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2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한 메모는 라오스 동부 산악 지대의 관측 지점 한 곳을 지난 트럭을 셌습니다. 최근 열흘 동안 하루 평균 약 17대였습니다. 지난해에는 여섯 달 건기 내내의 평균이 그 정도였습니다. 열흘 만에 한 철의 평균에 닿은 것입니다.

이 트럭들이 달린 길을 미국 사람들은 호찌민 루트(Ho Chi Minh Trail)라고 불렀습니다. 북베트남에서 이웃 나라 라오스를 거쳐 남베트남으로 사람과 물자를 나른 보급로입니다. 이름은 정글 속 오솔길 하나를 떠올리게 하지만, 미국 정부의 당대 문서가 그리는 모습은 훨씬 넓습니다.

이 글은 미 국무부 역사실이 펴낸 외교 문서집 FRUS(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를 따라갑니다. 길이 어떻게 커졌는지, 미국이 폭격과 센서 장벽으로 그것을 어떻게 끊으려 했는지, 그리고 그 효과를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셈하고 다퉜는지를 봅니다. 숫자는 모두 당시 미국 기관의 추정입니다.

길 하나가 아니라 그물

1965년 12월의 CIA 메모는 라오스 남쪽의 길쭉한 지역인 팬핸들(panhandle)이 몇 해 동안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의 전쟁을 돕는 주된 길이었다고 적었습니다. 그 길은 도로, 강, 오솔길, 보급 집적소, 기지가 이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땅의 일부는 이미 네 해 넘게 공산 측 손에 있었습니다.

"호찌민 루트"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범위도 문서마다 달랐습니다. 1964년 10월 미 군사지원사령부(MACV)의 연구는 라오스·캄보디아 국경을 따라가는 "주 회랑(Main Corridor)"과, 그 동쪽으로 약 100 km 떨어져 나란히 가는 "이른바 호찌민 루트"를 따로 불렀습니다. 1963년 초부터는 내려가는 무리가 모두 주 회랑을 썼고 호찌민 루트는 전부나 일부가 버려졌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두 해 뒤인 1966년 9월의 CIA 메모는 같은 이름을 라오스 팬핸들을 지나는 복잡한 도로망 전체에 붙였습니다. 오늘날 이 이름이 흔히 뜻하는 것도 이쪽입니다. 같은 이름 아래 한 갈래 길에서 도로망 전체로 뜻이 넓어진 것입니다.

호찌민 루트를 두 칸으로 견준 개념도. 왼쪽 칸 '이름이 주는 느낌'은 북쪽 네모와 남쪽 네모를 곧은 선 하나로 잇고, 아래에 '선 하나를 끊으면 흐름이 멈출까?'라는 물음이 있다. 오른쪽 칸 '기록이 그리는 모습'은 같은 두 네모 사이를 굵은 도로 두 갈래, 그 사이를 잇는 우회로, 점선의 강, 짧은 오솔길이 잇고, 길 위에 보급 집적소·중계소를 뜻하는 검은 네모 세 개가 있다. 아래 범례는 도로, 우회로, 강, 오솔길, 보급 집적소다. 1965년 CIA와 1968년 합참의 서술을 바탕으로 했고, 지도가 아니며 축척·실제 장소·실제 길이 없다
이름은 길 하나 같지만, 기록이 그리는 것은 우회로가 많은 그물입니다. 지도가 아닌 개념도입니다 (도표)(도표)

그물이라는 점이 왜 중요할까요? 길 하나라면 한 곳을 끊으면 흐름이 멈춥니다. 그물에서는 한 갈래가 막혀도 다른 갈래로 돌아갑니다.

실제로는 날씨와 땅, 트럭과 사람의 수가 모두 얽혀 있어서 그림처럼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뒤에 나올 차단 작전의 이야기에서 이 차이가 되풀이해 나옵니다.

오솔길에서 트럭 길로

시작은 작았습니다. 1964년 MACV 연구는 1959년에 북베트남이 몇 부대를 라오스로 보내 남부 라오스의 베트남 국경 쪽을 정리했고, 이어 북베트남군 제70수송단이 북베트남 남부와 남베트남 북부를 잇는 중계소를 세웠다고 적었습니다. 약 400명으로 시작한 이 부대는 1964년에는 약 2,000명과 짐꾼이 되어 중계소 약 20곳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 길로 사람이 얼마나 내려갔을까요? 같은 연구는 포로 신문과 노획 문서로 셈해 34,000명 넘게 남베트남에 들어왔다고 보았습니다. 정보가 해에 따라 10%에서 66%까지, 평균 약 30% 모자란다고 보고, 1959년부터 그때까지의 합계가 45,000명에 이를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추정의 빈틈을 스스로 적어 둔 숫자입니다.

1965년에는 길의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그해 12월 CIA 메모에 따르면 북베트남은 처음으로 흙을 파고 옮기는 중장비를 팬핸들의 도로 공사에 보냈고, 여름 우기에도 공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트럭이 전보다 100마일(약 160 km) 더 남쪽, 다낭 남동쪽의 남베트남 국경까지 갈 수 있게 되었고, 비 오는 날씨에 길이 끊기는 일도 줄었습니다.

길을 지키는 방법도 달라졌습니다. 대체로와 우회로를 여러 개 지어 공습에 덜 약하게 했고, 항공 사진에는 새 도로 한 구간 위를 덩굴로 덮은 시렁이 보였습니다. 수송대는 거의 밤에만 움직였습니다. 사람이 걸어 나르던 길이 트럭이 다니는 군수(logistics) 체계로 커진 것입니다.

중립국 라오스를 지나는 길

이 길이 남베트남으로 곧장 내려가지 않고 라오스를 돌아간 데에는 정치가 걸려 있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당선 뒤 처음 맞은 외교 위기는 베를린도 쿠바도 아닌 라오스였습니다. 1961년, 파테트라오가 5월 3일 휴전 제안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걸린 사이에 북베트남군은 남부 라오스에서 공세를 폈습니다. 교차로 마을 체폰과, 호찌민 루트를 안남산맥 서쪽으로 넓히는 데 필요한 땅을 차지했습니다.

1962년 7월 23일 제네바 회의는 라오스 중립 선언에 합의했습니다. 선언과 의정서는 모든 외국 정규군과 비정규군, 준군사 조직, 군사 인원이 라오스에서 나가라고 했고, 인도·폴란드·캐나다로 된 국제감시위원회가 이를 감독하게 했습니다.

협정은 빨리 무너졌습니다. 북베트남군은 8월 27일 15명을 상징적으로 철수시키고 10월 9일 철수를 마쳤다고 알렸지만, 남부 라오스의 장악을 계속 넓혀 남베트남 전장으로 가는 보급선을 지켰습니다. 미국은 협정대로 군사 고문단을 철수시켰고, 그 뒤 북베트남의 위반에 맞서 몽족·태국 병력과 수바나 푸마 정부를 지원했습니다. 라오스는 이름으로는 중립국이었지만, 그 동쪽 산악 지대는 남베트남 전쟁의 뒷길이 되었습니다.

1966년 9월 CIA가 303위원회에 보낸 메모는 1965년 가을부터 북베트남 인원 약 7만 명이 라오스에 투입되었다고 추정했습니다. 이 숫자는 라오스 북부를 장악하는 일과 팬핸들의 도로망을 만들고 지키는 일, 두 가지를 합친 것입니다.

폭격으로 끊으려 하다

미국이 고른 첫 수단은 하늘에서 길을 끊는 차단(interdiction)이었습니다. 1967년 11월 29일 휠러 합참의장이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에게 보낸 전보는 그 무렵의 분위기를 보여 줍니다. 국방정보국(DIA)은 그달 팬핸들에서 파괴된 트럭을 약 600대로 확인했고, 결과의 약 95%는 밤에 얻은 것이었습니다.

같은 숫자를 두고 해석은 갈렸습니다. 주라오스 미국 대사 설리번은 건기의 화물이 남쪽 9번 도로 부근까지 거의 오지 못하고 북베트남이 곧 트럭이 모자랄 것으로 보았습니다. DIA는 그 결론이 낙관적이라고 했습니다. 11월 1~25일에 목격된 트럭이 파괴·손상된 트럭보다 약 5배 많았고, DIA는 이 구간에서 300대 넘는 트럭이 다니며 약 2,000대가 뒤를 받친다고 추정했습니다.

1968년 11월, 미국은 북베트남 본토 폭격을 멈추고 그 항공력을 라오스로 돌렸습니다. 11월 4일 주라오스 대사관 전보는 팬핸들의 출격이 하루 약 100회에서 250회로 늘었고, Commando Hunt 등이 시작되면 더 늘 것이라고 적었습니다.

11월 20일 합참의장 대행 매코널의 메모는 왜 이렇게 많은 항공기가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라오스에는 우회로와 다른 길이 많아서 폭격으로 완전히 막을 수 있는 도로가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길 그물 전체에 한 달 약 12,000회의 출격을 쓰는 계획을 11월 15일에 시작했습니다.

그 효과는 얼마였을까요? 1968년 12월 31일 설리번 대사는 당시 기록으로 보면 공습이 통과량의 약 15%를 부수고 있고, 공군의 가장 큰 주장도 20%를 넘지 않는다고 적었습니다. 폭격으로 끊는다는 말과, 실제로 부순 몫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었습니다. 정밀 유도 무기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꾸려 했는지는 정밀 유도 폭탄 글에서 원리를 볼 수 있습니다.

소리를 듣는 장벽

폭격과 나란히 다른 생각도 자랐습니다. 길을 눈으로 찾기 어렵다면 귀로 듣자는 것이었습니다. 1966년 9월 15일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스타버드 국방통신국장을 제728합동임무부대장으로 정하고, 북에서 남으로 가는 사람과 물자의 흐름을 막거나 크게 줄이는 차단 체계를 남베트남과 라오스에 설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목표는 1967년 9월 15일까지 가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시서에 붙은 구상에서 차량을 막는 쪽의 첫 체계는 트럭이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따라 음향 탐지기를 두고, 순찰 항공기가 하루 24시간 그 신호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지시서는 지금보다 나은 음향 센서를 개발해야 한다고 적었고, 처음 체계의 비용을 한 해 약 8억 달러로 추정했습니다. 흐름은 센서가 듣고, 항공기가 전하고, 분석가가 읽고, 사람이 정하는 순서였습니다.

1966년 센서 장벽의 생각을 그린 도표. 위쪽에 네모 네 개가 화살표로 이어진다: 1 센서(소리나 흔들림을 느낌), 2 중계(순찰 항공기가 들음), 3 분석가(양상을 읽음), 4 사람이 정함(다음에 할 일). 그 아래 '1966년 계획: 트럭 도로를 따라 둔 듣는 장치를 순찰 항공기가 하루 24시간 지켜봄'이라는 줄이 있다. 왼쪽 아래 칸 '종이 위의 계획'에는 1966년 9월 15일 맥나마라 지시와 1967년 9월 15일 가동 목표, 첫 체계 비용 추정 한 해 약 8억 달러, 1966년 9월 17일 태평양사령관이 실용성에 의문, 1967년 1월 12일 국가 최고 우선순위, 1968년 11월 센서(Igloo White)가 라오스 항공 계획의 일부가 됨이 적혀 있다. 오른쪽 아래 칸 '센서가 기록한 것'은 MACV의 1972년 1월 전보에 실린 센서 작동 주 평균을 막대 둘로 보인다: 1971년 12월 약 3,100번, 1972년 1월 첫 두 주 5,400번. MACV가 이 증가를 라오스의 보급 이동이 빨라진 것으로 읽었다는 메모가 있다. 장치 종류·수량·위치는 없다
듣고, 전하고, 읽고, 사람이 정합니다. 1966년의 생각과 1972년 초의 기록 (도표)(도표)

군 안에서도 의문이 있었습니다. 1966년 9월 17일 합참 메모에 따르면 태평양사령관은 제시된 구상이 실제로 될지 의문을 나타냈습니다. 합참은 체계가 목표를 이룰지는 더 따져 봐야 하지만, 부품과 운용 기법을 개발하는 일은 사업 전체의 성공과 관계없이 쓸모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11월 14일 맥나마라는 존슨 대통령에게 땅 위 장벽의 서쪽에는 공중 장벽이 필요하지만 그 모습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보고했습니다.

1967년 1월 12일 대통령은 이 사업(Practice Nine)을 국가 최고 우선순위에 넣었습니다. 1968년 11월 매코널의 메모에서는 소리·진동 센서의 배치와 감시가 Igloo White라는 이름으로 라오스 항공 계획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독립된 장벽으로 시작한 생각이 폭격 작전에 정보를 대는 눈과 귀로 자리를 옮긴 것입니다.

1971년 지상 진입과 그 뒤

1971년에는 땅으로 들어가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은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전역에 걸친 공세를 명령했고, 2월 초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와 라오스로 들어갔습니다. 북베트남은 람손 719라 불린 이 라오스 진입을 예상하고 병력을 모아 두었고, 남베트남군의 철수는 무질서한 퇴각으로 무너졌습니다.

그 작전이 보급에 준 영향을 재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1971년 2월 26일 백악관 회의에서 닉슨 대통령은 루트의 통행량을 두고 DIA와 CIA가 크게 다르다는 보도가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헬름스 CIA 국장은 두 기관이 함께 일한다고 답했고, 레어드 국방장관은 DIA가 보급량을 CIA보다 높게 잡는다고 말했습니다. 3월 16일 회의는 두 기관 추정의 차이, 해마다 자료를 견주는 어려움, 람손 작전의 영향을 재는 어려움을 다시 다뤘습니다.

1959년부터 1975년까지의 연표 도표. 파란 점은 길이 커진 과정이다: 1959년 중계소 시작(처음 약 400명, 1964년 MACV 연구), 1961년 남부 라오스 전투로 길이 안남산맥 서쪽으로 넓어짐, 1965년 기계로 도로 공사를 해 트럭이 100마일 더 남쪽까지 감(1965년 12월 CIA). 주황 점은 끊으려 한 시도다: 1966년 9월 15일 맥나마라의 센서 장벽 지시(1967년 9월 15일 가동 목표), 1967년 11월 한 달에 트럭 약 600대 파괴(DIA는 목격 트럭이 손실보다 약 5배 많다고 봄), 1968년 11월 항공력이 라오스로 옮겨 감(센서 Igloo White가 새 항공 계획에 들어감), 1968년 12월 대사의 추정 약 15% 파괴, 1971년 2월 람손 719 지상 진입과 무질서한 퇴각. 회색 점은 협정과 끝이다: 1962년 7월 23일 라오스 중립 선언(외국군 철수, 곧 무너짐), 1973년 1월 27일 평화 협정 서명(루트 통행은 계속), 1975년 4월 30일 전쟁이 끝남(1975년 3월 시작된 공세 뒤). 점 사이 간격은 실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중계소 몇 곳에서 시작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숫자는 모두 당시 미국 정부의 추정입니다 (도표)(도표)

센서는 그 뒤에도 길의 움직임을 기록했습니다. 1972년 1월 20일 에이브럼스 사령관의 전보에 따르면 센서 작동의 주 평균은 1971년 12월 약 3,100번에서 1972년 1월 첫 두 주 5,400번으로 뛰었습니다. 그는 증강이 Commando Hunt VII 차단 작전으로 타격을 입었지만, 항공력이 다른 임무로 돌려져 작전이 약해졌다고 적었습니다.

북베트남은 그해 3월 말 남베트남에서 세 갈래 공세를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부활절 공세라고 부릅니다.

남은 것

1973년 1월 27일 평화 협정이 서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베트남 쪽 모두 협정을 지키지 않았고 전쟁은 이어졌습니다. 3월 15일 키신저는 주라오스 대사에게 보낸 메시지에서 호찌민 루트의 사람과 장비 이동이 여전히 높고 협정 이전의 양상을 따른다고 보았고, 이를 협정 7조와 20조 위반이라고 적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 해설은 북베트남군이 병력을 다시 세우고 보급 체계를 고친 뒤 1975년 3월 중부 고원에서 큰 공세를 시작했다고 적습니다. 4월 30일 사이공 대통령궁 문으로 전차가 들어가면서 전쟁은 사실상 끝났습니다.

라오스에는 다른 것이 남았습니다. 2016년 9월 오바마 대통령은 라오스에서 한 연설에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아홉 해 동안 미국이 라오스에 200만 톤 넘는 폭탄을 떨어뜨렸다고 말했습니다. 2차 대전 때 독일과 일본에 떨어뜨린 것을 합친 것보다 많고, 그래서 라오스는 1인당 역사상 가장 많이 폭격받은 나라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숫자는 호찌민 루트만이 아니라 라오스 전체에 대한 것입니다.

터지지 않은 폭탄도 많았습니다. 같은 연설은 그 뒤 수천 명의 라오스 사람이 밭을 일구다, 놀다가 죽거나 다쳤다고 말하고, 불발탄 제거 지원을 세 해 동안 한 해 9,000만 달러로 두 배 늘린다고 밝혔습니다. 보급로를 끊으려던 싸움의 흔적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땅속에 남아 사람들의 삶에 닿고 있습니다.

호찌민 루트는 하나의 길이라기보다 늘 고쳐지고 갈라지는 그물이었고, 미국 문서는 그 그물을 끊는 일이 숫자로 재기조차 어려웠다는 것을 스스로 적어 두었습니다. 트럭을 몇 대 부쉈는지보다, 그 숫자를 무엇으로 읽느냐를 두고 기관마다 다퉜다는 점이 이 길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 남는 대목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군수: 보급이 왜 전쟁의 속도를 정하는지 원리부터 봅니다.
  • 정밀 유도 폭탄: 넓게 뿌리던 폭격이 한 점을 노리는 무기로 바뀐 흐름입니다.
  • 이아드랑 전투와 헬기 공중기동: 같은 전쟁에서 헬기가 병력과 보급을 어떻게 실어 날랐는지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