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 13일 새벽, 런던 사람들은 처음 듣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오토바이 같은 윙윙 소리와 함께, 날개가 짧고 반쯤 불붙은 비행기 같은 것이 하늘을 가로질렀습니다. 몇 분 뒤 소리가 멎었고, 이어 폭발이 일었습니다. 석 달 뒤에는 아무 소리도 없이 떨어지는 무기가 나타났습니다.

앞의 것이 V-1, 뒤의 것이 V-2입니다. V-1은 날개와 제트 엔진으로 대기 속을 낮게 날았고, V-2는 로켓으로 우주 가장자리까지 올라갔다가 떨어졌습니다. 오늘 순항미사일과 탄도미사일이라고 부르는 두 갈래가 이때 처음 실전에 나왔습니다. 두 무기가 어떻게 생겨나 쓰였는지, 그 무기를 만든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쟁 뒤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공개 기록으로 따라가 봅니다.

'보복 무기'가 나온 때

첫 V-1이 떨어지기 한 주 전, 연합군은 노르망디에 상륙했습니다. 독일 하늘에서는 영국과 미국 폭격기가 독일 도시를 거의 마음대로 폭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빠진 전략 상황에서 독일은 '보복 무기(Vergeltungswaffen)'를 내보냈습니다. 목적은 영국 민간인을 겁주고 사기를 꺾는 것이었고, 나치 선전은 이 무기를 전쟁의 흐름을 뒤집을 '기적의 무기(Wunderwaffe)'라고 불렀습니다.

조종사 없는 폭탄이 왜 끌렸을까요? 영국 전쟁박물관(Imperial War Museums, IWM)의 학예사 비키 호킨스(Vikki Hawkins)는 독일이 폭격 전쟁뿐 아니라 생산 전쟁에서도 지고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조종사 없는 폭탄은 만들기 비교적 쉽고, 비행기보다 싼 재료를 썼으며, 영국 하늘에서 귀한 인력을 잃지 않아도 됐습니다.

이름도 선전의 일부였습니다. V-1과 V-2는 나치 선전부가 붙인 이름이고, 원래 이름은 따로 있었습니다. V-1은 공군부가 정한 Fi 103, V-2는 육군 병기국이 부른 A-4(Aggregat 4)였습니다. 서로 다른 군이 따로 만든 두 무기였습니다.

V-1: 날개 달린 제트 폭탄

V-1은 공군 쪽 계획이었습니다. 엔진 회사 아르구스(Argus)와 항공기 회사 피젤러(Fieseler)가 함께 만들었고, 이름 Fi 103은 기체를 설계한 피젤러에서 왔습니다. 미 국립항공우주박물관(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NASM)은 공군이 이 비행 폭탄을 서두른 까닭 하나로, 마침 로켓 A-4의 시험 발사를 시작한 육군과의 경쟁을 듭니다.

생김새는 작은 비행기에 가까웠습니다. 몸통 뒤쪽 위에 펄스제트(pulsejet)라는 관 모양 엔진을 얹었고, 이 엔진은 공기를 빨아들여 연료를 태웠습니다. 단순하지만 시끄러운 엔진이었습니다. 그 소리 때문에 연합국 사람들은 V-1을 '버즈 밤(buzz bomb)', '두들버그(doodlebug)'라고 불렀습니다.

시험은 1942년에 시작됐습니다. 그해 10월 동력 없는 시제품으로 첫 비행 시험을 했고, 12월에는 항공기에서 떨어뜨린 첫 Fi 103 비행 시험과 경사로에서 쏜 첫 지상 발사 시험이 이어졌습니다. 실전에서는 경사로에서 쏘았고, 나중에는 V-1을 싣도록 손본 폭격기에서도 쏘았습니다.

V-1은 무선으로 조종하지 않았습니다. 미리 정해 둔 장치가 나침반으로 방향을 지키게 했고, 앞코의 작은 프로펠러가 돈 횟수로 거리를 쟀습니다. 정해진 횟수가 되면 꼬리 쪽 장치가 작동해 목표 쪽으로 내리꽂혔습니다. 보통 2,000~3,000피트 높이에서 시속 400마일까지로 30분쯤 날았고, 사정은 약 240 km였지만 매우 부정확했습니다.

땅 위의 사람들은 소리로 위험을 가늠했습니다. 윙윙 소리가 들리면 V-1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고, 소리가 멎으면 연료가 끊겨 떨어지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트위크넘의 소방대원 해럴드 치즈널(Harold Chisnell)은 언제, 어디서 소리가 멎을지 모른 채 기다리는 일이 사기에 가장 나빴다고 회고했습니다.

NASM은 V-1을 세계 첫 실전 순항미사일이라고 적습니다. 날개를 달고 공기를 빨아들이는 제트 엔진으로 대기 속을 나는 무기라는 점에서, 오늘의 순항미사일과 같은 갈래입니다. 다만 V-1에는 목표를 찾아가는 장치가 없었습니다. 미리 정한 방향과 거리만 지켰습니다.

V-2: 우주 가장자리까지 올라간 로켓

V-2는 육군의 로켓 계획에서 나왔습니다. 1차 대전 뒤 독일에서는 로켓과 우주여행이라는 생각이 크게 유행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이 로켓을 막지 않아서 육군이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가 흔하지만, IWM 학예사 이언 기쿠치(Ian Kikuchi)는 실제로는 합법성이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고 설명합니다.

1937년 4월, 약 90명이던 로켓 팀이 발트해 우제돔섬의 페네뮌데(Peenemünde)에 새로 지은 큰 비밀 연구 시설로 옮겼습니다. 개발을 이끈 사람은 기술 책임자 베른헤르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과 군 쪽 책임자 발터 도른베르거(Walter Dornberger)였습니다. 1942년 6월과 8월 두 번 실패한 뒤, 10월 3일 첫 A-4 발사에 성공했습니다.

대량 생산을 명령한 날은 자료마다 다릅니다. NASM은 히틀러가 1942년 11월 22일 대량 생산을 명령했다고 적고, IWM 학예사 영상은 대규모 생산 명령을 1943년 1월, 최우선 지정을 그해 7월로 듭니다. 시험은 계속됐고, 1944년 6월에는 A-4 시험 로켓이 우주에 닿은 첫 인공 물체가 됐습니다.

V-2의 몸통은 대부분 두 개의 큰 탱크였습니다. 위 탱크에는 알코올과 물을 섞은 연료, 아래 탱크에는 액체 산소가 들었고, 이 둘을 엔진에서 태워 추력(thrust)을 얻었습니다.

탄두 뒤에는 자이로스코프와 아날로그 유도 컴퓨터를 둔 칸이 있었습니다. 이 장치가 분사 흐름 속의 날개를 움직여 추력의 방향을 바꾸며 비행을 바로잡았습니다. 엔진의 힘으로 방향을 트는 원리는 추력편향 글에 있습니다.

엔진은 60~70초 동안 타며 V-2를 최고 80 km 높이까지 밀어 올렸습니다. 그 뒤로는 엔진 없이 탄도를 그리며 떨어졌고, 땅에 닿을 때 속도는 시속 2,000마일에 가까웠습니다. 소리보다 빨랐기 때문에, 목표 지역 사람들은 폭발이 난 뒤에야 로켓이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최대 사정은 약 320 km였습니다.

처음에는 프랑스 해안의 방호 벙커에서 쏠 계획이었지만, 벙커는 연합군 폭격에 부서졌습니다. 그래서 V-2는 거의 어디서나 움직일 수 있는 이동식 포대에서 쏘았습니다. NASM은 V-2를 세계 첫 대형 액체 추진제 로켓이자 첫 장거리 탄도미사일이며, 오늘의 대형 로켓과 발사체의 조상이라고 적습니다. 엔진이 꺼진 뒤 탄도를 그리며 떨어지는 비행은 오늘 탄도미사일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바로 그 비행입니다.

V-1과 V-2의 비행 모습을 견준 개념 도표. 땅에서 출발한 V-1(주황)은 낮게 올라가 평평하게 날다가 엔진이 꺼지면 아래로 내리꽂힌다. 길 위에 펄스제트가 도는 동안 대기 속을 낮고 평평하게 난다는 글자와, 엔진이 꺼지면 내리꽂힌다는 글자가 있다. V-2(파랑)는 엔진이 60~70초 타는 동안 가파르게 올라가고, 엔진이 꺼진 뒤 점선의 큰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꼭대기 근처에 IWM 기준 최고 약 80 km, 떨어지는 쪽에 시속 2,000마일 가까이로 소리보다 먼저 닿는다는 글자가 있다. 아래 주황 상자는 V-1(Fi 103): 공기를 빨아들이는 펄스제트, 경사로나 항공기에서 발사, 미리 정한 방향과 거리, 보통 2,000~3,000피트 높이에서 시속 400마일까지, 사정 약 240 km로 매우 부정확(NASM), 오늘의 순항미사일 갈래. 파랑 상자는 V-2(A-4): 알코올·물과 액체 산소, 이동식 발사대, 타는 동안 자이로스코프가 추력 방향을 조정, 사정 약 320 km(NASM), 오늘의 탄도미사일 갈래. 축척이 없는 개념도라는 메모가 있다
낮고 평평하게 나는 V-1과, 높이 올라갔다 탄도로 떨어지는 V-2. 축척 없는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1944~1945년: 런던과 안트베르펜

1944년 6월 13일 새벽 4시 18분, 첫 V-1이 잉글랜드 켄트의 스완스컴에 떨어졌습니다. 런던에 처음 떨어진 것은 4시 25분, 보우의 그로브 로드였습니다. 이 한 발이 철교와 근처 집들을 부숴 6명이 죽고 30명이 다쳤으며 200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막는 쪽도 손을 놓고 있지 않았습니다. V-1은 곧고 평평하게 날았기 때문에 목표에 닿기 전에 많이 격추됐습니다. 대공포가 1,800기 넘게, 전투기가 비슷한 수를 떨어뜨렸고, 방공 기구에 걸려 부서진 것도 200기였습니다.

그래도 런던을 V-1에서 끝내 구한 것은 연합군의 진격이었습니다. 1944년 8월 말 연합군이 프랑스 파드칼레의 발사 기지를 차지하자, 여러 달 동안 영국을 겨눌 길은 항공기에서 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대신 연합군의 중요한 항구 안트베르펜이 겨냥됐습니다.

V-2는 9월에 나타났습니다. 9월 7일 파리를 향한 첫 두 발은 엔진이 일찍 꺼져 실패했습니다. 9월 8일 오전 8시 30분 첫 V-2가 파리에 떨어졌고, 같은 날 오후 6시 43분에는 런던 서쪽 교외 치즈윅에 떨어졌습니다. 연합국은 오스트리아와 폴란드 저항 단체 덕분에 V-2가 하늘에 나타나기 오래전부터 이 무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 있어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V-2는 속도와 궤적 때문에 대공포로도 전투기로도 떨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연합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북서유럽으로 진격하며 발사 기지를 차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피해 하나하나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1944년 11월 25일 토요일 낮 12시 25분, 뎃퍼드 뉴크로스 로드의 울워스(Woolworths) 가게에 V-2가 떨어졌습니다.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둔 날이라 가게는 유난히 붐볐고, 168명이 죽었습니다. 근처에 살던 팻 그랜트(Pat Grant)는 폭발 뒤 찾아온 섬뜩한 고요를 기억했습니다.

안트베르펜은 더 오래 맞았습니다. 가장 심했던 12월에는 한 주에 V-2가 100발 넘게 이 항구에 떨어졌습니다. 한 번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곳도 안트베르펜의 한 영화관으로, 567명이 숨졌습니다.

끝은 1945년 3월에 왔습니다. 발사 기지들이 연합군에 넘어가며 공세가 멈췄습니다. 마지막 V-2가 떨어진 날을 IWM은 3월 27일로, 실전 마지막 발사를 NASM은 3월 29일로 적습니다. 영국을 향한 마지막 V-1은 3월 29일 대공포에 격추됐습니다.

V-1과 V-2의 연표 도표. 위에서 아래로 1937년 4월 로켓 팀이 페네뮌데로 옮김, 1942년 10월 3일 첫 A-4(V-2) 발사 성공, 1942년 10~12월 첫 Fi 103(V-1) 비행 시험, 1943년 8월 17~18일 영국 공군의 페네뮌데 폭격과 V-2 생산의 지하 이전, 1943년 8월 28일 노르트하우젠 근처 도라 하위 수용소 설립, 1944년 6월 A-4 시험 로켓이 우주에 닿음(IWM), 1944년 6월 13일 첫 V-1이 잉글랜드와 런던에 떨어짐, 1944년 9월 8일 첫 V-2가 파리와 런던에 떨어짐, 1944년 11월 25일 뎃퍼드 울워스에 V-2가 떨어져 168명 사망, 1945년 3월 27일·29일 마지막 V-2 타격(IWM)과 실전 마지막 발사(NASM), 1945년 3월 29일 영국을 향한 마지막 V-1 격추, 1945년 4월 미군이 도라-미텔바우 해방, 1945년 9월 폰 브라운이 미국에 도착, 1946년 4월 16일 화이트샌즈에서 첫 노획 V-2 발사, 1948년 9월 17일 소련 R-1 첫 성공 발사, 1951년 6월 28일 화이트샌즈에서 마지막 노획 V-2 비행. 점 색은 V-1(주황), V-2(파랑), 강제 노동 수용소(보라), 전쟁 뒤(초록)이다. 줄 간격이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고, 자료마다 날짜가 다르면 둘 다 적었다는 메모가 있다
시험장에서 전쟁 뒤까지의 흐름. 날짜는 NASM, IWM, USHMM, NASA에 나온 것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지하 공장의 사람들

1943년 8월 17~18일 밤, 영국 공군이 페네뮌데를 폭격했습니다. 이 폭격의 물리적 효과는 지금도 논쟁거리입니다. 그래도 이 폭격은 나치 지도부가 V-2 생산을 연합군 폭격이 닿지 않는 지하로 옮기기로 하는 데 한몫했습니다. 생산은 독일 하르츠 산지 노르트하우젠의 지하 공장 미텔베르크(Mittelwerk)로 옮겨졌습니다.

그 공장을 만든 것은 강제수용소 수감자였습니다. 1943년 8월 28일, SS는 부헨발트 수용소의 수감자 107명을 트럭에 태워 하르츠 남부의 터널로 데려갔습니다. 부헨발트의 하위 수용소 '도라(Dora)'가 이렇게 시작됐고, 1944년 10월에는 하위 수용소 30곳 넘게를 거느린 독립 수용소 미텔바우(Mittelbau)가 됐습니다.

미 홀로코스트 기념관(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USHMM)의 홀로코스트 백과는 그곳의 조건을 자세히 남겼습니다. 1944년 봄까지 수감자들은 거의 지하에 갇혀, 햇빛과 신선한 공기 없이 무너질 듯한 터널에서 지냈습니다. 화장실은 반으로 자른 기름통뿐이었고, 폐렴과 결핵, 장티푸스, 이질이 하루 12시간의 고된 노동과 겹쳤습니다. 기록된 사망은 1943년 9월 5명에서 1944년 1월 669명으로 뛰었습니다.

이 무렵 수감자는 모두 남자였습니다. 수가 많은 순서로 소련, 폴란드,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출신이었습니다. 사망률은 다른 대부분의 강제수용소보다 높았고, 일할 수 없을 만큼 약해지거나 병든 사람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나 마우트하우젠으로 보내져 죽임을 당했습니다.

수감자들의 저항도 있었습니다. 저항 조직은 생산을 늦추고 로켓을 망가뜨리려 했습니다. 사보타주를 의심받은 사람은 대개 죽임을 당했고, 200명 넘게 공개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이곳을 무기 공장으로만 보면 놓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독일 학자 옌스-크리스티안 바그너(Jens-Christian Wagner)는 미텔바우를 무기 생산 단지로 강조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지적했습니다. 1945년 3월 약 4만 명 가운데 실제 생산에 일한 사람은 6,000명이 안 됐고, 대부분은 건설 노동자와 광부였습니다. 그래도 공장은 1944년 9월부터 V-2를 한 달 600~700기 만들었고, 1944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V-1도 6,000기를 조립했습니다.

1945년 4월 초, 나치는 수감자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행진에서 수천 명이 죽었고, 미군이 4월에 수용소를 해방했을 때 남아 있던 사람은 몇 명뿐이었습니다. 생존자 얀 임리흐(Jan Imrich)는 IWM 영상에서 젊은 사람들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게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노동을 누가 정했는지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NASM은 도른베르거와 공장 수석 기술자 아르투어 루돌프(Arthur Rudolph)가 로켓 계획에 강제수용소 노동을 쓰기로 정한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고 적습니다. 폰 브라운은 이 결정을 알았고, 시간이 지나며 수용소 노동 관리에 점점 더 얽혔다는 것이 NASM의 설명이고, NASA의 인물 소개도 V-2가 미텔베르크라는 강제 노동 공장에서 만들어졌다고 밝힙니다.

숫자 읽기

V-1과 V-2의 숫자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쏜 수를 셌는지 떨어진 수를 셌는지, 영국만 셌는지 유럽 대륙까지 셌는지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래 숫자는 자료 이름과 함께 적습니다.

V-1의 발사 수부터 봅니다. NASM 요약은 1944년 6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영국과 유럽 대륙에 20,000기 넘게 쏘았다고 적습니다. NASM 본문은 영국을 향해 지상에서 8,892기, 항공기에서 약 1,600기를 쏘았고, 안트베르펜에 약 8,696기를 쏘았다고 셉니다. IWM 학예사 영상은 런던에 1만 기 가까이, 안트베르펜에 2,500기라고 말해 안트베르펜 숫자가 크게 다릅니다.

V-2는 NASM이 먼저 자료마다 다르다고 밝힌 뒤, 연합국 목표로 3,200~3,600기를 쏘았다고 적습니다. 한 추정으로는 1,115기가 영국에, 1,775기가 유럽 대륙에 떨어졌고, 대륙의 것 가운데 1,610기가 안트베르펜이었습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도 갈립니다. NASM 집계로 V-1에 영국에서 6,200명 가까이, 유럽 대륙에서 군인과 민간인 4,683명이 죽었습니다. V-2의 사망자는 약 5,500명, 중상자는 6,500명으로 추정됩니다. IWM은 V-무기가 영국에서 민간인 사상자 3만 명 넘게를 냈다고 적고, IWM 연구 블로그는 영국에서 1만 명 넘게 목숨을 잃었다고 씁니다.

무기를 만들다 죽은 사람도 셈에 들어가야 합니다. IWM은 V-무기를 만들다 약 2만 명이 죽었고, 이 수가 무기에 죽은 민간인보다 많았다고 적습니다. NASM은 V-2를 만드는 과정에서 적어도 1만 명이 죽었다고 쓰고, 미텔바우-도라의 사망 약 2만 명 가운데 절반쯤을 V-2 계획 탓으로 봅니다. 바그너의 추정으로는 철수 중에만 8,000명 넘게 죽어 미텔바우 전체의 사망자가 2만 명을 넘습니다.

V-1과 V-2의 숫자를 자료별로 나눠 놓은 막대 도표. 첫 블록은 V-1 발사 수: 1944년 6월~1945년 3월 모든 목표에 2만 기 넘게(NASM), 영국을 향해 지상 발사 8,892기와 공중 발사 약 1,600기(NASM), 런던에 1만 기 가까이(IWM 학예사), 안트베르펜에 약 8,696기(NASM)와 2,500기(IWM 학예사). 둘째 블록은 V-2 발사 수: 연합국 목표로 3,200~3,600기(NASM은 자료마다 다르다고 밝힘), 한 추정으로 영국 1,115기, 대륙 1,775기, 그 가운데 안트베르펜 1,610기. 셋째 블록은 무기에 죽은 사람: V-1으로 영국 6,200명 가까이, 대륙 군인·민간인 4,683명(NASM), V-2 약 5,500명(NASM 추정), V-무기로 영국에서 1만 명 넘게(IWM 블로그). 넷째 블록은 무기를 만들다 죽은 강제 노동자: V-무기 생산 약 2만 명(IWM), V-2 제조 적어도 1만 명(NASM), 철수 포함 미텔바우 전체 2만 명 넘게(바그너, USHMM). 아래에 IWM이 V-무기로 영국 민간인 사상자 3만 명 넘게를 셌다는 메모가 있다. 블록마다 막대 축척이 다르다는 메모가 있다
발사 수와 사망자 수. 자료마다 세는 대상과 값이 달라 자료별로 나눠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돈도 많이 들었습니다. 기쿠치는 V-2가 전쟁 중 독일의 가장 큰 무기 사업으로 최대 20억 라이히스마르크가 들었다고 설명합니다. 일곱 달 동안 V-2가 나른 고폭약 3,000톤은 영국 중폭격기가 한 번의 폭격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양이었다고도 덧붙입니다. 결국 V-2는 정확하지도, 믿을 만하지도, 들인 비용만큼 효과가 있지도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IWM은 V-무기 공세가 독일의 나쁜 전략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고 정리합니다. 심리적 충격은 컸지만 파괴는 1940~1941년 블리츠보다 작았고, 큰 피해에도 민간인의 사기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처칠(Winston Churchill)은 그 시절을 두고 "긴장은 더 오래갔다. 새벽은 안도를, 구름은 위안을 주지 않았다"고 남겼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은 V-2의 장비와 문서, 기술자를 앞다퉈 가져갔습니다. 미국은 첫 V-2 발사 두 달여 뒤인 1944년 11월 15일에 이미 제너럴 일렉트릭과 노획 V-2를 시험할 계약을 맺어 두었습니다. 1945년 5월 미군이 미텔베르크를 잠시 차지한 동안, V-2 약 100기분의 부품이 미국으로 실려 갔습니다.

사람도 건너갔습니다. 폰 브라운은 1945년 9월 미 육군과 계약해 미국에 왔습니다. 페이퍼클립 작전(Operation Paperclip)으로 함께 온 사람은 NASM 기록으로 118명, NASA 기록으로 120명입니다.

1946년 4월 16일 뉴멕시코 화이트샌즈 시험장에서 미국의 첫 노획 V-2가 발사됐습니다. 화이트샌즈와 플로리다 케이프커내버럴에서 V-2는 모두 67번 날았습니다. 1946년 10월 24일 발사에서는 65마일 높이에서 지구를 영상으로 찍었고, 마지막 노획 V-2 비행은 1951년 6월 28일이었습니다.

다른 나라도 V-2를 가져다 썼습니다. 영국은 1945년 10월 백파이어 작전(Operation Backfire)으로 독일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V-2 세 발을 시험 발사했습니다. 프랑스는 볼프강 필츠(Wolfgang Pilz) 등 V-2 연구자를 데려가 첫 액체 연료 미사일을 만들었습니다.

소련은 1946년 10월 독일 기술자와 가족 수천 명을 강제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1947년 10월 30일 다시 조립한 V-2를 처음 쏘았고, 1948년 9월 17일 R-1 발사에 처음 성공했습니다.

V-1도 바다를 건넜습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영국이 건넨 잔해 부품으로 V-1을 베끼기 시작해, JB-2라는 미국판을 1,000기 넘게 만들었습니다. 실전에는 쓰이지 않았지만 육군 항공대와 해군에 미사일 경험을 주었고, 해군판 룬(Loon)은 뒤에 태평양에서 잠수함에서도 쏘았습니다.

펄스제트는 전후 몇 해 동안 값싼 미사일과 표적 무인기에 쓰였습니다. 하지만 높은 고도와 빠른 속도에서는 쓸 수 없어 곧 밀려났습니다.

로켓 쪽은 더 멀리 갔습니다. 소련은 1950년대 중반 전혀 다른 세대의 로켓으로 넘어갔지만, 그 전에 V-2를 다루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여러 나라가 고쳐 만든 V-2를 몇 해 동안 쏘았고, 이 경험은 핵을 단 다음 세대 탄도미사일로 가는 길을 닦았습니다. 그다음 이야기는 ICBM 글로 이어집니다.

폰 브라운의 팀은 1950년 앨라배마 헌츠빌로 옮겼고, 1969년에는 그가 설계한 로켓이 미국 우주인을 달에 실어 갔습니다. IWM 영상은 그를 역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부릅니다. 미텔베르크의 생산 책임자였던 루돌프는 1984년, 법무부가 그 일을 들어 시민권 박탈 심리를 걸자 맞서지 않고 미국을 떠났습니다. 로켓의 역사와 지하 공장의 역사는 이렇게 전쟁 뒤에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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