의병과 승병: 관군 밖의 전쟁: 이 글에서 짧게 지나간 의병 이야기를 이어 갈 글입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군량을 나르는 일이 전쟁의 한 축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군대가 군수를 무엇으로 묶어 부르는지 살피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