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5년 4월 19일, 매사추세츠 렉싱턴의 마을 녹지에 민병 77명이 줄을 섰습니다. 보스턴에서 온 영국 경보병이 다가왔고, 어디서 났는지 모르는 총성 하나가 울렸습니다. 3분이 안 되는 싸움에서 민병 8명이 죽고 10명이 다쳤습니다.

8년 뒤인 1783년 9월 3일, 영국은 파리에서 13개 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세금 다툼이 총격으로 바뀐 과정, 마을 민병이 대륙군이 된 과정, 북아메리카의 반란이 프랑스와 스페인까지 끌어들인 전쟁으로 넓어진 과정을 연표 한 장과 숫자 비교로 따라갑니다.

미국 쪽 자료로는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 국무부 역사실,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공개 쪽을 썼습니다. 영국 쪽 시각은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tional Army Museum, NAM)의 해설로 나란히 놓았습니다.

7년 전쟁의 빚과 인지세

1763년 영국은 7년 전쟁에서 이겼지만 무거운 빚을 안고 나왔습니다. 그렌빌 총리는 설탕과 당밀의 관세를 낮추는 대신 이전보다 엄격하게 거뒀습니다. 1764년 통화법은 식민지가 지폐를 찍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음은 인지세법이었습니다. 법률 문서와 여러 종이 물건에 정부가 발행한 인지를 사서 붙여야 했습니다. 이 법은 13개 식민지를 영국 의회에 맞서 하나로 묶었습니다. 1765년 10월 9개 식민지 대표가 모여 의회의 과세 권한을 부정하는 청원을 냈고, 영국 정부는 집행보다 폐지가 쉽다고 보고 법을 거둬들였습니다.

다툼의 뿌리는 세금의 크기보다 누가 세금을 정하느냐에 있었습니다. NAM은 영국이 식민지에 방위비를 물리려 했고 식민지 사람들은 자기들 의회만 세금을 매길 수 있다고 맞섰다고 설명하며, 1763년 보통 영국인의 한 해 세금이 26실링, 매사추세츠 납세자는 1실링이었다는 숫자를 함께 듭니다.

1767년 타운센드법의 새 세금에 다시 저항이 일었습니다. 1773년 의회는 동인도회사에 차를 세금 없이 나를 독점권을 줬습니다. 그해 12월 16일 원주민 차림으로 변장한 식민지 사람들이 보스턴 항구의 동인도회사 배에 올라 차 상자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입니다.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닫고, 1774년 매사추세츠를 직접 다스리려는 법들을 냈습니다. 식민지에서는 이 법들을 "참을 수 없는 법들(Intolerable Acts)"이라 불렀습니다. 그해 9월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습니다.

1775년 4월 19일, 보스턴에서 콩코드까지

매사추세츠 군정 총독 게이지 장군은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18마일 떨어진 콩코드에 무기와 보급품이 쌓여 있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그는 병력을 비밀리에 보내 이를 빼앗고 없애게 했습니다. 원정 병력은 자료에 따라 약 700명(NPS)에서 800명(NAM)입니다.

렉싱턴 녹지에서 77명과 맞선 싸움은 짧았습니다. 첫 총성을 누가 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영국군은 콩코드로 가서 노스 브리지에 3개 중대, 약 96명을 남겼습니다. 다리에서 총격이 오가 영국군 3명이 죽거나 치명상을 입고 9명이 다쳤습니다.

돌아가는 길이 더 길었습니다. 싸움은 보스턴에서 콩코드까지 16마일의 길을 따라 하루 종일 이어졌고, 영국 정규군 약 1,700명과 식민지 민병 4,000명 넘게가 맞붙었습니다. 퍼시 준장이 1,000명 가까운 지원군을 이끌고 왔고, 렉싱턴에서 6파운드 포 두 문이 이 전쟁의 첫 포격을 했습니다.

하루가 끝났을 때 영국군 273명, 민병과 민간인 95명이 죽거나 다치거나 실종됐습니다. 이틀 안에 뉴잉글랜드 곳곳에서 15,000명이 모여 보스턴의 영국군을 에워쌌고, 11개월의 보스턴 포위가 시작됐습니다. NAM은 이날을 심각한 군사적 패배는 아니었지만 영국에는 정치적 재앙이었다고 평가합니다.

민병대에서 대륙군으로

식민지에는 상비군이 없었습니다. 싸울 일이 생기면 농부와 상인이 무기를 들고 나오는 민병이 전부였습니다. 1775년 6월 14일 대륙회의는 상비군을 일으키기로 표결했고, 이튿날 만장일치로 조지 워싱턴을 새 대륙군(Continental Army)의 총사령관에 앉혔습니다.

6월 17일 보스턴 건너편 브리즈 힐에서 첫 큰 싸움인 벙커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경험 없는 식민지 병사들이 2시간 넘게 버텼고, 싸움에 나선 영국군 2,200명 가운데 1,000명 넘게가 죽거나 다쳤습니다. 영국군은 언덕을 차지했지만 값이 컸습니다. "흰자위가 보일 때까지 쏘지 마라"는 명령이 이 싸움 이야기로 널리 퍼졌지만, 누가 실제로 그 말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1776년 3월 4일 워싱턴은 도체스터 고지에 포를 올려 보스턴을 겨눴고, 4월 영국군은 도시를 비우고 캐나다 핼리팩스로 물러났습니다. 영국은 전쟁 내내 사람과 보급품을 대서양 너머로 날라야 했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는 데 5주, 길면 두 달이 걸렸으니 바다를 잠시라도 잃으면 큰일이었습니다.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는 독립선언을 채택해 영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끊었습니다. 독립을 선언한 덕분에 13개 식민지는 프랑스와 공식 동맹을 맺고 도움을 받을 길을 열었습니다.

렉싱턴에서 요크타운까지의 연표

미국 독립전쟁 연표 도표. 위쪽 막대는 1763년부터 1783년까지를 같은 비율로 그렸고 세금 다툼(1763~1775), 북부의 전쟁(1775~1778), 넓어진 전쟁(1778~1783)으로 나뉜다. 아래 세 칸에 사건이 있다. 첫 칸: 1763년 7년 전쟁이 끝나고 영국에 큰 빚, 1764년 통화법, 1765년 인지세법과 9개 식민지의 항의, 1767년 타운센드법, 1773년 12월 16일 보스턴 차 사건, 1774년 참을 수 없는 법들과 9월 제1차 대륙회의, 1775년 4월 19일 렉싱턴·콩코드와 보스턴 포위. 둘째 칸: 1775년 6월 14일 상비군 표결, 6월 15일 워싱턴 임명, 6월 17일 벙커힐, 11월 던모어 선언, 1776년 4월 영국군의 보스턴 철수, 7월 4일 독립선언, 8월 영국군의 롱아일랜드 상륙, 12월 26일 트렌턴, 1777년 1월 3일 프린스턴, 10월 17일 사라토가 항복, 12월 19일 밸리 포지 야영. 셋째 칸: 1778년 2월 6일 프랑스 동맹, 6월 28일 몬머스, 1779년 6월 21일 스페인 참전, 1780년 5월 12일 찰스턴 함락, 10월 7일 킹스 마운틴, 1781년 1월 17일 카우펜스, 3월 15일 길퍼드 코트하우스, 9월 5일 체서피크 해전, 10월 19일 요크타운 항복, 1782년 3월 영국 의회의 전쟁 중단 결의, 11월 30일 예비 조항, 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 맨 아래에 1782년 왕당파 철수 시작과 1784년 10월 포트 스탠윅스 조약이 적혀 있다
1763년부터 1783년까지를 세 마디로 나눈 연표. 위 막대는 실제 길이 비율대로 그렸습니다 (도표)(도표)

1776년 8월 22일 영국군 22,000명가량이 롱아일랜드에 내렸습니다. 워싱턴군은 밀려났고, 하우 장군은 이 싸움들에서 6,000명 넘는 병사를 죽이거나 사로잡았습니다. 많은 병사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반전은 겨울에 왔습니다. 크리스마스 밤 워싱턴은 3,000명과 함께 얼음 덮인 델라웨어강을 건넜고, 12월 26일 트렌턴에서는 헤센군을 이겨 1,000명 넘게를 포로로 잡았습니다. 헤센군은 영국이 돈을 주고 쓴 독일 병사들이었습니다. 1777년 1월 3일 프린스턴에서도 이기자 전쟁을 이길 수도 있다는 희망이 되살아났습니다.

1777~1778년 겨울 대륙군은 펜실베이니아의 밸리 포지에서 지냈습니다. 12월 19일 병사 12,000명 넘게와 여자와 아이 400명이 들어가 통나무 오두막을 줄지어 지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전투가 한 번도 없었지만 병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독감,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이 흔했고, 죽은 사람의 3분의 2는 보급이 오히려 나아진 3~5월에 죽었습니다.

이 겨울에 프로이센 장교 출신 슈토이벤(Steuben)이 훈련을 맡았습니다. 그는 미국 병사들이 가혹한 유럽식 규율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보고, 직접 해 보이며 가르쳤습니다. 보통 2년 걸리는 훈련을 병사들이 빨리 따라왔다고 그는 말했고, 뒤에 군대 교범을 썼습니다. 1778년 6월 28일 몬머스 전투는 비긴 싸움이었지만, 미국군이 영국 정규군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게 됐음을 보여 줬습니다.

1778년 12월 영국은 남부로 눈을 돌렸습니다.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를 모아 남부를 되찾으려 한 것입니다. 1780년 5월 12일 찰스턴이 떨어지며 독립 쪽은 큰 군대를 잃었습니다.

1780년 10월 7일 킹스 마운틴에서는 영국 쪽 지휘관 퍼거슨 소령만 영국 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미국인이었습니다. 미국인끼리 자기 미래를 두고 싸운 전투였습니다.

1781년 1월 17일 카우펜스에서는 대륙군과 민병이 이겼고, 3월 15일 길퍼드 코트하우스에서는 영국이 이겼지만 손실이 컸습니다. 남부의 싸움은 잔혹했고, 양쪽 모두 잔학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사라토가와 프랑스 동맹

1777년 버고인 장군은 캐나다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뉴잉글랜드와 나머지 식민지 사이를 끊으려 했습니다. 남하를 시작할 때 군대는 약 9,000명이었습니다. 영국 정규군 4,000명, 독일 보조군 3,200명, 그리고 왕당파 병사와 원주민 전사, 캐나다 민병, 민간인과 따라온 사람들이 1,800명 가까이였습니다.

9월 19일 프리먼 농장 싸움에서 영국군은 자리를 지켰지만 약 58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미국 쪽 약 320명). 10월 7일 베미스 고지에서 버고인이 다시 공격했으나 밀려났고, 사상자는 영국 쪽 약 600명, 미국 쪽 약 150명이었습니다. 버고인은 사라토가로 물러났다가 1777년 10월 17일 항복했습니다. NPS는 영국군이 다른 나라에 항복한 것은 세계사에서 처음이었다고 적습니다.

소식은 그해 12월 파리에 닿았습니다.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젠은 동맹을 결정했고, 1778년 2월 6일 프랭클린을 비롯한 세 사절이 동맹 조약과 우호통상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동맹 조약에는 어느 쪽도 따로 영국과 평화를 맺지 못한다는 조항이 들어갔습니다. 대륙군은 5월에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프랑스에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7년 전쟁에서 영국에 져 1763년 파리 조약으로 북아메리카 땅을 잃었고, 영국의 반란을 기회로 봤습니다. 동맹 전부터 비밀리에 돕고 있었습니다. 1778~1782년 프랑스는 보급품, 무기와 탄약, 군복, 그리고 무엇보다 병력과 해군을 보냈습니다.

스페인은 1779년 6월 21일 공식으로 참전했습니다. 네덜란드와 인도의 마이소르 술탄국도 영국과의 싸움에 들어섰습니다. 북아메리카의 반란이 여러 대륙에 걸친 전쟁이 된 것입니다.

머스킷, 소총, 대포: 그 시대의 무기

머스킷과 소총 도표. 왼쪽 위 막대그래프는 미 국립공원청 세 쪽의 사거리(야드)다. 머스킷은 경험 많은 병사들의 짐작 50~100야드(쪽 A), 정확한 사거리 75~150야드(쪽 B), 정확한 거리 80~90야드와 탄이 날아가는 거리 약 300야드(쪽 C). 소총은 유효 사거리 최대 300야드(쪽 C), 아주 숙련된 사수가 300야드 표적을 맞힘(쪽 B). 오른쪽 위는 1분에 쏘는 횟수로 머스킷 2~3발(쪽 A), 3~4발(쪽 B)이고, 소총은 다시 장전하는 데 거의 1분이 걸렸고 총검을 꽂을 수 없었다는 메모가 있다. 아래에는 강선 없는 머스킷 총열(브라운 베스는 지름 4분의 3인치 납알)과 나선 홈이 있는 소총 총열을 비교한 그림, 어깨를 맞대고 두 줄로 선 병사들의 선형 전술 그림, 영국 3파운드 포의 유효 사거리 약 800야드 메모가 있다
머스킷, 소총, 대포. 미 국립공원청 세 쪽의 값을 그대로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독립전쟁의 보병 표준 무기는 활강 수발식 머스킷(smoothbore flintlock musket)이었습니다. 가장 흔한 것은 영국의 브라운 베스(Brown Bess)와 프랑스의 샤를빌(Charleville)이었고, 대륙군도 브라운 베스를 많이 썼습니다. 총열 안이 매끈해서 탄을 돌려 주는 홈이 없었습니다. 탄은 지름 4분의 3인치의 납알이었고, 병사는 총구로 탄을 밀어 넣어 장전했습니다.

그래서 느리고 부정확했습니다. 숙련병도 1분에 두세 발이었고, 경험 많은 병사들은 사거리를 50~100야드로 봤습니다. 같은 국립공원청이라도 쪽마다 값이 다릅니다. 남부 전역 해설은 75~150야드에서 정확하고 1분에 3~4발이라 하고, 교사용 자료는 80~90야드에서 정확하며 탄은 약 300야드까지 날아간다고 적습니다.

부정확한 총을 메운 것이 선형 전술이었습니다. 수백 명이 탁 트인 곳에서 어깨를 맞대고 줄지어 섰고, 장교의 지휘에 맞춰 한꺼번에 일제 사격을 했습니다. 백 자루가 같은 방향으로 쏘면 부정확한 탄 가운데 몇 발이라도 맞았습니다.

소총(rifle)은 총열 안에 강선이라 부르는 나선 홈이 있어 탄을 돌리며 내보냈고, 사거리와 정확도가 높았습니다. 아주 숙련된 사수는 300야드 거리의 표적을 맞혔습니다.

그러나 소총은 만들기 비쌌고 다시 장전하는 데 거의 1분이 걸렸으며, 총검을 꽂을 수 없었습니다. 독립전쟁의 소총은 주로 민간 무기였습니다.

대포도 있었습니다. 1770년 영국은 3파운드 포(이른바 "그래스호퍼")를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했고, 이 포의 유효 사거리는 800야드쯤이었습니다. 가볍고 다루기 쉬워 보병 부대와 함께 다니며 가까운 싸움을 돕기도 했습니다.

체서피크 해전과 요크타운

1780년 여름 로샹보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 5,500명이 로드아일랜드 뉴포트에 닿았습니다. 남부의 콘월리스 장군은 1781년 여름 클린턴의 명령에 따라 영국 함대가 쓸 항구를 마련하려고 버지니아의 요크타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드그라스 제독은 전열함 28척을 포함한 37척을 이끌고 체서피크만으로 왔습니다. 1781년 9월 5일 만 어귀에서 영국 전열함 19척과 맞붙었습니다. 해전은 2시간 반쯤 이어졌고 미국인은 한 명도 끼지 않았습니다. 영국은 6척이 상하고 90명이 죽고 246명이 다쳤으며, 프랑스는 사상자 209명에 2척이 상했습니다.

바라스 제독의 함대까지 합류해 프랑스 전열함이 36척으로 늘자 영국 함대는 뉴욕으로 돌아갔습니다. 만은 프랑스 손에 남았고, 콘월리스는 바다로 지원군을 받을 수 없게 됐습니다. NPS의 체서피크 해전 해설은 드그라스 함대가 만을 쥐지 않았다면 요크타운의 승리는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땅에서는 9월 말 미국과 프랑스 병사 약 17,600명이 모였고, 요크타운의 영국군은 8,300명이었습니다. 9월 28일 연합군이 요크타운으로 다가가 포위를 시작했습니다. 10월 14일 밤 프랑스군 400명과 미국군 400명이 영국의 9번·10번 보루를 30분이 안 돼 빼앗았습니다.

10월 19일 영국군은 한쪽에 미국군, 다른 쪽에 프랑스군이 늘어선 두 줄 사이로 걸어 나와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북아메리카 영국군 전체의 3분의 1이 이날 항복했습니다. 바로 그날 클린턴이 5,000명을 싣고 뉴욕을 떠났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요크타운이 곧 끝은 아니었습니다. 영국은 여전히 뉴욕, 찰스턴, 서배너를 쥐고 있었습니다. 1782년 3월 영국 의회는 미국과의 전쟁을 이어 가지 말자는 결의를 했습니다. NAM은 영국군이 전장에서는 꽤 잘 싸웠지만 군수 문제를 넘지 못했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참전이 영국 해군의 우위를 지운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봅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자료별 숫자 비교 도표. 미 국립공원청(NPS)과 영국 국립육군박물관(NAM)의 숫자를 줄마다 막대 두 개로 나란히 놓았다. 콩코드로 보낸 영국군은 NPS 약 700명, NAM 800명. 사라토가 항복은 NPS 6,000명 넘는 병사, 여자와 아이까지 7,000명 가까이, NAM 행군한 1만 명 가운데 싸울 수 있던 3,500명. 밸리 포지 사망은 NPS 병으로 2,000명 가까이, NAM 1만 명 가운데 약 2,500명. 요크타운의 연합군은 NPS 약 17,600명, NAM 17,000명. 요크타운 뒤 북아메리카의 영국군은 NPS 26,000명, NAM 30,000명. 떠난 왕당파는 NPS 약 10만 명, NAM 적어도 8만 명. 막대는 줄마다 따로 비율을 맞췄다. 아래에 NPS 한 쪽 안에서도 밸리 포지 오두막이 1,500채와 2,000채쯤으로, 다른 NPS 쪽에서는 독립 쪽 아프리카계가 5,000~8,000명과 5,000~6,000명으로 다르게 적혔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전쟁, 다른 숫자. 미국과 영국 기관의 값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같은 사건을 두고도 숫자가 다릅니다. 콩코드 원정 병력은 NPS가 약 700명, NAM이 800명입니다. 그날 아침 콩코드 목사 윌리엄 에머슨의 기록에도 800명이 적혀 있습니다.

사라토가는 무엇을 세느냐에 따라 숫자가 크게 갈립니다. NPS는 6,000명 넘는 영국군이 항복을 준비했고 장교·병사·여자·아이를 합쳐 7,000명 가까이가 행군해 나갔다고 적습니다. NAM은 캐나다에서 출발한 영국·독일 병사 1만 명 가운데 항복 때 싸울 수 있던 사람이 3,500명뿐이었다고 적습니다.

밸리 포지의 죽음도 NPS는 병으로 2,000명 가까이, NAM은 1만 명 가운데 약 2,500명으로 봅니다. NPS의 같은 쪽 안에서도 오두막 수가 한 문단에서는 1,500채, 다른 문단에서는 2,000채쯤입니다.

전쟁 끝 무렵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크타운에 모인 연합군은 NPS 약 17,600명, NAM 17,000명입니다. 요크타운 뒤 북아메리카에 남은 영국군은 NPS 26,000명, NAM 30,000명입니다. 미국을 떠난 왕당파는 NPS 약 10만 명, NAM 적어도 8만 명입니다.

파리 조약과 남은 질문

1782년 11월 30일 파리에서 예비 조항에 서명했고, 영국과 프랑스의 평화가 정해진 뒤인 1783년 9월 3일 정식 조약에 서명했습니다. 영국은 13개 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경계를 받아들였습니다. 뉴펀들랜드 어장의 어업권, 전쟁 전 영국 채권자에게 진 빚, 왕당파의 재산 반환, 영국군의 철수도 조약에 들어갔습니다. 서쪽 경계는 미시시피강이었습니다.

NARA는 이 전쟁이 미국과 영국만이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가 낀 세계 전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조약의 핵심으로는 독립 인정과 서쪽으로 넓어질 수 있는 경계를 꼽습니다.

조약으로 끝나지 않은 질문도 있었습니다. 먼저 왕당파입니다. NAM의 추정으로는 식민지 인구의 40%쯤이 독립 쪽을, 15~20%가 왕을 지지했고, 왕을 지지한 사람은 50만 명쯤이었습니다.

뉴욕 인구의 절반이 왕당파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중립을 지키려 했습니다. 전쟁은 북아메리카와 영국의 가족과 공동체를 갈라놓았습니다.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선택은 더 무거웠습니다. 1775년 11월 버지니아 총독 던모어는 영국 진영으로 오는 반란자의 노예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전쟁 동안 수만 명의 아프리카계가 영국 편에서 자유를 찾았고, 그보다 적은 수가 독립 쪽에서 싸웠습니다. 대륙회의는 1776년 1월에야 흑인 모집을 허락했고, 밸리 포지에도 아프리카계 병사 700~720명이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독립선언의 문장은 노예제의 모순을 사람들 앞에 드러냈습니다. 왕당파가 떠날 때 그 가운데 약 15,000명이 아프리카계였고, 그중 일부는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을 세우는 데 함께했습니다.

원주민도 양쪽으로 나뉘었습니다. 버고인 군대에는 원주민 전사들이 있었고, 미국 쪽 게이츠 군에는 오네이다와 투스카로라 150명이 합류했습니다. 1784년 10월 포트 스탠윅스 조약은 영국 편에 섰던 이로쿼이 연맹 구성원들에게 평화를 강요했습니다. NPS 연표는 전쟁 뒤의 결과가 원주민에게 큰 타격이 됐고, 기댈 유럽 동맹을 잃은 부족들이 서쪽으로 오는 정착민에게 더 큰 압박을 받았다고 적습니다.

렉싱턴 녹지의 77명으로 시작된 싸움은 여러 나라가 낀 전쟁으로 끝났습니다. 그 결말은 독립을 얻은 사람, 고향을 떠난 사람, 땅을 잃어 간 사람에게 같은 뜻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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