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4년 7월 3일 밤 8시, 지금의 미국 펜실베이니아 숲속 초지에 급히 세운 작은 요새에서 문서 한 장이 오갔습니다. 버지니아 민병대를 이끌던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이 프랑스군 지휘관이 내민 항복 문서에 서명한 것입니다. 문서는 프랑스어로 쓰여 있었고, 그 안의 낱말 하나가 곧 두 나라 사이의 다툼거리가 됩니다.
이 숲속 다툼은 몇 해 지나지 않아 유럽의 왕국들, 인도의 벵골, 카리브해의 섬들, 프랑스 서해안의 바다로 번졌습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이어진 이 7년 전쟁(Seven Years' War)이 "원조 세계 전쟁"이라 부를 만하다고 소개합니다.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싸움이 유럽의 전면전과 한 전쟁으로 묶였기 때문입니다.
북아메리카의 숲과 독일의 들판, 인도의 강가와 대서양의 암초는 어떻게 한 전쟁이 됐을까요? 네 무대를 한 장의 연표에 올려 놓고, 끝에 남은 두 장의 조약문과 그 뒤의 빚까지 따라가 봅니다.
오하이오 숲의 작은 요새
1753년의 북아메리카 지도를 떠올려 보면 출발점이 보입니다. 영국은 대서양 쪽에서 애팔래치아 산맥까지 이어진 13개 식민지를 다스렸습니다. 산맥 너머에는 루이지애나에서 미시시피 강 유역과 오대호를 지나 캐나다까지 뻗은 누벨프랑스(New France)가 있었습니다. 땅은 아주 넓었지만 사는 사람은 드문 식민지였습니다.
두 세력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다툼이 가장 날카로웠던 곳이 오하이오 강 상류였고, 프랑스는 이곳에 요새를 여럿 지어 자기 땅이라는 주장을 굳히려 했습니다. 싸움이 시작되자 한쪽에는 프랑스와 프랑스 이주민, 그들과 손잡은 원주민 부족이, 다른 쪽에는 영국과 영국계 식민지인, 그리고 뉴욕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이로쿼이 연맹(Iroquois Confederacy)이 섰습니다.
1753년 버지니아 총독은 워싱턴을 오하이오로 보내 프랑스의 정착을 막으려 했습니다. 이듬해 5월 워싱턴은 그레이트 메도스(Great Meadows)라는 공터에 진을 쳤고, 세네카족 지도자 하프 킹(Half King)과 함께 근처의 프랑스 병사들을 에워쌌습니다. 이 싸움에서 프랑스 지휘관 조제프 쿨롱 드 주몽빌(Joseph Coulon de Jumonville)이 죽었습니다.
6월 말 프랑스군은 원주민 동맹과 함께 큰 수로 돌아왔습니다. 미 국립공원청에 따르면 7월 3일의 전투에서는 일곱 부족이 프랑스 편에서 싸웠고, 영국 쪽은 큰 손실을 입은 끝에 항복했습니다. 항복 문서는 워싱턴의 부대에게 "전쟁의 예우"를 허락했습니다. 북을 울리며 작은 대포 한 문을 끌고 나갈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문제는 문서의 둘째 문단과 일곱째 조항이었습니다. 두 곳 모두 주몽빌의 죽음을 "암살(assassinat)"이라고 적었습니다. 워싱턴은 암살이 아니었다고 부인하며, 통역이 그 낱말을 "죽음"이나 "잃음"으로 옮겨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미 국립공원청의 한 기사는 워싱턴이 서명으로 암살을 인정한 꼴이 됐다고 적습니다. 워싱턴이 평생 적에게 항복한 것은 이때 한 번뿐이었고, 항복 뒤 프랑스군은 요새를 불태웠습니다.
이듬해 영국은 에드워드 브래독(Edward Braddock) 장군을 북아메리카 총사령관으로 보냈습니다. 그의 목표는 지금의 피츠버그 자리에 있던 프랑스의 뒤케인 요새(Fort Duquesne)였습니다.
숲길은 무거운 장비와 약 2,400명이 지나기에 너무 좁았고, 브래독은 속도를 내려고 군대를 나눴습니다. 1755년 7월 뒤케인 요새 가까이에서 매복을 만나, 브래독과 함께 간 영국군 1,200명 가운데 절반 넘게 죽었습니다. 브래독도 7월 13일 그때 입은 치명상으로 숨졌습니다.
이 싸움을 미국에서는 흔히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이라고 부릅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이것을 7년 전쟁이라는 더 큰 제국 전쟁의 북아메리카 쪽 싸움으로 설명하고, 1754년에 시작해 1763년에 끝났다고 적습니다. 미 국립공원청의 한 기사는 같은 전쟁을 1756~1763년으로 적기도 합니다. 북아메리카의 싸움은 1754년에 먼저 시작됐고,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은 7년 전쟁 전체를 1756~1763년으로 적습니다.
하노버, 작센, 슐레지엔: 유럽의 전쟁
유럽에서 불씨가 된 곳은 독일 북부의 하노버(Hanover)였습니다. 하노버는 영국 왕 조지 2세가 다스리던 땅이었고, 북아메리카에서 이어지는 싸움에 맞서 프랑스는 이곳을 칠 채비를 했습니다. 영국은 1756년 초 프로이센이 하노버를 지키도록 돕는 조약을 맺었고, 이에 맞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유럽의 싸움은 1756년 6월 프랑스가 지중해의 메노르카(Menorca) 섬을 영국에게서 빼앗으며 시작됐습니다. 두 달 뒤 프로이센이 이웃 작센을 쳤고,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습니다. 곧 유럽의 큰 나라 대부분이 전쟁에 들어왔습니다.
프로이센 쪽에서 보면 이야기가 조금 앞에서 시작합니다. 1740년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는 두 차례의 슐레지엔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Schlesien) 지방을 차지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1756년 그가 오스트리아·프랑스·작센·러시아의 반프로이센 동맹이 맺어지려 한다는 것을 알고, 예상된 공격에 앞서 1756년 8월 29일 선전포고 없이 작센에 쳐들어갔다고 설명합니다. 1757년 초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다수는 프로이센을 침략자로 보고 제국군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1757년 프리드리히는 로스바흐(Roßbach)에서 제국군과 프랑스군을, 로이텐(Leuthen)에서 수가 두 배 넘는 오스트리아군을 이겼습니다. 이 두 승리가 그를 "거의 질 수 없는 지휘관"으로 보는 이야기를 독일 밖에까지 퍼뜨렸습니다. 그러나 1759년 8월 12일 쿠너스도르프(Kunersdorf)에서는 거의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프로이센이 무너지지 않은 데는 상대 쪽 사정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지휘부가 하나로 움직이지 못해 동맹은 끝내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프로이센은 슐레지엔의 절반, 작센 일부, 힌터포메른 전체를 빼앗긴 채 두 해를 더 버텼습니다.
1762년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를 이은 표트르 3세는 동맹에서 빠져 1762년 5월 5일 프로이센과 따로 평화를 맺었고, 같은 해 스웨덴도 따로 평화를 맺었습니다. 이 일은 "브란덴부르크 가문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하노버 쪽 전선도 따로 있었습니다. 1757년 7월 컴벌랜드 공작의 군대가 하스텐베크(Hastenbeck)에서 프랑스군에게 졌고, 1759년 8월 1일 민덴(Minden)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의 페르디난트가 이겼습니다. 민덴에서는 영국·하노버 보병 여단이 명령을 잘못 알아듣고 프랑스 기병 60개 대대를 정면으로 향해 나아갔는데, 반격을 받고도 대열을 지켰습니다.
네 무대의 연표
북아메리카의 처음 몇 해는 프랑스 쪽이 앞섰습니다. 프랑스는 1756년 오스위고(Oswego), 1757년 윌리엄 헨리 요새(Fort William Henry)에서 이겼습니다. 하지만 영국 해군을 걱정한 프랑스는 큰 수송 선단을 북아메리카로 보내려 하지 않았고, 유럽의 전쟁에 힘을 더 모았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1757년 이후 전쟁이 영국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적습니다.
1758년 영국은 지금의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있던 루이스버그(Louisbourg) 요새를 차지했습니다. 이로써 세인트로렌스 강을 거슬러 북아메리카 프랑스 정착지의 중심인 퀘벡(Quebec)으로 가는 바닷길이 열렸습니다. 1759년 9월 13일 퀘벡 앞 에이브러햄 고원(Heights of Abraham)에서 영국군이 이겼고, 1760년 9월에는 몬트리올도 항복했습니다. 몬트리올의 항복으로 이어진 마지막 승리에는 이로쿼이 연맹 전사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인도에서는 무굴 제국이 무너져 가던 틈에 인도와 유럽의 여러 세력이 저마다 힘의 터를 넓히고 있었습니다. 영국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7년 전쟁이 터진 뒤 회사가 프랑스에 맞선 군사 준비를 멈추지 않자, 벵골 태수 시라지 웃 다울라(Siraj-ud-Daulah)는 캘커타(지금의 콜카타)의 윌리엄 요새(Fort William)를 빼앗았습니다. 그 뒤 포로들이 좁은 감옥에서 숨진 사건, 이른바 "캘커타의 블랙홀"은 영국인 생존자 한 사람의 기록에 기대고 있어 지금까지 논쟁이 이어집니다.
1757년 6월 23일 캘커타 북쪽 약 160 km의 플라시(Plassey)에서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이끄는 회사 군대와 태수의 군대가 맞섰습니다. 싸움 전에 회사와 벵골의 은행가 가문은 태수의 지휘관 미르 자파르(Mir Jafar)를 새 태수로 세우겠다고 몰래 약속해 두었습니다. 전투 도중 기병을 이끌던 미르 자파르는 싸움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클라이브 쪽은 22명이 죽고 50명이 다쳤고, 태수 쪽 사상자는 500명이 넘었습니다.
인도의 프랑스 세력은 1761년 1월 퐁디셰리(Pondicherry)가 몇 달의 육군·해군 합동 포위 끝에 항복하며 끝났습니다. 1765년 클라이브는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에게서 벵골의 세금과 관세를 걷는 권리인 디와니(diwani)를 얻었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이때 회사가 더는 순수한 상업 조직이 아니라 제국의 힘이 됐다고 평가합니다.
바다와 카리브해도 무대였습니다. 영국은 1759년 카리브해에서 가장 부유한 프랑스 섬이던 과들루프(Guadeloupe)를, 1762년에는 마르티니크(Martinique)를 차지했습니다. 1761년 8월 15일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와 프랑스 왕 루이 15세가 "가족 협약"이라는 동맹을 맺자, 영국은 1762년 1월 4일 스페인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영국군은 그 뒤 스페인령 쿠바와 필리핀을 빼앗았고, 스페인의 포르투갈 침공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일제 사격, 경보병, 봉쇄 함대: 그 시대의 군대
이 전쟁의 보병 싸움 이야기에 거듭 나오는 말이 머스킷(musket)의 일제 사격(volley)입니다. 줄지어 선 병사들이 한꺼번에 쏘는 방식입니다. 이 방식이 숲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는 브래독의 패배가 보여 줍니다. 브래독은 부하들에게 숲 전투를 익히게 하려고 시간을 들였지만, 준비가 모자랐던 병사들은 매복을 받자 나무 쪽으로 효과 없는 일제 사격을 퍼붓다 결국 무너져 달아났습니다.
영국군은 이 경험에서 배웠습니다. 기존 연대마다 정찰하고, 흩어져 싸우고, 지형을 엄폐물로 잘 쓰는 병사들로 경보병 중대(light company)를 더했습니다. 나중에는 북아메리카에서 쓸 경보병 연대를 통째로 만들었습니다.
넓은 들판에서는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퀘벡에서 몽칼름(Montcalm) 후작은 정해진 대형으로 군대를 세웠는데, 이 방식은 정확히 함께 움직이도록 훈련된 병사가 있어야 힘을 냈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그의 병사 다수가 함께 움직이는 데 익숙하지 않고 저마다 쏘는 편이어서 가까운 거리의 집중 사격 효과가 크게 줄었다고 봅니다. 반대로 울프(James Wolfe)의 정규군은 줄지어 빠르고 규율 있는 일제 사격을 하는 데 익숙했고, 프랑스 포대를 피해 능선 뒤에 자리 잡았습니다. 울프는 첫 일제 사격을 위해 머스킷에 두 번 장전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퀘벡에 닿는 길 자체도 기술이었습니다. 영국군은 강을 정찰해 바닥이 평평한 상륙정(flat-bottomed landing craft)으로 닿을 수 있는 작은 만을 찾았고, 9월 13일 새벽 그곳에 내려 가파른 절벽 길을 올랐습니다. 영국 함대는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 주의를 끄는 공격을 벌였습니다.
화약 무기는 날씨를 탔습니다. 플라시에서 폭우가 쏟아지자 영국 포병은 재빨리 대포와 탄약을 방수포로 덮었습니다. 상대는 그러지 않았고, 그 포병은 쓸 수 없게 됐습니다. 태수의 군대는 야포 50문을 프랑스에서 빌려 온 장교들에게 맡겼고, 클라이브에게는 야포 10문과 작은 곡사포 2문뿐이었습니다.
바다에서는 봉쇄(blockade)가 전쟁의 모양을 정했습니다. 영국 해군은 프랑스 해안을 막아 식민지로 가는 보급을 끊었고, 이것이 퀘벡 공격의 기회를 만든 조건의 하나였습니다. 1759년 프랑스는 2만 명의 군대를 아일랜드에 상륙시키려 했지만, 에드워드 호크(Edward Hawke)의 해협 함대가 다섯 달째 브레스트(Brest) 항을 막고 있었습니다.
11월 첫 주 강풍에 호크의 함대가 영국 토베이(Torbay)로 피한 사이 콩플랑(Conflans)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빠져나왔습니다. 콩플랑은 바위와 암초가 많고 바다 지도가 부실한 키브롱만(Quiberon Bay)으로 피했는데, 호크는 따라 들어갔습니다. 영국은 바깥 암초에서 배 두 척을 잃었지만, 거의 어둠 속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프랑스 함대는 크게 꺾였습니다. 프랑스 기함 솔레유 루아얄(Soleil Royal)은 좌초해 이튿날 불태워졌고, 영국 왕립박물관 그리니치는 이 싸움으로 프랑스의 영국 침공 계획이 멈췄다고 적습니다.
군대를 바다 건너 보내고 먹이는 일이 승패를 얼마나 좌우하는지는 오늘의 군수·보급·정비 글에서도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옛 전투의 병력 수는 자료마다 다르고, 7년 전쟁도 예외가 아닙니다. 같은 박물관의 두 쪽이 서로 다른 숫자를 적은 경우도 있습니다.
플라시가 좋은 예입니다. 영국 국립육군박물관의 7년 전쟁 개요 쪽은 클라이브의 군대를 유럽인 750명과 인도인 2,500명으로, 상대를 5만으로 적습니다. 같은 박물관의 플라시 쪽은 클라이브의 군대를 약 3,000명, 곧 인도인 보병인 세포이(sepoy) 2,100명과 유럽인 약 800명으로 적고, 태수의 군대를 기병 1만 6천을 포함한 약 5만으로 적습니다. 양쪽의 차이가 아주 크다는 점은 같지만, 클라이브 쪽의 짜임은 쪽마다 다릅니다.
퀘벡도 비슷합니다. 개요 쪽은 퀘벡의 강한 진지를 지킨 몽칼름의 프랑스군을 5,000명으로 적습니다. 퀘벡 쪽은 퀘벡과 그 둘레를 지킨 군대가 약 1만 3천 명이고, 그 가운데 실제 전투에 나선 것은 약 4,500명이라고 나눠 적습니다. 울프의 원정대는 5,000명이었고, 전투에서 프랑스 쪽 약 640명, 영국 쪽 약 650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전쟁 전체의 희생은 더 무겁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1756년부터 프로이센 군인 약 18만, 오스트리아 군인 약 14만, 러시아 군인 약 12만 명이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고 적습니다. 그들은 전장에서, 상처로,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이 숫자는 세 나라 군대만 센 것이고, 바다 건너 무대의 희생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군인 밖의 사람들도 전쟁을 치렀습니다. 프로이센과 작센의 일부 지역은 황폐해졌고, 수만 명의 민간인이 죽거나 학대받거나 약탈당했습니다.
파리와 후베르투스부르크의 평화
1762년 무렵 유럽 강국 대부분은 군사적으로도 재정적으로도 지쳐 평화를 떠보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은 1763년 2월, 닷새 사이에 맺어진 두 조약으로 끝났습니다.
첫째는 1763년 2월 10일 파리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이 맺은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입니다. 포르투갈 왕도 같은 날 이 조약에 참여했습니다. 조약 4조에서 프랑스는 캐나다와 그에 딸린 땅, 케이프브레턴 섬을 영국에 넘기고 노바스코샤에 대한 주장을 모두 버렸습니다.
7조는 미시시피 강 가운데를 두 나라의 경계로 정하고, 뉴올리언스를 뺀 강 동쪽의 프랑스 땅을 영국에 넘겼습니다. 아프리카의 세네갈 강과 그 요새들도 영국으로 갔습니다(10조).
조약은 빼앗은 땅을 돌려주기도 했습니다. 영국은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를 비롯한 카리브해의 섬들을 프랑스에 돌려주었고(8조), 인도에서는 프랑스가 1749년 초에 가졌던 상관(商館)들을 돌려주었습니다(11조). 프랑스는 메노르카를 영국에 돌려주었습니다(12조). 스페인은 영국에게서 아바나와 쿠바의 점령지를 돌려받고(19조), 그에 따라 플로리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의 스페인 땅을 영국에 넘겼습니다(20조).
둘째는 닷새 뒤인 2월 15일의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Peace of Hubertusburg)입니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작센의 전권대사들은 1762년 12월 30일부터, 1761년 프로이센 병사들이 망가뜨린 후베르투스부르크 사냥성의 부속 건물에서 협상했습니다. 그들은 서로 가진 것을 보장했고, 조약은 전쟁 전의 상태를 그대로 확정했습니다. 일곱 해를 싸운 끝에 중부 유럽은 전쟁 전으로 돌아간 셈입니다.
두 조약의 결과는 이렇게 달랐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파리 조약이 바다 건너의 전쟁을 끝내고 영국의 해양·식민지 강국 자리를 굳혔다고 평가합니다. 같은 박물관은 프리드리히 2세가 거의 일곱 해 동안 우세한 적에 맞선 목적을 프로이센을 유럽의 다섯째 강국으로 세우는 데서 찾습니다.
승리가 남긴 빚
이긴 쪽에도 청구서가 왔습니다. 영국 정부는 1763년 큰 빚을 진 채 전쟁을 끝냈습니다. 조지 그렌빌(George Grenville) 총리는 설탕과 당밀의 관세를 낮추는 대신 더 엄격하게 걷었고, 식민지 사람들이 실제로 내는 세금은 늘었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1763년부터 1775년까지 이어진 무역·세금 법들이 미국 혁명을 부른 원인의 하나였다고 설명합니다.
넓어진 땅도 문제를 낳았습니다. 프랑스는 원주민 동맹에게 선물을 주는 데 많은 자원을 써 왔는데, 프랑스 요새를 넘겨받은 영국군은 이 관행을 멈췄습니다. 오타와족 지도자 폰티액(Pontiac)은 왐펌(wampum) 띠에 담은 전갈을 지금의 미국 중서부 공동체들에 보내 영국 요새 공격을 모았습니다. 영국은 피트 요새와 디트로이트를 빼고 서부의 요새를 모두 잃었고, 원주민 부족과의 전쟁은 1764년부터 1766년까지 이어졌습니다.
런던은 1763년 왕령 선포(Royal Proclamation)로 애팔래치아 산맥 너머의 정착을 금했습니다. 이 선포는 서쪽으로 가는 정착을 거의 막지 못했고, 정착민과 서부 토지 투기에 돈을 댄 식민지 엘리트의 분노만 샀습니다. 국립육군박물관은 이 흐름을 "북아메리카의 승리가 뒤의 패배의 씨앗을 뿌렸다"고 요약합니다. 프랑스의 위협이 사라진 식민지 사람들은 영국 수비대의 비용을 내기 싫어했고, 이것이 미국 독립전쟁(1775~83)의 원인 하나가 됐다는 설명입니다.
인도에서도 승리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영국의 학생 대부분이 플라시와 "인도의 클라이브"를 알았을 만큼 그는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을 때 이미 여론을 갈랐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정치·군사 영향력으로 재산을 모은 부패하고 탐욕스러운 "나밥(nabob)"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네세시티 요새의 국립 전적지는 지금 그 여름의 대치를 북아메리카 대륙을 두고 벌어진 전쟁의 서막으로 소개합니다. 그 전쟁은 1763년 북아메리카와 인도에서 프랑스 세력이 물러나며 끝났습니다. 숲속 공터의 서명 한 장에서 시작된 일이 두 대륙의 주인을 바꾸고, 다시 다음 전쟁의 불씨를 남긴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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