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척. 명량 해전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숫자입니다. 1597년 9월, 진도와 해남 사이의 좁은 바닷길 울돌목에서 조선 수군이 훨씬 많은 일본 수군을 물리친 싸움입니다. 이 글의 날짜는 기록에 적힌 옛 달력의 달과 날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나란히 펼치면 숫자가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배가 12척이었다고 적은 자료가 있고, 일본 배와 깨뜨린 배의 수도 조금씩 다릅니다. 해전 두 달쯤 뒤 『선조실록』에 옮겨 적힌 이순신의 보고, 그리고 그 기록들을 읽은 오늘날 학자들이 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항목을 함께 놓고 그날의 바다를 따라가 봅니다.
다시 시작된 전쟁과 무너진 수군
임진왜란 중에 이어지던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은 1596년 9월에 깨졌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2월 21일 다시 14만 병력을 꾸렸고, 1차 목표는 호남 지방을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번째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이순신은 수군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조정은 그를 옥에 가두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세웠고, 이순신은 풀려난 뒤 도원수 권율 아래에서 백의종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1597년 7월 15일,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게 크게 졌습니다. 「정유재란」 항목은 이 날을 7월 16일로 적습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선 수군이 진 유일한 해전으로 꼽히는 싸움입니다. 경상우수사 배설만이 12척을 이끌고 빠져나왔고, 남해의 바다는 일본 수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조정은 7월에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앉혔습니다. 날짜는 항목에 따라 21일 또는 22일입니다. 남은 쓸 만한 전선은 배설이 데려온 12척이었고, 백성들이 나중에 한 척을 더 가져와 13척이 되었습니다. 「이순신」 항목에는 남은 군사가 120명이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일본 수군은 육군이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과 함께 서해로 나가려 했습니다. 이순신은 서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명량을 지키려고 이진과 어란포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으로 옮겼습니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의 조선 수군을 밤에 여러 차례 기습했지만 경계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울돌목이라는 바닷길
명량은 진도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 문내면 학동리 사이의 해협입니다. 「명량」 항목에 적힌 값으로 가장 좁은 곳의 폭은 293 m, 사리 때 물살은 11.5노트, 깊이는 19 m입니다. 물살이 빠르고 소리가 요란해서 바다의 목이 우는 것 같다고 하여 '울돌목'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물길 북쪽의 녹진이 진도와 우수영을 이었고, 남쪽의 벽파진은 해남으로 이어지는 나루였습니다. 우수영은 조선 초기에 해남에 쌓은 전라우도 수군의 본영입니다. 오늘날에도 이곳은 명량대첩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순신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했고, 9월 15일 수군을 우수영으로 옮겼습니다.
9월 16일 하루의 흐름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들어왔습니다. 이순신은 출전 명령을 내리고 맨 앞에 서서 물길로 나아갔습니다. 「명량대첩」 항목에 따르면 그때 물은 흐름이 거의 멎는 정조 때였고, 일본 전선은 133척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배들을 '一' 자 모양으로 벌여 세운 일자진으로 물길을 막으려 했고, 곧 큰 혼전이 벌어졌습니다. 물은 서서히 남동쪽으로 흐름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탄 배를 에워쌀 기세였습니다.
가장 위태로운 순간에 이순신은 뒤에 처져 있던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 김응함 등에게 적진으로 뛰어들게 했습니다. 싸움은 이때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방향을 바꾼 물은 배가 적은 조선 수군보다 배가 많은 일본 수군에게 더 불리했고, 좁은 물길의 고르지 않은 흐름 속에서 양쪽의 진형과 대오가 함께 흐트러지고 있었습니다.
「명량」 항목은 조류를 조금 다르게 설명합니다. 그날은 사리여서 물살이 빨랐고, 일본 수군이 들어올 때 북서쪽으로 흐르던 물이 점차 남동쪽으로 바뀌어 조선 수군에게 유리했다는 것입니다. 처음의 물이 거의 멎어 있었는지 빨랐는지는 두 항목이 다르지만, 물의 방향이 남동쪽으로 바뀌었다는 데서는 같습니다.
싸움 도중, 이순신의 배에 타고 있던 투항한 일본인 준사가 꽃무늬 옷을 입은 사람을 가리키며 안골포의 일본 수군 장수 마다시라고 외쳤습니다. 이순신은 그를 끌어올려 처형해 내걸게 했고, 이를 본 일본 수군의 사기는 크게 꺾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과 여러 화전을 쏘며 몰아붙였고,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 등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일본 수군은 물러났습니다.
판옥선과 총통
명량에서 싸운 조선 전선은 판옥선이었습니다. 1555년(명종 10)에 처음 시험된 이 군함을 백과 항목은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전투선"으로 풀이합니다. 그 전의 맹선은 갑판을 깔고 노를 단 평평한 배였는데, 판옥선은 배 위 전체에 한 층을 더 올린 2층 구조였습니다.
아래층은 노를 젓는 격군의 자리였습니다. 격군은 위아래 두 갑판 사이에서 적에게 드러나지 않은 채 노를 저었고, 싸우는 군사는 위층 갑판의 넓고 높은 자리에 섰습니다. 아래층은 엔진실, 위층은 싸우는 갑판인 셈입니다. 실제로는 엔진 대신 많은 사람이 노를 저어 배를 움직였다는 점이 다릅니다.
높은 상갑판은 적이 배에 기어오르기 어렵게 했고, 포를 높은 자리에 둘 수 있게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 판옥선은 이미 125명이 넘는 군사를 태웠는데, 그 전의 대맹선은 정원이 많아야 80명이었습니다. 판옥선은 거북선의 바탕이 되었고 조선 후기까지 주력 군함으로 남았습니다.
배 위의 무기로는 총통이 있었습니다. 현자총통은 조선 전기에 쓰던 유통식(통이 달린) 화포로, 천자·지자 총통 다음 크기이며 태종 때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선조실록』에 실린 이순신의 보고에도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뜨리니"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13척, 12척, 133척: 숫자를 어떻게 읽을까
가장 오래된 기록부터 봅니다. 『선조실록』 1597년 11월 10일 기사는 조선 조정이 명나라 제독에게 적의 움직임과 조선 장수의 전과를 알리게 한 글인데, 그 안에 이순신의 보고가 들어 있습니다. 보고에 따르면 한산도가 무너진 뒤 병선과 병기는 거의 다 사라졌고,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 등과 함께 전선 13척과 정찰용 초탐선 32척을 모아 해남 바닷길의 길목을 막고 있었습니다.
같은 보고에서 적선은 "1백 30여 척"이고, 싸운 곳은 "진도 벽파정 앞바다"로 적혀 있습니다. 깨뜨린 배는 대포로 20여 척, 송여종과 정응두가 와서 또 11척이었습니다. 두 수를 더하면 30여 척이 됩니다.
백과사전에서는 「명량대첩」이 조선 13척, 일본 133척, 깨뜨린 배 31척입니다. 「명량」은 조선 배를 12척으로, 「이순신」은 13척으로 쓰되 "일설에 12척"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명량대첩」 항목의 설명대로라면 12척은 칠천량에서 빠져나온 배의 수이고, 13척은 여기에 백성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을 더한 수입니다.
그렇게 보면 12척과 13척은 언제 세었느냐의 차이입니다. 다만 「명량」 항목은 해전 자체를 12척으로 싸웠다고 적어, 이 차이가 다 풀리지는 않습니다. 보고는 "1백 30여 척", "20여 척"처럼 어림수를 썼고, 백과 항목은 133척, 31척처럼 딱 떨어지는 수를 씁니다. 어느 쪽이 옳다고 고르기보다, 숫자 옆에 그 숫자를 적은 자료의 이름을 같이 붙여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야기로 전해지는 장면도 따로 읽어야 합니다. 피난선 100여 척을 전선처럼 꾸며 뒤에 세웠다는 이야기, 쇠사슬을 물길에 깔아 적선을 뒤집었다는 이야기는 「명량대첩」 항목에서도 본문과 떼어 "일부 전해오고 있다"는 기록으로만 소개됩니다. 그 항목의 참고문헌에는 『선조실록』, 『난중일기』, 류성룡의 『징비록』과 함께 1924년 일본 참모본부의 「日本戰史朝鮮役」도 올라 있습니다. 이 글은 조선 쪽 기록과 한국 학자의 서술만 견주었고, 일본 쪽 기록에 적힌 숫자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해전이 남긴 것
정유재란의 흐름에서 명량은 바다 쪽의 고비였습니다. 육지로 올라간 일본군은 남원과 전주까지 휩쓸었지만 9월 7일 직산에서 명군에 막혀 서울로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바다에서는 9일 뒤 명량에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물리치고 제해권을 되찾았습니다.
해전의 뜻을 두고 「명량대첩」 항목은 10배가 넘는 적을 맞아 좁은 물길을 이용해 서해 진출을 막았다고 평가하고, 「명량」 항목은 한강 유역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막았다고 적습니다. 해전 두 달쯤 뒤 조선 조정이 명나라 제독에게 보낸 그 글은 이 싸움을 "작은 승리"라고 적고, 이 때문에 적선이 서해에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수군은 그 뒤 다시 일어섰습니다. 이순신은 목포의 고하도인 보화도를 거쳐 이듬해 2월 고금도로 본영을 옮겼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군은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에서 물러가려고 모인 일본 배들을 공격했고, 달아나는 적선을 쫓다가 유탄을 맞고 숨졌습니다. 일본군이 물러가면서 전쟁은 끝났습니다.
승리의 기록 뒤에는 긴 고통이 있었습니다. 전라도를 노린 정유재란은 이 지역을 철저히 짓밟았습니다.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져 경작지가 3분의 1로 줄었고, 기근과 질병 속에서 농민들의 삶은 참담했습니다.
1688년에 세운 명량대첩비(보물)는 1947년 경복궁에서 해남 문내면 학동리로 옮겨 세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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