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캐나다 해군(Royal Canadian Navy, RCN)의 프랭크 커리(Frank Curry)는 대서양을 건너는 작은 코르벳 안에서 일기를 썼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썩은 듯한, 희망 없는 삶인가"로 시작하는 글에서 그는 선단에 붙어 가는 일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 적었습니다. 캐나다 보훈부(Veterans Affairs Canada)가 대서양 전투를 소개하며 맨 앞에 옮겨 둔 일기입니다.

커리가 겪은 싸움이 대서양 전투(Battle of the Atlantic)입니다. 1939년 9월에 시작해 1945년 독일이 질 때까지 끊이지 않고 이어진, 2차 대전에서 가장 긴 작전이었습니다. 한쪽에는 상선을 노리는 독일 잠수함 U보트가, 다른 쪽에는 상선을 묶어 지키는 호송 선단(convoy)이 있었습니다.

왜 이 바닷길이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그리고 연합국이 밀리던 싸움은 1943년 5월에 왜 뒤집혔을까요? 이 두 물음을 공개 기록으로 따라가고, 손실 숫자가 자료마다 다른 까닭도 함께 봅니다.

섬나라의 바닷길

영국은 섬나라입니다. 2차 대전 동안 영국은 북미와 영 제국 곳곳에서 오는 물자에 기댔고, 그 물자는 거의 모두 상선에 실려 대서양을 건너야 했습니다. 바다 위의 상선은 독일 잠수함과 군함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 해군은 이 사슬을 끊으면 영국을 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수상 함대는 작았지만 잠수함은 세계에서 손꼽히게 앞서 있었습니다.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의 학예사 로버트 럼블(Robert Rumble)은 1939년 독일 해군이 소모전을 준비했고, 칼 되니츠(Karl Dönitz)가 영국 상선대를 부수려면 잠수함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U보트라는 이름은 '물밑 배'라는 뜻의 독일어 Unterseeboot에서 왔습니다.

상선을 지키는 답은 호송 선단이었습니다. 상선을 여러 척씩 묶고 군함이, 할 수 있으면 항공기도 함께 가는 방식입니다. 첫 대서양 선단은 1939년 9월 2일에 떠났습니다. 캐나다 핼리팩스에서 처음 떠난 선단은 9월 16일의 HX-1이었습니다.

배를 한데 모으면 무엇이 좋을까요? 넓은 바다에 표적이 흩어져 있지 않고 한곳에 모이면 표적의 수가 줄어, 선단 하나를 찾기가 홀로 다니는 배 한 척을 찾기보다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선단을 공격하는 U보트는 호위하는 군함에게 거꾸로 공격받을 수 있었습니다. 선단은 몇 줄로 섰고 한 줄에 다섯 척까지, 모두 60척까지 큰 네모를 이루었습니다.

1917년이 남긴 교훈

이 싸움에는 앞선 판이 있었습니다. 1차 대전이 시작된 1914년부터 독일은 상선을 노린 U보트 작전을 폈고, 1917년에는 영국을 거의 무릎 꿇릴 뻔했습니다. 1915년 2월 4일 독일은 영국 둘레를 전쟁 구역으로 선포하고 그 안의 상선을 경고 없이 가라앉혔습니다. 이 무제한 잠수함전을 그해 9월 1일 그만두었다가 1917년 2월 1일 다시 시작했습니다.

다시 시작한 봉쇄는 거의 성공할 뻔했습니다. 1917년 2월부터 4월까지 U보트가 가라앉힌 상선은 500척이 넘었습니다. 영국의 대응책은 느리게 왔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상선을 묶어 군함이 지키는 호송 선단이었습니다.

교훈이 그대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NHHC)의 개관 글은 1차 대전 때처럼 2차 대전에서도 일부 해군 지도자가 잠수함 위협에 늦게 반응했다고 적습니다. 1917~18년에 호송 선단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이 드러났는데도, 1942년 초 미국 당국은 몇 달을 기다린 뒤에야 이 방식을 요구했습니다.

1939~1941년: 첫 선단과 '행복한 시절'

전쟁은 첫날부터 바다에서 시작됐습니다. 1939년 9월 3일 영국 여객선 아테니아(Athenia)가 대서양에서 U보트에 격침된 첫 연합국 배가 되었습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무너지자 사정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U보트는 프랑스 대서양 해안에 기지를 얻어 더 멀리 나가고 바다에 더 오래 머물 수 있었습니다. 독일 해군 지휘관들은 뒤에 1940년 7~9월을 '행복한 시절(happy time)'이라 불렀고, 큰 손실은 1941년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U보트가 무리를 지어 다니는 '늑대 떼(wolf pack)'도 이 무렵 나타났습니다. 캐나다 보훈부는 1940년 9월 처음으로 여러 척이 밤에 북미에서 영국으로 가는 선단을 함께 공격했고, 한 선단의 화물선 가운데 20%까지 가라앉았다고 적습니다. IWM은 1941년 봄 U보트 생산이 늘어 무리를 꾸릴 만큼 잠수함이 생겼다고 적어, 시기에 대한 설명이 조금 다릅니다.

1941년 봄 영국은 대서양 위기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상선이 수백 척씩 가라앉았고, 그대로라면 한 해 안에 상선대의 4분의 1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IWM 영상 해설로는 영국이 한 해에 지을 수 있는 배가 125만 톤뿐인데, 1941년 3~4월의 손실이 이어지면 그해 끝까지 730만 톤을 잃을 판이었습니다.

이름도 이 무렵 붙었습니다. 처칠(Winston Churchill)은 1941년 3월 6일 '대서양 전투'라는 말을 만들었습니다. 영국 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을 일부러 떠올리게 해 이 싸움의 무게를 강조한 이름이었습니다.

5월에는 독일 전함 비스마르크(Bismarck)를 잃으면서 수상함 습격이 끝났습니다. 연합국은 호송 선단을 대서양 전체로 넓혔습니다. 정보의 성과로 선단을 위험에서 비켜 가게 하자 손실이 마침내 줄었습니다.

아직 참전하지 않은 미국도 영국을 도왔습니다. 1940년 8월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는 서반구의 영국 기지를 쓰는 대가로 낡은 구축함을 '빌려' 주었습니다. 1941년 3월에는 영국이 장비와 물자를 먼저 받고 나중에 갚을 수 있게 하는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이 통과됐습니다. 그해 10월 31일 미 해군 구축함 루벤 제임스(Reuben James)가 U-552에 격침됐는데, 2차 대전에서 적의 공격으로 잃은 첫 미 해군 함정입니다.

캐나다 해군의 몫도 커졌습니다. 1941년 5월 31일 레너드 머리(Leonard Murray) 준장이 뉴펀들랜드 호위대(Newfoundland Escort Force)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캐나다 함대에 더해진 새 배 가운데 가장 이름난 것이 코르벳(corvette)입니다. 본래 연안 초계용이었지만 다른 배가 없어서 대서양 횡단에 나섰고, 승조원 약 60명이 지내기에는 견디기 힘들 만큼 붐볐습니다.

하늘에는 아직 빈 곳이 있었습니다. 이 무렵 항공기는 대서양 한가운데까지 닿지 못했습니다. U보트가 큰 손실을 입히던 그 바다는 '검은 구덩이(Black Pit)'로 불렸습니다.

1942년: 미국 앞바다와 대서양 한가운데의 구멍

1941년 12월 미국이 참전한 뒤, 이듬해 1월 대서양 전투의 무대는 캐나다와 미국 해안으로 옮겨 갔습니다. U보트는 1942년 1월 12일 증기선 사이클롭스(Cyclops)를 가라앉히며 미국 동부 해안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이른바 드럼비트(Drumbeat) 작전입니다.

미 해군은 독일의 맹공에 준비가 덜 되어 있었습니다. 유조선과 상선은 흔히 홀로 다녔고, 밤에는 해안 도시의 불빛 앞에 배의 윤곽이 드러났습니다. 해안을 지키면서 선단까지 호위할 구축함과 구잠정도 모자랐습니다.

U보트에게 이 몇 달은 '두 번째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연합국에는 진주만 공격보다 많은 목숨과 훨씬 많은 배를 잃은, 재앙에 가까운 몇 달이었습니다. 5월부터 미국 앞바다의 상선이 선단으로 다니기 시작하자 U보트는 멕시코만과 카리브해로 옮겨 갔습니다.

그 뒤 늑대 떼는 다시 대서양 한가운데로 돌아왔습니다. 1942년 가을 되니츠는 300척 가까운 잠수함을 쓸 수 있었는데, 개전 때의 열 배가 넘는 수였습니다. 연합국이 한동안 독일 신호를 읽지 못하면서, 1942년 말 연합국 해운은 위기에 빠졌습니다.

신호가 읽히지 않은 데는 사정이 있었습니다. 1942년 2월 독일 해군은 암호 기계 에니그마(Enigma)에 넷째 회전자를 더했습니다. 에니그마를 읽지 못하게 된 탓도 있어 1942년 하반기 대서양 선단 손실이 1941년 같은 기간의 세 배였다고 적습니다.

반대쪽 사정도 비슷했습니다. 독일 해군의 무선 정보·암호 해독 조직 B-Dienst는 1941년부터 1943년 대부분까지 영국의 선단 암호를 작전에 쓸 만큼 빨리 읽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이 사실을 몰랐고, 1943년 6월에야 선단 항로 암호를 바꾸었습니다.

호송 선단과 대서양 한가운데의 공중 엄호 빈틈을 그린 개념 도표. 왼쪽 칸에는 영국 전쟁박물관(IWM)이 설명한 선단 모양이 있다. 회색 상선이 세로 줄 여덟 개에 다섯 척씩 서서 점선 네모를 이루고, 파란 호위함 여덟 척이 그 둘레에 있으며, 나아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있다. 아래에 여러 줄, 한 줄에 다섯 척까지, 모두 60척까지의 큰 네모이고 둘레에 호위함이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른쪽 칸에는 북미와 영국 사이 바다를 띠로 그렸다. 위 띠는 '전쟁 초기'로 양쪽 끝만 항공기가 닿고 가운데가 검은 '공중 엄호 없음' 구간이며, 육상 항공기가 가운데에 닿지 못해 '검은 구덩이' 또는 대서양 중앙 빈틈이라 불렸다는 설명이 있다. 아래 띠는 '1943년 5월까지'로 끝에서 끝까지 항공기가 닿고, 초장거리 리버레이터와 늘어난 기지, 호위 항공모함이 거의 끊이지 않는 공중 엄호를 주었다는 설명이 있다. 맨 아래 상자는 대서양이 1억 제곱킬로미터가 넘어 그 넓은 바다에서 선단은 표적 수가 줄어 배 한 척보다 찾기 어려웠고 공격하는 U보트는 호위함의 공격을 받을 수 있었다는 IWM의 설명이다. 실제 지도·해안선·항로·거리가 아니고 축척도 없다는 메모가 있다
선단의 모양과, 항공기가 닿지 못한 대서양 한가운데. 지도가 아니라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1943년 5월: 흐름이 바뀌다

정점은 1943년 3월이었습니다. 그달 U보트가 가라앉힌 연합국 배는 567,000톤이었고, 3월의 어느 열흘 사이에만 상선 40척이 가라앉았습니다. 이 숫자는 NHHC 사령부장의 글에 나오며, 캐나다 보훈부는 같은 달을 108척, 569,000톤으로 적습니다.

그런데 두 달 뒤 흐름이 뒤집혔습니다. 1943년 5월 24일 되니츠는 U보트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IWM 영상 해설은 이 '검은 5월(Black May)'에 U보트 34척이 가라앉았다고 설명합니다.

무엇이 바꿨을까요? NHHC 사령부장은 1943년 5월의 전환에는 많은 요인이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를 결정적 요인이라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고 적습니다. 첫째로 꼽는 것은 항공력입니다. 대서양 둘레의 기지와 늘어난 호위 항공모함에서 더 많은 장거리 항공기가 떴고, 초장거리형으로 바꾼 B-24 리버레이터(Liberator)가 대서양 한가운데의 빈틈을 메웠습니다.

배를 짓는 숫자와 잃는 숫자도 자리를 바꿨습니다. 1943년 5월에 이르러 미국 조선소는 독일이 가라앉힐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배를 만들었고, 독일은 조선소가 메울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잠수함을 잃었습니다. 되니츠의 철수 명령은 이 변화에서 나왔습니다.

정보 쪽의 그림은 기관마다 강조가 다릅니다. NHHC 사령부장은 5월의 전환점에서 U보트에 대한 연합국 정보 능력이 전쟁 전체에서 가장 약했고, 다른 여러 요인과 기술이 같은 때에 무르익었다고 봅니다. IWM 영상 해설은 연합국이 1942년 말 에니그마 암호를 깨 선단을 늑대 떼에서 비켜 가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IWM은 항공모함, 초장거리 항공기, 바다를 돌아다니는 군함 '지원단(support group)'이 들어오면서 1943년 5월 말 마침내 U보트를 꺾었다고 짧게 정리합니다.

그래도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되니츠에게는 여전히 200척 넘는 잠수함이 있었습니다. 독일은 1943년 가을까지 대서양 잠수함 작전을 본격적으로 다시 하지 않았고, 그 뒤로는 거의 늘 수세였습니다.

스노클을 단 U보트는 영국과 캐나다 연안에서 전쟁 끝까지 공세를 이어 갔습니다. 캐나다 소해함 에스퀴몰트(HMCS Esquimalt)는 독일이 항복하기 3주 전인 1945년 4월 16일 핼리팩스 앞바다에서 가라앉았습니다.

1939~1945년 대서양 전투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1939년 9월 2일 첫 대서양 선단 출발(IWM), 9월 3일 여객선 아테니아가 대서양에서 U보트에 격침된 첫 연합국 배가 됨, 9월 16일 HX-1 선단이 핼리팩스를 떠남(캐나다 전쟁박물관), 1940년 6월 프랑스 함락으로 U보트가 대서양 해안 기지를 얻음, 7~9월 독일 지휘관들이 뒤에 '행복한 시절'이라 부른 때, 8월 미국이 기지를 쓰는 대가로 낡은 구축함을 빌려줌, 1941년 3월 6일 처칠이 '대서양 전투'라는 말을 만듦, 3월 미국 무기대여법 통과, 5월 비스마르크를 잃고 선단이 대서양 전체로 넓어짐, 10월 31일 미국이 정식 참전하기 전 루벤 제임스 격침, 1942년 1월 12일 미국 동부 해안 앞바다에 U보트가 나타남(드럼비트), 2월 독일 해군이 에니그마에 넷째 회전자를 더함, 5월 미국 앞바다 상선이 선단으로 다니기 시작, 6월 IWM 학예사 설명으로 연합국에 가장 나쁜 달, 1943년 3월 선단 격전의 정점, 5월 초장거리 리버레이터가 대서양 중앙의 공중 빈틈을 메움, 5월 20일 미 제10함대 공식 출범, 5월 24일 되니츠가 U보트 철수를 명령('검은 5월'),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과 영국으로 가는 바닷길, 1945년 4월 16일 항복 3주 전 캐나다 소해함 에스퀴몰트가 핼리팩스 앞바다에서 격침. 파란 점은 연합국의 조치, 주황 점은 U보트 공격과 독일의 조치, 회색 점은 이름과 전환점이다. 날짜는 IWM, NHHC, 캐나다 보훈부, 캐나다 전쟁박물관이 적은 것만 옮겼고 줄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메모가 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흐름. 날짜는 IWM, NHHC, 캐나다 보훈부, 캐나다 전쟁박물관이 적은 것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소리, 전파, 암호, 조선소

대서양 전투는 기술을 두고 벌인 경주이기도 했습니다. 물속의 잠수함을 찾는 연합국의 대표 장비는 애즈딕(Asdic)이었습니다. 뒤에 소나(sonar)라고 불린 이 장비는 음파로 물속의 잠수함을 찾았습니다.

다만 애즈딕은 잘 훈련된 운용자가 있어야 제대로 쓸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U보트가 밤에 물 위에서 공격하면 이 장비가 쓸모가 없었습니다. U보트가 물 위로 자주 올라온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디젤-전기 기관으로 움직인 U보트는 디젤 기관에 공기를 넣으려 오래 물 위에 있어야 했고, 물속에서는 전지로 움직였지만 멀리 가지 못했습니다.

그 물 위의 시간을 노린 것이 항공기였습니다. 항공기 레이다를 점점 더 갖춘 대잠 항공기는 U보트가 전지를 채우려 즐겨 떠오르던 밤에도 공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답 가운데 하나가 스노클(schnorkel)입니다. 스노클 덕에 U보트는 물속에서 전지를 채우며 열흘까지 잠겨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전파는 다른 방식으로도 쓰였습니다. 독일은 자기 암호가 안전하다고 믿어 무전을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연합국이 내용을 읽지 못할 때에도 통신 분석과 무선 방향 탐지가 단서가 되었습니다. 영국이 앞장서 배와 항공기에 고주파 방향 탐지(high frequency direction finding, HF/DF)를 서둘러 갖췄습니다.

한쪽이 새 무기를 내면 다른 쪽이 답했습니다. 독일이 배의 추진기 소리를 따라가는 음향 유도(acoustic homing) 어뢰를 만들자, 연합국 과학자들은 17일 만에 배 뒤에 끄는 소음 장치를 내놓아 어뢰를 엉뚱한 곳으로 이끌었습니다.

하늘의 빈틈은 배로도 메웠습니다. 상선 선체로 흔히 지은 호위 항공모함(escort carrier)은 큰 항공모함보다 느리고 비행기를 적게 실었습니다. 대신 싸고 빨리 지을 수 있어, 느린 상선 선단에 끊이지 않는 공중 엄호를 주기에 알맞았습니다. 유조선이나 곡물선에 비행갑판을 얹은 상선 항공모함(Merchant Aircraft Carrier, MAC)도 있었습니다.

조선소도 싸움터였습니다. 연합국 조선소의 성과는 흐름이 바뀐 중요한 까닭의 하나였습니다. 1943년 중반에는 U보트가 아무리 많은 배를 가라앉혀도 새 배를 짓는 속도를 앞지를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조직도 바뀌었습니다. 1943년 5월 20일 공식 출범한 미 제10함대(Tenth Fleet)는 배가 한 척도 없는 함대로, 대서양에서 미 해군의 대잠전을 맡았습니다. 민간 과학자들이 호송과 대잠 임무에 함께 나가 수병과 조종사를 지켜보고 교전 통계를 모아 분석했습니다. 그 무렵 하루 평균 바다에 나가 있던 U보트는 1943년 5월 108척에서 8월 51척으로 줄었는데, 대서양과 인도양을 함께 센 숫자입니다.

숫자 읽기

대서양 전투의 숫자는 그대로 옮기기 어렵습니다. NHHC 사령부장도 자료마다 세는 기준이 달라 대서양 전투의 통계는 가려 들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그래서 아래 도표는 숫자를 자료별로 나눠 두었습니다.

대서양 전투의 숫자를 자료별로 나눠 놓은 도표. 첫 블록은 1939~1945년 전체(미 해군 역사유산사령부, NHHC)로, 가라앉은 연합국 상선 3,500척(1,450만 총톤), 연합국 군함 175척, 독일이 잃은 U보트 783척을 같은 축척의 막대로 그렸다. 그 아래 글로 연합국 해군·상선 선원 72,200명, 독일 잠수함 승조원 약 3만 명(4만 명 부대의 4분의 3)이 숨졌고, IWM은 독일 잠수함 승조원 다섯에 셋이 죽었다고 적었다. 둘째 블록은 1942년 북미 앞바다에서 가라앉은 배를 네 자료가 서로 다른 기간·범위로 센 것으로, IWM 영상 1~8월 868척(310만 톤), IWM 글 '1942년 초' 미국 동부 해안 호위 없는 배 500척 가까이, 캐나다 보훈부 1~7월 400척 가까이, NHHC 1~4월 동부 해안 80척 넘게와 버뮤다 북쪽 55척이다. 같은 시기 잃은 U보트는 42척(IWM 영상, 1~8월) 또는 7척(캐나다 보훈부, 1~7월)이다. NHHC 막대는 두 숫자를 더한 135로 그렸다는 메모가 있다. 셋째 블록은 1943년 3월의 정점으로 NHHC 사령부장 글 567,000톤, 캐나다 보훈부 108척·569,000톤, NHHC 제10함대 글 대서양과 북극해 상선 95척이며, 통계는 자료마다 세는 기준이 달라 가려 들어야 한다는 NHHC의 말이 붙어 있다. 넷째 블록은 캐나다의 두 공식 숫자로, 가라앉히거나 함께 가라앉힌 U보트 약 50척(캐나다 보훈부)과 31척(캐나다 전쟁박물관, 해군만), 전쟁 끝의 해군 인원 11만 명 넘게(보훈부)와 9만 5천 명 넘게(전쟁박물관)이다. 파랑은 연합국 배, 주황은 독일 U보트이고, 블록마다 축척이 다르며 다른 기간과 바다를 더하지 않았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싸움, 다른 숫자. 자료마다 세는 기간과 범위가 달라 자료별로 나눠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전체 규모부터 봅니다. NHHC 집계로 1939~1945년 연합국 상선 3,500척(1,450만 총톤)과 군함 175척이 가라앉았고, 연합국 해군·상선 선원 72,2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독일은 U보트 783척과 약 3만 명을 잃었는데, 4만 명이던 잠수함 부대의 4분의 3입니다. IWM 영상 해설로는 독일 잠수함 승조원 다섯 명 가운데 셋이 죽었습니다.

같은 1942년 북미 앞바다를 두고도 숫자가 넷입니다. IWM 글은 1942년 초 미국 동부 해안 앞바다에서 호위 없는 배 500척 가까이를, IWM 영상은 1~8월 868척(310만 톤)을 적습니다. 캐나다 보훈부는 1~7월 400척 가까이, NHHC 개관 글은 1~4월 동부 해안 앞바다 80척 넘게와 버뮤다 북쪽 55척을 적습니다. 기간과 바다의 범위가 서로 달라 하나로 더할 수 없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이 잃은 U보트도 42척(IWM 영상, 1~8월)과 7척(캐나다 보훈부, 1~7월)으로 갈립니다. 1943년 3월의 손실 역시 세는 단위가 다릅니다. NHHC 사령부장은 톤수로, 캐나다 보훈부는 척수와 톤수로, NHHC 제10함대 글은 대서양과 북극해의 상선 95척으로 적습니다.

캐나다 숫자도 기관마다 다릅니다. 캐나다 군함과 항공기가 가라앉히거나 함께 가라앉힌 U보트는 캐나다 보훈부 쪽에서 약 50척이고, 해군만 센 캐나다 전쟁박물관(Canadian War Museum) 쪽에서 31척입니다. 전쟁 끝의 캐나다 해군 인원도 보훈부는 11만 명 넘게, 전쟁박물관은 9만 5천 명 넘게로 적습니다.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캐나다 해군에서는 약 2,000명이 숨졌고 대부분이 대서양 전투에서였습니다. 캐나다 상선 선원의 사상률은 일곱에 하나로 캐나다의 어느 군보다 높았고, 약 1,500명이 숨졌습니다. 보훈부의 상선대 추모록에는 1,600명 가까운 이름이 올라 있어, 같은 기관 안에서도 세는 범위에 따라 숫자가 다릅니다.

남긴 것

1943년 여름에 열린 바닷길은 육지의 싸움으로 이어졌습니다. IWM 학예사는 영국과 북미 사이 바닷길이 열린 것이 노르망디 상륙과 그 뒤 2년의 유럽 해방에 결정적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상륙은 1944년 6월 6일에 있었고, 캐나다 해군도 좋은 호위함들을 영국 해협으로 보냈습니다.

1943년 중반 흐름이 바뀌자 연합국은 유럽의 지상 작전을 더 자신 있게 계획할 수 있었습니다. 6년 동안의 싸움은 결국 물자를 나르는 길, 곧 군수(logistics)의 길을 두고 벌어졌습니다.

독일의 새 잠수함은 너무 늦었습니다. 1945년 독일 해군은 완전히 물속에서 다니도록 만든 XXI형 '전기 잠수함(Electro-boat)'을 내놓았지만, IWM 학예사는 너무 적고 너무 늦었다고 평가합니다.

교훈도 남았습니다. 소나와 레이다 같은 기술은 승조원이 충분히 훈련한 뒤에야 호위함에 유리함을 주었습니다. 상선을 지키는 '방어'와 잠수함을 찾아 치는 '공격' 가운데 무엇을 앞세울지 다툼도 있었지만, 둘 다 같은 전략 목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과학자와 군인이 함께 통계를 보며 방법을 고친 경험은 뒤에 미 해군 작전 연구(operational research)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기억도 남았습니다. 핼리팩스 포인트 플레전트 공원의 기념비에는 두 세계대전에서 바다에 묻힌 캐나다 남녀 3,257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에는 이들의 무덤은 알 수 없지만 기억은 이어질 것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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