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 서문을 나섰습니다. 『인조실록』은 이날 왕이 남색 물을 들인 옷을 입고 백마를 탔으며, 의장을 모두 치우고 시종 50여 명만 거느렸다고 적었습니다. 산 아래 한강 가의 삼전도에서 왕은 청 태종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왕이 이 성에 들어간 것은 그 전해 12월 14일 밤이었습니다. 실록의 날짜로 들어간 날과 나온 날을 모두 세면 47일입니다. 이 글은 9년 앞선 1627년의 정묘호란부터 시작해, 두 전쟁이 왜 일어났고 산 위의 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당대 조정의 기록인 실록과 오늘날 학자들이 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으로 따라갑니다. 날짜는 모두 기록에 적힌 옛 달력의 달과 날입니다.

형제의 맹약: 1627년 정묘호란

만주에 흩어져 살던 여진 부족들은 누르하치 아래 하나로 뭉쳐 1616년 후금을 세웠습니다. 후금이 명과 부딪치자 명은 조선에도 함께 군사를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1만 3000명을 주어 명군을 돕게 하면서도, 형세를 보아 처신하라고 은밀히 지시했습니다. 「정묘호란」 항목은 이를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으로 풀이합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실권을 잡은 서인은 광해군 때의 대외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했습니다. 후금과 관계를 끊고,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도왔습니다. 명에 이어 조선과의 교역길까지 막힌 후금은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1627년 1월, 후금의 아민이 3만 병력으로 쳐들어왔습니다. 후금군은 안주성을 점령하고 평양을 지나 황주까지 내려왔고,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갔습니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정봉수와 이립 같은 이들의 활약이 두드러졌습니다.

화의는 강화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참판 최명길의 주장으로 주화론이 받아들여졌고, 3월 3일 두 나라는 형제의 나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후금군은 평산을 넘지 않고 곧 물러나며, 조선은 후금과 맹약을 맺더라도 명에 적대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약 2개월 만에 전쟁이 끝났고, 조정은 4월에 강화도에서 돌아왔습니다.

군신의 의를 요구받다

조선은 형제 관계를 굴욕으로 여겼습니다. 막대한 세폐와 수시로 요구되는 물자는 무거운 짐이었고, 조정은 점점 후금을 배척하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면서도 1628년부터는 중강과 회령에서 열린 무역을 통해 예물 말고도 약간의 필수품을 보냈습니다.

후금은 세력을 더 키웠습니다.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로 고치자고 요구했고,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같은 훨씬 무거운 세폐와 정병 3만까지 바랐습니다. 형제가 아니라 신하의 나라가 되라는 요구였습니다.

1636년 2월, 후금 사신 용골대와 마부태가 와서 이 뜻을 강요하자 인조는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연호를 숭덕으로 바꿨습니다. 11월에는 심양에 간 조선 사신에게 왕자와 대신, 척화를 주장한 사람을 보내라는 최후 통첩을 했고, 조선은 이를 묵살했습니다.

가로 연표 도표. 1616년 후금 건국, 1623년 인조 즉위, 1627년 1월 후금 침입과 인조의 강화도 피난, 1627년 3월 3일 형제의 나라로 화의, 1636년 4월 국호를 청으로 바꿈, 1636년 12월 9일 청군의 압록강 도하, 12월 14일 인조의 남한산성 입성, 1월 21일 밤 청군의 강화도 상륙, 1월 30일 출성과 삼전도 항복, 1639년 삼전도비 건립, 1645년 소현세자 귀국이 같은 간격으로 놓여 있다. 입성과 출성 두 점은 크고 진하게 표시했고, 그 사이에 '요새 안의 47일(인조실록 날짜로 셈)'이라는 괄호가 있다. 1636~1637년 겨울 전쟁 구간은 옅은 띠로 칠했다
두 번의 침입, 1616년에서 1645년까지. 달과 날은 기록에 적힌 옛 달력 그대로이고, 간격은 실제 시간에 맞추지 않았습니다 (도표)(도표)

12월 14일, 강화도 대신 남한산성으로

청 태종은 몸소 전쟁에 나섰습니다. 「병자호란」 항목에 따르면 1636년 12월 1일 청군 7만, 몽골군 3만, 한군 2만, 모두 12만이 심양에 모였습니다. 9일에 압록강을 건넌 선봉은 의주부윤 임경업이 굳게 지키던 백마산성을 피해 밤낮으로 달렸고, 심양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서울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조정에 급보가 닿은 것은 12일이었습니다.

14일, 조정은 윤방과 김상용에게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과 원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데리고 강화도로 피하게 했습니다. 인조도 그날 밤 강화도로 향했지만, 청군이 양천강을 막아 길이 끊겼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최명길이 청군 진영에 나가 시간을 끄는 사이 왕은 세자와 백관을 데리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습니다. 실록은 "초경이 지나서" 왕의 수레가 산성에 닿았다고 적었습니다.

그날 밤에도 강화도로 옮기자는 말이 나왔습니다. 김류는 "고립된 성에 계시면 외부의 구원도 없게 되고 마초와 양식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고, 강화도는 우리에게 편리하고 적은 침범하기 어려운 곳이라고 아뢰었습니다. 15일 새벽 왕은 산성을 떠났지만, 눈 뒤에 얼어붙은 비탈에서 말이 미끄러졌습니다. 말에서 내려 걷다가도 여러 번 미끄러진 끝에 왕은 강화도행을 포기하고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산 위의 성은 어떤 성이었나

남한산성은 서울 남동쪽 25 km의 산지에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이곳을 조선 왕조의 비상 수도로 설계된 곳이라고 소개합니다. 『삼국사기』에는 673년 이 일대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지금 성의 모습은 인조 2년(1624)에 다시 고쳐 쌓은 결과입니다.

공사는 총융사 이서가 맡았고, 승려 각성을 도총섭으로 삼아 전국 8도의 승군을 동원했습니다. 유네스코도 이 성을 승병이 쌓고 지켰으며 4,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2년 뒤 성에는 여장 1,897개, 옹성 3개, 문 4곳, 암문 16곳, 우물 80곳, 샘 45곳이 갖춰졌고, 광주읍의 관아도 성안으로 옮겨 왔습니다. 왕이 머물 행궁은 1624년 9월에 세웠습니다.

성벽 바깥은 경사가 급하고 안쪽은 완만합니다. 지키는 쪽에는 유리하고 다가오는 쪽에는 어려운 지형입니다. 여장에는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 갈라 놓은 틈인 타구가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등재 기준에서 이 성의 방어 체계가 중국과 한국의 성 쌓기 기준을 다시 따져 본 데서, 그리고 서양에서 들어온 새 화기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오늘 보는 시설이 모두 1636년 겨울에 있던 것은 아닙니다. 여장은 1744년에 벽돌을 걷어 내고 기와로 덮었고, 순조 때까지 여러 시설이 더 정비되었습니다.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개념 도표. 왼쪽 바다 쪽에 강화도, 가운데 위에 한양(지금의 서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한강 위에 삼전도, 오른쪽 아래 산 위에 점선 고리로 남한산성이 있다.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회색 점선에는 X 표시와 '14일,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겼다는 보고'라는 글이 붙었다. 한양에서 남한산성으로 파란 화살표가 '14일 밤, 왕이 성에 들어감'을 나타낸다. '15일, 강화도로 다시 가려다 얼어붙은 비탈에서 포기'라는 글, 강화도 아래에 '1월 21일, 청군이 건너와 섬의 고을이 함락'이라는 글, 남한산성에서 삼전도로 가는 주황 화살표에 '1월 30일, 서문으로 나와 항복'이라는 글이 있다. 바깥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는 회색 점선 화살표 두 개는 '각 도의 구원군이 닿기 전에 무너짐'을 나타낸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으며, 남한산성은 서울 남동쪽 약 25 km(유네스코)라는 메모가 있다
1636~1637년 겨울, 왕이 움직인 길을 단순하게 그린 그림입니다. 지도가 아닙니다 (도표)(도표)

성안의 47일

「병자호란」 항목은 성안의 군사를 1만 3000명으로 적습니다. 식량은 양곡 1만 4300석과 장 220항아리로, 겨우 50여 일을 버틸 양이었습니다. 신경진이 동쪽 망월대, 구굉이 남쪽, 이서가 북쪽, 이시백이 서쪽 성벽을 맡았습니다.

청군 선봉은 12월 16일 산성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습니다. 성안에서는 12월 18일부터 몇 차례 작은 부대가 성을 빠져나가 싸워 사기를 올렸지만, 큰 싸움은 없었습니다. 이듬해 1월 1일 청 태종은 산 아래 탄천에 군사를 벌여 세우고, 성 동쪽 망월봉에 올라 성안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같은 항목은 이때 탄천의 청군을 20만으로 적습니다. 심양을 떠날 때 12만이라고 한 숫자와 다릅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이 항목만으로 가릴 수 없어, 아래 숫자 도표에 둘을 나란히 두었습니다.

성안이 기다린 것은 바깥의 구원군이었습니다. 도원수와 각 도의 관찰사, 병사에게 근왕병을 모으게 했지만, 충청도 군사는 험천에서, 경상도 군사는 광주 쌍령에서 무너졌습니다. 전라병사 김준룡은 광교산에서 이겼으나 역습을 받아 물러난 뒤 군이 흩어졌습니다.

명나라에도 원병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명은 나라 안의 반란 때문에 원병을 보낼 형편이 못 되었고, 수군을 움직이려던 계획도 바람과 파도에 막혔습니다. 남한산성은 기댈 곳 없이 고립되었습니다.

「병자호란」 항목은 큰 싸움 없이 40여 일이 지나자 성안의 참상이 말이 아니었다고 적습니다. 47일이라는 수는 실록의 날짜에서 나옵니다. 12월 14일 밤에 들어가 그달 30일까지가 17일이고, 1월 1일부터 성을 나온 30일까지가 30일입니다. 들어간 날과 나온 날을 모두 세면 47일이 됩니다.

표 도표. 숫자, 무엇을 센 것인지, 어느 기록인지를 나란히 적었다. 3만: 1627년 침입한 후금군(「정묘호란」 항목). 12만: 1636년 12월 1일 심양에 모은 청군(「병자호란」 항목). 20만: 1637년 1월 1일 탄천에 벌여 세운 청군(「병자호란」 항목). 1만 3000: 남한산성 안의 군사. 1만 4300석: 겨우 50여 일 버틸 양곡. 40여 일: 성안의 형편이 참혹해지기까지 지난 날. 47일: 12월 14~30일 17일과 1월 1~30일 30일을 더한 수(인조실록 날짜로 셈). 수만: 청군에게 끌려간 사람, 다른 기록에는 50만. 12만과 20만 두 줄은 같은 항목 안의 서로 다른 숫자라고 주황색으로 표시했다
한 전쟁, 여러 숫자. 숫자마다 어느 기록에서 왔는지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강화도가 먼저 무너지다

왕족과 신주가 먼저 피한 강화도는 김류가 적이 침범하기 어려운 곳이라고 했던 섬입니다. 강화 수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은 청군이 강화도만은 침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과는 서로 배척할 만큼 사이가 나빴습니다.

1월 21일 밤, 청군이 강화도로 건너오기 시작했습니다. 청군은 나루터에서 홍이대포라는 큰 포를 쏘았고, 포탄은 물을 넘어 육지 몇 리 밖에 떨어졌습니다. 조선 관군도 조총을 쏘았지만 화약에 습기가 차서 불발되었습니다.

강화부성은 무너졌습니다. 청군은 세자빈과 봉림·인평 두 대군을 붙잡았고, 원손은 교동으로 피했습니다. 원임대신 김상용을 비롯한 관원들, 그리고 많은 어린이와 부녀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청군은 포로가 된 대군의 편지와 신하들의 장계를 남한산성에 보여 주며 항복을 재촉했습니다. 강화도가 함락된 것을 확인한 인조는 결국 성을 나가기로 했습니다.

주화와 척화: 같은 위기, 다른 답

성안의 조정은 둘로 갈렸습니다. 화의를 맺어 나라를 지키자는 주화론과,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론(주전론)입니다. 주화론의 중심에는 이조판서 최명길이, 척화론의 앞에는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이 있었습니다.

최명길은 정묘호란 때도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했다가 많은 지탄을 받았습니다. 「최명길」 항목은 그가 미리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강화론을 계속 폈다고 설명합니다. 김상헌은 1635년 대사헌이 되자 군비를 확보하고 북방의 군사 시설을 늘리자고 주장했고, 산성 안에서는 끝까지 주전론을 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를 보여 주는 일화가 전합니다. 김상헌이 조선 쪽 강화 문서를 찢고 통곡하자 최명길이 그것을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병자호란」 항목은 주전파 역시 난국을 타개할 방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쓰고, 대세가 강화 쪽으로 기울었다고 적습니다. 1월 3일 최명길이 지은 국서가 청 진영으로 갔지만, 청 태종의 답은 왕이 직접 성에서 나와 항복하고 척화 주모자 두세 명을 묶어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쟁 뒤 두 사람이 걸은 길도 달랐습니다. 최명길은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나랏일을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김상헌은 1639년 명을 치려는 청의 출병 요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으로 끌려가 6년 만에 풀려났고, 뒷날 효종이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존경받았습니다.

삼전도와 그 뒤

1월 30일, 인조는 왕세자와 함께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갔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왕은 청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올렸습니다. 왕이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는 사로잡힌 사람들이 길을 끼고 울부짖었는데 그 수가 만 명을 헤아렸다고 실록은 적었습니다.

항복 조건은 11조였습니다. 조선은 청에 신하의 예를 행하고, 명에서 받은 고명과 인장을 바치고 명의 연호를 버려야 했습니다. 왕의 맏아들과 둘째 아들, 대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내고, 청이 명을 칠 때 원군을 보내며, 성을 새로 쌓거나 고치지 않고, 1639년부터 세폐를 보내야 했습니다.

청군은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을 볼모로 삼았습니다. 척화를 주장한 오달제·윤집·홍익한도 붙잡아 함께 심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전쟁은 한 달 남짓이었지만, 「병자호란」 항목은 그 피해가 임진왜란에 버금갔다고 적습니다. 청군에게 끌려간 사람은 수만 명이었고, 다른 기록에는 50만 명으로 나옵니다. 그 대부분은 몸값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돌아온 여성들의 이혼 문제가 정치·사회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명과 관계를 끊고 청에 복속했고,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질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공문서에는 청의 연호 숭덕을 썼지만 개인 문서나 제사의 축문에는 명의 연호가 쓰였습니다. 1641년 청의 요구로 다시 보낸 원군은 강압으로 이루어진 파병이었고, 싸우는 자세도 지극히 소극적이었다고 항목은 설명합니다.

1639년 삼전도에는 청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비가 섰습니다. 청이 건립을 강요한 비로, 앞면에는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가, 뒷면에는 한문이 새겨져 있고 비문은 이경석이 지었습니다. 비신 높이 395 cm의 이 비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1645년에 돌아왔지만 세자는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왕위에 오른 봉림대군, 곧 효종은 군비를 늘리며 북벌을 계획했으나 재위 10년 만에 세상을 떠나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남한산성 동문 안에는 1688년 척화를 주장한 홍익한·윤집·오달제와 김상헌·정온의 위패를 모신 사당 한절사가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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