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가을, 일본 혼슈 한가운데의 작은 골짜기 세키가하라(関ケ原)에 밤새 비가 내렸습니다. 아침에는 안개가 짙게 깔렸습니다. 미 국립공원청(National Park Service, NPS)의 전투 글은 그 일대에 모인 15만 넘는 병사 누구도 앞으로 100피트 넘게 내다보지 못했다고 적습니다.

안개가 걷히고 반나절 만에 한쪽 군대가 무너졌습니다. 이긴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3년 뒤 쇼군이 되었고, 그 집안의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졌습니다. 일본에서 이 싸움을 흔히 "천하를 가른 세키가하라"라고 부르는 까닭입니다.

이 글은 이 전투가 왜 일어났고 하루 동안 어떻게 흘러갔으며 무엇을 남겼는지를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문화청, 기후현의 기념관, 미 국립공원청의 공개 자료로 따라갑니다. 날짜와 병력이 자료마다 다르게 적힌 곳도 함께 봅니다.

히데요시가 죽은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게이초 3년 8월 18일, 1598년에 후시미 성에서 63살로 죽었습니다. 아들 히데요리는 아직 어려서 나랏일을 맡을 수 없었습니다.

정권은 큰 영주 다섯이 맡는 다섯 다이로(五大老)와 실무를 보는 다섯 부교(五奉行)에게 넘어갔습니다. 다이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데루모토, 마에다 도시이에, 우키타 히데이에, 우에스기 가게카쓰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이에야스가 정권의 일을 앞장서 이끌었습니다.

부교 가운데 한 명인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는 이 흐름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는 반이에야스 세력을 모았고, 이 세력은 다이로 모리 데루모토를 우두머리로 세워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미 국립공원청 연표는 같은 세력을 "미쓰나리가 이끄는 도요토미 충성파"로 적어, 누구를 앞에 두느냐가 자료마다 조금 다릅니다.

이 다툼 바로 앞에는 조선과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 부르고 일본에서 분로쿠·게이초의 역이라 부르는 전쟁입니다. 1592년 5월부터 1598년 12월까지 이어진 이 전쟁에는 세키가하라에서 싸울 사람 다수가 참전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자기 군사를 보내지 않아 전쟁 뒤에도 힘과 재산을 지켰습니다.

게이초의 역 때 조선에 건너간 일본군의 총대장은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였습니다. 이 젊은 장수가 2년 뒤 세키가하라의 승부를 가릅니다.

1598년에서 1616년까지의 세로 연표 도표. 가운데에 사건, 왼쪽에 일본 옛 달력 날짜, 오른쪽에 양력 날짜를 적었다. 게이초 3년 8월 18일(1598년 9월 18일) 히데요시 사망, 1600년 5월 이에야스가 우에스기에게 편지, 7월 동군이 에도 쪽으로 이동, 8월 27일~9월 6일 서군의 후시미 성 포위, 10월 20일 밤 미쓰나리의 오가키 성 철수, 게이초 5년 9월 15일(1600년 10월 21일)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8년 2월 12일(1603년 3월 24일) 쇼군 임명, 1614년 11월~1615년 오사카 전투, 겐나 2년 4월 17일(1616년 6월 1일) 이에야스 사망. 옛 달력 날짜가 출처에 없는 칸은 줄표로 두었다
히데요시의 죽음에서 이에야스의 죽음까지, 두 달력으로 본 연표 (도표)(도표)

동쪽으로 간 군대, 서쪽에서 일어난 군대

여기서부터 나오는 1600년의 날짜는 오늘 쓰는 양력입니다. 그해 5월 이에야스는 혼슈 동북의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왜 군비를 늘리느냐고 따지는 엄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가게카쓰는 미쓰나리와 손발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7월에 이에야스는 "동군"을 이끌고 오사카에서 에도 쪽으로 움직였습니다.

이에야스가 동쪽으로 간 사이 미쓰나리의 "서군"이 8월 27일부터 9월 6일까지 후시미 성을 에워쌌습니다. 성을 지킨 이에야스의 가신 도리이 모토타다가 서군의 큰 몫을 붙잡아 두었습니다. 길목의 여러 성을 두고도 싸움이 벌어져, 결전 날까지 수천 명이 본대와 떨어져 있었습니다.

10월 20일 동군이 오가키 성 앞에 이르렀습니다. 성 안의 미쓰나리는 포위를 피하고, 이에야스가 자신을 지나쳐 오사카로 가는 것도 막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늦게 성을 나와 서쪽으로 갔습니다.

왜 하필 세키가하라였을까요? 1600년의 세키가하라는 나카센도(中山道) 길가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에도와 교토를 잇는 내륙 길 나카센도는 바닷가 쪽 도카이도와 함께 당시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두 길이었습니다. 이에야스가 노리는 미쓰나리의 본거지 사와야마와 오사카가 이 길 끝에 있었으니, 그는 세키가하라 근처에서 기다리는 서군과 맞붙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안개 낀 골짜기의 배치

비 오는 밤 내내 서군 약 8만이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네 언덕 둘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왼쪽 끝 사사오산에는 미쓰나리 직속 6,000이 섰습니다. 그 오른쪽으로 우키타·오타니·고니시의 약 21,000이 있었고, 오른쪽 끝 마쓰오산에는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약 15,600을 거느렸습니다. 몇 마일 동쪽 난구산에는 모리 쪽 약 28,000이 기다렸습니다.

새벽 4시 30분 무렵 서군은 나카센도를 막는 벽을 만들었습니다. 지형만 보면 미쓰나리가 유리해 보였습니다. 다만 마쓰오산의 속내는 누구도 몰랐습니다.

전투 며칠 전 히데아키는 큰 재물과 땅을 주면 때가 왔을 때 동군에 붙겠다는 전갈을 이에야스에게 보냈습니다. 소문을 들은 미쓰나리는 봉화를 올리면 도쿠가와 군의 옆을 치겠다는 약속을 따로 받아 냈습니다.

이에야스는 새벽 2시 무렵 미쓰나리를 뒤쫓기 시작해 난구산 옆 작은 언덕 모모쿠바리에 본진을 차렸습니다. 직속 약 3만이 그를 둘러쌌고, 약 13,500은 모리 쪽이 약속을 어길 때에 대비해 뒤쪽 길을 지켰습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약 2만은 미쓰나리 쪽을 마주했습니다. 동군 장수들은 나카센도를 가로질러 서군과 나란한 줄을 만들었습니다.

전투 아침의 배치 개념 도표. 가운데를 나카센도 길이 가로지른다. 왼쪽(서쪽) 사사오산에 미쓰나리 약 6,000과 시마즈 약 2,000, 덴마산 쪽에 우키타·오타니·고니시 약 21,000, 마쓰오산에 고바야카와 약 15,600이 있다. 가운데에 후쿠시마·구로다 등 동군 약 20,000과 길 건너 동군 줄이 서쪽을 향해 화살표를 그린다. 오른쪽에 모모쿠바리의 이에야스 약 30,000과 뒤쪽 경계 약 13,500, 아래 오른쪽 난구산에 싸우지 않은 모리 쪽 약 28,000이 있다. 정오 무렵 고바야카와가 오타니 쪽으로 돌아선 화살표, 이에야스가 본진을 앞으로 옮긴 점선 화살표가 있다.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다
1600년 10월 21일 아침의 배치. 미 국립공원청 글의 숫자로 그린 개념도이며 지도가 아닙니다 (도표)(도표)

반나절의 싸움

전투는 1600년 10월 21일 오전 7시 30분 무렵 시작됐습니다. 안개가 걷히자 동군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이이 나오마사가 정찰이라며 30명을 이끌고 우키타 히데이에의 17,000 진영으로 달려들었고, 이어 후쿠시마 군이 일제히 총을 쏘며 싸움이 본격적으로 붙었습니다.

문화청의 국가 사적 해설도 같은 첫 장면을 적습니다. 게이초 5년 9월 15일 아침, 동군 선봉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덴마산 남쪽 기슭의 우키타 히데이에에게 싸움을 걸었고, 고니시 유키나가와 시마즈 요시히로 같은 서군 장수들이 덴마산 동쪽 기슭에서 맞섰습니다.

두 쪽 모두 큰 계획을 짤 시간이 없었습니다. 처음 몇 시간 동안 총격을 주고받는 싸움과 처참한 맞붙기 싸움이 이어졌습니다. 전투 90분 무렵 서군의 시마 사콘이 동군의 화승총 사격에 가슴과 팔꿈치를 맞고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이에야스는 자기 편의 기세를 올리려 본진을 마을 바로 바깥까지 앞으로 옮겼습니다.

서군 가운데 꽤 많은 수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난구산 둘레의 약 25,000은 앞에 선 깃카와 히로이에가 먼저 나서기만 기다렸습니다. NPS 글은 히로이에가 싸울 거냐는 물음에 세 번이나 아직 점심을 먹는 중이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2,000도 꿈쩍하지 않았고, 오전 11시 무렵 미쓰나리가 직접 말을 타고 가서 따졌습니다.

마쓰오산도 조용했습니다. 미쓰나리가 신호를 하늘로 쏘고 오타니와 고니시가 전령을 올려 보내도 고바야카와 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NPS 글은 정오 무렵 골짜기에 갇힌 꼴이 된 이에야스가 화승총 부대를 앞으로 보내 마쓰오산에 총을 쏘게 했다고 전합니다.

마침내 히데아키는 산을 내려가 오타니 요시쓰구를 치라고 명했습니다. 약 15,000이 600을 덮친 셈이었고, 오타니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서군의 줄은 양쪽에서 밀려 갈라졌습니다. 오후 1시 무렵 우키타와 고니시가 전장을 떠났고, 1시 30분 무렵 미쓰나리도 달아났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카 도요히사와 함께 다가오는 동군 사이를 뚫고 물러나는 길을 골랐습니다.

난구산의 모리 쪽은 끝까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깃카와 히로이에는 처음부터 동군과 싸우지 않기로 이에야스에게 약속해 두었습니다. 오후 2시 30분 이에야스는 거둔 적장의 머리를 확인하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일본 쪽 기록은 이 반나절을 더 짧게 요약합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NDL)은 두 쪽이 밀고 밀리다가 고바야카와의 배신으로 미쓰나리 쪽이 무너지고 이에야스가 크게 이겼다고 적습니다. 결전지로 사적에 들어간 곳은 같은 날 오후 고바야카와가 등을 돌린 뒤 오타니가 죽고 고니시·우키타 군도 진 다음, 미쓰나리가 시마즈와 함께 마지막 싸움을 벌인 사사오산 아래 일대입니다.

화승총과 창, 표식과 봉화: 그날의 무기

세키가하라는 총소리로 시작한 싸움이었습니다. 화승총(matchlock, 일본어로 鉄砲)이 일본에 처음 들어온 것은 1543년입니다. 다네가시마 남쪽 해안에 떠밀려 온 중국 배의 포르투갈 사람이 가져왔습니다.

섬의 영주는 두 자루를 사서 본떠 만들게 했고, 총은 기슈 네고로와 센슈 사카이로 퍼졌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를 비롯한 전국 시대 무장들이 눈여겨보면서 많이 만들어져 전국에 퍼졌습니다.

그로부터 57년 뒤의 세키가하라에서 총은 싸움의 소리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NPS 글이 인용한 한 필사본은 오전 10시 무렵 "총 연기가 햇빛을 가렸다"고, 이어지는 화승총 소리가 "천둥보다 컸다"고 적었습니다.

총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일본의 장대 무기인 나기나타를 든 근접전도 벌어졌고, 이 시대에는 쓰러뜨린 적의 머리를 거두어 싸움이 끝나면 등록해 대장에게 올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신분이 높은 적의 머리일수록 공이 컸습니다.

수만 명이 안개 속에서 섞이면 아군과 적을 어떻게 가렸을까요? 에도 시대 병법가 다이도지 유잔이 쓴 『오치보슈(落穂集)』에는 세키가하라에서 암호를 썼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책에 적힌 예는 한쪽이 "산은 산"이라고 하면 다른 쪽이 "깃발은 깃발"이라고 답하는 식입니다. 병사들은 어깨에 접은 종이 표식(스미토리가미)을 달아 편을 가렸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한참 뒤에 쓰인 책이라는 점을 함께 기억해 둘 만합니다.

신호도 무기의 하나였습니다. 미쓰나리는 봉화와 신호로 고바야카와를 움직이려 했습니다. 국가 사적에 들어간 오카야마 봉화터는 동서 두 군의 진지를 한눈에 모아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날짜와 숫자는 자료마다 다르다

같은 전투인데 일본 쪽 자료는 게이초 5년 9월 15일, NPS는 1600년 10월 21일이라고 씁니다. 둘 중 하나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옛 일본 달력은 달의 차고 기움에 맞춘 태음태양력이었습니다. 한 달을 30일이나 29일로 두고, 계절과 어긋나는 것을 메우려 몇 해마다 윤달을 넣어 열세 달짜리 해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날이 두 달력에서 서로 다른 날짜로 적힙니다. 이 글의 연표 도표는 두 날짜를 나란히 두었습니다.

이에야스가 죽은 나이도 갈립니다. NDL은 겐나 2년 4월 17일, 1616년에 슨푸 성에서 75살로 죽었다고 적고, NPS 연표는 1616년 6월 1일에 73살로 죽었다고 적습니다.

병력은 더 크게 다릅니다. NDL은 이에야스 쪽 약 7만, 미쓰나리 쪽 약 8만이 맞섰다고 하고, NPS는 양쪽이 각 약 8만으로 거의 같았으며 그 일대에 15만 넘는 병사가 있었다고 적습니다. 기후 세키가하라 고전장 기념관의 관장 오와다 데쓰오 시즈오카대학 명예교수는 두 군대를 합쳐 15만이 넘었다고 씁니다.

NPS 글 안에서도 모리 쪽은 28,000과 25,000으로, 고바야카와 군은 15,600과 15,000으로 다르게 나옵니다. 죽은 사람은 NPS가 약 3만 명으로, 게티즈버그 전투 사망자의 네 배가 넘는다고 적었지만, 이 글이 본 다른 자료에는 사망자 수가 없습니다.

자료별 병력 숫자 막대 도표.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은 이에야스 쪽 약 70,000, 미쓰나리 쪽 약 80,000. 미 국립공원청은 동군·서군 각 약 80,000, 그 일대의 병사 모두 150,000 넘게. 기후 세키가하라 고전장 기념관은 두 군대 합쳐 150,000 넘게. 아래에 사망자 약 30,000은 미 국립공원청 글에만 있다는 메모와, 같은 글 안에서도 모리 쪽이 28,000과 25,000, 고바야카와가 15,600과 15,000으로 다르게 나온다는 메모가 있다
병력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각 자료가 적은 대략의 숫자를 한 눈금에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이름에도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같은 관장은 인사말에서 싸움이 있던 당시에는 아직 동군·서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짚습니다. 오늘 우리가 쓰는 이름은 뒤에 붙은 것입니다.

장면도 기록마다 무게가 다릅니다. 점심 이야기, 이에야스가 마쓰오산에 총을 쏘게 한 장면, 뒤에 나올 투구 끈과 감 이야기는 NPS 글이 이야기체로 생생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글은 장면마다 어느 기록에서 왔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반면 NDL이 소개하는 공가 니시노토인 도키요시(1552~1640)의 일기 『도키요시쿄키(時慶卿記)』에는 고바야카와의 배신과 오타니 요시쓰구의 죽음을 포함한 전투의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같은 시대 사람의 일기가 확인해 주는 것과 뒤에 전해진 이야기는 나눠서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막부 260여 년과 오늘의 전장

싸움이 끝나자 이에야스에게 맞설 세력은 사실상 남지 않았습니다. 이에야스는 땅과 재물을 다시 나눠 충성한 장수에게 상을 주고 맞선 이들에게 벌을 내렸습니다. NPS 글은 붙잡혀 처형을 기다리던 미쓰나리가 감을 권받고도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이에야스는 게이초 8년 2월 12일, 양력으로 1603년 3월 24일에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에도에 막부를 열었습니다. 도요토미 가문은 오사카 전투로 끝났습니다. NPS 연표는 이 싸움을 1614년 11월부터 1615년 1월까지로, 전투 글은 1615년의 오사카 전투로 적으며, 어느 쪽이든 이때 히데요리까지 없앴다고 적습니다. 이에야스는 1616년에 죽은 뒤 도쇼 다이곤겐이라는 신으로 모셔졌습니다.

NPS 글은 세키가하라가 긴 전국 시대의 끝이자 에도 시대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 260년은 바깥과의 교류를 막은 시기이면서 경제와 문화가 자라고 무엇보다 평화와 안정이 이어진 때였다고 설명합니다. NPS 글에는 이긴 이에야스가 투구 끈을 고쳐 맸다는 일화도 나옵니다. 그때의 말 "이기면 투구 끈을 조여라"는 일본의 속담이 되었습니다.

전장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일본 문화청은 1931년 3월 30일 세키가하라 고전장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했습니다. 이에야스의 처음과 마지막 본진, 미쓰나리의 진지, 오카야마 봉화터, 오타니의 무덤, 동·서 수총(머리 무덤)이 함께 들어 있고 관리는 세키가하라정이 맡습니다. 옛 전장이 평야 거의 전체에 걸쳐 넓고 그 사이에 시가지와 공장, 역이 흩어져 있어서, 지정 범위는 평야 서쪽 끝의 개전지와 결전지로 좁혔습니다.

이에야스의 마지막 본진 터에는 기후현이 세운 기후 세키가하라 고전장 기념관이 있습니다. 2015년 3월에 세운 고전장 기본 구상에 따라 지었고, 큰 바닥 화면 "그라운드 비전"으로 두 진영을 내려다보게 합니다. 기념관은 2025년 6월 11일 일본 박물관법에 따른 박물관으로 등록됐습니다.

미국과의 인연도 있습니다. 2016년부터 미국 게티즈버그 자치구와 세키가하라정이 자매 도시이고,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과 이 기념관이 자매 관계를 맺었습니다. 두 곳은 기병 군도와 남북전쟁 군복, 판화와 재현 갑옷, 재현 병풍을 주고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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