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8월 22일, 벨기에 하늘을 날던 영국 비행기 한 대가 땅에서 쏜 소총에 맞아 떨어졌습니다. 탔던 두 사람이 죽었고, 이 아브로(Avro)는 영국이 싸움에서 잃은 첫 비행기로 기록되었습니다. 같은 날 영국 항공대는 정찰을 열두 번 나갔습니다. 그 가운데 한 번은 몽스(Mons)에 선 영국군의 왼쪽 옆구리를 독일군이 돌아 들어올 움직임을 보았습니다.
그해 여름 비행기가 싣고 다닌 것은 총보다 눈과 지도였습니다. 4년 뒤에는 전투기, 폭격기, 정찰기가 따로 있었고 한 전투에 1,500대 가까운 비행기가 모였습니다. 그 사이에 무엇이 바뀌었을까요?
정찰에서 시작해 전투기와 도시 공습, 독립 공군의 탄생까지 차례로 따라가 봅니다. 근거는 영국 공군 박물관(RAF Museum), 스미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NASM), 호주 전쟁기념관(AWM), 독일역사박물관(DHM), 미 공군의 공개 기록입니다. 숫자와 평가가 기관마다 다른 곳은 나란히 적습니다.
1914년, 하늘에서 본 전쟁
영국 항공대(Royal Flying Corps, RFC)는 1914년 8월 중순 비행대대 넷을 프랑스로 보냈습니다. 그때 대륙에 건너간 RFC는 장교 105명, 비행기 63대, 차량 95대였습니다. 독일 항공대는 1914년에 약 4,000명, 비행기 300대였습니다. 미 육군은 아직 전쟁 밖에 있었고, 장교 12명과 사병 54명, 비행기 6대의 제1비행대대가 전술 항공 전력의 전부였습니다.
첫 정찰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8월 19일 모뵈주(Maubeuge)에서 뜬 두 조종사는 모두 길을 잃어 적도, 찾던 벨기에군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튿날에야 테르뷰렌과 바브르 근처에서 독일군 행렬을 찾아내 첫 정찰에 성공했습니다.
9월 3일의 정찰은 더 큰 일로 이어졌습니다. RFC는 폰 클루크(von Kluck)의 독일 제1군이 행군 방향을 남동쪽과 동쪽으로 바꿨다고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받은 프랑스 총사령관 조프르(Joffre)는 마른(Marne) 전투로 이어진 반격을 명령했습니다. 그는 뒤에 영국 항공대가 이 움직임을 지켜보는 데 "중요한, 사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전쟁 첫해의 비행기는 무엇보다 지휘부의 눈이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처음에는 비행기를 공격 수단으로 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참호가 땅을 막아 기병이 예전처럼 정찰할 수 없게 되자, 비행기가 그 일을 넘겨받았습니다.
기구와 사진기, 무선
하늘에서 보는 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관측(observation)은 한 자리를 오래 지켜보는 일이고, 주로 중포의 포탄이 어디 떨어지는지 봅니다. 정찰(reconnaissance)은 적 함대나 전선으로 가는 부대처럼 무언가를 찾으러 나가는 일입니다.
오래 지켜보는 데는 땅에 줄로 맨 계류 기구가 알맞았습니다. 기구는 땅의 윈치에 매여 떴고, 바구니의 관측병은 포병에게 포탄이 맞았는지 알렸습니다. 높이는 같은 박물관 안에서도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NASM의 이야기 쪽은 보통 1,500피트, 바람이 센 날 1,000피트쯤이라고 하고, 전시 자료표는 표준 고도를 500 m로 적습니다.
기구 안의 수소는 잘 탔습니다. 적기는 소이탄으로 기구를 노렸고, 기구만 쫓는 조종사들이 따로 생겼습니다. 관측병은 불이 붙으면 뛰어내릴 수 있게 낙하산을 매고 올라갔습니다. 영국군은 1915년 5월 4일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연 모양의 기구(kite balloon)를 포병 관측에 썼습니다.
비행기 정찰은 처음에 말로 했습니다. 승무원이 땅에 내려와서 본 것을 보고하는 식이었습니다. 곧 2인승 비행기에 사진기를 든 관측병 자리가 생겼고, 2인승이 금세 표준이 되었습니다. 관측병은 바깥 공기 속, 흔히 얼어붙는 추위에서 사진기를 다뤘습니다.
1914년 9월 15일 엔(Aisne) 전투에서 항공 사진과 무선 전신이 처음으로 전투 중 포병 관측에 쓰였습니다.
9월 24일 공중 무선으로 포 사격을 이끈 두 장교의 기록은 "조금 짧음. 쏴! 쏴!"로 시작해, 40분 뒤 "이제 돌아간다"로 끝납니다.
말이 통하려면 같은 지도가 있어야 했습니다. 1914년 10월 RFC는 글자와 숫자로 된 격자 지도를 쓰기 시작해 적의 위치를 몇 야드 안으로 포병에게 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전 지도에는 공통 격자가 없었습니다. 곧 탄착을 빨리 바로잡는 "시계 부호(clock code)"도 나왔습니다.
1915년 3월 10일 뇌브샤펠(Neuve Chapelle) 공격은 전쟁사에서 처음으로 사진 정찰로만 만든 지도를 바탕으로 세운 공격이었습니다. NASM의 큐레이터는 비행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이런 정찰로 봅니다. 전투기는 적이 이 눈을 못 쓰게 하고 아군 정찰기를 지키려고 나중에 나왔다는 설명입니다.
프로펠러 너머로 쏘기
처음 하늘에서 마주친 조종사들이 바로 서로를 쏜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에 따르면 많은 조종사가 전쟁 전 국제 비행 대회에서 알던 사이였고, 상대를 떨어뜨리기보다 상대 기체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첫 공중전은 권총으로 즉흥적으로 치렀고, 관측병이 손에 든 무기를 들고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영국 쪽 기록도 비슷한 모습입니다. 1914년 8월 25일의 첫 영국 공중 승리는 독일 타우베(Taube) 한 대를 세 대가 쫓아 땅에 내려앉게 한 것이었습니다. 9월 16일 기관총을 단 첫 RFC 비행기가 프랑스로 왔지만, 소총과 권총은 1915년 여름까지 주 무장이었습니다. 11월 22일에는 기관총을 단 아브로가 독일 알바트로스(Albatros)를 처음으로 떨어뜨렸고, 독일 승무원 둘은 다치지 않고 붙잡혔습니다.
걸림돌은 프로펠러였습니다. 가장 좋은 사격 자세는 기체 앞머리를 표적으로 향하고 앞으로 쏘는 것인데, 앞에서 도는 프로펠러가 바로 그 길을 막았습니다. 설계자들은 프로펠러를 뒤에 다는 비행기를 만들거나, 위 날개에 기관총을 얹어 프로펠러 위로 쏘게 했습니다.
가장 좋은 답은 동조 장치(gun synchronizer)였습니다. 총알이 프로펠러 날개 사이로 지나가도록 쏘는 때를 맞추는 장치입니다. 호주 전쟁기념관은 이 차단 장치(interrupter gear)가 1915년에 개발되어 1인승 전투기 조종사가 프로펠러 너머로 곧장 앞을 쏠 수 있게 되었다고 적습니다.
이것을 처음 실전에 쓴 쪽은 독일이었습니다. NASM은 1915년 5월 앤서니 포커(Anthony Fokker)가 자기 단엽기에 앞으로 쏘는 기관총과 처음으로 실전에 쓰인 동조 장치를 달았다고 적습니다. RAF Museum 연표는 첫 포커 아인데커(Fokker Eindecker)가 1915년 4월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다고 적어, 날짜가 한 달쯤 다릅니다. 이 단엽기는 흔히 첫 진짜 전투기로 불립니다.
1915년 말 아인데커가 연합군 비행기를 너무 많이 떨어뜨려, 이 시기는 "포커의 재앙(Fokker Scourge)"이라 불렸습니다. 연합군의 답은 여러 갈래였습니다. 1916년 2월 프로펠러를 뒤에 단 영국의 1인승 DH2가 프랑스에 왔고, FE2b와 뉘포르(Nieuport)와 함께 1916년 5월까지 공중 우세를 되찾았습니다.
프랑스의 뉘포르 11 "베베(Bébé)"는 동조 장치 없이 위 날개의 루이스 기관총으로 프로펠러 위를 넘겨 쏘았고, 이 시기를 끝내는 데 한몫했습니다. 1916년 5월 24일에는 차단 장치를 단 첫 영국 일선 비행기인 1½ 스트러터(Strutter)가 프랑스에 왔습니다. 그림의 세 가지 답이 실제로 모두 쓰인 셈입니다.
편대와 전투기 부대
아인데커는 비행 방식도 바꿨습니다. 1916년 1월 14일 RFC는 편대 비행을 정식 방침으로 삼았습니다. 그때까지는 한 대나 두 대씩 다녔지만, 이제 모든 정찰기가 적어도 전투기 3대의 호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볍고 날랜 추격기(pursuit plane)는 전쟁이 시작되고 아홉 달쯤 뒤에 나타났습니다. 1916년 중반에는 전투기만 모은 첫 대대가 생겼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도 1916년부터 양쪽 모두 혼자 나는 비행에서 정해진 무리의 편대 공중전으로 옮겨 갔고, 고정된 비행 중대가 생겼다고 적습니다.
1916년 7월 1일 솜(Somme) 전투가 시작될 때 연합군은 비행기 421대를 모았고 독일은 104대였습니다. 연합군은 이 덕에 전투 대부분 동안 공중 우세를 지켰습니다.
하늘의 저울은 다시 기울었습니다. 1917년 4월 첫 주에만 RFC는 서부 전선에서 75대를 잃었습니다. 달 끝까지 영국 항공대는 비행기 150대와 승무원 316명을 잃었고, 프랑스와 벨기에 항공대도 200대를 더 잃었습니다. 이 달은 "피의 4월(Bloody April)"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6월에는 독일 전투비행대 넷이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Manfred von Richthofen)이 지휘하는 제1전투비행단(Jagdgeschwader 1)으로 묶였습니다. 그래도 저울은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1917년 여름 연합군이 수의 우세로 결국 하늘의 주도권을 잡았다고 봅니다.
도시 위의 비행선과 폭격기
전선 밖의 도시도 하늘 아래 놓였습니다. 1915년 1월 19~20일 독일 해군 비행선이 처음으로 영국을 공습했고, 그레이트야머스와 킹스린에서 두 사람씩 목숨을 잃었습니다. 5월 31일 밤에는 독일 육군 체펠린(Zeppelin) LZ38 한 대가 처음으로 런던을 공습해 7명이 죽고 35명이 다쳤습니다.
비행선에는 정확한 항법과 조준 기술이 없어 폭탄이 거의 아무 데나 떨어졌습니다. 런던은 밤에 불빛을 어둡게 했습니다. 1916년 7월에는 대공포 64문 넘게, 탐조등, 소이탄을 단 비행대대가 도시를 지켰습니다.
1916년 9월 2~3일 밤, 독일 육군과 해군의 비행선 16척이 런던으로 향했습니다. 1차 대전에서 가장 큰 비행선 공습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쉬테-란츠(Schütte-Lanz) SL11이 윌리엄 리프 로빈슨(William Leefe Robinson) 중위에게 맞아 불타며 떨어졌고, 영국 하늘에서 떨어진 첫 독일 비행선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 영국 조종사는 새 소이탄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뒤 독일은 덜 취약한 큰 다발 엔진 폭격기로 옮겨 갔습니다. 1917년 6월 13일 낮, 고타(Gotha) 폭격기가 런던 하늘에 왔습니다. 피해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RAF Museum 연표는 고타 18대에 사상자 588명, 그 가운데 사망 162명으로 적고, 런던 박물관은 고타 14대에 런던 시민 145명이 죽었고 그 가운데 포플러의 한 학교 아이 18명이 있었다고 적습니다.
공습 경보 제도는 고타 공습이 시작된 1917년 5월에야 생겼습니다. 1917년 9월 말에는 밤마다 30만 명이 지하철로 피했다고 여겨집니다. 런던의 마지막 공습은 1918년 5월 19일이었고, 독일 비행기 19대로 이 전쟁에서 가장 많은 수가 온 공습이었습니다. 1915~1918년 공습으로 런던 시민 668명이 죽고 집과 가게가 부서졌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1917년 봄까지 이어진 비행선 공습으로 500명 넘게 죽었다고 적고, 공습의 군사적 효과를 방어 전력을 묶어 두고 잦은 경보로 전쟁 생산을 끊은 데서 찾습니다.
공습은 영국의 항공 조직도 바꿨습니다. 1917년 7월 정부는 항공 조직과 방공을 살필 위원회를 만들었고, 실제로는 얀 스뮈츠(Jan Smuts) 중장 혼자 이 일을 맡았습니다. 8월 17일 보고서는 공군성을 만들고 두 항공대를 합치라고 권했습니다. 1918년 4월 1일 RFC와 해군 항공대(Royal Naval Air Service, RNAS)를 합친 영국 공군(Royal Air Force, RAF)이 생겼고, 여군 공군도 같은 날 생겼습니다.
1918년: 숫자가 커진 하늘
미국은 1917년 4월 6일 참전했지만 전투에 쓸 만한 비행기가 없었습니다. 영국 DH.4를 바탕으로 만든 DH-4가 미국이 처음 대량 생산한 전투용 비행기였습니다. 미 육군 항공대(Air Service)는 1918년 5월 24일 공식으로 인정되었고, 전투 기록은 1918년 2월부터 11월까지 아홉 달이었습니다.
1918년 8월 8일 아미앵(Amiens) 전투 첫날, 영국과 프랑스는 비행기 약 1,900대를 띄울 수 있었고 독일은 365대였습니다.
9월 12일 생미엘(St. Mihiel) 전투에는 1,500대 가까운 비행기가 모였습니다. 미 공군 역사실이 엮은 문서집은 그 가운데 미국 부대의 미국인이 몬 것이 약 40%, 600대쯤이고 나머지 60%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 부대 것이었다고 밝힙니다. 연합군은 그 뒤 어느 전투에서도 이만한 항공 전력을 다시 모으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비행기는 전투기, 정찰과 포병 관측, 적지 안 폭격처럼 일이 나뉘어 있었습니다. 1917년쯤부터는 폭탄 걸이와 기관총을 달고 낮게 날며 지상을 되풀이해 공격하는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바다에서는 1915년쯤부터 비행기가 배와 잠수함을 가라앉혔지만 성공한 수는 적었습니다. 1918년 7월 19일 항공모함 퓨리어스(Furious)에서 뜬 캐멀(Camel) 7대가 톤데른의 비행선 격납고를 친 것이 항모에서 띄운 첫 공습이었습니다.
하늘의 환경도 거칠어졌습니다. 대공포와 성능 좋은 전투기를 피해 조종사는 공기가 엷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고, 산소가 없으면 정신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그 전까지 대부분의 정찰 비행은 10,000피트(3,048 m) 아래였습니다. 조종사와 관측병은 시끄러운 열린 조종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만드는 수도 달라졌습니다. SPAD XIII는 8,000대 넘게 만들어져 1차 대전에서 가장 많이 만든 전투기가 되었습니다. 휴전 때 RAF는 모든 종류를 합쳐 22,647대, 그 가운데 일선 3,300대와 비행선 103척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공군이었습니다. 영국 제조사는 한 달에 3,500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미국 쪽 숫자는 훨씬 작았습니다. 1918년 11월 11일 전선의 미국 비행기 740대는 연합국 전체 항공 전력의 10%를 조금 넘었습니다. 미 항공대는 적기 756대와 기구 76개를 떨어뜨렸고, 비행기 289대와 기구 48개를 잃었습니다.
독일 항공대는 1918년 약 8만 명, 비행기 5,000대로 커졌습니다. 약 12,000명이 죽거나 다쳤고, 비행사 4,578명과 지상 요원 299명이 전사했으며, 본국에서 사고와 시험 비행으로 2,000명 가까이가 더 목숨을 잃었습니다.
호주의 기록에서도 사고가 눈에 띕니다. 1차 대전에 항공대를 만든 유일한 영국 자치령인 호주에서는 장교 460명과 사병 2,234명이 복무해 178명이 죽었고, 그 3분의 1 넘게가 영국에서 났습니다. 많은 조종사가 일선 대대에 가기도 전에 사고로 죽었습니다.
에이스 이야기와 기록
일대일 공중전은 땅 위의 피투성이 익명 전쟁보다 사람들이 생각하던 명예로운 전쟁에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추격기 조종사를 기리는 문화가 생겼고, 적기 다섯 대 이상을 떨어뜨린 조종사는 "에이스(ace)"라 불리며 가장 존경받았습니다. 독일에서도 성공한 전투기 조종사는 칭송받는 전쟁 영웅이 되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붉은 남작"으로 불린 리히트호펜입니다. RAF Museum은 그가 1918년 4월 21일 격추되어 죽을 때까지 공중전에서 연합군기 80대를 떨어뜨렸다고 적습니다. 누가 그를 떨어뜨렸는지는 갈립니다. 영국의 로이 브라운(Roy Brown) 대위가 격추한 것으로 인정되었지만, 지상 사격에 맞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매넉(Edward Mannock)처럼 격추 수가 지은이마다 다르게 적힌 조종사도 있습니다. 같은 조종사의 기록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전투기가 대중의 상상을 차지했지만, 실제 공중전은 순간의 때맞춤과 기체·무기를 완전히 다루는 솜씨가 있어야 하는 어려운 기술이었습니다. 전쟁 끝 무렵 공중전에는 100대까지 엉켰고, 그 속에서 적을 맞히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호주 공간사를 쓴 커틀랙(F.M. Cutlack)은 양쪽의 이름난 비행사들이 서로를 "개인적 존경과 치명적 적의가 묘하게 섞인" 마음으로 보았다고 썼습니다.
NASM의 큐레이터는 비디오 게임과 대중문화가 1차 대전의 하늘을 에이스끼리의 사격 게임처럼 그려 실제 경험의 폭을 가렸다고 지적합니다. 그가 꼽는 비행기의 가장 중요한 일은 앞에서 본 정찰이었습니다. 에이스 이야기는 하늘의 일부였고, 그 아래에는 사진기와 무선과 지도가 있었습니다.
남긴 것, 갈리는 평가
NASM은 1차 대전을 쓰임이 한정된 비행기를 믿을 만한 무기로 바꾼 "실험실"이라 부릅니다. 이 전쟁에서 전투기·폭격기·정찰기라는 뚜렷한 종류가 생겼고, 군 비행사라는 직업이 섰다고 봅니다. 전쟁 뒤 초기에는 DH-4가 첫 정기 항공 우편 노선의 주력기가 되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의 평가는 결이 다릅니다. 1차 대전이 끝날 때 전투·폭격·정찰·보병 지원·수송까지 군에 쓸 수 있는 모든 기종이 시험되었지만, 1918년까지 전쟁 전체에서 하늘이 차지한 비중은 비교적 작았다고 적습니다. 공군의 파괴력과 결정적 역할은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두 평가는 보는 자리가 다릅니다. 하나는 기술과 조직이 이 4년 동안 무엇을 배웠는지를 보고, 다른 하나는 1918년까지의 싸움 결과에 하늘이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지를 봅니다.
영국은 1918년 4월 두 항공대를 합친 공군을 따로 세웠고, 6월에는 육·해군에 딸리지 않고 전쟁을 치르려고 만든 첫 공군인 독립 공군(Independent Air Force)을 세웠습니다. 호주 항공대는 뒤의 호주 공군(RAAF)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빠르게 줄여, 미 항공대 장교가 휴전 때 19,189명에서 1920년 6월 30일 1,168명이 되었습니다.
연합국은 독일의 포커 D.VII 전투기를 모두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요구가 어디에 적혔는지도 자료마다 다릅니다. NASM의 이야기 쪽은 1918년 11월 휴전 협정이라고 하고, 같은 박물관의 전시 자료표는 베르사유 조약이라고 적습니다.
도시 공습은 많은 민간인을 처음으로 전투와 직접 마주하게 했습니다. 독일역사박물관은 이것이 2차 대전의 모습을 앞서 보였다고 적고, 런던 박물관도 전쟁 마지막 해의 런던을 2차 대전에 올 일의 그림이라고 부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참호전: 서부전선은 왜 4년 동안 움직이지 않았나: 비행기가 기병 대신 정찰을 맡게 된 땅 위의 사정입니다.
- 최초의 전차와 캉브레 전투: 참호를 넘으려는 기계: 같은 막힌 전선을 땅에서 넘으려 한 기계 이야기입니다.
- 방공포: 미사일 시대에도 포가 남아 있는 이유: 런던을 지킨 대공포가 오늘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 봅니다.
- 항공모함: 배 한 척이 공항이 되려면: 1918년 퓨리어스의 첫 공습 뒤에 이어진 항모 이야기입니다.
- 군사 정찰위성: 우주에서 얻는 정보: 하늘에서 보는 정찰이 우주로 올라간 이야기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새 기술이 싸움을 바꾼 다른 순간들입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하늘의 표적을 막는 또 다른 길의 역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