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8월 1일 오후, 베를린 왕궁 앞에 수천 명이 모였습니다. 독일이 러시아에 보낸 최후통첩의 시한이 끝나는 순간을 지켜보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7시쯤 독일의 동원령이 발표됐고, 곧이어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가 나왔습니다.
다섯 주 전인 6월 28일에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부부가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발칸의 한 도시에서 일어난 암살이 어떻게 독일·러시아·프랑스·영국이 모두 뛰어든 전쟁이 됐을까요? 위기가 전쟁으로 번지기까지는 6주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답은 한 줄로 나오지 않습니다. 두 동맹과 군비 경쟁, 발칸의 민족 문제라는 오래된 바탕 위에 7월의 결정이 하나씩 쌓였고, 동원령이 외교에 남은 시간을 줄였습니다. 누구의 책임이 가장 컸는지는 100년이 넘도록 역사가들이 다투는 물음입니다.
1914년 이전의 유럽: 두 동맹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합병하면서 프랑스를 오래도록 적으로 돌렸습니다. 프랑스는 1871년에 잃은 이 땅을 되찾고 싶어 했습니다. 1879년 10월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이국 동맹(Dual Alliance)을 맺었습니다. 러시아가 한쪽을 공격하면 서로 군사적으로 돕고, 다른 나라가 공격하면 호의적 중립을 지킨다는 약속이었습니다.
1882년 이탈리아가 들어오면서 이 동맹은 삼국 동맹(Triple Alliance)이 됐습니다. 기한은 5년이었고 1914년까지 5년마다 갱신됐습니다.
맞은편 진영은 차례로 생겼습니다. 1890년 빌헬름 2세가 러시아와 맺었던 재보장 조약의 연장을 거절하자 러시아는 프랑스에 다가갔습니다. 두 나라의 군사 협약 문서는 1892년 8월 18일 날짜로 남아 있지만, 독일역사박물관(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DHM)의 온라인 박물관 LeMO에는 1893년에 합의된 협약으로 나옵니다. 협약은 독일이 한쪽을 공격하면 다른 쪽이 모든 병력으로 독일을 친다고 정했습니다.
1904년 4월 8일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와 모로코 문제를 정리한 선언을 주고받았습니다. 흔히 영불 협상(Entente Cordiale)이라고 부르는 합의입니다. 1907년에는 영국과 러시아가 페르시아에서 서로의 이권 범위를 나누는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렇게 이어진 세 나라를 삼국 협상(Triple Entente)이라고 부릅니다.
독일에서는 적대 세력에게 '포위'됐다는 감정이 퍼졌고, 그 주된 책임을 영국에 돌렸습니다. 다만 동맹 문서가 곧 자동 참전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탈리아는 1914년 8월 삼국 동맹의 의무를 인정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했고, 1915년 5월 23일에는 오히려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했습니다. 영국이 프랑스·러시아와 맺은 두 협정도 문서 이름부터 이집트, 모로코, 페르시아 같은 식민지와 세력권 문제를 다룹니다.
군비 경쟁과 민족주의
20세기 초의 국제 관계는 강대국 사이의 세력 경쟁과 치열한 군비 경쟁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가장 눈에 띈 곳은 바다였습니다. 19세기 말부터 영국과 독일은 함대를 두고 드러내 놓고 경쟁했습니다.
독일은 1900년 함대법 개정으로 해군을 두 배로 늘리고, 영국 대비 군함 수의 비율을 1:2에서 2:3으로 바꾸려 했습니다. 1906년에는 독일 제국 의회가 드레드노트급 대형 전함을 짓는 데 막대한 예산을 승인했습니다. 1909년부터 1912년까지 군비를 제한하고 관계를 풀려는 시도가 이어졌지만, 독일이 함대 계획을 크게 줄이기를 거부해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 경쟁은 나라 사이의 긴장을 키웠고 각국의 살림에도 큰 짐이 됐습니다.
제국 경쟁도 겹쳤습니다. 빌헬름 2세 시대의 독일은 '세계적 위상'과 '양지바른 자리'를 요구했습니다. 1911년 봄의 모로코 위기에서는 모로코에서 움직이던 프랑스에게 양보를 받아 내려 했습니다. 프랑스·영국·러시아는 독일과 그 군비를 점점 심각한 위협으로 느꼈고, 독일은 적에게 둘러싸였다고 보고 두 전선에서 싸우는 전쟁 계획을 세웠습니다.
발칸에서는 민족 문제가 국경 문제와 엉켜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78년부터 점령해 관리하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1908년 10월 5일 합병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세르비아도 이 땅을 요구했고, 그곳에는 세르비아계 주민이 많이 살았습니다. 세르비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했고, 러시아는 합병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1912년 10월 8일 몬테네그로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고, 발칸 동맹의 다른 나라들이 열흘 안에 뒤따랐습니다. 1913년 6월 29일에는 어제의 동맹끼리 싸운 2차 발칸 전쟁이 시작돼 8월 부쿠레슈티 강화로 끝났습니다. 두 전쟁을 거치며 세르비아의 영토는 81% 넓어지고 인구는 150만 명 늘었습니다.
민족주의는 전쟁이 시작될 때 사람들의 마음에서도 드러났습니다. 모든 나라에 퍼진 민족주의와 교묘한 국가 선전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적국이 자기 나라에 전쟁을 강요했다고 믿었습니다. 벽보와 호외로 알려진 동원령에 젊은 남성들이 기꺼이 응한 까닭이기도 합니다.
사라예보의 총성
1914년 6월 28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Franz Ferdinand) 대공은 부인 조피와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기동 훈련을 시찰하러 사라예보를 찾았습니다. 합병을 두고 세르비아와 갈등이 깊던 곳이라, 황태자의 방문은 정치적인 힘 과시이기도 했습니다. 신문은 방문 일정과 의전을 미리 실었습니다.
암살자들은 모든 남슬라브인을 세르비아가 이끄는 한 나라로 묶으려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첫 시도는 실패했습니다. 한 사람이 차량 행렬에 던진 폭탄은 대공의 부관과 행인 몇 사람을 다치게 했을 뿐입니다.
대공 부부는 일정을 이어 갔습니다. 오전 11시를 조금 넘겨, 19살의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 가브릴로 프린치프(Gavrilo Princip)가 군중 속에서 지붕 없는 차를 향해 권총을 쐈습니다. 두 사람은 곧 숨졌습니다.
경찰 수사는 세르비아 정보기관이 무기와 돈, 정보로 음모자들을 도왔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같은 날 사라예보에서는 세르비아인을 겨냥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치인과 군인들은 이 사건을, 발칸 전쟁으로 힘을 키운 세르비아를 정치적으로 굴복시킬 기회로 봤습니다.
프린치프와 공모자 24명은 1914년 10월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법정에 섰습니다. 법정은 프린치프에게 대역죄와 살인으로 징역 20년을 선고했고, 그는 1918년 4월 테레지엔슈타트 요새의 감옥에서 숨졌습니다.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지금도 갈립니다. 전쟁 뒤 세워진 유고슬라비아는 그에게 기념비를 바쳤고, 많은 세르비아인은 지금도 그를 자유 투사로 봅니다.
7월 위기: 최후통첩에서 선전포고까지
7월 5~6일,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조건 없는 동맹 의리를 약속했습니다. 흔히 '백지수표(blank cheque)'라고 부르는 약속입니다. 재상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Theobald von Bethmann Hollweg)와 빌헬름 2세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절에게, 세르비아와 전쟁하게 되면 동맹국을 돕겠다고 한 것입니다.
독일 참모본부와 정부의 계산은 발칸을 넘어섰습니다.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국제 동맹 체제의 시험대가 될 것이었습니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군사적으로 도울까, 러시아와 묶인 프랑스와 영국까지 끼어들까? 모든 나라의 외교관은 동맹 체제 때문에 지역 분쟁이 크게 번질 위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7월 23일 목요일 오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건넸습니다. 회신 시한은 25일 토요일 오후 6시였습니다. 최후통첩은 암살 계획이 베오그라드에서 꾸며졌고, 나로드나 오드브라나(Narodna Odbrana)라는 단체에 속한 세르비아 장교와 관리가 무기를 건넸다고 주장했습니다.
요구는 열 가지였습니다. 그 가운데 5항은 반오스트리아 운동을 누르는 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기관이 세르비아 안에서 협력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항은 암살 공모자를 수사하는 절차에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가 참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LeMO는 이 최후통첩이 독일과 긴밀히 협의해 나왔고 요구가 일부러 받아들일 수 없게 짜였다고 봅니다.
세르비아는 25일 답서를 보냈습니다. 6항의 수사는 하겠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가 수사에 참여하는 것은 헌법과 형사 절차를 어기는 일이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세르비아는 최후통첩을 대부분 받아들이면서 같은 날 군을 동원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부분 동원과 외교 관계 단절로 답했습니다.
27일 독일은 외무장관 회의로 분쟁을 풀자는 영국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다른 강대국의 중재 시도를 물리치고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동원령과 철도
동원(mobilization)은 나라가 전쟁에 쓸 병력을 불러 모아 싸울 자리로 보내는 일입니다. 1892년 프랑스-러시아 군사 협약에 그 모습이 잘 담겨 있습니다. 삼국 동맹 쪽 어느 나라든 동원하면, 두 나라는 첫 소식을 듣는 즉시 따로 상의하지 않고 모든 병력을 동원해 국경 가까이 옮기기로 했습니다.
협약은 규모도 적었습니다. 독일을 상대로 프랑스는 130만 명, 러시아는 70만~80만 명을 쓰고, 독일이 동쪽과 서쪽에서 동시에 싸우게 될 만큼 빨리 맞선다는 내용입니다. 한 나라의 동원이 곧 상대 동맹의 동원을 부르는 신호가 되도록 짜여 있었던 셈입니다.
병력을 국경까지 실어 나르는 일은 철도가 맡았습니다. 1870년 보불 전쟁 때 독일군은 철도 덕분에 서부 전선에 빠르게 전개했습니다.
프랑스 육군박물관(Musée de l'Armée)의 교육 자료는 이때 프로이센이 동원을 7일, 병력 집결을 19일 만에 마쳤고, 같은 무렵 프랑스는 현역군이 장비도 받지 못하고 예비군도 합류하지 못한 상태였다고 설명합니다. 프랑스는 이 패배에서 배워 1872년부터 징병제 군대를 두고 동원과 집결을 미리 계획했습니다.
44년 뒤 프랑스의 동원은 이 계획대로 움직였습니다. 1914년 8월 1일 오후 경종이 울리고 동원 벽보가 붙었습니다. 동원에는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열차 1만 편이 들었고, 집결에는 부대와 장비를 떼지 않고 한데 싣는 '표준 열차' 5,000편이 쓰였습니다. 8월 18일 집결이 끝났을 때 프랑스군 270만 명이 싸움에 나설 준비를 마쳤습니다.
군대의 크기도 동원으로 몇 배가 됐습니다. 같은 박물관 자료에 따르면 평시 80만 명이던 프랑스 현역군은 동원으로 358만 명이 됐고, 독일 현역군은 88만 명에서 375만 명으로 늘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와 달리 예비 부대를 처음부터 전투 서열에 넣었습니다.
두 진영 전체로 보면, 개전 때 동맹국 쪽 약 350만 명이 협상국 쪽 570만 명 넘는 병력과 맞섰다는 LeMO의 집계가 있습니다. 세는 범위가 달라 두 자료의 숫자를 그대로 더하거나 견줄 수는 없습니다.
독일의 전쟁 계획은 시간을 더 다그쳤습니다. 1891년부터 1905년까지 참모총장을 지낸 알프레트 폰 슐리펜(Alfred von Schlieffen)의 구상은, 러시아가 동원하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먼저 프랑스를 꺾고 그다음 병력을 동부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후임 헬무트 폰 몰트케가 이 계획을 손봤습니다. 계획대로 하려면 독일군은 중립국 벨기에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7월 말에는 동원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29일 러시아가 부분 동원을, 30일 총동원을 했습니다. 31일 독일은 '전쟁 위험 임박 상태'를 선포하고 러시아에 12시간 안에 동원을 멈추라고 요구했고, 같은 날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총동원했습니다. 러시아가 멈추지 않자 독일은 8월 1일 총동원을 발표하고 러시아에 선전포고했습니다.
프랑스도 같은 8월 1일 총동원을 선포했습니다. 벽보에 적힌 동원 첫날은 8월 2일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서둘렀을까요? 어느 정부도 상대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몰랐고, 동원이 늦어 전략적으로 불리해지지 않도록 모든 경우에 대비하려 했습니다. LeMO는 특히 독일에서 군사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여긴 판단이 정치 결정에 영향을 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도 어느 나라도 침략자로 보이고 싶어 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쟁은 어떻게 커졌나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 의무를 지키겠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8월 2일 독일은 벨기에에 군대가 지나갈 권리를 최후통첩으로 요구하고 룩셈부르크를 점령했습니다. 3일에는 프랑스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벨기에는 8월 3일 아침 거절하는 답서를 독일 공사에게 건넸습니다. 답서는 1839년 조약이 강대국의 보장 아래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을 지킨다고 짚고, 요구를 받아들이면 나라의 명예를 버리고 유럽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게 된다고 했습니다.
독일군이 벨기에에 들어간 날은 LeMO 연표에는 8월 3일, 브리검영 대학교 도서관의 1차 대전 문서 보관소 해설에는 8월 4일 아침으로 적혀 있습니다.
같은 8월 3일,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Grey)는 하원에서 영국의 처지를 밝혔습니다. 프랑스는 러시아와의 동맹에 따른 명예의 의무로 끌려 들어갔지만, 영국은 프랑스-러시아 동맹의 당사국이 아니고 그 조항도 모르므로 같은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동원이 시작될 무렵 그레이는 프랑스와 독일에 벨기에의 중립을 지킬지 물었습니다. 프랑스는 지키겠다고 답했고, 독일 외무장관은 황제와 재상과 상의하기 전에는 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레이는 벨기에 중립 문제가 시간이 갈수록 더 무거워진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 나라였습니다. 영국은 중립국 벨기에 침공을 참전 이유로 들어 8월 4일 프랑스·러시아 편에서 전쟁에 들어갔습니다. 호주 전쟁기념관에 따르면 영국이 선전포고하자 영국의 자치령이던 호주도 자동으로 전쟁 상태가 됐습니다.
전쟁은 유럽 밖으로도 번졌습니다. 8월 2일 독일과 방어 동맹을 맺은 오스만 제국은 바로 싸움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11월 2일 러시아, 5일 영국, 6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동쪽 끝에서는 8월 23일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했고, 11월 독일의 식민지 칭다오를 점령했습니다.
이탈리아는 1915년 5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1916년 8월 28일 독일에 선전포고했습니다. 미국에서는 1917년 4월 2일 윌슨 대통령이 의회에 독일과의 전쟁을 요청했고, 4월 4일 상원이, 이틀 뒤 하원이 찬성했습니다. 미국은 그해 12월 7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도 선전포고했습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나라는 모두 38개국으로 집계됩니다.
날짜는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프랑스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한 날은 같은 박물관 안에서도 1914년 연표에는 8월 11일, 선전포고 목록에는 8월 13일로 적혀 있습니다.
전쟁은 1918년 11월 11일 휴전으로 멈췄습니다. 숨진 사람의 수는 무엇을 어떻게 세느냐에 따라 자료마다 크게 다릅니다. 숨진 병사는 자료에 따라 850만 명 남짓에서 약 900만 명으로 적힙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SHMM)의 백과는 850만 명 넘게, LeMO는 약 900만 명으로 씁니다.
민간인 숫자는 차이가 더 큽니다. USHMM은 전쟁 동안 민간인 피해를 꼼꼼히 센 공식 기관이 없었다고 밝히면서, 학자들의 추정으로 많게는 1,300만 명을 듭니다. LeMO의 숫자는 600만 명 넘게입니다.
병사와 민간인을 합친 전체 사망자는 자료에 따라 약 1,500만 명(LeMO의 두 숫자를 더한 값)에서 약 2,000만 명(독일 전쟁묘지관리협회 Volksbund의 안내판)까지 벌어집니다.
동원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독일에서만 약 1,320만 명이 동원됐습니다. 인구가 500만 명이 안 되던 호주에서도 416,809명이 입대했고, 그 가운데 6만 명 넘게 숨지고 15만 6천 명이 다치거나 독가스에 노출되거나 포로가 됐습니다.
누구의 책임인가: 엇갈리는 해석
승전국의 판단은 1919년 강화 조약에 남았습니다. 베르사유 조약 231조는 연합국 정부가 단언하고 독일이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독일과 그 동맹국의 침략으로 강요된 전쟁의 모든 손실과 피해에 대한 책임이 독일과 동맹국에 있다고 적었습니다. 막대한 배상 요구가 이 책임 규정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독일은 이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이마르 정부는 승전국의 결정과 거리를 두었고, 이른바 '전쟁 책임의 거짓말'에 맞선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1930년대 초에는 한 나라의 야심보다 당시 동맹 체제의 실패를 원인으로 보는 시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영국 총리를 지낸 로이드 조지는 1933년 회고록에서 유럽이 전쟁의 끓는 가마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고 썼습니다.
1960년대 독일에서 이 물음이 다시 열렸습니다. 함부르크의 역사가 프리츠 피셔(Fritz Fischer)는 1961년 책 『세계 강국을 향한 손 뻗기(Griff nach der Weltmacht)』에서 개전의 주된 책임을 베를린에 두었습니다. 논쟁은 감정적으로 번졌고 정부와 외무부까지 끼어들었습니다. 피셔는 독일 혼자의 잘못이라고 하지 않았고, 주된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영국 오픈 유니버시티의 역사가 애니카 몸바우어(Annika Mombauer)는 개전 100주년을 앞둔 2014년 4월의 글에서 연구의 흐름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이 논쟁이 가라앉았습니다. 독일이 오래전부터 전쟁을 계획했다는 피셔의 주장에는 대체로 동의하지 않았지만, 독일이 개전 책임의 큰 몫을 졌다는 데는 거의 다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결정도 비판적으로 다시 읽혔습니다.
21세기 초에는 이 전쟁이 피할 수 없던 일은 아니었다는 데 뜻이 모였습니다. 다른 강대국의 결정도 다시 들여다봤습니다. 미국 역사가 숀 맥미킨(Sean McMeekin)은 러시아가 튀르키예 해협과 콘스탄티노플을 손에 넣는 데 관심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러시아가 일찍 부분 동원을 결정해 평화적 해결을 막았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크리스토퍼 클라크(Christopher Clark)의 『몽유병자들(The Sleepwalkers)』은 2012년 영국에서 나왔고, 2013년 가을 독일어판이 나오자 독일에서 큰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클라크는 한 나라의 범인을 찾는 일이 필요하지도 뜻있지도 않다고 보고, 개전을 "범죄가 아니라 비극"이라고 했습니다. 역사가 게르트 크루마이히(Gerd Krumeich)는 가장 큰 책임이 독일에 있다는 것이 자신의 확신이라고 반박했습니다.
몸바우어는 2014년의 그 글에서, 잠깐 이뤄졌던 합의가 깨졌고 1960년대처럼 역사가들이 다시 정반대 자리에 서 있다고 봤습니다. 이 정리를 쓴 몸바우어 자신도 클라크와 다른 해석을 책으로 낸 학자입니다. 그 글이 나온 2014년까지 어느 쪽 결론도 학계 전체의 합의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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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20세기 무기 기술의 큰 변화를 따라갑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이 사이트의 중심 주제인 레이저 무기가 어떻게 발전했는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