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에 있는 견내량은 좁고 암초가 많은 물길입니다. 1592년 7월 7일 저녁, 이곳에 일본 전선 70여 척이 머물러 있다는 말이 조선 수군에 들어왔습니다. 이튿날 한산섬 앞바다에서 벌어진 싸움은 지금 '학익진'이라는 이름과 함께 기억됩니다.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는 그 진형은 기록에 얼마나 자세히 남아 있을까요? 이 글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여러 항목과, 한국고전번역원이 우리말로 옮긴 옛 기록 『국조보감』·『난중잡록』을 나란히 놓고 한산도 해전을 따라갑니다. 백과 항목은 옛 사료를 읽은 오늘날 연구자의 글이고, 항목마다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라는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1592년 여름, 바다가 중요해진 까닭
1592년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육군과 수군이 함께 나아가는 수륙병진계획으로 조선에 들어왔고, 그 수군은 남해와 서해 쪽으로 나아가려 했습니다. 바다로 가는 길이 그 계획의 한쪽 축이었던 셈입니다.
개전 무렵 조선의 수군 사정은 좋지 않았습니다. 왜란 직전 조선의 판옥선은 모두 250여 척으로 추측되는데, 난이 나자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수군은 전라좌·우수사 아래의 배가 주축이 되었고, 지휘는 이순신이 맡았습니다. 이순신은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된 뒤 전선을 만들고 군비를 늘려 두었습니다.
첫 출동은 5월 4일에서 8일 사이였습니다. 옥포·합포·적진포에서 적선 37척을 불태우거나 부쉈고, 옥포 싸움은 이순신의 첫 해전으로 기록됩니다.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의 두 번째 출동에서는 사천·당포·당항포·율포에서 왜선 72척을 침몰시켰습니다. 이때 전라우수사 이억기의 함대가 합류해 연합 함대는 51척이 되었고, 사천 해전부터 거북선이 쓰였습니다.
일본 수군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잇달아 지자 와키자카(脇坂安治)가 병력을 늘려 73척을 이끌고 거제도 쪽으로 왔고, 구키(九鬼嘉隆)도 42척을 거느리고 뒤따랐습니다. 한산도 해전은 이렇게 다시 모인 일본 수군과 맞선 싸움이었습니다.
7월 6일에서 8일까지
7월 5일 이순신은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여수 본영 앞바다에 모아 합동훈련을 했습니다. 다음 날 본영을 떠나 노량에 이르렀고, 원균이 이끌고 온 7척과 합쳐 세 도의 전선은 55척이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같은 날 두 수사가 90여 척을 이끌고 떠났다고 적어 숫자가 다릅니다. 무엇을 센 숫자인지는 두 항목 어디에도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7일 저녁 함대는 당포 앞바다에 닿았습니다. 여기서 목동 김천손이 일본 전선 70여 척이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8일 한산섬 앞바다에서 확인해 보니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모두 73척이었고 지휘관은 와키자카였습니다.
좁은 물길에서 넓은 바다로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전선이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적을 한산섬 앞바다로 끌어내 싸우기로 했습니다. 판옥전선 5, 6척이 먼저 일본 수군을 공격하고, 적이 반격해 오면 한산섬 쪽으로 물러나며 뒤를 따라오게 했습니다.
옛 기록도 같은 줄기를 전합니다. 『국조보감』 선조 25년 기사에는 원균이 앞선 승리를 믿고 곧장 맞서려 하자, 이순신이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기록 속 장수들은 거짓으로 져서 물러나는 척했고, 적은 기세를 몰아 뒤쫓았습니다.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조선 배들은 군사를 돌려 싸웠습니다.
『난중잡록』의 대목은 결이 조금 다릅니다. 여기서 조선 수군은 견내량에서 큰 배 10척과 중·소선 70여 척을 만나 싸웠고, 두 번째 총통을 쏘고도 적이 깨어질 형세가 없자 한산도 큰 바다로 물러났습니다. 그 뒤 삼도의 배와 약속하고 북채를 두들기며 한꺼번에 나가 거의 다 무찔렀습니다. 이 대목 끝에는 《경상 순영록》에서 옮겼다는 표시가 붙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계획해 끌어냈다는 서술과, 싸우다 물러난 뒤 다시 나갔다는 서술이 함께 남아 있는 셈입니다. 어느 쪽이든 좁은 물길을 떠나 넓은 바다에서 승부를 냈다는 점은 같습니다.
학익진, 기록에는 무엇이 적혀 있나
학익진(鶴翼陣)은 학이 날개를 편 듯이 치는 진으로, 적을 둘러싸기에 편리한 진형이라고 풀이됩니다. 『난중잡록』 번역본의 주석도 진법의 하나로, 학이 날개를 벌리는 모양으로 진을 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백과 세 항목은 모두 한산도에서 학익진을 썼다고 적습니다. 「한산도대첩」에 따르면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을 짜서 공격하게 했고, 장수와 군사들은 지자·현자총통 등 여러 총통을 쏘며 돌진했습니다. 「임진왜란」에는 학익진을 펴고 총통을 쏘아 먼저 2, 3척을 부수자 적이 달아나려 했고, 그때 함대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고 나옵니다.
그러나 세 항목 어디에도 배를 몇 줄로, 어떤 곡선으로 세웠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국조보감』과 『난중잡록』의 한산도 대목에는 '학익'이라는 말 자체가 없고, 물러났다가 돌아서 싸운 흐름만 있습니다. 배를 어떤 모양으로 늘어세웠는지는 이 글이 읽은 자료로 확인되지 않아서, 앞의 그림에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학익진이라는 이름이 한산도에서만 쓰인 것도 아닙니다. 『난중잡록』은 같은 해 9월 성주 싸움에서 일본 응원군이 학익진을 치고 조선 군사를 에워쌌다고 적었습니다. 육지 싸움을 적을 때도 쓰인 진법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판옥선과 총통
한산도에 나간 조선 전선의 중심은 판옥선이었습니다. 판옥선은 1555년(명종 10)에 처음 시험된 군함이고, 임진왜란은 그로부터 37년 뒤에 일어났습니다. 당시 조선 수군의 전투함은 몇 척의 거북선을 빼면 판옥선뿐이었고, 나머지는 시중을 들거나 정탐하는 아주 작은 배였습니다.
판옥선은 갑판이 두 겹인 2층 구조의 전투함입니다. 노를 젓는 격군은 아래위 두 갑판 사이에서 적에게 드러나지 않은 채 노를 저었고, 군사들은 위 갑판의 넓고 높은 자리에서 싸웠습니다. 배의 크기는 중량 140.3톤, 너비 8.74 m, 높이 5.56 m, 길이 32.16 m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판옥선은 이미 125명 이상의 군사를 태웠습니다. 기껏 80명이 정원이던 옛 대맹선이나 일본 군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크기였습니다. 배가 높아 적이 기어오르기 어려웠고, 포를 높게 두어 유리한 자리에서 쏠 수 있었습니다. 판옥선은 거북선의 바탕이 되었고, 조선 후기에도 주력함으로 남았습니다.
한산도에서 쏜 무기로는 지자총통과 현자총통 같은 총통이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수군이 연승한 까닭으로 이순신의 지휘에 이어 조선 전선이 일본 전선보다 견고하고 화력이 우세했던 점을 듭니다. 배의 높이와 튼튼함, 그 위에 올린 화포가 함께 짝을 이룬 셈입니다.
숫자로 읽는 한산도
한산도 해전의 숫자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조선 함대는 「한산도대첩」과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항목에서 55척, 「임진왜란」 항목에서 90여 척입니다. 일본 함대는 「한산도대첩」에서 73척, 김천손의 말로는 70여 척, 『난중잡록』에서는 큰 배 10척과 중·소선 70여 척입니다.
전과는 세는 방식부터 다릅니다. 「한산도대첩」은 47척을 불태우거나 부수고 12척을 사로잡았다고 적고, 「이순신」은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했다고 적습니다. 나누는 기준은 다르지만 둘 다 더하면 59척입니다. 「임진왜란」 항목의 전투 표는 "왜선 73척 격파"로, 『국조보감』은 "적선 70여 척을 남김없이 격파"로 적었습니다.
빠져나간 배도 「임진왜란」에서는 10여 척, 『난중잡록』에서는 10척입니다. 살아남은 4백여 명은 배를 버리고 근처 육지로 달아났고, 조선 수군은 사상자가 있었지만 전선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국조보감』은 일본 진영에서 전해진 말이라며 한산도에서 죽은 일본 병사가 9천 명이라고 덧붙였는데, 이것은 기록자가 들은 소문을 옮긴 것입니다.
안골포, 그리고 한산도에 남은 것
한산도 해전 뒤 함대는 견내량에 머물렀다가 9일 다시 떠났습니다. 안골포에는 와키자카와 함께 움직이려던 구키와 가토(加藤嘉明)의 수군이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10일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안골포의 적선을 모두 파괴했다고 씁니다.
「이순신」 항목은 물이 얕아 끌어내려 했으나 적이 나오지 않자 장수들이 번갈아 종일 공격해 큰 배를 거의 불태웠다고 씁니다. 『난중잡록』은 적선 70여 척을 상대로 백여 척이 싸웠으나 다 깨뜨리지는 못했다고 적었습니다.
함대는 13일 여수로 돌아왔습니다. 이 세 번째 출동에서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거나 나포했지만 조선 쪽 손실도 적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항목은 한산도·안골포 해전으로 조선이 제해권을 쥐고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다고 봅니다. 「한산도대첩」 항목도 이 해전이 일본 수군의 주력을 거의 꺾어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고 평가합니다.
이 해전은 진주성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불립니다. 한산도와 안골포의 공으로 이순신은 정2품 정헌대부,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 가의대부의 품계를 받았습니다. 「한산도대첩」은 안골포 해전을 한산도의 "하루 뒤"로 적어, 10일로 적은 다른 자료와 날이 어긋납니다.
한산도는 그 뒤 수군의 근거지가 되었습니다. 이순신은 1593년 7월 한산도에 본영을 두고, 8월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둔전을 일구고 무기와 전함을 만들며 3년 8개월 동안 이곳에서 군영을 지휘했습니다.
이 본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우수사 배설이 불을 질러 폐허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칠천량 해전에서는 이억기가 원균, 충청수사 최호 등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오늘 한산도에는 제승당, 충무사, 한산정, 수루 등이 있습니다. 1740년 통제사 조경이 옛터에 유허비를 세웠고, 지금의 제승당은 1932년 통영의 유지들이 다시 세운 것입니다. 국가유산청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1963년 1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면적은 528,027㎡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임진왜란 한눈에: 1592년부터 7년의 전쟁」: 한산도 해전이 일곱 해 전쟁의 어디쯤에 놓이는지 봅니다.
- 「명량 해전: 13척 기록과 울돌목」: 다시 통제사가 된 이순신의 해전을 같은 방식으로 읽습니다.
- 「거북선: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과 모르는 것」: 판옥선을 바탕으로 한 거북선을 기록 중심으로 봅니다.
- 구축함과 호위함: 같은 군함인데 이름은 왜 다를까: 군함의 이름과 종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이어서 읽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