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8월 4일 밤, 통킹만에 있던 미 해군 구축함(destroyer, DD) 터너 조이는 항공기들과 함께 두 시간 반 동안 정체 모를 레이더 신호 쪽으로 포를 쐈습니다. 사흘 뒤 미 의회는 대통령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맡기는 결의를 통과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 바다에 북베트남의 배가 정말 있었을까요?
이틀 전인 8월 2일에는 함께 정찰하던 구축함 매덕스가 북베트남 어뢰정과 맞붙었습니다. 두 사건은 흔히 "통킹만 사건"이라는 한 이름으로 묶이지만, 기록이 말하는 내용은 꽤 다릅니다. 2005년 11월 30일, 국가안보국(NSA)이 이 사건에 관한 옛 기밀 자료를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8월 4일을 둘러싼 물음에 새 자료가 더해졌습니다.
이 글은 두 날짜를 나눠서 따라갑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의 외교 문서집(FRUS)과 해설, 국립문서보관소, 해군 함정사, NSA 공개 자료를 나란히 놓고, 기록끼리 다른 곳은 다른 그대로 둡니다.
1964년 여름의 통킹만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난 뒤 제네바 회의는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나눴습니다. 두 쪽은 따로 다스려졌고, 나라를 하나로 합칠 선거 일정도 잡혔습니다. 남베트남의 디엠 정부는 갈수록 흔들리다 1963년 장군들의 쿠데타로 무너졌고, 디엠은 살해됐습니다. 미 국무부 역사실은 케네디 정부가 이 쿠데타를 묵인했다고 적습니다.
1964년 8월 무렵 존슨 정부는 미국의 개입을 늘리는 것만이 해법이라고 믿었습니다. 미군은 남베트남이 북베트남 해안을 기습하는 일을 뒷받침하기 시작했습니다. 해군은 이 일을 돕기 위해 구축함 매덕스와 터너 조이를 통킹만에 두었습니다.
이 무렵 통킹만에서는 두 가지 일이 함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베트남 특공대가 북베트남 해안을 치는 34A 작전(OPLAN 34A)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 해군 구축함이 정보를 모으는 데소토 정찰(DESOTO patrol)이었습니다.
두 일이 얼마나 이어져 있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NSA 암호사 센터가 펴내는 『Cryptologic Quarterly』에 실린 로버트 J. 해녁(Robert J. Hanyok)의 글은 데소토 임무가 34A 계획자에게 쓸모 있는 정보를 모으는 데 머물렀다고 봅니다. 두 계획은 따로 관리됐고, 34A 작전 지역을 피하라는 경고 말고는 계획을 맞춘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국립문서보관소의 해설은 매덕스가 남베트남군의 기습을 돕기 위해 북베트남을 전자 감청하고 있었고, 당시에는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7월 30~31일 밤, 남베트남 특공대가 북베트남 중부 해안 앞의 혼메섬을 쳤습니다. 매덕스는 밤에는 바다 멀리 있으라는 명령에 따라 그때 현장에서 떨어져 있었습니다. 해녁의 해석으로는 이 섬들, 특히 혼메에 대한 기습과 가까이 있던 매덕스가 겹치면서 충돌이 벌어졌습니다.
8월 2일: 실제로 있었던 교전
8월 2일 미 동부 시각 오전 3시 40분, 사이공 시각으로는 오후 3시 40분이었습니다. 매덕스에서 첫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고속정들이 어뢰 공격을 할 듯이 다가오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27분 뒤에는 북베트남 초계정 3척에게 공격받아 사격을 시작했다고 알렸습니다.
매덕스의 레이더는 남서쪽에서 다가오는 P-4 어뢰정 3척을 잡고 있었습니다. 교전에는 항공모함 타이콘데로가에서 날아온 항공기도 끼어들었습니다. 매덕스와 항공기는 어뢰정 2척을 손상시켜 북쪽으로 물러나게 했고, 1척은 바다 위에 멈춰 섰습니다. 매덕스는 북베트남 기관총탄 한 발이 남긴 구멍 말고는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터너 조이도 매덕스 쪽으로 서둘러 갔습니다. 하지만 닿았을 때 남은 배는 이미 달아난 뒤였습니다. 두 구축함은 그 뒤에도 함께 만에서 정찰을 이어 갔습니다.
북베트남 어뢰정은 왜 나왔을까요? 국립문서보관소 해설에 따르면 역사가들은 이제 이 배들이 진행 중이던 남베트남군 기습을 치러 나섰다가 매덕스와 마주쳤다고 의심합니다. 그날 워싱턴에서 열린 회의의 참석자들은 북베트남의 현지 해안 지휘관이나 해안 기지가 먼저 움직였다고 결론짓고 보복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두 가지를 정했습니다. 북베트남에 항의 각서를 보내는 것, 그리고 정찰을 계속하라고 명령하는 것이었습니다.
8월 4일: 레이더와 소나가 본 밤
이틀 뒤인 8월 4일 미 동부 시각 오전 7시 40분, 사이공 시각으로는 저녁 7시 40분이었습니다. 매덕스가 보낸 보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들의 공격이 임박해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곧 레이더에 정체 모를 수상 표적 2개와 항공기 3개가 잡혔다는 보고가 뒤따랐습니다.
터너 조이에서는 어뢰 항적을 하나, 어쩌면 둘 보았다는 보고가 나왔습니다. 그 뒤 두 시간 반 동안 터너 조이와 타이콘데로가의 항공기가 적으로 여긴 배를 향해 쐈습니다. 당시 보고에는 적어도 2척을 격침하고 다른 2척에 큰 손상을 입혔다고 적혔습니다.
현장의 확신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매덕스에 타고 있던 존 J. 헤릭 대령은 매덕스가 속한 구축함 전대의 지휘관으로, 이 임무의 현장 지휘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신하지 못했고, 몇 시간 뒤 태평양 사령부에 "공격"의 많은 부분이 의심스럽다고 무전을 보냈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 해설에 옮겨진 매덕스 함장의 첫 보고는 "계속 어뢰 공격을 받고 있다"였습니다. 그 뒤 보낸 전문은 이랬습니다. "레이더에 나타난 이상한 날씨 효과와 지나치게 열성적인 음탐병들이 많은 보고의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이 의심을 존슨 대통령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소나(sonar) 기록도 깔끔하지 않았습니다. 매덕스의 음탐병(소나를 맡은 수병)은 장비에서 잡음이 튀는 것을 보았지만 어뢰라고 보고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장에 있던 해군 조종사 제임스 스톡데일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해군 역사유산사령부의 터너 조이 함정사(DANFS)는 북베트남이 4일에 두 배를 공격했는지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적습니다. 나쁜 날씨와, 통킹만에서 잘 알려진 이상한 레이더 조건 때문에 터너 조이 화면에 반사 신호가 나타났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워싱턴의 하루: 보복 공습과 결의
8월 4일 오후 6시 15분, 워싱턴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열렸습니다. 맥나마라의 첫 보고는 북베트남 어뢰정이 공해에서 두 구축함을 계속 공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공보처(USIA)의 로완 처장은 북베트남의 도발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사실로 아는지,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못 박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맥나마라는 아침이면 확실히 알게 된다고 답했습니다. 지금은 높은 등급의 기밀 정보만이 사건을 뒷받침하는데, 그 정보는 쓸 수 없으니 앞으로 들어올 다른 보고에 기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이 "그들이 우리 배를 공격하는 것은 전쟁을 원해서인가"라고 묻자, 매콘 중앙정보국장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북베트남이 연안 섬에 대한 "우리의" 공격에 방어적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보복의 범위도 이 회의에서 나왔습니다. 공습 대상은 북베트남 북쪽의 기지 두 곳과 남쪽의 기지 단지 두 곳으로 정해졌고, 중국과 가까운 다섯째 표적은 빠졌습니다. 그날 밤 11시 36분, 존슨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국민에게 연설했습니다. 대응은 "지금으로서는 제한적이고 알맞은"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더 넓은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튿날인 8월 5일, 피어스 애로(Pierce Arrow)라는 이름의 보복 공습이 이뤄졌습니다. 항공모함 컨스털레이션이 타이콘데로가에 합류했고, 두 항공모함의 항공기가 공격이 출발했다는 기지들과 이를 지원한 유류 저장소로 64회 출격했습니다. 유류 저장소에서는 탱크 14개 가운데 12개에 불이 났습니다. 이른 오후까지 북베트남 해군 시설의 거의 전부를 포함한 여러 표적이 공격받았습니다.
8월 7일, 의회는 합동 결의(joint resolution, H.J. RES 1145)를 통과시켰습니다. 의회에서 토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상원에서는 웨인 모스와 어니스트 그루닝 두 의원만 반대했고, 하원은 만장일치였습니다.
결의의 핵심 문장은 짧습니다. 의회는 대통령이 최고사령관으로서 "미군에 대한 무력 공격을 물리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는 결정을 승인하고 지지했습니다. 결의는 대통령이 그 지역의 평화와 안전이 확보됐다고 판단할 때 끝나며, 그 전에 의회가 양원 동시 결의(concurrent resolution)로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의회가 대통령이 전쟁을 더 키우기 전에 다시 지지를 구하리라는 전제로 결의를 지지했다고 설명합니다.
기밀 해제 문서가 말한 것
2005년 11월 30일, NSA는 통킹만 사건에 관한 옛 기밀 자료의 첫 묶음을 공개했습니다. 마지막 묶음은 2006년 5월 30일에 나왔습니다. 논문과 사건 연대기, 구술 기록, 감청한 통신에서 얻은 신호정보(SIGINT, signals intelligence) 보고와 번역, 메모가 들어 있습니다. NSA는 이 공개가 어느 한 결론을 증명하거나 반박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해녁의 글도 이 자료 가운데 하나로 NSA 누리집에 올라 있습니다. 이 학술지에는 글의 의견이 지은이의 것이며 NSA의 공식 견해가 아닐 수 있다는 안내가 붙어 있습니다. 공개 시점은 자료마다 다르게 적혀 있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 해설은 "2002년의 NSA 보고서가 2007년에 공개되어" 8월 2일 공격은 확인했지만 8월 4일 공격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고 씁니다.
해녁은 그때까지 NSA가 8월 4일 사건이 있었다는 입장을 공식으로 지켜 왔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새로 찾은 자료로 내린 결론은 그날 밤 공격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결론으로는 북베트남 해군이 그날 밤 8월 2일에 손상된 배 두 척을 건지는 일만 하고 있었습니다.
신호정보가 어떻게 쓰였는지도 이 글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8월 4일과 관련된 신호정보의 대부분이 사후 요약 보고와 1964년 10월의 최종 보고에서 빠졌는데, 빠진 몫은 쓸 수 있던 신호정보 전체의 거의 90%였습니다. 공격이 있었다고 시사한 몇 안 되는 보고에는 심각한 분석 오류와 설명되지 않은 번역 변경이 있었습니다. 관련 없는 두 메시지를 한 번역으로 합친 것도 있었습니다.
북베트남 쪽 통신도 근거가 됩니다. 8월 6일 북베트남 해군 쪽이 지난 전투를 정리한 통신은 8월 2일 "미국 군함"과 싸운 일을 다뤘지만, 4일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해녁은 이 감청이 가리키는 결론은 4일 밤 공격이 없었다는 것 하나뿐이라고 썼습니다.
그렇다고 누군가 증거를 지어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해녁은 신호정보를 잘못 다룬 일이 증거를 만들어 내고 모든 단계가 공모한 음모로 볼 수 있는 방식은 아니었다고 씁니다. 관련자들의 목적은 데소토 정찰이 북베트남에게 고의로 공격받았다는 해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해녁의 글은 반대쪽 기록도 옮겨 둡니다. 맥나마라는 1968년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뒷받침하는 신호정보가 "흠잡을 데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회고록 『In Retrospect』에서도 공격이 있었다는 증거가 여전히 설득력 있다고 보았습니다. 해군의 베트남 전쟁 공식 역사(Marolda·Fitzgerald)는 두 번째 공격의 증거, 특히 신호정보를 조금 포함한 정보 자료가 결정적이라고 여겨졌다고 적었습니다.
정부 기관의 기록끼리도 표현이 다릅니다. 터너 조이에 대한 공격이 실제로 있었는지를 두고, 국무부 역사실 해설에는 나중에 의심이 생겼다는 문장이 있고 해군 함정사에는 "수수께끼"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 해설에 실린 것은 공격이 없었다는 결론입니다.
결의가 남긴 것
국무부 역사실은 통킹만 사건과 결의가 미국이 베트남 분쟁을 더 키우는 명분이 됐다고 봅니다. 그 해설에 따르면 북베트남을 폭격하는 롤링 선더 작전은 1965년 2월 13일 시작됐습니다. 존슨은 정규 지상 전투 부대의 첫 파병도 승인했습니다. 미국 개입이 가장 클 때 그곳에는 50만 명이 넘는 미군이 있었습니다.
결의는 존슨 정부와 뒤의 닉슨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치르는 법적 근거가 됐습니다. 해군 함정사는 이 결의를 이어진 8년 반 동안 미국이 인도차이나 전쟁에 직접 개입한 법적 토대로 적습니다.
물음은 의회로 돌아왔습니다. 1968년 초 윌리엄 풀브라이트 의원이 위원장인 상원 외교위원회가 이 사건으로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풀브라이트는 1964년에 이 결의를 상원에서 이끌어 통과시킨 사람이었습니다.
국립문서보관소 해설에 따르면 상원 조사에서 매덕스가 통킹만에서 정보 임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해군이 그런 임무를 지원하지 않았다는 존슨의 부인과 어긋나는 내용이었습니다. 반대되는 정보가 나중에 나오자 많은 사람이 의회가 속았다고 믿었지만,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 결의는 닉슨 대통령이 전쟁을 이어 갈 권한을 줄이려는 시도 속에 1971년 1월 폐지됐습니다.
돌아보면 8월 2일에 교전이 있었다는 데는 기록이 모두 같습니다. 8월 4일은 기록에 따라 "없었다", "나중에 의심이 생겼다", "수수께끼", 그리고 해군 공식 역사와 맥나마라의 "있었다"로 갈립니다. 어느 보고가 언제, 누구에게 전해졌는지를 따라가 보면 같은 밤이 왜 이렇게 다르게 기록됐는지가 보입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베트남 전쟁 한눈에: 1955년부터 1975년까지」: 통킹만 뒤 이어진 전쟁 전체의 흐름입니다.
- 「이아드랑 전투와 헬기 공중기동」: 지상군이 들어간 뒤의 베트남 전쟁 이야기입니다.
- 레이다: 전파로 거리와 움직임을 어떻게 알까: 8월 4일 밤 화면에 나타난 표적을 이해할 바탕입니다.
- 소나: 물속에서는 왜 소리로 볼까: 소나 보고가 왜 논쟁이 되었는지 생각해 볼 바탕입니다.
- 구축함과 호위함: 같은 군함인데 이름은 왜 다를까: 매덕스와 터너 조이가 어떤 군함인지 봅니다.
- 공개 자료 찾는 법: 정부 보고서, 논문, 표준은 어디서 보나: FRUS 같은 공개 기록을 어디서 찾는지 봅니다.
- 레이저 무기 기사 읽는 법: 발표와 기록을 나눠 읽는 습관을 레이저 무기 뉴스에 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