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8월 2일, 이라크군 10만 명이 국경을 넘어 쿠웨이트로 들어갔습니다. 나라 전체가 이라크군 손에 들어가기까지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곱 달이 채 안 된 1991년 2월 28일, 이라크군은 쿠웨이트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그 일곱 달에는 두 개의 작전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병력을 모은 다섯 달 남짓의 '사막의 방패(Desert Shield)'와, 공습과 지상전으로 이어진 '사막의 폭풍(Desert Storm)'입니다.

전쟁은 왜 시작됐고, 무엇을 남겼을까요? 미 국무부 역사실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문, 미 의회조사국(CRS)·회계감사원(GAO) 보고서, 미 해군 보고서, 호주 전쟁기념관 자료로 침공에서 정전까지를 따라갑니다.

사상자처럼 자료마다 다른 숫자는 어느 기관의 것인지 함께 적습니다.

빚과 국경: 1990년 여름까지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났을 때, 이라크는 나라를 지켜 냈지만 큰 빚을 안았습니다. 전쟁 비용을 주로 빌려서 댔기 때문입니다. 1990년 걸프 지역 채권국에 진 빚이 370억 달러쯤이었습니다.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에 그 빚을 없애 달라고 했습니다. 이란의 팽창에서 아라비아반도를 지켜 준 값으로 쳐 달라는 논리였지만 답은 오지 않았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이 거절이 부유하지만 군사력이 약한 이웃 쿠웨이트를 위협하기로 한 후세인의 결정에 한몫했다고 봅니다.

다툼은 돈만이 아니었습니다. 와르바섬과 부비얀섬을 누가 갖느냐는 두 나라 영토 분쟁의 오랜 쟁점이었습니다. 1961년 영국이 쿠웨이트 보호를 끝내자 당시 이라크 총리 카심은 쿠웨이트가 옛 오스만 제국의 바스라주였다며 이라크의 일부라고 주장했습니다. 영국군이 쿠웨이트에 들어오자 이라크는 물러섰습니다.

1990년 7월, 후세인은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가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생산 할당량을 어기고 원유를 많이 뽑아 값을 떨어뜨렸다고 비난했습니다. 국경에 걸친 루마일라 유전에서 쿠웨이트가 석유를 훔쳐 간다고도 했고, 두 섬을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7월 초 걸프에서 기동을 벌여 경고하면서도, 이라크와의 관계는 이어 가려는 유화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1990년 8월 2일: 몇 시간 만의 점령

미국은 후세인의 위협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 침공까지는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쿠웨이트의 저항이 일부 있었으나 곧 눌렸습니다.

쿠웨이트 왕가 사람들은 사우디아라비아로 피해 국제 지원을 호소했습니다. 8월 28일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자국의 열아홉 번째 주가 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라크군은 철수를 거부한 채 쿠웨이트를 약탈하고 기반 시설을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연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1980~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결의 660, 8월 6일 결의 661(제재), 8월 7일 미군 추가 배치 시작, 8월 28일 이라크의 합병 선언, 11월 29일 결의 678(1월 15일 시한), 1991년 1월 15일 시한, 1월 16~17일 공습 시작(자료에 따라 하루 다름), 2월 24일 지상전 시작, 2월 28일 전투 끝, 3월 2일 결의 686, 4월 3일 결의 687. 1990년 8월 7일~1991년 1월 15일은 사막의 방패, 그 뒤는 사막의 폭풍으로 색을 나눴다
1980~1991년, 걸프 전쟁으로 이어진 일과 주요 날짜 (도표)(도표)

안보리 결의: 철수 요구에서 무력 승인까지

침공 당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 660을 냈습니다. 이라크의 침공을 규탄하고, 모든 병력을 8월 1일에 있던 자리로 즉시, 무조건 물리라는 요구였습니다. 표결은 찬성 14, 반대 0이었고 예멘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나흘 뒤 안보리는 결의 661로 이라크와의 무역을 막는 금수를 정했습니다. 표결은 찬성 13, 반대 0이었고 쿠바와 예멘이 기권했습니다.

8월 9일에는 결의 662가 어떤 형태의 쿠웨이트 합병도 법적 효력이 없다고 선언했고, 몇 주 안에 이라크의 바닷길을 막는 봉쇄가 뒤따랐습니다. 침공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넓었고 거의 한목소리였습니다.

이라크가 철수를 거부하는 동안 미국은 다음 단계를 준비했습니다. 부시 정부는 10월 30일까지 필요하면 무력으로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했고, 미군을 늘리며 유엔에 무력 사용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11월 29일의 결의 678은 유엔 헌장 7장에 따른 결의였습니다. 이라크가 1991년 1월 15일까지 앞선 결의들을 다 이행하지 않으면, 쿠웨이트 정부와 협력하는 회원국이 "모든 필요한 수단"을 쓸 수 있게 했습니다. 결의문은 이를 "선의의 휴지기"로 주는 마지막 기회라고 불렀습니다.

표결은 찬성 12, 반대 2(쿠바·예멘), 기권 1(중국)이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결의 678을 이라크를 물러나게 하려는 무력 사용 승인으로 설명하고, 이라크에 45일의 유예가 주어졌다고 적습니다.

흐름도. 유엔 안보리 결의 다섯 개를 상자와 화살표로 이었다. 660(1990년 8월 2일): 침공 규탄, 즉시 무조건 철수 요구, 찬성 14. 661(8월 6일): 무역 금수, 찬성 13·반대 0·기권 2(쿠바·예멘). 678(11월 29일): 1월 15일까지 이행하지 않으면 모든 필요한 수단, 찬성 12·반대 2·기권 1. 686(1991년 3월 2일): 정전 조건. 687(4월 3일): 비무장 지대(이라크 쪽 10 km, 쿠웨이트 쪽 5 km), 화학·생물 무기와 사거리 150 km 넘는 탄도미사일 폐기, 핵무기 금지, UNSCOM과 IAEA 사찰, 피해 배상 책임, 정식 정전
철수 요구에서 정식 정전까지, 안보리 결의 다섯 개의 흐름 (도표)(도표)

사막의 방패: 다섯 달 동안의 집결

침공 직후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는 반도를 지키려고 미군을 사우디에 배치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미 해군의 1991년 요약 보고서에 따르면 대통령은 8월 7일부터 남서아시아에 병력을 더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날부터 1월 15일 시한까지는 162일, 다섯 달 남짓입니다.

모인 병력은 컸습니다. CRS가 정리한 국방부 집계에서 작전 지역 안에서 복무한 미군은 현역 58만 4,342명과 소집된 예비군 11만 208명, 합쳐 69만 4,550명입니다. 이 숫자는 사막의 방패와 사막의 폭풍을 함께 센 것입니다.

미국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연합에는 아랍 나라 여럿을 포함해 34개국이 병력을 보냈습니다. 호주 해군은 유엔 제재를 집행하는 다국적 해군의 차단 부대에 프리깃 2척과 보급함 석세스를 먼저 보냈습니다.

바다에서는 이라크의 해상 무역을 막는 차단이 이어지며 이라크군의 보급을 끊었습니다. 이 전쟁을 받친 물자는 90% 넘게가 배로 실려 왔고, 초기 몇 달의 의료 자원도 대부분 해군이 댔습니다. 물자를 실어 나르고 장비를 계속 쓰게 하는 일은 군수·보급·정비: 성능이 좋아도 계속 쓸 수 있어야 한다에서 따로 다룹니다.

사막의 폭풍: 공중전과 나흘의 지상전

1월 15일 시한이 지나자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이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시작 날짜는 자료마다 하루 다릅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1월 16일로, 호주 전쟁기념관은 1월 17일로 적습니다.

공습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43일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이 공중전에서 왜 스텔스기와 정밀유도무기가 주목받았는지는 「걸프전 공중전: 스텔스기와 정밀유도무기가 주목받은 이유」에서 따로 다룰 주제입니다.

후세인은 보복으로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연합군 기지에 미사일을 쏘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맞대응하지 않았습니다.

2월 24일, 한 달 넘는 공습 끝에 연합 지상군이 쿠웨이트와 이라크 안의 이라크군 진지로 나아갔습니다. 지상전은 나흘 이어졌고, 연합군은 쿠웨이트시를 해방하며 이라크군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바그다드 라디오는 이라크군에 1990년 8월 이전 위치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알렸습니다. 그 이틀 뒤 연합군은 전투를 멈추고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2월 28일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라크는 자기 땅 안에 상당한 군사력을 그대로 남겼습니다.

기간 막대. 1990년 8월부터 1991년 3월까지의 같은 시간 축 위에 막대 세 개를 그렸다. 사막의 방패 집결: 1990년 8월 7일~1991년 1월 15일, 162일. 공습: 1991년 1월 16~17일부터 2월 28일까지, 호주 전쟁기념관 기준 43일. 지상전: 2월 24일부터 나흘. 지상전 막대가 공습 막대 끝에 겹쳐 있다
다섯 달 남짓의 집결, 43일의 공습, 나흘의 지상전을 같은 축에 놓았습니다 (도표)(도표)

무기와 수송: 무엇이 주목받았나

바다에서 쏜 미사일도 이 전쟁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순양함, 구축함, 전함, 잠수함이 홍해와 페르시아만에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모두 288발 쏘았다고 미 해군 보고서는 적습니다.

하늘에서는 미사일과 미사일이 맞섰습니다. 이라크가 쏜 미사일에는 이라크가 고친 스커드, 곧 알 후세인이 있었습니다. 미 육군은 이를 막으려고 지대공 유도미사일 체계 패트리엇을 남서아시아에 보냈습니다.

패트리엇은 공습에서 미군을 지키려고 만든 체계로, 항공기와 순항미사일에 이어 단거리 탄도미사일까지 상대하도록 발전해 왔습니다. 그래도 알 후세인처럼 사거리를 늘린 빠른 탄도미사일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설계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얼마나 막았을까요? 육군의 평가부터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초기 보고서는 사우디와 이스라엘에서 교전한 스커드의 약 96%를 파괴했다고 했습니다. 정보가 쌓이자 사우디 80%, 이스라엘 50%로 낮췄고, 1992년 4월 수정 평가에서는 사우디 70%, 이스라엘 40%로 보았습니다.

미 회계감사원(GAO)이 짚은 것은 숫자보다 근거였습니다. 육군은 시험장이 아니라 전장에서 패트리엇을 운용했고, 몇 발을 맞혔는지 확정할 성능 자료를 모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확정할 방법이 없습니다. 가장 강한 증거가 받치는 교전은 약 9%, 육군이 높은 확신을 둔 탄두 파괴는 약 25%였습니다.

같은 무기를 두고 96%와 9%가 함께 기록에 남았습니다. 96%는 육군이 처음 내놓았다가 스스로 낮춘 값이고, 9%는 GAO가 전체 교전 가운데 탄두 파괴의 가장 강한 증거가 있다고 본 몫입니다.

정전과 결의 687

3월 2일 안보리는 결의 686으로 정전 조건을 정했습니다. 이라크는 제재와 전쟁 피해 배상, 쿠웨이트에서 가져간 재산의 반환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4월 3일의 결의 687은 훨씬 길고 자세합니다. 국경을 따라 이라크 쪽으로 10 km, 쿠웨이트 쪽으로 5 km 들어간 비무장 지대를 두었습니다. 화학·생물 무기와 사거리 150 km가 넘는 탄도미사일은 국제 감독 아래 없애게 했고, 이를 사찰할 유엔 특별위원회(UNSCOM)가 이 결의로 세워졌습니다.

이라크는 핵무기와 핵무기에 쓸 수 있는 물질을 얻거나 개발하지 않기로 해야 했고, 핵 능력의 현장 사찰은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맡았습니다.

이라크는 침공과 점령으로 생긴 피해에 국제법상 책임을 지게 되었고, 여기에는 환경 피해와 자원 고갈도 들어갔습니다. 이라크가 이 조항들을 받아들인다고 공식 통보하면 그때 정식 정전이 효력을 낸다고 결의는 정했습니다. 미국은 1990년 결의 661의 무역 금수가 그대로 유지되게 하려 했습니다.

전쟁 뒤 이라크 안은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남부에서 시아파의 봉기가, 북부에서 쿠르드의 소요가 일어났지만 결국 후세인 정권에 진압되었습니다. 사찰과 제재가 이어진 12년 뒤의 이야기는 「이라크 전쟁(2003): 바그다드까지 3주」의 몫입니다.

숫자로 남은 것, 숫자로 다 못 남은 것

미군 사망자부터 봅니다. CRS가 정리한 국방부 집계로 사막의 방패와 사막의 폭풍을 합친 미군 사망자는 383명입니다. 사막의 방패 기간에도 적대 행위가 아닌 원인으로 84명이 숨졌습니다.

사막의 폭풍의 적대 행위 사망은 같은 보고서의 두 표에 148명과 147명으로 한 명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2020년 7월 16일 기준 표에서 전사는 143명, 치명상이 아닌 부상은 467명입니다. 연합군 전체로는 166명이 숨졌고 그 가운데 많은 수가 아군 사격 때문이었다고 호주 전쟁기념관은 적습니다.

이라크 쪽 숫자는 무엇을 세느냐에 따라 크게 갈립니다. 이 글에서 확인한 자료 가운데 이라크 사망 총수를 적은 곳은 호주 전쟁기념관 하나이고, 적어도 10만 명의 이라크인이 죽었다고 적습니다. 군인과 민간인을 나누지 않은 한 기관의 추정입니다.

베스 오즈번 다폰테는 국제적십자위원회 학술지 논문에서 1991년 걸프전을 예로 전쟁 사망을 다섯 갈래로 나눴습니다. 전쟁 중의 군인, 전쟁의 직접 피해로 숨진 민간인, 간접 피해로 숨진 민간인, 그리고 전쟁 뒤 폭력에 숨진 민간인과 군인입니다.

그 가운데 직접 피해 민간인 사망을 인권 단체의 보고와 이라크 보건부 집계로 세어 보니 3,500명이었고, 두 자료 모두 적게 셌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10만과 3,500은 세는 범위가 다른 숫자라서 한 줄에 놓고 견줄 수 없습니다.

전쟁은 땅과 하늘에도 흔적을 남겼습니다. 1991년 2월부터 11월까지 이라크군이 불을 붙인 유정들이 짙은 그을음과 가스 구름을 만들었습니다. 미 보훈부는 이 연기가 눈·코·목을 자극하고 기침을 일으킬 수 있지만 대부분 일시적이며,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장기 건강 문제의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돌아온 군인 가운데에는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만성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피로, 두통, 관절통, 소화 불량, 불면, 어지럼, 호흡기 질환, 기억 문제가 함께 나타납니다. 증상이 사람마다 크게 달라 보훈부는 "걸프전 증후군" 대신 "의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만성 다증상 질환"이라는 이름을 쓰고, 6개월 넘게 이어진 일부 증상은 원인과 상관없이 걸프전 복무와 관련 있다고 봅니다.

전투는 43일 만에 멈췄습니다. 그러나 결의 687의 사찰과 제재, 참전 군인의 병처럼 정전 뒤에도 오래 이어진 일이 이 전쟁의 다른 절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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