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2월 16일 새벽 5시 30분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걸친 아르덴 숲의 미군 진지에 독일군의 공격이 쏟아졌습니다. 안개 낀 겨울 아침이었습니다. 그곳은 경험이 없거나 싸움에 지친 미군 사단들이 쉬면서 경험을 쌓던 자리였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뒤 연합군은 빠르게 나아갔고, 전쟁은 거의 끝난 듯 보였습니다. 그런 때 독일은 왜 남은 힘을 숲속 공세에 쏟았을까요? 그 공세는 어디까지 갔고 왜 멈췄을까요? 미 육군, 영국 전쟁박물관(IWM),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기록으로 41일 동안의 싸움을 따라가 봅니다.

끝나 가는 듯했던 1944년 겨울

디데이 뒤 연합군은 유럽을 빠르게 가로질렀습니다. 파리와 프랑스 대부분이 해방됐습니다. 너무 빨리 나아가 보급선보다 앞서 버리는 바람에 멈춰 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연합군은 독일 본토를 향해 세게 밀고 나갔습니다. 북쪽은 캐나다군과 영국군이, 남쪽은 미군이 굳게 지켰습니다. 그 사이의 아르덴에는 얇고 약한 전선만 있었습니다. 미군 지휘관들은 숲이 독일의 공세를 막아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이 구간은 숲이 빽빽하고 길이 적은 곳이었습니다. 미 육군 군사사 센터(CMH)의 설명으로는 경험이 없거나 싸움에 지친 미군 4개 사단이 쉬면서 경험을 쌓으려고 여기 머물렀습니다. 전선의 길이는 이 글이 참고한 자료에 따라 75마일과 80마일로 조금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안트베르펜을 향한 계획

공세를 정한 사람은 히틀러였습니다. 장군들이 반대했고, 영국 전쟁박물관은 그 장군들조차 성공을 믿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히틀러는 밀리고 있던 동쪽의 러시아 전선까지 포함해 여러 전선에서 사람과 무기를 끌어왔습니다.

목표는 벨기에의 항구 안트베르펜이었습니다. 얇은 전선을 뚫고 뫼즈(Meuse)강을 건너 그 항구까지 가면, 영국 해협 쪽으로 밀고 나가 연합군을 둘로 가를 수 있다고 봤습니다. 1940년 5월 연합군을 갈랐던 일을 다시 해 보려는 셈이었습니다.

작전 이름은 가을 안개(Herbstnebel)였습니다. 흔히 라인강의 파수꾼(Wacht am Rhein)으로 불리지만, 국립문서보관소의 한 기록 담당자는 이 이름이 정확하지 않다고 적습니다. 모두 24개쯤의 독일 사단이 이 공세에 들어갔습니다.

공격은 세 갈래였습니다. 북쪽의 제6 SS 기갑군과 가운데의 제5 기갑군이 주 공격을 맡았습니다. 보병이 주력인 제7군은 남쪽에서 연합군 전선을 쳐서 두 기갑군의 옆을 가렸습니다.

벌지 전투를 설명하는 개념 도표. 위가 북쪽, 왼쪽이 서쪽이다. 오른쪽에 세로로 연합군 전선이 있고 북쪽 끝은 영국·캐나다군, 남쪽은 미군이며 가운데 아르덴 구간은 얇은 선으로 '미군 4개 사단, 75~80마일'이라고 적혀 있다. 독일 쪽(오른쪽)에서 제6 SS 기갑군(북쪽), 제5 기갑군(가운데), 제7군(남쪽, 옆을 가림)의 세 화살표가 서쪽으로 나와 전선이 왼쪽으로 불룩하게 밀린다. 불룩한 곳 안에 생비트와 바스토뉴 교차로 점이 있다. 왼쪽 끝에 세로로 뫼즈강이 있고 불룩한 끝은 12월 24일 뫼즈강이 보이는 곳에서 멈춘다. 뫼즈강 너머 북서쪽으로 독일의 목표 안트베르펜으로 가는 점선 화살표가 있다. 지도가 아니며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얇은 전선이 서쪽으로 불룩하게 밀렸지만 뫼즈강을 넘지 못했습니다. 기관 자료의 설명을 선과 화살표로만 줄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12월 16일 새벽

그날 아침 공격에 나선 독일군은 20만 명이 넘었고 전차는 1,000대 가까이였습니다. 완전한 기습이었습니다. 독일군은 미군 전선의 한가운데를 서쪽으로 밀고 나갔고, 그렇게 생긴 불룩한 모양이 전투의 이름이 됐습니다.

하루의 격전 끝에 미군 전선이 뚫렸습니다. 독일군은 보병 1개 사단 대부분을 에워쌌고, 중요한 교차로를 잡고, 앞선 부대를 뫼즈강 쪽으로 밀었습니다.

뒤쪽에는 두려운 이야기가 먼저 퍼졌습니다. 낙하산병이 전선 뒤에 내렸다는 이야기, 미군 군복을 입고 영어를 하는 독일군이 다리를 잡고 통신선을 끊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벨기에 마을 사람들은 연합국 깃발을 치웠고, 파리 경찰은 밤새 통행금지를 했습니다.

병사들은 저마다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숨어든 적을 가리려고 미국 사람만 알 만한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교차로 두 곳: 생비트와 바스토뉴

길이 적은 숲에서는 길이 만나는 곳 하나하나가 중요했습니다. 독일의 진격을 늦춘 것은 빨리 도착한 증원군과, 생비트(St. Vith)와 바스토뉴(Bastogne)의 도로 교차점을 끈질기게 지킨 미군이었습니다.

바스토뉴에는 12월 18일 미 제10기갑사단 B전투단이, 이튿날 제101공수사단이 들어왔습니다. 그 뒤 독일 제5 기갑군 일부가 마을을 에워쌌습니다.

B전투단을 이끈 로버츠(Roberts) 대령은 1945년 2월의 기록에서, 101공수사단도 기갑 부대도 혼자서는 바스토뉴를 지키지 못했겠지만 함께해서 힘이 세 배가 됐다고 적었습니다. 그가 말한 '함께'에는 제705대전차대대도 들어 있었습니다.

12월 22일 독일군이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101공수사단의 지휘를 대신 맡고 있던 앤서니 매콜리프(Anthony McAuliffe) 준장의 답은 한 낱말, "Nuts!"였습니다. 독일 장교들은 이 답을 더 거칠고 단호한 거절로 받아들였습니다.

북쪽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6 SS 기갑군의 파이퍼 전투단은 12월 19일까지 30마일 가까이 서쪽의 스투몽(Stoumont)까지 나아갔습니다. 그 길에 말메디(Malmedy) 부근에서 항복한 미군 제285야전포병관측대대 B포대 병사들이 학살됐습니다.

숫자는 자료에 따라 다릅니다. 국립문서보관소의 글은 포로 130명이 학살됐다고 쓰고, 국립 2차 대전 박물관(National WWII Museum)의 전시 소개는 120명 넘는 사람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이 43명뿐이었다고 씁니다.

포로와 벨기에 민간인에 대한 전쟁 범죄는 미군의 저항을 오히려 굳게 했습니다. 1946년에는 디트리히(Sepp Dietrich), 파이퍼(Joachim Peiper)를 비롯한 무장친위대 고위 장교들이 '말메디 재판'의 피고석에 섰습니다. 그 재판 기록은 지금 국립문서보관소에 있습니다.

길, 연료, 날씨, 하늘

이 싸움에서는 전차와 대포 말고도 길, 연료, 날씨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 공세에는 독일이 갖지 못한 사람과 자원이 필요했습니다.

연료가 대표적입니다. 독일 전차는 연료에 굶주려 있었고, 나쁜 날씨가 보급선을 흐트러뜨리면서 연료 부족은 더 심해졌습니다. 미군 병사들은 중요한 휘발유 더미를 옮기거나 태워 독일 전차가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날씨는 하늘도 묶었습니다. 처음에는 나쁜 날씨가 연합군의 항공 지원을 막았습니다. 그러다 12월 23일 날씨가 갰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가 옮긴 당시 미 제5군단 구역의 기록은 이 '운명적인 날씨 변화' 덕분에 연합군 항공기가 독일의 수송과 병력을 크게 쳐서 싸울 힘을 떨어뜨렸다고 적습니다.

갇힌 바스토뉴에는 하늘로 물자가 들어갔습니다. 글라이더가 실어 온 보급품과 탄약을 미군이 거두는 사진이 남아 있습니다. 눈 덮인 들판에서 흰 침대보를 둘러 몸을 가린 미군 정찰병을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독일 공군도 한 번 크게 나섰습니다. 1945년 1월 1일 북서유럽의 연합군 비행장을 쳐서 큰 피해를 줬습니다. 그러나 이때 잃은 것은 끝내 되찾지 못했습니다.

벌지 전투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1944년 12월 16일 오전 5시 30분쯤 독일 공세 시작(크게 표시), 12월 17일 말메디 부근에서 미군 포로 학살, 12월 18일 미 제10기갑사단 B전투단 바스토뉴 도착, 12월 19일 제101공수사단 바스토뉴 도착과 파이퍼 전투단이 30마일 가까이 서쪽 스투몽까지 나감, 12월 22일 바스토뉴에 항복 요구와 'Nuts!'라는 답, 12월 23일 날씨가 개어 연합군 항공기가 다시 뜸(크게 표시), 12월 24일 독일군이 가장 서쪽 포이노트르담에서 뫼즈강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가 미 제2기갑사단에 막힘, 12월 26일 패튼의 제3군이 바스토뉴 구원(크게 표시), 1945년 1월 1일 독일 공군이 연합군 비행장 공격, 1월 초 연합군 반격, 1월 25일 전선이 이전 위치로 돌아감(크게 표시). 점의 색으로 독일군 행동, 연합군 행동, 중요한 날을 나눈다
1944년 12월 16일부터 1945년 1월 25일까지, 약 41일.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뫼즈강 앞에서 멈추다

독일군이 가장 서쪽까지 간 날은 12월 24일이었습니다. 제5 기갑군의 제2기갑사단이 포이노트르담(Foy-Notre Dame) 마을에서 뫼즈강이 보이는 곳까지 왔지만, 미 제2기갑사단이 이를 물리쳤습니다. 북쪽과 가운데, 남쪽의 진격 모두 뫼즈강에 한참 못 미쳐 멈췄습니다.

남쪽에서는 패튼(George S. Patton Jr.)의 미 제3군이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독일군의 옆구리를 쳤습니다. 그때 제3군은 약 23만 명이었습니다. 북쪽의 미군은 잠시 영국의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 원수가 지휘를 맡아 방어와 반격을 맞췄습니다.

12월 26일 제3군 부대가 독일 전선을 뚫고 바스토뉴에 닿았습니다.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대인 제761전차대대가 바스토뉴 포위를 푸는 데 한 역할도 전시로 전합니다.

1월 내내 미군은 깊은 눈더미를 헤치며 줄어드는 불룩한 곳의 양옆을 쳤습니다. 독일군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서 밀려났고, 1월 25일 연합군은 전선을 이전 자리로 되돌렸습니다. 12월 16일부터 이날까지 약 41일이 걸린 싸움이었습니다.

숲속 마을의 민간인

전투의 기록은 대개 군인의 사상자를 자세히 적습니다. 같은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민간인은 대부분의 기록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켄터키 대학 출판부는 Peter Schrijvers의 책 『The Unknown Dead』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현재 가장 믿을 만한 추정으로 6주 동안 아르덴에서 숨진 민간인은 약 3천 명입니다. 희생의 한쪽에는 전선의 독일 부대와 후방의 나치 보안 기관이 저지른 전쟁 범죄가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작은 마을에 쏟아진 대규모 폭격처럼, 적에 맞선 연합군의 대응이 낳은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

싸움이 끝나도 어려움은 남았습니다. 무너진 마을을 다시 세워야 했고, 버려진 지뢰와 폭발물도 큰 문제였습니다.

자료마다 다른 숫자

사상자 수는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같은 전투를 두고 자료마다 다른 값을 적습니다.

  • 미 국립문서보관소의 잡지 Prologue(2014)는 군사사 센터의 숫자를 옮겨 미군 사상자 75,000명, 전사 19,276명이라고 적습니다. 오키나와, 과달카날, 이오지마를 포함해 이 전쟁의 어느 전투보다 많은 미군 전사자입니다.
  • 2004년 60주년 대통령 포고문은 미군 60만 명 넘게가 싸웠고, 미군 사상자는 81,000명, 그 가운데 약 19,00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적었습니다.
  • 국립문서보관소의 2024년 12월 16일 기록 블로그는 미군 사상자 대략 8만 명, 전사 2만 명 가까이, 포로 23,000명 넘게라고 씁니다.
  • 같은 블로그의 12월 19일 글은 5주 동안 연합군(대부분 미군) 8만 명 넘게가 죽거나 다치거나 포로가 됐다고 씁니다.

독일 쪽 숫자는 폭이 더 넓습니다. Prologue가 옮긴 군사사 센터의 숫자는 80,000~100,000명이고, 12월 19일 글은 80,000명에서 125,000명 넘게까지라고 적습니다. 참가 병력도 미 육군 특집 쪽은 연합군 70만 명 넘게, 포고문은 미군 60만 명 넘게로 셉니다.

비중으로 보면 무게가 더 잘 보입니다. 미 국립공원청은 전쟁 동안 미군 사상자 열 명 가운데 한 명 가까이가 한 달 동안의 이 전투에서 나왔다고 적습니다.

자료별 사상자 숫자를 견주는 가로 막대 도표. 단위는 천 명. 위는 미군 쪽이다. 미 국립문서보관소 Prologue(미 육군 군사사 센터를 옮김) 사상자 75, 그 가운데 전사 19.276. 2004년 대통령 포고문 사상자 81, 전사 약 19. 미 국립문서보관소 기록 블로그(2024년 12월 16일) 사상자 약 80, 전사 20 가까이, 포로 23 넘게. 미 국립문서보관소 기록 블로그(2024년 12월 19일) 연합군, 대부분 미군, 80 넘게. 아래는 독일 쪽이다. Prologue(군사사 센터) 80~100의 범위 막대, 2024년 12월 19일 블로그 80에서 125 넘게의 범위 막대. 짙은 막대는 사상자 전체, 주황은 전사, 연한 색은 포로, 줄무늬 막대는 범위다. 맨 아래에 이 전투가 2차 대전 미군 전투 사상자의 약 10%(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옮긴 국립 2차 대전 박물관의 말), 열 명 가운데 한 명 가까이(미 국립공원청)라는 문장과 민간인 약 3천 명(켄터키 대학 출판부 책 소개, 현재 가장 믿을 만한 추정)이라는 문장이 있다
같은 전투를 세는 숫자가 자료마다 다릅니다. 자료에 적힌 값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여러 이름과 남은 평가

이 전투에는 이름이 여럿입니다. 독일은 "라인강의 파수꾼 작전", 프랑스는 "아르덴 전투", 서방 연합국은 "아르덴 반격"이라고 불렀습니다. 전투가 한창일 때 지도 위의 전선이 불룩하게 튀어나와 보여서 역사에는 "벌지(불룩한 곳) 전투"로 남았습니다.

결과는 분명했습니다. 연합군은 손실을 메울 수 있었지만 독일은 사람과 물자를 바닥냈습니다. 히틀러는 다시는 서부에서 이만한 규모의 공세를 열지 못했고, 연합군은 초봄에 독일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평가의 말은 누가 했는지 함께 봐야 합니다. 영국 총리 처칠은 이 전투를 "틀림없이 이 전쟁에서 가장 큰 미국의 전투"라고 했습니다. 미 육군 특집 쪽은 참가 인원과 손실로 보면 미국 군사사에서 가장 큰 전투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적고, Prologue는 연합국 쪽으로 기운 중요한 전환점이자 2차 대전에서 가장 피를 많이 흘린 전투의 하나로 봅니다.

기록 속 장면을 볼 때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무장친위대 선전 부대가 찍은 '포토(Poteau) 매복' 영상은 유명하지만, 국립문서보관소의 설명으로는 카메라 앞에서 다시 꾸며 찍은 장면이었습니다. 미군이 이 필름을 독일에서 현상되기 전에 거뒀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에는 독일 포로의 진술, 정보 보고, 전쟁 범죄의 세부까지 담긴 아르덴 전역 기록이 남아 있고, 연구자는 국립문서보관소 목록에서 이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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