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4월 3일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날 영국 하원이 열렸고, 대처 총리는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영국 주권 영토가 외국에 침공당했다고 말했습니다. 하루 전 아르헨티나군이 남대서양의 포클랜드 제도에 상륙해 섬을 군사적으로 장악한 것입니다.

섬에 사는 사람은 1,800명쯤이었고, 영국 본토에서는 8,000마일, 약 12,900 km 떨어져 있었습니다. 두 나라는 왜 이 먼 섬을 두고 74일 동안 싸웠을까요? 그날의 의회 기록과 유엔 결의문, 미국 외교문서를 따라 분쟁의 뿌리, 바다와 섬에서 벌어진 일, 전쟁이 해군에 남긴 숙제를 차례로 봅니다.

이름이 둘인 섬

영국은 이 섬을 포클랜드라고 부르고, 아르헨티나는 말비나스라고 부릅니다. 유엔 결의문은 "포클랜드 제도(말비나스 제도)"처럼 두 이름을 함께 적습니다.

섬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기록에 남은 첫 정착지는 1764년 프랑스인들이 세웠고, 이들은 고향 항구 생말로를 따서 섬을 "Iles Malouines"라 불렀습니다. 말비나스는 이 이름을 스페인어로 옮긴 것입니다.

영국은 1765년 이 섬을 자기 땅이라고 주장했고, 여기서 주권 분쟁이 시작됐습니다. 프랑스는 2년 뒤 섬을 스페인 왕실에 팔았고,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이 섬을 차지하고 살았던 것을 주장의 근거로 삼습니다.

스페인이 물러난 뒤에는 막 독립한 아르헨티나가 섬을 자기 것이라고 했습니다. 1833년 스탠리 항에 자리 잡은 아르헨티나의 작은 대표단은 영국 수병들에게 쫓겨났고, 그 뒤 영국이 식민자와 양을 들여와 섬을 다스렸습니다. 영국 쪽에서는 1982년 대처 총리가 섬 주민 1,800명이 영국의 전통과 혈통을 이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내세웠습니다.

섬의 산업은 양을 쳐서 양털을 내는 일 하나였습니다. 그래도 주권 문제는 아르헨티나의 가장 오래된 외교 문제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무거웠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아르헨티나는 이 문제를 국제 무대에 거듭 올렸습니다.

1965년 12월 16일 유엔총회는 결의 2065호에서 두 정부 사이에 주권 분쟁이 있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평화적인 해결을 찾도록 지체 없이 협상하라고 권했습니다. 1982년 3월 26일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일일 정보 보고는 두 나라가 15년 동안 협상해 왔지만 아르헨티나 정부가 진전이 없다며 조급해져 협상을 깨겠다고 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1982년 4월 2일

불씨는 섬에서 동남쪽으로 떨어진 사우스조지아섬에서 먼저 일었습니다. 아르헨티나 해군 화물선이 리스 항에 약 60명을 내렸고, 이들은 야영지를 차리고 아르헨티나 깃발을 올렸습니다. 옛 고래잡이 기지의 고철을 걷어 가는 상업 계약 때문이었지만, 영국 측은 허가 없이 상륙할 권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3월 22일 배와 50명가량은 떠났지만 10명쯤이 남았습니다.

1982년 초 레오폴도 갈티에리가 이끄는 아르헨티나 군사정부는 오랜 협상을 버리고 침공을 택했습니다. 영국 관보 『The Gazette』의 역사 기사는 그 결정이 주로 정치적이었다고 봅니다. 경제 실정과 인권 침해로 비판받던 군정이 섬을 되찾으면 나라가 애국심으로 하나가 되리라 믿었다는 것입니다.

침공은 4월 2일 금요일에 시작됐습니다. 아르헨티나군은 그날 이른 아침 수도 포트스탠리로 들어왔고, 수와 무기에서 밀린 영국 해병대 수비대는 짧은 교전 뒤 렉스 헌트 총독의 명령으로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정부청사를 지킨 해병대 쪽에는 사상자가 없었고, 총독이 아는 한 민간인 사상자도 없었습니다. 사우스조지아도 곧 점령됐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4월 3일 결의 502호를 채택했습니다. 결의는 포클랜드 지역에 "평화의 파괴"가 있다고 판정하고, 즉각적인 적대 행위 중지와 아르헨티나군 전원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습니다. 두 정부에는 외교적 해결을 찾으라고 했습니다. 표결은 찬성 10, 반대 1(파나마), 기권 4(중국·폴란드·스페인·소련)였습니다.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기동부대

결의가 나온 날 대처 총리는 하원에서 큰 기동부대(task force)를 보내겠다고 밝혔습니다. 앞장설 배는 인빈서블함이었고, 월요일에 출항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영국 쪽 공식 작전 이름은 코퍼레이트 작전(Operation Corporate)이었고, 총지휘는 함대사령관 존 필드하우스 제독이 맡았습니다.

준비는 빨랐습니다. 1982년 7월 미국 와인버거 국방장관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보낸 메모는 영국에 이런 작전의 비상계획이 거의 없었는데도 즉석 계획을 잘 짰다고 평가했습니다. 첫 부대는 5일 만에 출항했고, 5월 말까지 민간 선박 58척을 징발하거나 빌리거나 고쳐 써서 물자를 실었습니다.

병력 2만 8,000명과 배 100척의 기동부대가 섬에 닿기까지는 3주가 걸렸습니다. 섬에는 주로 징집병으로 이뤄진 아르헨티나 병사 1만 2,000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사이 외교도 쉬지 않았습니다. 미국 헤이그 국무장관이 런던과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오가며 중재했지만 해결이 나지 않자, 미국은 4월 30일 공개적으로 영국 편에 섰고 아르헨티나에 제재를 했습니다.

첫 싸움은 사우스조지아에서 벌어졌습니다. 작전은 4월 25일 동틀 무렵 시작됐습니다. 상륙을 준비하던 영국 군함 가까이에 아르헨티나 잠수함 산타페가 나타나자 헬기가 공격해 잠수함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런던 시각 오후 4시 조금 넘어 영국군이 상륙했고, 오후 6시쯤 그리트비컨의 아르헨티나 지휘관이 항복했습니다.

포로는 약 180명이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작전이 유엔 헌장 51조의 자위권에 따른 행동이라고 밝혔습니다.

5월의 바다: 벨그라노와 셰필드

기동부대는 4월 30일 섬 주변에 닿았습니다. 영국은 이틀 전 아르헨티나 정부에 미리 알린 뒤 섬 둘레 200마일의 전면 배제 수역(total exclusion zone)을 시행했습니다. 이 안에 들어오면 공격받을 위험이 있었습니다.

5월 1일 이른 시각, 벌컨 폭격기와 시해리어가 포트스탠리 비행장을 공격했습니다. 활주로에 구덩이가 파여 본토에서 오는 수송기가 내릴 수 없게 됐습니다. 같은 날 본토에서 날아온 아르헨티나의 미라주와 캔버라 공격은 시해리어가 막아 냈습니다.

세 칸 연표. 4월: 2일 아르헨티나군 상륙과 섬 장악, 3일 유엔 안보리 결의 502호(철수 요구, 찬성 10·반대 1·기권 4), 3일 영국이 큰 기동부대를 보낸다고 발표, 25일 사우스조지아 탈환(포로 약 180명), 30일 기동부대 도착·전면 배제 수역 시행·미국이 영국 지지. 5월: 1일 벌컨과 시해리어의 포트스탠리 비행장 공격, 2일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가 수역 밖(약 30~36마일)에서 격침, 4일 구축함 셰필드 미사일 피격, 20일 밤 산카를로스 상륙과 공습에 아덴트 상실, 25일 코번트리와 애틀랜틱 컨베이어 상실. 5월 말~6월: 산카를로스 뒤 구스그린 전투(하루 낮과 하룻밤), 동포클랜드를 가로지른 동쪽 행군(사흘에 56마일), 현지 6월 14일 포트스탠리 항복(런던 시각 6월 15일 오전 1시 합의), 포로 약 1만 5,000명
1982년 4월 2일부터 6월 14일까지, 74일의 연표 (도표)(도표)

5월 2일 런던 시각 오후 8시, 영국 잠수함이 구축함 두 척의 호위를 받는 아르헨티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를 찾아냈습니다. 노트 국방장관은 이 무리가 배제 수역 가까이에서 몇 시간 거리의 기동부대 일부로 다가오고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호위 구축함에는 사거리 20마일이 넘는 엑조세 대함미사일이 있다고 보았고, 위협이 커서 기동부대 사령관이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었습니다. 벨그라노는 격침됐습니다.

격침이 일어난 자리는 처음부터 논쟁거리였습니다. 같은 날 의회에서 노트 장관은 수역 바로 바깥 약 35마일이라고 했다가 뒤의 답변에서는 수역 남쪽 약 30마일이라고 했고, 질의한 의원은 36마일 밖이라고 들었다며 인명 손실이 동맹국의 우려를 낳고 있다고 따졌습니다. 영국 왕립해군 국립박물관은 지금도 이 결정이 배가 수역 밖에 있었다는 점 때문에 크게 논란이 된다고 적습니다.

이 격침으로 죽은 승조원은 자료에 따라 323~368명입니다(아르헨티나 대통령실 323명, 영국 관보 기사 368명). 아르헨티나는 이날을 나라 역사에서 가장 큰 해군 참사로 기억합니다.

이틀 뒤인 5월 4일 늦은 오후에는 영국의 42형 구축함 셰필드가 아르헨티나 미사일에 맞았습니다. 불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퇴함 명령이 내려졌고, 곁에 있던 배들이 승조원을 건졌습니다. 그날 의회에서 노트 장관은 실종 12명이라고 발표했다가 같은 자리에서 사망자가 30명에 이를 수 있다고 고쳤습니다. 관보 기사가 적은 최종 숫자는 20명입니다.

산카를로스에서 스탠리까지

5월 20일 목요일 밤, 영국군은 동포클랜드의 산카를로스에 상륙했습니다. 기동부대는 어둠을 틈타 포클랜드 해협으로 들어갔고, 구축함과 호위함이 해협에 줄지어 상륙을 지켰습니다. 그 위로 아르헨티나 항공기의 공습이 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방공망을 뚫고 들어온 아르헨티나 항공기는 영국 배 다섯 척에 피해를 입혔습니다. 21형 호위함 아덴트는 금요일 밤 가라앉았고 승조원 22명이 죽고 17명이 다쳤습니다. 영국은 함정의 미사일과 해안에 세운 레이피어 포대, 하늘의 시해리어로 맞섰지만, 호위함 앤털로프도 크게 부서졌습니다.

구축함 코번트리는 포클랜드 해협 입구 북쪽에서 공습을 미리 알리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5월 25일 런던 시각 7시 30분쯤 코번트리는 스카이호크의 폭탄 여러 발에 맞아 뒤집혔고, 첫 집계로 승조원 20명이 죽었습니다. 8시 30분쯤에는 보급을 맡은 상선 애틀랜틱 컨베이어가 쉬페르 에탕다르 두 대가 쏜 엑조세에 맞아 불탔고, 배에 탄 사람 가운데 4명이 죽었습니다.

먼저 구스그린에서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 전투가 벌어졌고, 양쪽을 합쳐 64명이 죽고 209명이 다쳤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긴 영국군은 산카를로스를 벗어나 스탠리를 향해 동쪽으로 긴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애틀랜틱 컨베이어에는 무거운 짐을 나를 치누크 헬기 세 대가 실려 있었습니다. 헬기를 잃은 탓에 해병대는 사흘 동안 56마일을 걸어서 섬을 가로질러야 했습니다.

마지막 공격은 스탠리를 둘러싼 고지의 아르헨티나 방어선을 향했습니다. 아르헨티나군은 현지 날짜로 6월 14일 항복했고, 런던 시각으로는 6월 15일 오전 1시에 항복이 합의됐습니다. 섬이 침공당한 지 74일째였습니다. 영국군 무어 장군이 아르헨티나군 메넨데스 장군에게서 동·서포클랜드 아르헨티나군 전체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포로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포트스탠리에서 1만 1,000명쯤, 서포클랜드에서 2,000명쯤이 항복했고 앞서 잡은 1,800명을 더하면 1만 5,000명가량이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국제적십자의 도움을 받아 제네바 협약에 따른 책임대로 이들을 보호하고 되도록 빨리 섬 밖으로 보내려 한다고 밝혔습니다.

무기와 교훈

엑조세 대함미사일, 작은 항공모함에서 뜨는 시해리어, 바닷속의 잠수함, 해안의 레이피어 포대까지 이 전쟁에는 여러 무기가 한꺼번에 나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과 영국 정부는 저마다 교훈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교훈인지는 서두를 일이 아니었습니다.

와인버거 장관의 7월 메모는 첫 결론으로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는 것의 위험을 꼽았습니다. 셰필드가 가라앉은 뒤 알루미늄 상부구조가 약점이라는 말이 널리 퍼졌지만, 셰필드에는 알루미늄 상부구조가 없었습니다. 자료가 적다는 단서 아래, 메모는 미사일이 일으켰을 수 있는 불이 배의 소화 능력을 넘어 번진 것으로 보았습니다.

같은 메모는 해상·상륙 작전에서 제공권을 얻고 지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확인됐다고 보았습니다. 영국의 작은 항공모함은 시해리어를 적게만 실을 수 있었고, 장거리 방공 경보와 공격 수단이 없어 아슬아슬한 싸움이 됐다는 것입니다.

같은 해 12월 영국 상원 토론에서도 질의에 나선 메이휴 경(Lord Mayhew)이 해리어가 제 몫을 했지만 전투기 엄호에는 더 큰 크기와 항속거리, 체공 시간이 필요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정부는 해리어의 항속거리와 탑재량을 늘리는 개량을 하고 있으며, 큰 항공모함을 다시 들이기에는 자원 부담이 너무 크다고 답했습니다.

1982년 12월 14일 영국 정부는 국방 백서 「포클랜드 작전: 교훈」을 내놓았습니다. 백서의 2부가 이 작전에서 얻은 주요 교훈이었습니다. 정부는 항공모함마다 시워터 레이더를 쓴 공중 조기경보 능력을 갖추고, 항공모함과 상륙함, 42형 구축함 등에 현대식 근접 방어 무기를 달겠다고 했습니다.

왼쪽 다섯 상자는 전쟁에서 겪은 일, 오른쪽 다섯 상자는 1982년 12월 영국 국방 백서 발표에 나온 대책이고 화살표로 잇는다. 하늘에서 공격받은 배와 장거리 방공 경보의 부족 → 운용 항공모함마다 시워터 레이더를 쓴 공중 조기경보. 구축함·호위함에 대한 미사일과 공습 → 항공모함·상륙함·42형 구축함에 현대식 근접 방어 무기. 본국 기지에서 8,000마일 떨어진 작전 → 트라이스타 여객기 여섯 대를 공중급유기로 바꿈. 애틀랜틱 컨베이어와 함께 잃은 치누크 세 대 → 치누크 여덟 대 추가(세 대는 보충). 작전에서 잃은 배 네 척 → 새 22형 호위함, 그때까지 오래된 배를 계속 운용
겪은 일에서 주문서로: 1982년 12월 영국 국방 백서 (도표)(도표)

8,000마일 떨어진 곳에서 싸운 경험은 공중급유(air-to-air refuelling)로 이어졌습니다. 백서 발표는 공중급유가 포클랜드 작전에서 매우 중요했다고 하면서, 영국항공의 트라이스타 여섯 대를 사들여 급유기로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치누크는 여덟 대를 더 사서 그 가운데 세 대로 잃은 것을 메우고, 시해리어도 일곱 대를 더 사기로 했습니다.

작전에서 잃은 배 네 척은 당분간 오래된 배를 더 쓰며 메우고, 새 22형 대잠 호위함으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전쟁 중에 사들인 새 무기 목록에는 하푼 미사일과 레이저 유도 무기도 있었습니다. 레이저 유도 무기는 보통 레이저로 표적을 비추고 그 반사광을 따라가는 반능동 레이저 유도(semi-active laser guidance) 방식을 씁니다.

전쟁이 남긴 것

항복 소식이 전해진 6월 15일, 대처 총리는 최종 숫자는 며칠 더 지나야 알겠지만 영국 장병과 민간인 약 250명이 죽었다고 하원에 보고했습니다. 영국 왕립해군 국립박물관이 적은 최종 숫자는 영국군 255명 사망, 777명 부상입니다. 아르헨티나군 사망자는 박물관 자료로 649명, 관보 기사로 655명이고, 섬 주민도 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두 칸 막대 도표. 위 칸은 병력이다. 영국 기동부대 2만 8,000명, 섬의 아르헨티나 병사 1만 2,000명(관보 기사), 항복 뒤 포로 약 1만 5,000명(6월 15일 영국 정부 발표, 앞서 잡은 약 1,800명과 서포클랜드 약 2,000명 포함). 아래 칸은 최종 사망자다. 영국 장병 255명, 아르헨티나 장병 649명(왕립해군 국립박물관)과 655명(관보 기사), 섬 주민 3명. 6월 15일 첫 발표는 영국 장병과 민간인 약 250명이었다는 메모가 있다. 두 칸의 눈금은 서로 다르다
보낸 사람, 붙잡힌 사람, 잃은 사람. 자료마다 다른 값은 둘 다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같은 해 12월 영국 국방부는 의회 답변에서 포클랜드에 보낸 병력 가운데 1%가 조금 안 되는 사람이 전사했다고 밝혔습니다. 비율로는 작아 보여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돌아오지 못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같은 답변 자리에서 국방부는 임시로 묻힌 아르헨티나 전사자 다수를 영구적인 방식으로 모시는 계획을 세우고, 국제적십자위원회와 브라질 대사관과 의논하겠다고 했습니다.

전쟁은 아르헨티나의 정치를 바꿨습니다. 갈티에리는 포트스탠리 함락 사흘 뒤 물러났고, 군정이 끝나 민주주의가 돌아오는 길이 열렸습니다. 아르헨티나에는 1983년 12월 민간 정부가 다시 섰습니다.

미국에도 숙제가 남았습니다. FRUS 13권은 이 분쟁이 미국과 중남미의 관계에 해를 끼쳤고, 남아 있는 포클랜드/말비나스 주권 분쟁이 전쟁 뒤 미국과 아르헨티나의 관계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정리합니다. 섬은 지금도 영국의 속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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