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1년 4월 12일 새벽 4시 30분,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항구의 존슨 요새에서 남부연합의 10인치 박격포 한 문이 섬터 요새를 향해 첫 발을 쐈습니다. 요새는 제대로 응사하지 못했고, 이튿날 오후 2시 30분 수비대장 앤더슨 소령이 항복했습니다. 포격이 이어지는 동안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늘날 미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은 이 전쟁을 "400만 명 해방, 75만 명 사망"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사상자 없이 시작한 싸움이 어떻게 미국 역사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쟁이 됐을까요? 노예제를 둘러싼 분리 독립, 북부와 남부의 힘의 차이, 강선 소총과 철갑함과 철도, 해방 선언과 흑인 병사, 그리고 끝내 하나로 모이지 않는 숫자들을 차례로 봅니다.
근거는 미국 정부 기관의 공개 기록입니다. 국립공원청의 전적지 자료,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 NARA)의 원문 문서, 국무부 역사실(Office of the Historian)의 외교사 연재를 썼습니다.
노예제와 분리 독립
1860년 11월 6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습니다. 첫 공화당 대통령이었고, 공화당은 노예제가 서부의 준주(territories)로 퍼지는 것에 반대하는 당이었습니다. 이 승리가 노예제를 유지하던 남부 곳곳에서 연방을 떠나자는 목소리를 불렀습니다.
12월 20일 사우스캐롤라이나가 가장 먼저 연방을 떠났습니다. 분리를 결정한 회의의 대표 169명 가운데 153명이 1860년에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나흘 뒤 이 주가 낸 선언문은 링컨을 "노예제에 적대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으로 가리켰습니다. 국립공원청은 선언문이 밝힌 분리의 이유를 노예제에 대한 실제의, 그리고 그렇게 받아들인 위협으로 정리합니다.
1861년 1월에는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뒤따랐습니다. 2월 4일 이 주들의 대표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모여 아메리카 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조직했습니다. 흔히 남부연합이라고 부르는 나라이고, 2월 18일 제퍼슨 데이비스가 임시 대통령이 됐습니다. 링컨의 취임식은 3월 4일이었습니다.
남부가 내세운 "주의 권리"라는 논리에도 앞선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는 1828년과 1832년의 연방 관세를 주의 권리를 들어 무효로 하자고 표결했고, 1833년 타협 관세로 위기가 풀렸습니다. 이때 이 주는 분리를 외치는 것이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원인을 두고는 지금도 대중과 학계의 생각이 엇갈립니다. 국립공원청이 실은 역사학자 제임스 올리버 호턴(조지워싱턴대 명예교수)의 글은, 노예제가 남부가 싸운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분리와 전쟁의 동기에서 중심이었다고 봅니다.
그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주장에 거의 논란이 없지만, 대중의 머릿속에서는 노예제와 전쟁이 자주 따로 떨어져 있다고도 적습니다. 1860년 사우스캐롤라이나 회의는 관세율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의 지적입니다.
북부의 목표도 처음부터 노예 해방은 아니었습니다. 링컨과 공화당 다수가 바란 것은 노예제의 확장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북부는 남부의 분리를 막고 연방을 지키려고 싸웠고, 노예제를 끝내는 것은 전쟁 목표에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섬터 요새의 포격
섬터 요새에는 북군 80명, 이를 둘러싼 남군은 500명이었습니다. 4월 10일 남부연합의 보러가드 준장이 항복을 요구했고 앤더슨 소령은 거절했습니다. 포격이 시작되자 요새는 제대로 응사하지 못했고, 4월 13일 항복한 수비대는 다음 날 요새를 떠났습니다.
포격 중에는 사상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4월 14일 철수하며 예포를 쏘던 대포가 일찍 터져 북군 포병 1명이 죽고 3명이 다쳤습니다(1명은 치명상). 국립공원청의 전투 기록은 이 포격을 남북전쟁의 첫 교전으로 적고, 결과 칸에는 "판정 없음(Indecisive)"이라고 썼습니다.
4월 15일 링컨은 반란이 일어났다고 선언하고 민병 75,000명을 불렀습니다. 이 소집에 반발해 버지니아, 아칸소,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가 몇 주 안에 연방을 떠났습니다. 5월 하순에는 버지니아의 리치먼드가 남부연합의 수도가 됐습니다.
남부연합은 결국 11개 주가 됐습니다. 노예제가 있으면서도 연방에 남은 메릴랜드, 델라웨어, 웨스트버지니아, 켄터키, 미주리는 경계주(Border States)라고 불렸습니다.
북부와 남부, 무엇이 달랐나
국립공원청의 "Civil War Facts" 쪽에 따르면 연방의 인구는 1,850만 명이었고, 남부연합은 자유인 550만 명과 노예 상태의 사람 350만 명이었습니다. 공장은 연방 101,000곳에 남부연합 21,000곳, 공장 노동자는 110만 명에 111,000명이었습니다. 철도는 20,000마일과 9,000마일, 은행 예금과 주화는 2억 3,400만 달러와 7,400만 달러였습니다.
차이는 무기를 만드는 힘에서 더 컸습니다. 1860년 나라 제조업 산출의 90%가 북부 주에서 나왔고, 북부는 남부보다 화기를 32배 많이 만들었습니다. 남부는 세계 면화의 3분의 2를 생산했지만 제조 능력은 적었고, 철도 선로의 약 29%와 은행의 13%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남부가 가난했던 것은 아닙니다. 1860년 미국의 노예를 돈으로 따진 가치는 나라의 모든 철도와 공장과 은행에 들어간 투자액을 합친 것보다 컸습니다. 부가 사람을 소유하는 제도에 묶여 있었던 셈입니다.
사람의 수는 시간이 갈수록 벌어졌습니다. 1861년 7월 두 군대는 각각 20만 명이 안 되는 비슷한 규모였습니다. 1863년 병력이 가장 많을 때 연방군은 남부연합군의 두 배였고, 다시 2년 뒤 남부연합군은 약 2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남부 남성은 약 75%가 전쟁에 나갔고, 북부 남성은 약 절반이 나갔습니다.
1861~1865년 연표
첫해의 큰 싸움은 1861년 7월 21일 버지니아의 불런(제1차 매나서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연방군이 밀었지만 남군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맥도웰의 연방군은 허둥지둥 워싱턴 방어선으로 물러났습니다.
1862년의 전쟁은 강에서 많이 움직였습니다. 2월 16일 테네시의 도널슨 요새가 항복했고, 그랜트 장군은 여기서 "무조건 항복" 그랜트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4월 6~7일 실로 전투가 있었고, 4월 25일에는 패러거트의 연방 함대가 뉴올리언스에 닿았습니다.
9월 17일 메릴랜드의 앤티텀은 남북전쟁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하루였고, 리 장군의 첫 북부 침공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닷새 뒤인 9월 22일 링컨은 예비 해방 선언을 냈습니다.
1863년 7월 초에는 큰일이 이틀 사이에 겹쳤습니다. 7월 1~3일 펜실베이니아의 게티즈버그는 이 전쟁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투였고, 리가 북부 침공에서 이기리라는 기대를 꺾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7월 4일 미시시피주 빅스버그가 그랜트에게 항복하면서 미국은 미시시피강 전체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해 3월 3일에는 북부에서도 징병이 시작됐습니다(남부는 그 전해에 시작했습니다).
1864년 3월 그랜트가 중장으로 진급해 모든 연방군을 맡았습니다. 6월 중순 버지니아의 철도 교차점 피터즈버그를 나흘 동안 공격한 뒤, 그랜트는 포위로 도시를 고립시킬 수밖에 없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서쪽에서는 9월 1일 애틀랜타가 함락됐고, 11월 8일 링컨이 재선됐으며, 11월 16일 셔먼의 군대가 "바다로의 행군"을 시작해 12월 10일 서배너에 닿았습니다. 국립공원청 해설은 셔먼의 원정이 남부의 산업과 농업과 기반 시설에 큰 피해를 줬다고 적고, 셔먼 자신은 나중에 그 피해를 1억 달러로 어림했습니다.
강선 소총, 철갑함, 철도와 전신
이 전쟁의 보병은 주로 강선 머스킷(rifle musket)을 들었습니다. 총열 안쪽에 나선 홈(강선)을 판 총으로, 총구로 한 발씩 장전했습니다.
연방군의 M1861 스프링필드는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이 쓰인 보병 총이었고, 숙련된 손에서는 1분에 세 번 쏠 수 있었습니다. 셰넌도어 계곡 전투 자료에 적힌 유효 사거리는 400~500야드입니다. 남부연합 병사가 가장 많이 쓴 총은 영국제 1853년형 엔필드였고, 약 90만 정이 대부분 남부연합을 위해 수입됐습니다.
강선 총을 전장의 주력으로 만든 것은 탄알이었습니다. 1848년 프랑스 육군의 미니에 대위가 내놓은 미니에 탄(Minié bullet)은 지름이 반 인치를 조금 넘는 원뿔꼴 납탄입니다. 밑이 비어 있어 쏘는 순간 벌어지면서 강선에 물렸습니다. 미 육군은 1855년 하퍼스페리 조병창의 버턴이 고친 설계를 채택했습니다.
국립공원청의 한 공원 안내원은 인터뷰에서 활강총(smoothbore)의 유효 사거리를 75~100야드, 미니에 탄을 쓰는 강선 총은 적어도 400야드로 비교합니다. 그런데도 군대는 여전히 어깨를 맞대고 줄지어 섰다고 그는 말합니다. 전쟁 중 부상의 75%가 미니에 탄 때문이었다는 것도 그의 설명입니다. 사거리는 쪽마다 조건이 다르니 숫자만 떼어 비교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포병은 12파운드 "나폴레옹" 포를 가장 많이 썼을 것으로 봅니다. 청동으로 만든 활강 포신에서 실탄과 유탄과 산탄을 쐈습니다.
연철 덩어리에 달군 연철 막대를 감아 만든 3인치 오드넌스 라이플은 가볍고 정확하고 잘 터지지 않아 가장 인기 있는 포가 됐고, 사거리는 2마일을 넘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쓰인 포탄의 종류는 70가지가 넘습니다.
바다에서는 배의 모양이 바뀌었습니다. 1862년 3월 8일 남부연합의 철갑함 버지니아(옛 연방 프리깃 메리맥을 철판으로 덮은 배)가 햄프턴 로즈에서 연방 배 두 척을 가라앉히고 한 척을 좌초시켰습니다. 다음 날 물 위로 18인치만 솟은 연방의 모니터가 도착했습니다. 두 배는 네 시간 동안 서로 쐈지만 포탄이 철판에 튕겨 나가 어느 쪽도 크게 상하지 않았습니다.
철갑함끼리 싸운 첫 교전이었고, 증기로 움직이는 철선의 시대가 왔다는 신호였습니다. 두 배 모두 오래 남지는 못했습니다. 버지니아는 두 달 뒤 물러나던 남군이 스스로 가라앉혔고, 모니터는 그해 말 노스캐롤라이나 해터러스곶 앞바다에서 궂은 날씨에 가라앉았습니다.
물밑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1864년 2월 17일 찰스턴 앞바다에서 7명이 타는 남부연합의 잠수정 H.L. 헌리가 연방 군함 하우저토닉을 가라앉혔습니다. 남북전쟁에서 처음 성공한 잠수함 공격이었고, 헌리도 돌아오지 못한 채 1995년에야 발견됐습니다.
땅 위에서는 철도와 전신이 전쟁의 속도를 바꿨습니다. 아홉 달 동안의 피터즈버그 포위가 좋은 예입니다. 연방은 선로 21마일을 새로 깔고 기관차 25대와 차량 275대 넘게를 굴렸습니다. 이것으로 10만 명 넘는 병력과 6만 5천 마리 넘는 말과 노새를 먹였습니다.
주된 화물은 식량과 무기와 탄약이었습니다. 연방의 군용 철도(United States Military Railroad)는 전쟁이 끝날 때 세계에서 가장 큰 철도망이었습니다. 전쟁부 차관보 찰스 A. 데이나는 전신을 "우리 군의 가장 쓸모 있는 도구 가운데 하나"라고 불렀습니다.
바다의 봉쇄와 유럽
섬터 요새 포격 일주일 뒤인 4월 19일 링컨은 남부 항구의 봉쇄를 선포했습니다. 면화 수출과 전쟁 물자 밀수를 막으려는 조치였고, 1861년 7월까지 남부의 큰 항구가 모두 봉쇄됐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봉쇄에 구멍이 꽤 있었지만 남부가 무기를 손에 넣는 것은 막았다고 평가합니다. 그래도 1865년 피셔 요새를 잃을 때까지 남부연합군은 봉쇄를 뚫는 배로 물자를 얼마간 얻었습니다.
남부 지도자들은 세계 시장에서 면화가 중요하니 영국과 프랑스가 도우러 오리라고 자신했습니다. 실제로 남부 면화에 기대던 영국과 프랑스의 섬유 지역에서는 실업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는 중립을 지켰고, 전쟁 후반에는 이집트와 인도에서 새 면화 공급처를 찾았습니다. 영국에서는 강한 노예제 반대 여론이 정부가 남부를 더 돕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위기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영국은 1861년 5월 13일 남부연합을 교전 단체로 인정했습니다. 11월 8일 미 해군 장교 윌크스는 영국 우편선 트렌트호를 세우고 남부연합 사절 두 명을 잡았습니다. 영국은 중립 침해라고 항의했고, 사절을 한 달 뒤 풀어 주면서야 위기가 가라앉았습니다.
해방 선언과 흑인 병사
전쟁의 성격을 바꾼 것은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이었습니다. 링컨은 앤티텀 승리 며칠 뒤인 1862년 9월 22일 예비 선언을 냈고, 1863년 1월 1일 반란 중인 지역의 노예가 "이제부터 자유"라고 선언했습니다. 군 통수권자로서 내린 군사 조치였습니다.
그래서 범위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선언은 분리한 주에만 적용됐고, 연방에 남은 경계주의 노예제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이미 연방군이 차지한 남부 지역도 뺐습니다. 약속한 자유는 연방군이 이겨야 실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해방을 기다리기만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쟁 첫날부터 노예 상태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유를 얻으려고 움직였고, 1862년 여름에는 자유를 찾아 연방군 전선을 넘었습니다. 미국 정부의 정책과 전쟁 목표는 이런 흐름 속에서 바뀌어 마침내 노예제 폐지를 품게 됐습니다.
해방 선언은 흑인 남성을 육군과 해군에 받아들인다고 알렸습니다. 전쟁 초에 흑인 자원자는 흑인이 연방 육군에서 무기를 들지 못하게 한 1792년 연방법 때문에 돌려보내졌습니다. 1863년 5월 22일 전쟁부의 일반 명령 143호가 미국 유색인 부대(United States Colored Troops)를 만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흑인 남성 약 179,000명(연방군의 10%)이 육군에서, 19,000명이 해군에서 복무했습니다. 흑인 병사 약 4만 명이 죽었고, 그 가운데 3만 명은 감염과 병 때문이었습니다.
차별은 군대 안에도 있었습니다. 흑인 병사는 처음에 한 달 10달러에서 옷값 3달러를 떼고 7달러를 받았고, 백인 병사는 13달러를 그대로 받았습니다. 1864년 6월 의회가 같은 급여를 정하고 지난 몫까지 돌려줬습니다. 부대는 따로 편성됐고 대개 백인 장교가 지휘했으며, 흑인 장교는 80명 가까이였습니다.
사로잡힌 흑인 병사는 대개 백인 포로보다 가혹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1864년 테네시의 포트 필로에서는 남부연합 병사들이 사로잡은 흑인 연방 병사들을 쏘아 죽였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흑인 병사 16명이 명예 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습니다.
애퍼매톡스와 그 뒤
1865년 4월 2일 리는 피터즈버그와 리치먼드를 버리고 서쪽으로 물러났습니다. 4월 9일 버지니아의 애퍼매톡스 코트하우스에서 리는 윌머 매클레인의 집 거실에서 그랜트를 만나 항복 문서에 서명했습니다. 남부연합 병사는 무기와 장비와 깃발을 내놓았고, 장교는 말과 권총과 개인 물건을 지녔습니다. 병사들은 포로수용소로 가지 않고 가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갔고, 그랜트는 사흘 치 2만 5천 명분의 식량을 보냈습니다.
리가 항복시킨 것은 자기 군대였지 남부연합 전체가 아니었습니다. 4월 14일 링컨이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총에 맞아 다음 날 아침 숨졌습니다. 4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존스턴이 항복했고, 5월 10일 데이비스가 조지아에서 붙잡혔습니다. 남은 군대도 6월 초까지 모두 항복했습니다.
1865년 6월 19일 연방군이 텍사스 갤버스턴에 들어가 2년 넘게 전에 선언된 자유를 집행했습니다. 텍사스에서 25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자유를 얻었고, 이날은 준틴스(Juneteenth)라는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마지막 남부연합 군함 셰넌도어는 11월 6일 영국 리버풀에서 항복했고, 1866년 8월 20일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선언이 공식적인 종전으로 남았습니다.
해방 선언만으로는 나라 전체의 노예제를 끝낼 수 없었습니다. 수정헌법 13조는 1865년 1월 31일 하원에서 119 대 56으로 통과했고, 그해 12월 6일 비준되어 미국에서 노예제를 없앴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는 13조를 14조, 15조와 함께 미국인의 시민권을 크게 넓힌 "남북전쟁 수정 조항" 세 개로 묶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이 전쟁의 숫자는 같은 정부 기관 안에서도 쪽마다 다릅니다. 사망자가 대표적입니다.
국립공원청 남북전쟁 첫 쪽은 75만 명이라고 씁니다. 국립공원청의 "Civil War Facts" 쪽은 연방의 전투 사망 110,100명과 병사 224,580명, 남부연합의 전투 사망 94,000명과 병사 164,000명을 적었고, 이 넷을 더하면 약 59만 명입니다.
"사상자(casualties)"와 "사망자"도 구별해야 합니다. 사상자에는 죽은 사람뿐 아니라 다친 사람과 포로가 들어갑니다. 같은 쪽은 연방의 사상자를 642,427명, 남부연합을 483,026명으로 적고, 게티즈버그(51,116명), 칠일 전투(36,463명), 치카모가(34,624명), 챈설러즈빌(29,609명), 앤티텀(22,726명)을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투로 꼽습니다. 이 가운데 하루 만에 끝난 싸움은 앤티텀뿐이었습니다.
인구도 다릅니다. "Civil War Facts" 쪽은 연방을 1,850만 명으로, 산업·경제 해설 쪽은 연방에 남은 주를 약 2,300만 명으로 적습니다.
흑인 병사는 "Civil War Facts" 쪽이 연방군의 아프리카계 병사 178,975명, 국립문서보관소가 육군 약 179,000명과 해군 19,000명으로 적어 거의 같습니다. 남부연합군의 입대 인원은 아예 75만 명에서 1,227,890명까지의 범위로만 나옵니다. 입대 기록이 불완전하고 일부는 없어져서 병사 구성도 알 수 없습니다.
포로수용소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은 연방 병사 30,218명, 남부연합 병사 25,976명이었고, 포로의 사망률은 각각 15.5%와 12%였습니다. 숫자가 서로 다를 때는 어느 하나를 고르기보다, 어느 기관의 어느 쪽에서 나온 값인지를 함께 적어 두는 편이 정확합니다.
다음에 읽을 글
- 게티즈버그 전투: 사흘 동안의 전환점. 1863년 7월의 사흘을 따로 자세히 봅니다.
- 모니터함과 버지니아함: 철갑함끼리의 첫 대결. 햄프턴 로즈의 이틀을 배의 구조로 봅니다.
- 강선 소총과 미니에 탄: 남북전쟁의 사상자가 많았던 배경. 이 글에서 짧게 본 소총과 탄알을 원리로 풉니다.
-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 피터즈버그의 철도처럼, 군대를 먹이고 움직이는 일이 왜 전쟁의 바탕인지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철갑함 뒤에 이어진 20세기 무기 기술의 큰 변화를 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이 사이트의 중심 주제인 레이저 무기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