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6년 8월 26일 저녁, 프랑스 북부 크레시(Crécy) 근처의 언덕입니다. 말에서 내려 걸어서 줄을 선 잉글랜드 병사들을 향해 프랑스 기사들이 몇 번이고 말을 몰아 올라왔습니다. 밤이 됐을 때 들판을 지킨 쪽은 수가 적은 잉글랜드군이었습니다.
이 싸움은 흔히 "장궁(longbow)이 기사를 이긴 전투"로 기억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전부도 아닙니다. 당시 연대기와 오늘의 박물관·학자들의 설명을 나란히 놓고, 활이 한 일과 활 말고 승부에 작용한 것들,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물음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두 왕이 한 왕관을 두고
1337년 프랑스 왕 필리프 6세(Philip VI)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Edward III)의 프랑스 안 영지를 침공했습니다. 땅을 둘러싼 다툼이었습니다. 1340년 에드워드가 프랑스 왕위 자체를 주장하면서 싸움은 왕관을 건 것이 됐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앞선 프랑스 왕의 친척이었습니다. 에드워드는 그 왕의 누이가 낳은 아들이었고, 필리프는 남자 쪽 혈통으로 이어진 사촌이었습니다. 필리프는 그전부터 스코틀랜드를 도우며 에드워드와 맞서 있었습니다.
뒤에 백년전쟁(Hundred Years' War)이라 불리게 된 이 다툼은 한 번의 긴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땅과 바다에서 포위전과 약탈, 전투가 띄엄띄엄 이어졌습니다. 크레시는 이 전쟁의 첫 육상 전투였고, 잉글랜드의 결정적 승리였습니다.
노르망디에서 솜 강까지 쫓긴 여름
에드워드는 1346년 7월 12일 노르망디에 상륙했습니다. 군대는 바르플뢰르(Barfleur)에서 동쪽으로 노르망디를 가로지르며 약탈했고, 캉(Caen)을 잠시 점령한 뒤 파리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필리프의 군대는 북쪽으로 솜(Somme) 강을 건너려는 잉글랜드군을 가두려 했습니다.
잉글랜드군은 강어귀 가까운 블랑슈타크(Blanchetacque) 여울을 싸워서 건넜습니다. 그리고 크레시앙퐁티외(Crécy-en-Ponthieu)의 튼튼한 언덕 자리로 물러났는데, 역사가 매슈 베넷(Matthew Bennett)은 그곳이 에드워드가 잘 아는 땅이었다고 짚습니다. 에드워드는 능선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고, 도착한 프랑스군은 그 옆을 돌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행군은 계획이었을까요, 도망이었을까요? 클리퍼드 로저스(Clifford Rogers)는 에드워드가 처음부터 결전을 노렸다고 봤고, 이 생각은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마이클 리빙스턴(Michael Livingston)은 반대로 잉글랜드군이 목숨을 걸고 달아나던 중이었다고 봅니다. 그의 재구성에서 에드워드의 재능은 전략보다 전술, 곧 지형을 잘 쓴 데 있었고 필리프의 추격은 뛰어났습니다.
그 무렵 잉글랜드군은 열흘 동안 적어도 120마일을 걸어 지쳐 있었습니다. 두 번이나 프랑스군이 따라잡기 몇 시간 전에 강을 건넜으니 꾀만큼 운도 따른 셈입니다.
8월 26일 저녁의 언덕
이날을 가장 자세히 전하는 글은 장 프루아사르(Jean Froissart)의 연대기입니다. 그는 목격자가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이야기를 주로 잉글랜드 사람들과, 필리프 곁을 지킨 에노의 장(John of Hainault)의 기사들에게서 들었다고 스스로 적었습니다.
프루아사르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군대 뒤 숲 가에 울타리를 치고 수레와 짐수레, 말을 모두 그 안에 넣었습니다. 들어가는 길은 하나였고, 병사는 모두 걸어서 싸웠습니다. 군대는 세 무리로 나뉘었는데, 맨 앞 무리는 왕의 아들인 흑태자(Black Prince)가 이끌었습니다.
잉글랜드 병사들은 땅에 누워 쉬다가 프랑스군이 보이자 서두르지 않고 일어나 대열을 갖췄습니다. 프랑스 쪽은 달랐습니다. 영주와 기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몰려와 서로를 방해했습니다.
필리프는 제노바(Genoa) 석궁수를 앞세웠습니다. 프루아사르는 그 수를 약 1만 5,000으로 적고, 그날 석궁을 메고 6리그를 걸어 지쳐 있었다고 전합니다. 때마침 큰비와 천둥이 지나갔고, 갠 하늘의 해는 프랑스군의 눈을 정면으로 비췄습니다.
석궁수들은 세 번 함성을 지르며 다가와 사거리에 들자 쏘기 시작했습니다. 잉글랜드 궁수들이 한 걸음 나서 화살을 한꺼번에 날리자, 화살은 눈이 내리듯 쏟아졌습니다. 화살을 맞은 석궁수 다수가 석궁을 버리고 물러났습니다.
그 뒤가 더 참혹했습니다. 필리프의 명령에 말 탄 병사들이 물러나는 석궁수들 사이로 뛰어들어 많은 수를 죽였고, 그 빽빽한 무리 위로 화살이 계속 떨어졌습니다. 쓰러진 사람과 말이 서로 얽혀 다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줄기만 추리면 이렇습니다. 석궁수는 너무 일찍 나아갔다가 화살을 맞고 물러났고, 기사들은 그 사이로 돌격해 화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거듭된 기병 돌격도 잉글랜드 대열을 깨지 못했습니다.
싸움이 한쪽으로만 흐르지는 않았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쪽 병사 몇이 흑태자 무리의 궁수 줄을 뚫고 들어가 중무장병과 맞붙었습니다. 전령이 에드워드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습니다. 작은 풍차 언덕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왕은 아들이 살아 있는 한 다시 사람을 보내지 말고, 오늘 그가 박차를 얻게 하라고 답했습니다.
거의 눈이 먼 보헤미아 왕은 칼을 한 번이라도 휘두르게 앞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일행은 서로의 말고삐를 묶고 나아갔고, 다음 날 왕 곁에서 모두 죽은 채 발견됐습니다.
잉글랜드 쪽의 큰 칼을 든 도보 병사들은 땅에 쓰러진 귀족들을 죽였습니다. 에드워드는 그들을 포로로 잡기를 바랐기에 뒤에 언짢아했습니다.
장궁과 석궁: 두 활의 차이
장궁은 유럽 곳곳에서 쓰였지만 잉글랜드와 웨일스 보병이 특히 즐겨 쓴 무기였습니다. 길이는 보통 약 1.8 m였고 흔히 주목(yew)으로 만들었습니다. 화살은 24개씩 묶어 보관하고 나눠 줬습니다.
석궁(crossbow)은 시위를 기계 장치로 걸어 두는 활입니다. 장궁보다 단순하고 싸며 덜 까다로워서 징집병과 용병에게 알맞았고, 그 가운데 제노바 석궁수가 특히 이름났습니다. 힘은 석궁이 훨씬 셌고, 백년전쟁 동안 나무 활이 복합재·강철 활로 바뀌며 더 강해졌습니다.
빠르기는 반대였습니다. 영국 왕립 무기고 박물관(Royal Armouries)의 설명으로 석궁수는 1분에 2~3발, 장궁 궁수는 10~12발을 쏠 수 있었습니다. 장궁의 사거리는 약 229 m이고 그보다 더 됐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 빠르기는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석궁은 장전하고 쏘기가 장궁보다 쉬웠고, 장궁은 훨씬 많은 훈련과 체력을 요구했습니다. 장궁 궁수의 훈련은 어린 시절에 시작해 일하는 평생 이어졌습니다.
활만으로 이긴 싸움이었나
먼저 갑옷입니다. 질 좋은 갑옷은 사람과 말을 화살에서 꽤 잘 지켰습니다. 박물관은 화살 가운데 적은 비율만, 그것도 투구 옆처럼 얇은 곳에서만 갑옷을 뚫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도 화살이 효과를 낸 것은 쏟아진 양이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싸우는 방식입니다. 백년전쟁의 전투는 대부분 걸어서 치렀고, 중무장병(man-at-arms)은 완전한 갑옷을 입고 걸어서도 말 위에서도 싸웠습니다. 궁수는 화살을 다 쏘면 다른 무기를 들고 중무장병 곁에서 싸웠습니다. 크레시의 잉글랜드군도 말을 울타리 안에 두고 모두 걸어서 싸웠습니다.
셋째는 자리입니다. 베넷은 한 논문을 들어 그 자리가 보급과 화살 면에서 미리 준비됐다고 보고, 적어도 궁수가 선 양옆에는 구덩이가 파여 있었던 듯하다고 적습니다. 다만 그가 아는 한 크레시는 발굴된 적이 없어서 들판의 방어물은 알 수 없습니다.
넷째는 프랑스 쪽의 사정입니다. 베넷은 제노바 석궁수가 재장전할 때 몸을 가려 주는 큰 방패(pavise)를 짐수레에 두고 와 쓰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들은 많이 비난받은 만큼 오해도 받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 그가 꼽는 진짜 재앙은 잉글랜드군에 빨리 닿으려던 프랑스 기사들의 조급함이었고, 조율 없이 앞에서만 거듭한 돌격이었습니다.
여기에 화약 무기도 있었습니다. 크레시에서 총포가 쓰였다는 증거가 남아 있습니다. 다만 그 쓰임은 소리로 겁을 주는 정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잉글랜드의 방식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았습니다. 베넷은 1322년 버로브리지와 1332년 더플린 무어 전투를 가장 중요한 앞선 영향으로 꼽고, 이듬해 할리던 힐에서 에드워드 3세가 같은 방법을 되풀이했다고 적습니다.
그렇다면 "활이 이겼다"는 이야기는 어디서 굳어졌을까요? 베넷은 옛 역사가들이 전술을 다른 모든 요인 위에 놓았다고 봅니다. 그는 전술이 때로 결정적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더 많았다고 하고, 그들의 견해가 시대에 맞지 않는 민족주의에 꽤 물들었다고 비판합니다. 궁술을 전장의 포병에 빗대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맞지만 너무 밀어붙이면 안 된다고 덧붙입니다.
리빙스턴 역시 장궁이 프랑스 기사도의 꽃을 무너뜨렸다는 전통은 이야기의 작은 조각만 말한다고 봅니다.
숫자와 장소, 아직 갈리는 해석
잉글랜드군의 숫자는 프루아사르가 무리마다 적었습니다. 첫째 무리는 중무장병 800, 궁수 2,000, 웨일스 사람과 함께한 다른 병사 1,000이었습니다. 둘째는 중무장병 약 800과 궁수 1,200, 셋째인 왕의 무리는 중무장병 700과 궁수 2,000이었습니다. 이를 더하면 중무장병 2,300, 궁수 5,200, 다른 병사 1,000입니다.
프랑스군 전체 숫자는 이 글이 연 자료 어디에도 없습니다. 프루아사르는 "놀랄 만큼 많았다"고만 쓰고, 리빙스턴은 훨씬 많았다고, 다른 서평은 더 컸다고 적습니다. 제노바 석궁수 약 1만 5,000도 프루아사르의 값입니다. 베넷은 오히려 석궁수의 수가 더 적었던 것을 사격에서 밀린 까닭 가운데 하나로 드는데, 이는 이 값과 어긋납니다.
죽은 사람의 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루아사르는 에드워드가 보낸 사람들이 전장을 돌아보고 큰 제후 11명, 깃발 80개, 기사 1,200명, 그 밖에 3만 명 넘게 죽었다고 보고했다고 적습니다. 리빙스턴은 널리 돌던 사상자 목록이 대부분 틀렸다고 봅니다. 숫자가 어떻든 그 뒤에는 그날 들판에 쓰러진 사람들이 있었고, 에드워드는 그 지역 사람들이 전장을 뒤져 죽은 이를 찾을 수 있게 사흘 휴전을 알렸습니다.
장소도 논쟁거리입니다. 전장 위치를 처음 정하려 한 것은 1757년 카시니 드 튀리(Cassini de Thury)의 프랑스 지도였고, 크레시 북쪽 언덕의 옛 돌 풍차가 주된 근거였습니다. 18세기 중반부터 전투는 크레시앙퐁티외 바로 북쪽에서 벌어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자리가 틀렸고 가장 그럴듯한 위치에서 5 km 넘게 떨어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왕의 주방 일지로 두 군대의 행군을 다시 짜 맞췄고, 크레시 숲 옆 크레시와 아브빌 사이 길의 높은 땅을 후보로 듭니다. 거기서 수레 진을 품을 만큼 큰 쐐기꼴 언덕과 사람이 판 도랑도 찾았습니다.
함께 사료집을 엮은 켈리 드브리스(Kelly DeVries)는 그 지형 때문에 프랑스 기병이 물러나는 제노바 석궁수를 보고 크게 놀랐고, 그 혼란이 공격을 무너뜨렸다고 봅니다.
리빙스턴의 주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제노바 석궁수가 프랑스를 배신했다는 이야기는 근거가 없고, 흑태자는 싸움 중에 실제로 사로잡힌 적이 있으며, 잉글랜드군은 수레로 만든 방어물을 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도 제대로 된 고고학 조사가 이뤄지기 전에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 적습니다.
궁수의 자리도 오래 논쟁해 온 문제입니다. 프루아사르는 흑태자 무리의 궁수가 "herse 모양으로" 섰다고만 적었습니다. 이 말은 촛대 가지, 써레, 가시 울타리로 읽힐 수 있고, 써레가 가장 많이 고르는 뜻입니다.
가장 지지받은 해석은 궁수가 중무장병 무리마다 양옆에 서서 조금 앞으로 비스듬히 나와 앞에서 엇갈려 쏘았다는 것입니다. 베넷은 궁수가 앞쪽과 양옆에 섰던 것 같다고 결론짓되 그 배치가 논쟁거리임을 함께 적습니다. 궁수를 수레로 둘러싼 것으로 그린 대작도 있는데, 베넷은 수레를 옆과 뒤를 포위에서 지키는 장치로 읽습니다.
칼레, 가터, 활쏘기 명령
크레시에서 이긴 에드워드는 북쪽으로 올라가 칼레(Calais) 항을 포위했습니다. 포위는 1346년 9월부터 1347년 8월까지 이어졌습니다. 도시는 주민들이 굶주림 끝에 항복하고 프랑스 구원군이 실패한 뒤에야 넘어갔습니다.
1347년에는 흑사병이 전쟁을 멈춰 세웠습니다. 1355년까지 큰 원정이나 전투가 없었습니다.
에드워드는 크레시 뒤에 가터 기사단(Order of the Garter)을 세웠습니다. 크레시와 푸아티에(1356)의 승리 뒤인 1363년에는 몸 성한 남자들이 일요일과 휴일에 축구 대신 활을 갖고 연습하라고 명했습니다. 같은 박물관 쪽의 다른 칸은 이를 15~60세의 모든 남자가 활을 갖고 연습하게 한 법으로 설명합니다.
그 시대의 활은 지금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연대가 정확히 매겨진 잉글랜드 장궁은 헨리 8세의 군함 메리 로즈(Mary Rose)에서 나온 것뿐입니다. 장궁 172개와 온전한 화살 2,000개 넘게가 나왔고, 활은 모두 주목 한 토막으로 만들었으며 길이는 1,839~2,113 mm입니다. 다만 이 배의 활은 1545년 무렵의 것으로 크레시보다 약 200년 뒤의 것이어서, 1346년 궁수의 활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백년전쟁 한눈에: 116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크레시가 긴 전쟁의 어디쯤 놓이는지 봅니다.
- 아쟁쿠르 전투: 진흙과 숫자에 관한 논쟁: 장궁이 가장 유명해진 싸움과 그 숫자 논쟁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무기 하나가 전쟁을 바꿨다는 이야기를 근대 기술로 다시 읽습니다.
- 레이저 무기의 역사: 화학 레이저에서 전기 레이저로: 멀리서 쏘는 무기의 오늘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