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6 nm 펌프 빛을 받는 이터븀 광섬유는 입맛이 까다롭습니다. 2024년 SPIE 학회에 실린 nLIGHT 연구진의 초록은 이터븀 도핑 광섬유의 흡수(absorption) 띠가 976 nm 근처에서 5 nm보다 좁고, 봉우리 둘레에서 가파르게 떨어진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펌프를 맡은 레이저 다이오드(laser diode, LD)의 파장(wavelength)은 칩이 데워지고 식을 때마다 움직이려 합니다.
이 둘을 이어 주는 작은 유리 조각이 체적 브래그 격자(volume Bragg grating, VBG)입니다. 이 글은 펌프 파장이 왜 흔들리면 안 되는지, 유리 속 무늬가 어떻게 한 파장만 골라 되돌리는지, 그 되돌린 빛이 어떻게 다이오드의 파장을 붙잡는지를 차례로 따라갑니다. 얻는 것과 치르는 것, 1990년대 말부터의 흐름, 칩 속 격자라는 다른 길도 함께 살핍니다.
펌프 파장이 흔들리면
펌프 다이오드(pump diode)가 쓸모 있는 까닭 하나는 스펙트럼이 좁다는 데 있습니다. 다이오드 배열은 보통의 섬광등보다 스펙트럼이 훨씬 좁아서 고체 레이저의 흡수선에 바로 맞출 수 있고, 그만큼 펌프 흡수가 효율적이고 열이 덜 납니다. 이 이야기는 「펌프 다이오드: 전기를 빛으로 바꾸는 부품」에서 자세히 풀었습니다.
맞춰 놓은 파장이 옮겨 가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흡수선이 좁은 고체 레이저에서는 다이오드 펌프의 광 주파수를 안정화하지 않으면 상당한 초과 잡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흡수 띠가 좁고 가장자리가 가파를수록, 펌프 파장이 조금만 비켜 가도 흡수되는 몫이 크게 바뀝니다.
그래서 펌프 다이오드 제품에는 "파장 안정화"라는 말이 자주 붙습니다. nLIGHT의 파장 안정화 제품은 넓은 온도와 전류 범위에서 스펙트럼이 고정되도록 만든 것으로, 펌핑의 흡수를 고르게 높게 지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파장을 붙잡는 방법은 여럿이고, 그 가운데 오래 쓰여 온 것이 칩 바깥에 VBG를 두는 방식입니다.
브래그 반사: 겹겹의 층이 한 색만 되돌린다
VBG를 이해하려면 브래그 거울(Bragg mirror)부터 보는 편이 쉽습니다. 레이저에 흔히 쓰는 고반사 거울은 굴절률이 높은 층과 낮은 층을 번갈아 기판 위에 쌓은 것입니다. 이런 거울은 브래그 파장(Bragg wavelength)이라는 한 파장에서 반사율이 가장 높습니다.
반사가 잘되는 곳은 브래그 파장 하나만이 아니라 그 둘레의 일정한 파장 범위입니다. 이 범위를 저지 대역(stop band)이라고 부르고, 반사율은 그 가장자리에서 가파르게 떨어집니다. 브래그 파장은 층 한 쌍의 광학 두께로 정해지며, 그 두 배입니다.
계단 하나하나에 발을 맞춰 걷는 행렬을 떠올리면 비슷합니다. 걸음 폭이 계단 간격과 맞을 때만 모두가 같은 박자로 움직입니다. 실제로는 사람이 아니라 빛의 파동이고, 박자를 맞추는 것은 층의 굴절률과 간격입니다.
유리 덩어리 속에 새긴 무늬
브래그 거울은 얇은 층을 표면에 입힌 것입니다. VBG는 같은 생각을 유리 덩어리의 부피 속으로 옮겼습니다. 굴절률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매질이라는 점은 같지만, 무늬가 표면의 막이 아니라 유리 안쪽에 들어 있습니다.
이 무늬를 새기는 재료로 널리 알려진 것이 광열굴절(photo-thermo-refractive, PTR) 유리입니다. 여러 성분이 섞인 규산염 광학 유리로, 자외선을 쬔 뒤 열처리를 거치면 굴절률이 바뀝니다. 이 기술의 뿌리는 미국 센트럴플로리다대학(UCF)의 광학·레이저 연구교육센터(CREOL)입니다.
격자가 유리 안에서 어떤 각도로 놓였는지에 따라 쓰임이 갈립니다. 격자는 회절 각과 유리판 속 방향에 따라 반사형, 투과형, 처프형으로 나뉩니다. 다이오드 파장 잠금용으로 OptiGrate가 내놓은 것은 반사형입니다.
되돌린 빛으로 파장 붙잡기
반사형 VBG를 다이오드 앞에 두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칩에서 나온 빛 가운데 격자의 좁은 반사 대역에 드는 빛만 칩으로 되돌아갑니다. 칩은 되돌아온 그 파장에서 발진하려 하고, 결과적으로 다이오드의 파장이 격자가 정한 자리에 묶입니다.
격자는 이렇게 다이오드 바깥에서 공진기(optical resonator)의 한쪽을 맡습니다. 2005년 UCF와 OptiGrate 연구진의 SPIE 논문에서는 PTR 유리의 VBG가 고출력 반도체 레이저 다이오드의 외부 공진기 소자로 쓰였습니다. 반사형 격자로 최대 75 K의 온도 변화에서도 파장을 100 pm 안쪽으로 붙잡았고, 다이오드 바의 스펙트럼도 좁히고 안정화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수동 소자(passive element)만으로 얻은 결과였습니다.
OptiGrate는 이런 격자를 레이저의 출력 결합기로 쓰면 출력을 줄이지 않고도 스펙트럼을 좁히고 안정화했다고 설명합니다. 반사형 제품의 쓰임 목록에도 "다이오드 레이저 파장 잠금"이 들어 있습니다.
얻는 것과 치르는 것
얻는 것은 좁고 덜 흔들리는 스펙트럼입니다. 2004년 Optics Letters에 실린 PD-LD 연구진의 논문은 고출력 다중 모드 레이저 다이오드와 배열에서 VBG로 스펙트럼 선폭(linewidth)을 8분의 1로 좁히고 방출 파장의 안정성을 30배 높였다고 보고했습니다. 그 쓰임 가운데 하나가 고체 레이저와 금속 증기 레이저를 펌핑하는 다이오드의 안정화입니다.
회사 자료도 같은 쪽을 가리킵니다. Coherent는 자사 976 nm 펌프 다이오드가 VBG 잠금으로 파장에 미치는 열의 영향을 더 줄이고, 20~50 °C 범위에서 능동 온도 제어 없이 잠금이 되었다고 백서에 적었습니다. 온도를 맞추는 장치를 덜 써도 된다는 뜻이지만, 회사가 자기 제품을 두고 한 설명이라는 점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치르는 것도 있습니다. 되먹임은 칩에 빛을 되돌려 넣는 일이라 지나치면 탈이 납니다. Laserline 연구진은 2024년 SPIE 초록에서 표준 VBG 구성으로는 3,000시간까지 되먹임에 따른 고장이나 열화를 보지 못했지만, 되먹임을 늘리자 예상대로 고장이 생겼다고 보고했습니다.
부품이 하나 더 붙는다는 점도 대가입니다. nLIGHT 연구진은 외부 VBG가 펌프 패키지에 값과 질량과 부피를 더하고, 고에너지 레이저(high-energy laser, HEL)에는 그만큼 효율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이 견줌은 칩 속 방식을 내놓은 쪽의 판단이라는 점도 기억해 둘 만합니다.
1990년대 말의 유리에서 오늘의 펌프까지
OptiGrate에 따르면 PTR 유리의 VBG로 고체 레이저의 세로 모드를 고르는 방식은 1990년대 말 이 회사에서 시연되었습니다. 이 시연이 겨냥한 것은 펌프 다이오드가 아니라 레이저 공진기 안에서 원하는 모드만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VBG는 다이오드의 파장을 붙잡는 데로 쓰임이 넓어졌습니다. 2004년의 다중 모드 다이오드·배열 논문과 2005년의 다이오드 바 연구가 그 무렵입니다.
VBG는 다른 쪽으로도 쓰였습니다. OptiGrate는 2008년에 대구경 VBG 결합기 네 개로 연속파 이터븀 광섬유 레이저(fiber laser) 빔 다섯 개를 합쳐, 회절 한계에 가까운 한 빔으로 750 W 넘게 냈다고 소개합니다. 파장이 다른 빔을 한 줄기로 모으는 이 방식은 「회절격자: 여러 색을 한 빔으로 모으는 소자」에서 이어 볼 수 있습니다.
2017년 5월에는 광섬유 레이저 회사 IPG Photonics가 OptiGrate를 인수했습니다. OptiGrate는 그전부터 IPG에 부품을 대던 회사였습니다.
최근의 펌프는 출력이 훨씬 커졌습니다. Laserline은 2024년에 969 nm에서 4 kW 넘는 파장 안정화 다이오드 스택을 보고했고, BWT 연구진은 2025년에 VBG를 써서 Yb:YAG 디스크 레이저용 969 nm 펌프를 내놓았습니다. 969 nm는 Yb:YAG의 영 포논선 흡수 봉우리에 있는 파장이라, 파장을 그 자리에 붙잡아 두는 일이 곧 흡수 효율과 이어집니다.
칩 속 격자, 그리고 레이저 무기
VBG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격자를 칩 바깥이 아니라 칩 안에 넣는 길도 있습니다. FBH 연구진은 2024년에 칩 안에 격자를 넣어 안정화한 약 970 nm 다이오드로 펌프 모듈 시제품을 만들었고, 외부 VBG가 필요 없는 단순한 구성을 내세웠습니다.
같은 해 nLIGHT 연구진은 반도체 칩 안에 파장 선택 소자를 넣어, 칩이 원하는 파장에서만 발진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초록이 겨냥한 쓰임은 분명합니다. 초록은 이터븀 도핑 광섬유 레이저와 증폭기를 분광 결합이나 결맞음 결합으로 합치는 고에너지 레이저(HEL)의 유력한 광원으로 꼽고, 그런 광섬유를 976 nm에서 펌핑하는 일이 필수가 되었다고 봅니다. 필요할 때 빔을 바로 켜는 "즉시 켜짐"도 같은 초록이 무엇보다 강조한 요구입니다.
nLIGHT는 국방 쪽 제품군에도 지향성 에너지(directed energy)용 파장 안정화 976 nm 제품을 올려 두었습니다. 펌프 파장을 붙잡는 일이 실험실의 정밀함을 넘어 레이저 무기의 효율과 크기, 켜는 속도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는 뜻입니다. 외부 VBG와 칩 속 격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널리 쓰일지는 공개 자료만으로 가늠하기 어렵고, 지금은 두 길이 함께 연구되고 있습니다.
칩에서 나온 빛이 발사 장치까지 가는 길 전체는 「레이저 무기 한 대 따라가기: 반도체 칩에서 발사 장치까지」에서 한 번에 따라가 볼 수 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펌프 모듈: 칩의 빛을 광섬유 한 가닥에 담기」: 파장을 붙잡은 빛을 광섬유에 모으는 부품입니다.
- 「광섬유 브래그 격자(FBG): 광섬유 안에 새긴 거울」: 같은 브래그 반사를 광섬유 코어 속에 새긴 소자입니다.
- 「학회로 본 고출력 반도체 레이저(펌프 LD) 흐름 2022~2027」: 파장 안정화가 학회 발표에서 어떻게 늘어났는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