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30일 오전 7시 53분, 사이공 미국 대사관에서 마지막 헬리콥터가 해병 경비대를 태우고 떠났습니다. 대사관 마당에는 미국이 데려가겠다고 약속한 베트남 사람 400명 넘게가 남아 있었습니다. 몇 시간 뒤 북베트남군 전차가 대통령궁 문을 지나갔고, 미 국무부 역사실은 이 장면을 사실상 전쟁이 끝난 순간으로 적습니다.

불과 2년 전인 1973년 1월, 미국과 북베트남은 파리에서 평화협정에 서명했습니다. 평화를 약속한 협정 뒤에 무엇이 남았기에, 남베트남은 1975년 3월에 시작된 공세 앞에서 두 달도 못 버텼을까요? 미 국무부 역사실이 펴낸 당대 문서와 대통령 연설, 포드 대통령 도서관과 텍사스공대 베트남 센터, 호주 전쟁기념관의 기록으로 그 넉 달을 따라갑니다.

이 기록은 대부분 미국과 그 동맹 쪽의 것입니다. 철수 인원 같은 숫자도 자료마다 달라서, 숫자마다 어느 기록에서 나왔는지가 중요합니다.

평화협정 뒤의 2년

닉슨 대통령은 1969년 1월 20일 취임하면서 이 전쟁을 넘겨받았습니다. 그해 미군 철수를 시작했고, 그 뒤로 철수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미군이 줄어든 자리는 남베트남군을 키워 메운다는 계획이었는데, 이것을 '베트남화(Vietnamization)'라고 불렀습니다.

협정은 1973년 1월 23일 가조인을 거쳐 1월 27일 서명됐습니다. 미국은 이 협정으로 전쟁에서 빠지고 포로들을 돌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베트남 당사자 모두 협정을 지키지 않았고, 전쟁은 이어졌습니다.

닉슨은 티에우 남베트남 대통령에게 편지와 특사를 보내, 북베트남이 협정을 어기면 미국이 군사적으로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그 까닭으로 세 가지가 겹친 것을 듭니다. 전쟁에 다시 들어가기를 꺼린 의회와 여론, 경제 사정, 그리고 닉슨을 약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입니다.

미군이 떠난 뒤에도 남은 사람은 있었습니다. 해병 159명이 대사관과 다낭·나트랑·비엔호아·껀터의 총영사관을 지켰고, 장교 50명이 새로 만든 국방무관부(Defense Attaché Office, DAO)에서 일했습니다. DAO는 남베트남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미국 원조와 무기·탄약의 분배를 맡았습니다.

1974년에는 바깥 사정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뒤 물가와 기름값이 뛰었고, 닉슨은 1974년 8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났습니다. 끝난 줄 알았던 전쟁에 돈을 계속 대는 데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의회는 군사·재정 원조를 크게 줄였습니다. 날짜가 적히지 않은 국무부 내부 문서 하나는 1973년에 이미 의회 때문에 파리 협정을 강제할 수단을 잃었다고 적었습니다.

반대편의 준비는 이어졌습니다. 북베트남은 군대와 군수(logistics) 체계를 다시 갖췄고, 1975년 초 남베트남 깊숙이 밀고 들어갈 큰 공세를 비밀리에 계획했습니다.

1975년 3월: 고원에서 해안까지

첫 신호는 1975년 1월 푸억롱의 함락이었습니다. 3월에는 북베트남군이 중부 고원에서 큰 공세를 시작했고, 3월 10일 고원 도시 반메투옷이 넘어갔습니다.

3월 중순 티에우 대통령은 큰 결정을 내렸습니다. 고원을 비우고 사람이 많이 사는 해안과 사이공 주변으로 병력을 모으기로 한 것입니다. 3월 27일 미국 정보기관들이 함께 낸 특별 정보 판단(SNIE)은 그 까닭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병력이 너무 넓게 흩어져 있었고, 훨씬 강한 북베트남군을 마주했으며, 미국 원조가 줄어들 전망이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결정을 내린 방식이었습니다. 같은 판단에 따르면 남베트남 합동참모본부와 지역 사령관들은 미리 설명을 듣지 못했고, 미국 관리들도 통보받지 못했습니다. 계획 없이 시작된 철수는 대체로 무질서했습니다.

3월 15일 플레이쿠·꼰뚬·닥락에서 지휘관들이 먼저 떠났고, 민간인과 남은 군인들은 스스로 살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텍사스공대 베트남 센터의 전시는 15일 동안 이어진 이 후퇴에서 3만~4만 명이 죽거나 굶어 죽었다고 적습니다. 언론은 이 행렬을 "눈물의 호송 행렬(Convoy of Tears)"이라고 불렀습니다.

북쪽 해안의 다낭에는 3월 내내 피난민과 지휘관을 잃은 군인이 몰려 100만 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입은 옷 그대로 배에 올랐고, 4월 1일 배가 깜라인만에 닿았을 때는 목이 말라 숨진 피난민이 많았습니다.

3월 27일의 정보 판단은 앞날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남베트남 정부에 남는 땅은 삼각주와 사이공, 그 주변의 인구 밀집 지역 정도일 것이고, 결국 "1976년 초까지" 패배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습니다. 사이공을 곧바로 치기는 어렵다고도 보았는데, 북베트남군이 앞쪽에 쌓아 둔 보급이 아직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이공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에 넘어갔습니다.

4월에는 해안 도시들이 하나씩 넘어갔습니다. 꾸이년과 나트랑이 4월 1일, 깜라인이 4월 3일, 판랑이 4월 15일, 판티엣이 4월 19일이었습니다.

연표. 선 위는 베트남에서 일어난 일, 선 아래는 워싱턴의 결정과 연설이다. 선 위: 1973년 1월 27일 파리 협정 서명, 1975년 1월 푸억롱 함락, 3월 10일 반메투옷 함락, 3월 15일 중부 고원 철수, 3월 말 다낭에 사람이 몰림, 4월 1~19일 해안 도시들 함락, 4월 4일 고아 수송기 C-5A 추락, 4월 21일 티에우 사임, 4월 29일 활주로 포격과 헬리콥터 철수, 4월 30일 대통령궁 문의 전차. 선 아래: 1974년 8월 닉슨 사임, 3월 27일 정보 판단, 4월 3일 아기 수송 작전 승인, 4월 10일 포드의 의회 원조 요청, 4월 17일 세 가지 철수안, 4월 23일 툴레인 연설, 4월 29일 포드의 철수 완료 발표. 선은 세 구간(1973~1974년은 줄이고 1975년 4월은 늘림)으로 눈금이 다르다
1973년 1월 파리 협정에서 1975년 4월 30일까지. 세 구간의 눈금이 다릅니다 (도표)(도표)

워싱턴의 4월

4월 10일 포드 대통령은 의회 합동회의에서 연설했습니다. 상황을 살피라고 베트남에 보낸 웨이언드 장군의 보고를 근거로 긴급 군사 원조 7억 2,200만 달러와 경제·인도 원조 첫 2억 5,000만 달러를 요청했습니다. 미국인의 철수를 위해서라면 미군을 쓸 수 있도록 동남아시아에서의 미군 사용 제한을 바로 정리해 달라고도 했고, 모든 조치를 4월 19일까지 마쳐 달라고 했습니다.

이 연설에는 포드 정부의 해석도 담겼습니다. 포드는 북베트남이 협정에 서명한 순간부터 휴전을 체계적으로 어겼고 35만 명 넘는 병력을 남쪽으로 들여보냈다고 주장했습니다. 남베트남의 고원 철수는 협의 없이 정해져 서툴게 실행됐고, 피난민 물결에 막혀 공황으로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같은 시기를 두고 "두 베트남 당사자 모두"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적습니다.

워싱턴에서는 철수 방법을 놓고 회의가 이어졌습니다. 4월 17일 워싱턴 특별행동그룹 회의에 오른 안은 셋이었습니다. 해안 도시 붕따우를 쓰는 안, 탄손누트 비행장과 붕따우를 함께 쓰는 안, 그리고 헬리콥터만으로 미국인만 빼내는 안이었습니다.

이틀 뒤 회의에서는 헬리콥터 철수의 큰 그림이 나왔습니다. 남중국해에 떠 있던 항공모함의 비행갑판(flight deck)을 비워 두고, 탄손누트의 DAO 구역과 갑판 사이를 헬리콥터가 오가게 한다는 구상입니다. 한 번 왕복에 약 두 시간이 걸린다고 보았습니다.

4월 21일 티에우 대통령이 물러났습니다. 텍사스공대 전시는 그가 후임자가 하노이와 더 나은 조건으로 협상하기를 바랐다고 적습니다. 이틀 뒤인 4월 23일, 포드는 뉴올리언스의 툴레인 대학교에서 미국이 베트남 이전의 자부심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 자부심은 "미국으로서는 끝난(finished as far as America is concerned)" 전쟁을 다시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비행기에서 헬리콥터로

철수 계획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DAO와 대사관은 1974년 12월부터 계획을 검토했고, 처음 이름은 '탤런 바이스(Talon Vise)', 나중 이름은 '프리퀀트 윈드(Frequent Wind)'였습니다.

4월 1일부터 탄손누트 비행장의 DAO는 철수 통제 본부를 24시간 열었습니다. DAO 구역의 나머지는 1,500명이 기다릴 수 있는 피난민 시설이 되었습니다. 서류는 까다로웠습니다. 남베트남 정부는 징집 연령의 남성이 나라를 떠나는 것을 막았습니다.

어린이들의 비행도 있었습니다. 포드 대통령은 4월 3일 베트남 고아 수천 명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철수를 승인했고, 이것이 '아기 수송 작전(Operation Babylift)'입니다. 다음 날인 4월 4일 탄손누트에서 뜬 C-5A 수송기는 이륙 직후 뒷문이 떨어져 나가 되돌아오다 비행장 근처 논에 추락했습니다.

이 사고의 숫자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텍사스공대 전시는 고아 250명과 직원 50명을 태우려 했고 175명만 살아남았다고 적습니다. 포드 도서관이 옮겨 실은 셰일라 와이든펠드의 회고록에는 200명 넘게 숨졌고 대부분 어린이였다고 나옵니다. 4월 5일 포드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고아 약 325명을 태운 비행기를 맞았습니다.

사고 뒤에는 좌석과 안전띠가 있는 사람만 태운다는 규칙이 생겼습니다. 큰 C-141 수송기는 94명, C-130은 75명까지만 태울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도 철수는 빨라졌습니다. 4월 1~19일에 5,000명이 떠났고, 4월 20일 뒤로는 하루 5,000~1만 명이 떠났으며, 4월 21일부터는 밤낮 없이 비행기가 떴습니다.

4월 29일 새벽 3시 58분,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탄손누트 활주로에 떨어졌습니다. 이 포격으로 해병 찰스 맥마흔 상병과 다윈 저지 일병이 숨졌습니다. 두 사람은 베트남 땅에서 숨진 마지막 미군이 되었습니다. 포격 뒤 활주로는 더 쓸 수 없었습니다.

남은 길은 하늘뿐이었습니다. 4월 29일과 30일, 해군·해병대와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 인력이 함께 헬리콥터를 띄우고 조율했습니다. DAO 구역에서 마지막 철수자가 떠난 것은 4월 29일 저녁 8시 무렵이었고, 해병대는 4월 30일 0시 12분 그곳을 떠났습니다.

흐름도. 왼쪽 상자는 고정익 단계로, 4월 1일부터 탄손누트 비행장의 국방무관부(DAO) 철수 통제 본부, C-141과 C-130 수송기, 4월 1~19일 5,000명, 4월 20일 뒤로 하루 5,000~1만 명이라고 적었다. 가운데 화살표에는 4월 29일 새벽 활주로 포격, 활주로를 더 쓸 수 없음이라고 적었다. 오른쪽 상자는 헬리콥터 단계로, DAO 구역과 대사관에서 앞바다의 항공모함 갑판까지 헬리콥터가 오갔고 한 번 왕복에 약 두 시간이라고 적었다. 아래 상자에는 1974년 12월부터 검토한 계획(처음 이름 탤런 바이스, 나중 이름 프리퀀트 윈드), 4월 17일의 세 가지 안, 4월 30일 마지막 비행 뒤 대사관에 남은 베트남 사람 400명 넘게를 적었다. 지도가 아니라는 메모가 있다
철수의 두 단계. 장소 사이의 관계만 나타낸 그림이고 지도가 아닙니다 (도표)(도표)

대사관 사정은 달랐습니다. 처음 계획에는 대사관에서 빠져나갈 사람이 적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떠나려는 사람이 대사관으로 몰렸습니다. 4월 30일 새벽 3시, 철수에 나선 헬리콥터들에 대통령의 메시지가 방송됐습니다. 남은 비행은 21번이고, 미국인만 태운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틴 대사는 오전 4시 45분 CH-46 군용 헬리콥터에 올라 대사관을 떠났습니다. 오전 7시 53분 마지막 헬리콥터가 해병 경비대를 태우고 떠났고, 약속을 받았던 베트남 사람 400명 넘게가 대사관 마당에 남았습니다. 국무부 역사실 편집자 주에 적힌 세계시 기준 시각은 이 현지 시각과 몇 분씩 다릅니다.

4월 30일, 그리고 숫자들

티에우가 물러난 뒤 한 주 동안 남베트남 대통령은 두 번 바뀌었고, 마지막은 '빅 민'이라 불린 즈엉반민 장군이었습니다. 4월 30일 북베트남군 전차가 대통령궁 문을 지나갔습니다. 사이공은 그 뒤 호찌민시가 되었습니다.

새 정부 쪽은 이 일을 다르게 불렀습니다. 텍사스공대 전시의 한 사진 설명에 따르면 5월 7일 옛 대통령궁 앞에서 임시혁명정부 군인과 북베트남군이 참석한 "사이공 해방" 기념 집회가 열렸습니다. 같은 날을 한쪽은 함락으로, 다른 쪽은 해방으로 기억하는 셈입니다.

워싱턴에서는 4월 29일 포드가 짧은 성명을 냈습니다. 사이공의 미국 인력 전원을 철수시키라고 명령했고 철수가 끝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 몇 명이 떠났을까요? 국무부 역사실 편집자 주는 합동참모본부의 집계를 옮겨, 프리퀀트 윈드 작전 동안 미군이 미국 시민과 외국인 7,806명을 철수시켰다고 적습니다. 텍사스공대 전시는 마지막 날 헬리콥터가 662회 넘게 날아 7,000명 넘게를 실어 날랐고, 작전 내내 헬리콥터 3대와 승무원 2명을 잃었다고 적습니다.

봄 전체로 넓히면 숫자는 열 배를 훌쩍 넘습니다. 텍사스공대 전시는 남베트남에서 모두 13만 명 넘게 철수했다고 적습니다. 범정부 인도차이나 난민 작업단의 6월 15일 보고서는 1975년 3~6월 미국 난민 체계에 들어온 캄보디아인과 베트남인을 131,399명으로 셌습니다. 두 숫자는 비슷해 보이지만 세는 대상이 다릅니다.

캄보디아에서는 사이공보다 먼저 철수가 있었습니다. 4월 11일 '이글 풀(Eagle Pull)' 작전으로 미국인과 캄보디아인, 다른 나라 사람 276명이 프놈펜을 빠져나왔습니다.

막대 도표 두 묶음. 위 묶음은 4월 29~30일 헬리콥터 철수 인원으로, 국무부 역사실 편집자 주가 옮긴 합참 집계 7,806명과 텍사스공대 베트남 센터의 7,000명 넘게를 나란히 놓았다. 아래 묶음은 봄 전체로, 텍사스공대의 남베트남에서 13만 명 넘게와 범정부 작업단의 3~6월 미국 난민 체계에 들어온 캄보디아인·베트남인 131,399명을 놓았다. 위 묶음 끝에는 4월 11일 프놈펜 이글 풀 작전 276명이 작은 막대로 있다. 두 묶음은 눈금이 다르고, 끝이 화살표인 막대는 '넘게'라는 뜻이라는 메모가 있다
철수 인원은 자료와 세는 범위에 따라 다릅니다. 위아래 묶음은 눈금이 다릅니다 (도표)(도표)

미국만 사람을 빼낸 것은 아닙니다. 호주의 참전은 1973년 1월 11일 총독 포고로 공식적으로 끝났고, 대사관을 지키던 소대도 1973년 6월 떠났습니다. 1975년 4월에는 호주 공군 허큘리스 수송기 7~8대가 피난민을 돕는 인도 비행과 고아 철수를 했고, 4월 25일 대사관 직원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남은 것과 엇갈리는 평가

남은 사람들에게 4월 30일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사람이 '재교육 수용소'로 불려 갔습니다. 수백만 명이 어떻게든 나라를 떠나려 했고, 탈출은 수십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떠난 사람들은 미국과 유럽에 정착해 처음부터 다시 삶을 꾸렸습니다.

미국 정부 안에서도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한 말은 갈렸습니다. 키신저 국무장관은 4월 29일 기자회견에서 협정이 실패한 큰 원인으로, 외교와 상관없는 이유로 미국 행정부의 권한이 약해진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인이 이 전쟁을 냉정하게 말하고 쓰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은 처음 개입을 시작한 사람들의 목표도, 그 개입을 끝내려 한 사람들의 목표도 이루지 못했다는 말도 남겼습니다.

국무부 안에서 쓴 날짜 없는 문서 「베트남의 교훈」은 다른 곳을 봅니다. 미국이 지원한 정부는 끝내 국민의 지지를 효과적으로 모으지 못했고,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키는 일을 남베트남 사람들 자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훈을 잊는 것보다 너무 넓게 적용하려는 유혹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도 담겼습니다.

협정 위반을 두고도 기록은 갈립니다. 포드의 4월 10일 연설은 북베트남의 위반을 앞세웠고, 국무부 역사실의 정리는 두 베트남 당사자 모두 협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봅니다. 국무부 역사실은 이 시기 문서집의 주제로 힘과 외교의 관계, 정책을 둘러싼 대통령과 의회의 다툼, 세계에서 미국의 신뢰, 미국 힘의 한계를 꼽았습니다.

이 글이 기댄 기록은 거의 다 미국과 그 동맹의 눈으로 본 것입니다. 북베트남과 임시혁명정부가 이 공세를 어떻게 계획하고 기억하는지는 베트남 쪽 공식 기록을 함께 읽어야 온전히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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