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 15일 아침 6시 30분, 인천 앞바다의 작은 섬 월미도에 미 해병대가 상륙을 시작했습니다. 정오 무렵에는 섬의 저항이 모두 멎었습니다. 그런데 인천 시내 쪽 해안에 본대가 오른 것은 그보다 열한 시간 뒤인 저녁 5시 30분이었습니다.

하루를 둘로 가른 것은 바닷물이었습니다. 인천 앞에는 물이 빠지면 넓은 갯벌이 드러났고, 상륙정은 물이 그 갯벌을 덮을 만큼 차올라야 해안에 닿을 수 있었습니다. 날짜도, 시각도 결국 조수가 정했습니다.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이름이 붙은 이 작전은 어떻게 계획되었고, 반대한 사람들은 무엇을 걱정했을까요?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HHC)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기록을 함께 놓고, 왜 하필 9월 15일이었는지와 숫자가 자료마다 왜 다른지를 따라갑니다.

낙동강까지 밀린 여름

1950년 8월 말, 유엔군은 한반도 남동쪽 끝까지 밀려 있었습니다. 주로 미군과 국군이었던 이 부대들은 부산 항 둘레의 좁은 땅에서 바다를 등지고 싸웠습니다. 영어로는 이곳을 부산 교두보(Pusan Perimeter)라고 부르고, 한국에서는 낙동강 방어선이라고 부릅니다.

그 좁은 땅으로 보급과 증원이 끊이지 않고 들어왔습니다. 미 해병 제1임시여단을 비롯해 모두 배로 실어 온 것이었고, 덕분에 방어선은 간신히 버텼습니다.

바다는 버티는 길이었을 뿐 아니라 적의 뒤로 돌아가는 길이기도 했습니다. 상륙 이야기는 이 여름보다 조금 더 앞에서 시작합니다.

맥아더의 구상과 반대

6월 29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는 한강 방어선을 둘러봤습니다. 그는 북한군이 장비도 사기도 모자란 국군을, 미군 증원이 오더라도 서울 훨씬 남쪽까지 밀어붙일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북한군 전선 뒤 어딘가에 상륙하는 결정적 일격이 남한을 되찾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계획은 일찍 움직였습니다. 7월 첫 주 맥아더가 참모장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지시를 내렸고, 합동전략기획단(JSPOG)이 연구한 첫 계획에 '블루하츠(Blue Hearts)'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블루하츠는 7월 22일 상륙을 잡았지만, 북한군의 남진을 막을 병력이 모자라 7월 10일 무렵 무산되었습니다.

다음 이름이 크로마이트였습니다. 기획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처럼 상륙할 만한 해안을 두루 검토했고, 7월 23일 크로마이트 계획 초안이 나왔습니다. 극동군사령부가 낸 세 안은 인천의 100-B, 군산의 100-C, 동해안 주문진 근처의 100-D였습니다. 그 가운데 100-B가 골라졌고, 잠정 상륙일은 9월 15일이었습니다.

왜 인천이었을까요? 인천은 적 전선 뒤로 110마일 떨어진 서해안의 큰 항구였습니다. 인천에 오르면 가까운 김포 비행장을 잡고 서울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서울은 북한군 보급선의 핵심 고리였고, 이곳을 잡으면 그곳이 모루가 되고 부산에서 올라오는 미 8군의 공세가 그 위에서 적을 내리치는 망치가 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1950년 6월 29일 맥아더의 한강 방어선 시찰, 7월 첫 주 블루하츠 계획(7월 22일 상륙 예정), 7월 10일 무렵 블루하츠 무산, 7월 23일 크로마이트 계획 초안, 8월 20일 셔먼·콜린스가 도쿄로 출발하고 8월 21일 도착, 이틀 뒤 브리핑과 도일의 '불가능하지는 않다', 8월 26일 미 제10군단 편성, 9월 1일 클라크 팀 영흥도 상륙, 9월 5~6일 인천·군산 포격과 기만, 승인(자료에 따라 날짜 없음, 9월 8일, 9월 9일), 9월 13~14일 월미도 포격, 9월 15일 6시 30분 월미도와 17시 30분 적색·청색 해안(크게 표시), 9월 16일 미 8군 공격 시작, 김포 비행장(자료에 따라 17일, 18일, 19일까지), 9월 21일까지 5만 3,882명 상륙, 9월 25~28일 서울(25일 알몬드 선언, 26일 유엔군 성명 제9호, 28일 완전 탈환), 9월 27일 오산 근처 합류, 9월 29일 환도식. 점의 색으로 계획, 작전, 자료마다 다른 날을 나눈다
1950년 6월 29일부터 9월 29일까지. 자료마다 날짜가 다른 일은 값을 모두 적었습니다 (도표)(도표)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현지의 미 해군 지휘관들은 상륙 자체가 아니라 인천이라는 장소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가장 큰 걱정은 작전 시각을 꽉 묶어 버리는 조수와 수로였습니다. 상륙할 두 '해변'이 실은 공업 지대로 이어지는 방파제라는 점, 제대로 된 예행연습을 할 시간이 없다는 점, 태풍철인데도 날짜를 미룰 여유가 없다는 점도 꼽혔습니다.

8월 20일, 해군참모총장 포레스트 셔먼(Forrest P. Sherman) 제독과 육군참모총장 J. 로턴 콜린스(J. Lawton Collins) 대장 일행이 워싱턴에서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날아왔습니다. 일행은 21일 도쿄 비행장에 내렸고, 브리핑은 그 이틀 뒤에 열렸습니다. 도일(Doyle) 제독의 참모진이 공격 계획의 세부를 설명했고, 도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인천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것"이라는 말로 브리핑을 맺었습니다.

이어 맥아더가 45분 동안 말했습니다. 인천은 조건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적이 그곳 상륙을 예상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첫째 논리였습니다. 인천에서 이기면 전쟁을 끝낼 수 있지만, 군산 같은 다른 곳을 잡으면 결정적이지 못하고 혹독한 겨울 싸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둘째였습니다.

승인한 날은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NHHC가 펴낸 커티스 어츠(Curtis A. Utz)의 단행본은 셔먼과 콜린스가 워싱턴으로 돌아간 뒤 합동참모본부(합참)가 9월 15일 인천 상륙을 공식 승인했다고만 쓰고, 날짜는 밝히지 않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인천상륙작전」 항목(2013년 집필)은 9월 9일 합참의 최종 승인을, 1995년에 집필된 「한국전쟁」 항목은 9월 8일 대통령의 허가를 적습니다. 1995년 항목에는 맥아더가 7월 15일 합참에 인천 안을 올렸다가 지형상 상륙에 가장 맞지 않는 곳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9미터가 넘는 조수, 갯벌, 좁은 수로

바닷물이 가장 높이 찬 때를 만조, 가장 많이 빠진 때를 간조라고 합니다. 둘 사이의 물높이 차이가 조수 간만의 차(tidal range)입니다. 인천 앞바다는 이 차이가 아주 큰 곳입니다.

얼마나 큰지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른 값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츠의 단행본은 32피트(약 9.8 m)라고 쓰고, 미 해군 국립박물관(NMUSN)의 한 장짜리 자료는 9월 한 달 동안 간조와 만조의 차가 30피트를 넘었다고 씁니다. 1995년 백과 항목에는 맥아더가 "인천의 간만의 차가 9 m에 불과하지만 6시간은 상륙작전을 위하여 사용 가능"하다고 주장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건물 3층 높이쯤 되는 물이 차고 빠진다고 떠올리면 되지만, 실제 물높이는 날마다 달라서 가장 높은 만조는 한 달에 며칠만 왔습니다.

물이 빠지면 도시 앞에 넓은 갯벌이 드러났습니다. 상륙정이 해안에 닿으려면 물이 이 갯벌을 덮을 만큼 높아야 했고, 그래서 낮에 상륙할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사나흘뿐이었습니다. 9월에는 가장 높은 조수가 달 중순에 와서, 기획단은 9월 15일을 상륙일로 골랐습니다. 보통 석 달에서 다섯 달 걸리는 상륙 계획을 두 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짜야 했습니다.

백과의 「인천상륙작전」 항목은 1950년 가을 상륙할 수 있는 만조일을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과 그 앞뒤 2~3일로 꼽습니다. 10월은 날씨로 보아 늦어서 9월 15일이 가장 알맞다고 정했다는 설명입니다. NMUSN 자료는 가장 높은 만조가 사흘뿐이었고, 그 높이에 오래 머물지도 않았다고 덧붙입니다.

9월 15일 하루의 일정도 조수에 맞춰 짜였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조석표가 서로 맞지 않았지만, 계획자들은 그날 만조가 해 뜬 직후와 해 진 직후에 올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그래서 아침 조수에 작은 첫 상륙을 하고, 저녁에 물이 다시 차오를 때 본 상륙을 하기로 했습니다.

9월 15일 하루의 물높이를 그린 개념 곡선. 측정값이 아니다. 가로축은 하루의 시각, 세로축은 물높이다. 곡선은 해 뜬 직후와 해 진 직후 두 번 높아지고 한낮에 낮아진다. 아침 만조 무렵 6시 30분 월미도 상륙, 저녁 만조 무렵 17시 30분 적색·청색 해안 상륙을 표시했다. 그 사이 물이 빠진 동안은 갯벌이 드러나 상륙정이 해안에 닿을 수 없는 여덟 시간의 기다림으로 칠했다. 곡선 위 번호 1~4는 6시 30분 월미도 상륙, 13시 뒤 LST와 수송선이 밀물을 타고 수로를 올라온 것, 17시 구축함이 다시 자리를 잡은 것, 17시 30분 적색·청색 해안 상륙이고 오른쪽 위 상자에 풀이가 있다. 점선은 갯벌을 덮을 만큼의 물높이(개념)다. 오른쪽 아래 상자에 자료별 조수 간만의 차: 미 해군 단행본 32피트(약 9.8 m), 미 해군 국립박물관 9월에 30피트 넘게, 1995년 백과 항목의 맥아더 주장 9 m
물이 차는 두 때에 맞춰 하루를 둘로 나눴습니다. 곡선은 모양만 보인 개념 그림이고 실제 물높이가 아닙니다 (도표)(도표)

바다 쪽 길도 좁았습니다. 황해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길은 비어 수로(Flying Fish Channel)와 동수로 두 갈래였고, 둘은 팔미도에서 만났습니다. 갯벌이 멀리까지 뻗어 있어 배들은 좁은 수로를 34마일이나 지나야 해안에 닿았습니다. 항구 안의 물살은 보통 2~3노트로 위험할 만큼 빨랐고, 때로는 8노트에 이르렀습니다.

항구도 상륙에 맞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정박지는 작고 부두는 적었으며, 보통 뜻의 상륙 해변이 없었습니다. 상륙할 두 곳은 사실 방파제(seawall)로 둘러싸인 공업 지대였습니다.

배를 마련하는 일도 조수를 따랐습니다. 도일은 미 해군 전차 상륙함(Landing Ship, Tank, LST) 17척과 일본인 선원이 모는 SCAJAP 선박 30척을 모았습니다. 저녁 썰물 때 LST 몇 척을 일부러 갯벌에 얹힌 채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 밀물에 다른 배로 바꾸는 계획이었습니다.

날씨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1950년 9월에는 강한 태풍 둘이 생겼습니다. 제인(Jane)은 9월 3일, 키지아(Kezia)는 9월 12일에 발달했고, 기동부대는 때로 90노트가 넘는 바람을 뚫고 가야 했습니다. 도일은 뒤에 해군에서 보낸 35년 동안 가장 거친 바다였다고 했지만, 배들은 모두 무사히 인천에 닿았습니다.

정보와 기만: 영흥도와 군산

조석표가 맞는지, 갯벌이 무게를 버티는지는 가서 봐야 알 수 있었습니다. 9월 1일, 인천에서 14마일 떨어진 영흥도에 클라크(Clark) 대위의 팀이 들어갔습니다. 클라크는 일본이 만든 조석표가 정확하고, 인천 앞 갯벌은 어떤 무게도 버티지 못하며, 방파제는 짐작보다 높다고 도쿄에 알렸습니다.

클라크와 한국인 대원들의 정찰로 2차 대전 때 일본이 만든 인천 조석표는 맞고 미국 조석표는 틀렸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두 갈래 길 가운데 비어 수로가 골라졌습니다. 본대가 들어오던 밤, 클라크 팀은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켜 어려운 수로를 지나는 배들을 도왔습니다.

인천으로 들어가는 길을 상자와 선으로 줄인 개념 도표. 지도가 아니며 축척이 없고 부대 위치도 없다. 왼쪽 황해에서 두 갈래 수로, 비어 수로(Flying Fish Channel)와 동수로가 오른쪽으로 들어와 팔미도에서 만난다. 팔미도에는 등대 표시가 있다. 그 아래쪽에 영흥도(인천에서 14마일)가 있다. 수로는 갯벌 사이를 지나 월미도로 이어지고, 월미도는 둑길로 인천 시내와 이어진다. 둑길 바로 북쪽에 적색 해안, 그 남쪽 3마일에 청색 해안이 있고 청색 해안 앞에는 2마일의 갯벌이 있다. 인천 시내 오른쪽 위로 김포 비행장, 한강, 서울이 있다. 메모: 좁은 수로 34마일(미 해군 국립박물관), 물살 보통 2~3노트·때로 8노트, 둑길 길이는 자료에 따라 800야드 또는 900야드
황해에서 월미도와 두 해안까지. 기관 자료의 설명을 상자와 선으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영흥도는 뜻밖의 효과도 냈습니다. 앞서 한국 해군이 영흥도에 오르자, 인천을 지키던 북한군이 인천 남쪽 상륙을 떠올리고 병력을 그쪽으로 옮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움직임은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9월 5일 영국 해군 앤드루스(Andrewes) 제독의 유엔 수상 부대가 인천을, 이튿날 군산을 포격했고, 영국 항공모함 트라이엄프(Triumph)는 동해안의 원산을 공격했습니다. 백과 항목은 9월 5일부터 평양에서 군산까지 서해안의 상륙 가능 지역을 폭격하고, 9월 12일부터 미·영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했으며, 동해안 전대가 9월 14일과 15일 삼척 일대를 포격했다고 정리합니다.

시간도 문제였습니다. 북한은 상륙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 군산과 목포에 기뢰를 집중해 깔고 있었습니다. NHHC의 콕스(Samuel J. Cox)는 작전이 한 달만 늦었어도 인천에 기뢰가 잔뜩 깔려 심각한 결과가 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9월 13~14일 월미도 포격

월미도는 인천 내항의 작은 섬이었습니다. 한 변이 반 마일쯤 되는 세모꼴이었고, 둑길로 인천 시내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둑길 길이는 콕스의 해설에 900야드, 어츠의 단행본에 800야드로 적혀 있습니다. 섬 위의 라디오 언덕(Radio Hill)은 높이 315피트로 항구를 완전히 내려다봤습니다.

섬을 지키던 북한군은 400명 정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섬에서는 북한군의 포가 북쪽 적색 해안과 남쪽 청색 해안으로 가는 상륙정을 옆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계획은 기습이 드러나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틀 동안 포격과 공습을 하고, 본 상륙 전에 섬을 먼저 잡는 것이었습니다.

호위 항공모함의 해병 항공기들은 월미도 서쪽 절반을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고 네이팜 9만 5,000파운드를 썼습니다. 인천이 목표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는 일이었지만, 꼭 필요한 위험으로 여겼습니다.

9월 13일, 구축함(destroyer)들이 들어갔습니다. 밀물에 맞춰 좁은 수로를 한 줄로 올라가 월미도에서 반 마일이 안 되는 곳에 닻을 내려야 했고, 썰물에 갯벌에 얹히기 전까지 포격할 시간은 두 시간쯤이었습니다. 11시 45분, 줄지어 떠 있는 계류 접촉 기뢰 17개가 눈에 띄었습니다. 조수와 일정이 기다려 주지 않았고, 스트러블(Struble) 중장은 기뢰가 더 있을 위험을 안고 그대로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13시, 반 마일이 안 되는 거리에서 포격이 시작되자 섬도 맞받아 쐈습니다. 구축함 콜렛(Collett)은 75 mm 포탄을 아홉 번, 거크(Gurke)는 세 번 맞았습니다. 라이먼 K. 스웬슨(Lyman K. Swenson)에서는 가까이 떨어진 포탄의 파편에 데이비드 H. 스웬슨(David H. Swenson) 중위가 숨졌고, 그날 포격 부대에서 8명이 더 다쳤습니다.

스트러블은 이튿날인 9월 14일에 포격을 되풀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번에는 섬의 응사가 드물고 부정확했습니다.

9월 15일: 아침의 월미도, 저녁의 방파제

9월 15일 아침, 해병대는 계획대로 6시 30분에 상륙했습니다. 그 직전 구축함 두 척이 근접신관(proximity fuze) 포탄으로 관측소 언덕(Observatory Hill)의 앞 비탈과 해안을 쓸었습니다. 근접신관은 목표에 직접 맞지 않아도 가까이 가면 터지게 하는 장치라서, 포탄이 공중에서 터지며 파편을 뿌렸습니다.

6시 33분 첫 해병이 섬에 올랐고 저항은 거의 없었습니다. 30분 안에 섬 북쪽 끝을 장악했고, 8시에 섬을 확보했다는 보고가 올라갔습니다. 정오 무렵에는 섬의 저항이 모두 멎었습니다.

월미도에서 다친 해병은 콕스의 해설에 14명, 어츠의 단행본에 17명으로 적혀 있습니다. 맥아더는 "해군과 해병대가 오늘 아침만큼 빛난 적이 없다"는 전문을 보냈습니다.

그다음은 기다림이었습니다. 물이 빠졌다가 다시 차오르고 해가 지기 시작할 때까지 여덟 시간 동안, 다른 해병 부대들은 적색·청색 해안에 오를 수 없었습니다. 낮 동안 공습과 함포 사격이 이어졌고, 인천의 민간 지역에 부수 피해가 나지 않도록 꽤 주의를 기울였다고 콕스는 적습니다. 13시가 지나자 LST와 수송선들이 밀물을 타고 수로를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17시, 물이 차서 구축함들이 다시 자리를 잡았고 해안 포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비구름과 짙은 연기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상륙정 500척이 해안으로 향했습니다. 해병대는 계획대로 17시 30분에 상륙했습니다.

적색 해안은 월미도 둑길 바로 북쪽에, 청색 해안은 그 남쪽 3마일에 있었습니다. 청색 해안으로 가는 길은 얕은 물에 덮인 갯벌을 2마일이나 건너야 해서, 첫 물결은 상륙 장갑차(Landing Vehicle, Tracked, LVT)가 실어 날랐습니다.

적색 해안에서는 북한군의 저항보다 해안의 생김새가 더 발목을 잡았습니다. 해병들은 사다리를 타고 방파제를 올라야 했고, 뒤따른 병력은 만조로 좁아진 갯벌 위에 쌓였습니다. 상륙정 바닥에는 갯벌에 걸렸을 때 해안까지 건널 긴 판자 두 장이 있었고, 다른 상륙정은 꼭대기에 갈고리를 단 나무나 알루미늄 사다리를 실었습니다. 그래도 한 시간 안에 해병대는 시내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첫날의 사상자는 세는 범위에 따라 다릅니다. 콕스는 해병대 사상자를 174명으로 적고, 그 안에 전사 20명, 실종 1명, 부상 뒤 사망 1명이 들어 있다고 씁니다. 어츠의 단행본은 합동기동부대 전체로 전투 부상 174명, 비전투 부상 14명, 실종 1명, 전사 21명을 적습니다. 적색 해안의 LST에서 돌본 부상자는 도일의 참모진이 예상한 300명보다 훨씬 적었고, LST 898의 수술실은 군인 42명과 민간인 32명을 치료했습니다.

같은 무렵 영흥도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북한 해병이 정크선을 타고 섬에 올랐을 때, 클라크와 한국 해군 배들, 한국인 유격대는 바로 직전에 섬을 떠난 뒤였습니다. 북한군은 섬에 남기로 한 민간인 약 50명을 학살했습니다.

서울 수복까지

갯벌은 상륙 뒤에도 문제였습니다. 조수와 지형은 군수(logistics)를 큰 과제로 만들었고, 무엇보다 속도가 중요했습니다. 9월 18일이 되면 어느 해안에도 LST가 닿을 수 없었습니다.

첫 제대 LST 8척이 적색 해안에 올랐고, 청색 해안에는 작은 배만 닿을 수 있었습니다. 물이 빠지자 LST들은 계획대로 일부러 갯벌에 얹힌 채 짐을 내렸습니다. 16일 오르는 물에 이 배들이 물러날 때까지 해군 해안 부대와 해병 해안 부대가 물자와 장비 4,000톤을 내렸고, 짐을 가득 실은 LST 9척이 곧 그 자리를 이었습니다. 9월 21일까지 해군은 인천에 인원 5만 3,882명, 차량 6,629대, 화물 2만 5,512톤을 내렸습니다.

김포 비행장을 잡은 날도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콕스는 9월 17일, 어츠는 "19일까지", 백과의 「9·28 서울 수복」 항목은 9월 18일에 완전히 장악했다고 적습니다. 9월 20일에는 미 제5해병연대와 한국 해병 제1대대가 북한군의 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한강 북쪽에 오르기 시작했고, 22일에는 영등포를 되찾았습니다.

서울을 되찾은 날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9월 25일 알몬드 소장이 서울 탈환을 선언했지만, 막 시내에 들어간 해병대는 28일까지 집집마다 싸우고 있었습니다. 도쿄의 맥아더는 9월 26일 14시 20분 서울을 탈환했다는 유엔군 성명서 제9호를 냈는데, 그때 되찾은 곳은 서울 시내의 절반 정도였습니다. 서울을 완전히 되찾은 것은 28일이었고, 9월 29일 12시에 환도식이 열렸습니다.

서울 탈환에서 해병대가 치른 사상자는 2,301명이었습니다. 9월 18일부터 28일까지 서울을 되찾은 부대는 한국 해병대, 국군 제17연대,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이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미 8군이 9월 16일 큰 공격을 시작했지만 곧 막혔습니다. 그러다 북한군의 저항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8군은 인천이 있는 북서쪽으로 나아갔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은 상륙 이틀 뒤 한국군, 미군, 영국군이 부산 교두보를 뚫고 나오는 싸움에 나섰다고 적습니다. 9월 27일 아침 오산 근처에서 제1기병사단의 제7기병연대가 제7보병사단의 부대와 만났습니다.

숫자와 평가

작전의 크기도 세는 범위에 따라 달라집니다. 백과의 「인천상륙작전」 항목은 미 제7함대를 주축으로 한 유엔군 함정 261척과 7만여 명의 지상군을 적습니다. 콕스는 공격부대(TF 90)를 모두 약 230척, 그 가운데 병력을 나르는 배를 약 120척으로 세고, 지원 기동부대들의 약 52척은 따로 적습니다. 공격부대의 LST 47척 가운데 30척은 일본인 선원이 몰았습니다.

상륙을 맡은 미 제10군단은 8월 26일 편성되었고, 주력은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었습니다. 제7보병사단에는 한국 청년 8,000여 명이 일본에서 훈련받은 뒤 배치되었고, 이것이 카투사(KATUSA)의 시작이었습니다. 국군에서는 해병 제1연대와 제17연대가 참가했습니다. 콕스는 실제 인천 공격을 미 제1해병사단이 모두 맡았다는 점에서 '유엔'이라는 말이 조금 맞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영국 해군이 의미 있는 도움을 주었다고 적습니다.

사상자 숫자는 무엇을 언제까지 셌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어츠의 단행본에 따르면 크로마이트 첫 7일 동안 합동기동부대는 전사 약 70명, 부상 470명, 실종 5명이었고, 서울 싸움을 거치며 전사 600명, 부상 2,750명, 실종 65명으로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유엔군은 북한군 1만 4,000명을 죽이고 7,000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남쪽 전선 전체로 넓히면 숫자가 더 커집니다. 콕스는 남쪽의 북한군 가운데 3만~4만 명이 죽고 13만 5,000명이 포로가 되었지만 약 3만 명이 북으로 돌아갔다고 씁니다. 어츠는 부산 둘레에서 싸운 북한군 7만 명 가운데 무거운 무기를 거의 갖지 못한 3만 명만 38선을 다시 넘었다고 적고, 1995년 백과 항목은 이 기간 공산군 포로를 1만 2,500명으로 적습니다.

여기 적은 숫자는 거의 모두 군인의 것입니다. 이 글이 살펴본 자료에는 인천과 월미도 주민이 입은 피해를 모두 센 숫자가 없습니다. 영흥도의 민간인 약 50명처럼, 기록에 한 줄로 남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평가도 하나가 아닙니다. 콕스는 인천 상륙이 군사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작전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고 하면서, 북한군의 퇴로를 완전히 막는 대신 서울을 먼저 되찾은 결정은 뒤에 큰 비판을 받았다고 함께 적습니다.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을 되도록 빨리 되찾겠다고 한 약속을 지켰고, 그 결과 남쪽 북한군의 퇴로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츠도 8군이 인천으로 달려가기보다 적을 고립시키는 데 힘을 모았다면 북한군 전체를 잡았을지 모른다고 씁니다.

다른 면을 보는 기록도 있습니다. 백과의 「인천상륙작전」 항목이 꼽는 의의는 우회 기동으로 북한군의 병참선을 한 번에 끊어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할 계기를 만들었고, 인천 항만과 서울까지의 병참 시설을 북진에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항목의 결론은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인천상륙작전이 손쉽게 교두보를 확보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50년 10월 중국이 개입하면서 한국의 싸움은 거의 3년을 더 이어졌습니다.

오늘 인천항의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는 갑문이 있습니다. 인천 앞바다의 큰 조수 간만의 차를 이기려고 만든 시설이고, 배는 이 갑문을 지나 내항으로 들어갑니다. 1950년의 계획자들을 붙잡았던 조수가 지금도 항구의 모양을 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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