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9년 7월 15일, 레톨드(Lethold)라는 기사가 예루살렘 성벽 위로 기어올랐습니다. 성벽을 지키던 이들이 물러났고, 서유럽에서 온 원정군이 도시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3년 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끝내 닿은 곳이었습니다.

이 원정을 지금은 1차 십자군이라고 부릅니다. 농민과 기사, 성직자와 제후가 왜 그 먼 길을 걸었을까요? 남은 기록은 대부분 원정에 참가한 라틴 성직자들의 연대기입니다. 여기에 비잔틴 황녀 안나 콤니니(Anna Komnene)의 회고와 라인란트 유대인 공동체의 히브리어 기록을 나란히 놓으면, 같은 사건이 꽤 다르게 보입니다.

비잔틴의 위기와 클레르몽의 연설

이야기는 소아시아에서 시작합니다. 1071년 셀주크 튀르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이 만지케르트(Manzikert)에서 비잔틴 제국 군대를 크게 이겼고, 그 뒤 소아시아가 튀르크에 열렸습니다. 1092년 술탄 말리크샤(Malik Shah)가 죽자 아들들의 다툼이 한 세대 넘게 이어졌습니다. 중세사학자 오거스트 크레이(August Krey)는 튀르크 세력이 서로 사이가 나빠 침입자에 함께 맞서지 않았고, 그래서 십자군이 그 공국들을 하나씩 이길 수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1094년 또는 1095년,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Alexios I Komnenos)는 교황 우르바노 2세(Urban II)에게 사람을 보내 셀주크에 맞설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만 이 요청을 두고는 학자들 사이에 의문이 있었습니다. 크레이가 소개한 프랑스 학자 샬랑동(Chalandon)은 알렉시오스가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1096년의 제국은 1071년 이후 어느 때보다 도움이 덜 필요했다고 보았습니다.

교황은 1095년 11월 클레르몽(Clermont)에서 공의회를 열었습니다. 회의는 18일부터 28일까지 열흘 동안 이어졌고, 그 유명한 연설은 폐회 전날 있었습니다. 문제는 연설문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공의회 기록도 사라졌고, 그 자리에서 들었다는 성직자 넷 또는 다섯이 몇 해 뒤에 저마다의 판본을 썼습니다.

판본마다 힘을 준 곳이 다릅니다. 샤르트르의 풀셰(Fulcher of Chartres) 판에서 교황은 동방의 형제들이 급히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튀르크와 아랍이 그리스인의 땅을 지중해와 헬레스폰트 바닷가까지 차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 길이나 싸움에서 죽는 이는 곧바로 죄를 사면받는다고 약속합니다.

수도사 로베르(Robert the Monk) 판에서는 듣던 이들이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를 외치자 교황은 이 말을 싸울 때의 함성으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순례를 서원한 이는 이마나 가슴에 십자가 표시를 달게 했습니다. 늙거나 약한 사람에게는 길을 권하지 않았고, 여자는 남편이나 형제, 법적 보호자 없이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출발 날도 정해졌습니다. 그해 12월 교황이 보낸 편지에는 교황 대리 아데마르(Adhemar) 주교가 성모 승천 축일에 떠난다고 적혀 있습니다.

원정의 한가운데에는 예수의 삶과 이어진 성지, 무엇보다 예루살렘의 성묘 성당에 가려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십자군에게는 죄의 사면과 영원한 영광이 약속됐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동방에서 땅과 재물도 바랐습니다. 신앙과 바람이 한 사람 안에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먼저 떠난 사람들: 은자 피에르와 라인란트

열기는 교황의 계획보다 빨랐습니다. 정해진 날을 기다리지 않고 여러 무리가 라인 지방에서 먼저 길을 나섰습니다. 흔히 '농민 십자군' 또는 민중 십자군이라고 부르는 무리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이름난 사람이 은자 피에르(Peter the Hermit)입니다. 수도원장 기베르 드 노장(Guibert de Nogent)의 기록에서는 재산은 적지만 수가 아주 많은 보통 사람들이 그를 따릅니다. 그가 클레르몽에서 연설했다는 이야기는 뒤에 생긴 것입니다. 19세기 중반 하겐마이어(Hagenmeyer)의 연구는 피에르가 클레르몽에서 연설하지 않았고 몇 달만 설교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원정에 나선 무리의 폭력은 예루살렘에 닿기 훨씬 전에 먼저 터졌습니다. 1096년 봄에 길을 나선 무리 가운데 일부가 독일을 지나며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 같은 큰 도시에서 유대인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그해 5월 독일 귀족 에미코(Emico)가 이끈 무리는 마인츠의 유대인들이 피해 있던 대주교 궁까지 밀고 들어갔습니다.

이 일은 1140년쯤 솔로몬 바르 삼손(Solomon bar Samson)이 히브리어로 남긴 기록으로 전해집니다. 라틴 쪽 연대기 작가 에케하르트(Ekkehard of Aura)도 에미코가 거의 1만 2천 명을 이끌고 라인강·마인강·도나우강의 도시들을 지나며 유대인을 죽이거나 강제로 개종시켰다고 적었습니다. 두 기록이 서로 다른 쪽에서 같은 일을 증언합니다.

피에르의 무리는 1096년 8월 초하루에 콘스탄티노플에 닿았습니다. 안나 콤니니는 그가 보병 8만, 기사 10만을 거느렸다고 적었는데, 이는 그녀의 기록에 나오는 숫자입니다.

황제는 본대가 올 때까지 해협을 건너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틴 쪽 연대기 『프랑크인의 행적(Gesta Francorum)』, 줄여서 『게스타』에 따르면 무리가 도시의 건물을 부수고 불을 지르자, 화가 난 황제는 그들을 해협 건너 소아시아로 보냈습니다. 그해 10월, 이들은 니케아 근처에서 튀르크 군대에 무너졌습니다. 피에르는 무리를 다스리지 못해 그 조금 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안티오키아까지

뒤이어 제후들이 이끈 본대가 콘스탄티노플에 모였습니다. 생질 백작 레몽(Raymond), 고드프루아(Godfrey) 공작, 위그 르 그랑(Hugh the Great), 르퓌 주교 아데마르, 그리고 남이탈리아 노르만 가문의 보에몽(Bohemond)이 그 이름입니다. 황제는 이들에게 맹세를 요구했습니다. 앞으로 빼앗을 도시와 땅 가운데 예전에 황제의 것이던 곳은 황제가 보낸 지휘관에게 넘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지도자들은 처음에 그런 맹세는 합당하지 않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결국 고드프루아는 엄숙하게 맹세했습니다. 안나 콤니니는 보에몽 같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제국을 노렸고 성묘를 되찾는 원정인 척했다고 보았습니다. 크레이는 황제가 라틴인을 믿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라틴 쪽 기록에서 황제를 속이려 한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고 덧붙입니다.

1097년 5~6월, 연합군은 셀주크의 수도 니케아(Nicaea)를 포위해 차지했습니다. 7월 1일에는 도릴라이움(Dorylaeum)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튀르크 군대가 사방에서 에워싸고 활을 쏘았고, 그날 여자들은 싸우는 이들에게 마실 물을 날랐습니다. 행군 도중 보두앵(Baldwin)은 본대를 떠나 에데사(Edessa)로 갔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네모와 화살표로만 그린 길 순서 도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클레르몽(1095년 11월, 연설), 콘스탄티노플(1096~1097년, 황제에게 맹세), 니케아(1097년 5~6월, 포위와 함락), 도릴라이움(1097년 7월 1일, 전투), 안티오키아(1097년 10월 말~1098년 6월 3일 포위, 그 뒤 케르보가), 예루살렘(1099년 6월 7일 포위, 7월 15일 함락)이 이어진다. 안티오키아 칸 위로 에데사로 갈라진 보두앵의 화살표가 있다. 실제 지도가 아니고 축척이 없다는 메모가 있다
클레르몽에서 예루살렘까지 거쳐 간 곳의 순서. 지도가 아니라 순서만 보인 그림입니다 (도표)(도표)

가장 오래 걸린 곳은 시리아의 도시 안티오키아(Antioch)였습니다. 포위는 1097년 10월 말부터 1098년 6월 3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성탄이 오기도 전에 곡식과 먹을거리 값이 크게 뛰었습니다.

실마리는 성 안에서 나왔습니다. 피루스(Pirus)라는 튀르크 아미르가 보에몽과 가까워져, 자기가 지키던 탑 세 개를 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도시를 차지한 십자군은 곧 모술의 아타베그 케르보가(Kerbogha)의 반격을 맞았습니다. 1098년 6월,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성창을 '찾았다'는 일이 지친 군대의 사기를 되살렸습니다.

케르보가를 물리친 뒤에도 교황 대리 아데마르가 죽고 지도자들이 다투면서 출발은 미뤄졌습니다. 끝내 보통 기사와 보병들이 처음 서원을 지키자며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떠난 것은 1098년 11월이었습니다.

예루살렘 1099

그 사이 예루살렘의 주인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십자군이 안티오키아에 머무는 동안 예루살렘의 셀주크 지배자들이 이집트 쪽 세력에게 도시를 넘겼습니다. 십자군은 1099년 6월 7일 도시를 에워쌌습니다. 포위는 5주 동안 이어졌습니다.

가장 큰 적은 목마름이었습니다. 십자군이 오기 직전, 성 쪽 사람들이 샘을 메우고 물웅덩이를 부수고 개울을 막아 두었습니다. 1데나리우스로는 갈증을 풀 만큼의 물도 살 수 없었습니다.

첫 공격은 사다리로 했습니다. 그러나 사다리가 적어 성벽을 넘지 못했고, 지도자들은 장인들에게 공성 기계를 만들게 했습니다. 나무는 먼 곳에서 실어 와야 했습니다. 그 무렵 십자군 쪽 배가 야파(Joppa) 항구에 닿았다는 소식도 왔습니다.

마지막 공격 전에 주교와 사제들은 기도와 금식으로 싸움을 준비하자며 군대를 이끌고 성 둘레를 행렬로 돌았습니다. 7월 15일, 나무 탑에서 싸우던 고드프루아 쪽의 레톨드가 성벽에 올랐습니다. 남쪽에서는 레몽이 다윗 탑을 지키던 아미르의 항복을 받았습니다.

그 뒤에 일어난 일은 십자군 쪽 기록에도 참혹하게 남았습니다. 『게스타』에는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른 곳까지 사람들을 죽이며 쫓은 일이 나오고, 풀셰는 그곳에서 거의 1만 명이 죽었고 여자도 아이도 살려 두지 않았다고 썼습니다. 이 숫자는 연대기에 그렇게 적힌 것이고, 『게스타』는 아예 그 수를 하느님만 아신다고 적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운명을 맞은 것은 아닙니다. 『게스타』에 따르면 성전 지붕에 모인 남녀는 탕크레드(Tancred)와 가스통(Gaston)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레몽 다길레르는 이튿날 아침 일부 병사가 지붕에 올라가 그들을 죽였고, 탕크레드가 이를 듣고 크게 화냈다고 적었습니다. 다윗 탑의 아미르와 그 일행은 다치지 않고 아스칼론(Ascalon)으로 보내졌습니다.

함락 여드레째, 지도자들은 고드프루아를 도시의 우두머리로 뽑았습니다. 왕 대신 도시를 지키고 세금을 나눌 '보호자'를 두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가로 연표 도표. 1071년 만지케르트, 1092년 말리크샤 사망, 1094년 또는 1095년 알렉시오스 1세의 도움 요청(학자의 의문이 있다는 표시),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 1096년 5월 마인츠, 1096년 8월 은자 피에르의 콘스탄티노플 도착과 10월 민중 십자군의 끝, 1097년 니케아와 도릴라이움, 1098년 6월 안티오키아,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오른쪽 끝에 흐린 색으로 1187년 10월 살라딘의 예루살렘 회복, 1291년 아크레 함락
1071년에서 1099년까지, 그리고 그 뒤. 이 글의 출처에 나온 날짜만 옮겼습니다 (도표)(도표)

기사, 활, 나무 탑: 그 시대의 싸우는 방법

양쪽 군대는 싸우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안나 콤니니는 아버지 알렉시오스가 프랑크 군대의 막을 수 없는 공격 방식을 알았기에 그들이 오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적었습니다.

튀르크 군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땅을 잘 알고 말이 빨라, 수가 더 많은 십자군과 맞설 수 있었습니다. 도릴라이움의 기록에서도 그들은 사방에서 적을 에워싸고 활을 쏘았습니다.

안나 콤니니의 책에는 석궁(crossbow)도 나옵니다. 그녀는 석궁을 그리스인이 전혀 몰랐던 "오랑캐의 활"이라고 소개했는데, 여기서 오랑캐는 서방의 라틴인을 가리킵니다. 화살은 아주 짧고 굵으며 앞에 무거운 쇠촉이 달렸는데, 안나는 이 무기를 "악마의 발명"이라고 불렀습니다. 비잔틴 사람의 눈에 낯선 무기가 어떻게 보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도시를 빼앗는 싸움에서는 성벽이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은 사다리, 가죽을 덮은 나무 탑, 성벽을 두드리는 공성추를 썼고, 수비군은 투석끈으로 불붙은 나무를 던졌습니다. 그래도 기록에는 무기 못지않게 먹을거리와 물, 나무를 구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안티오키아의 굶주림과 예루살렘의 목마름이 그 예입니다.

세 쪽의 기록

이 원정을 적은 사람은 대부분 그 길을 함께 걸은 라틴 성직자였습니다. 풀셰, 익명의 『게스타』 작가, 레몽 다길레르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원정을 하느님의 일로 보았고, 그 눈으로 승리와 고난과 학살을 적었습니다.

참가자의 기록이라고 다 믿을 수는 없습니다. 크레이는 사건이 빨리 이어져 글을 늦게 쓴 이들이 헷갈렸고, 특히 레몽의 이야기는 편지와 『게스타』로 꼼꼼히 견주어 봐야 한다고 주의를 줍니다. 은자 피에르도 그렇습니다. 거의 한 세기 뒤에 글을 쓴 윌리엄 오브 티레(William of Tyre) 때부터 그의 이야기가 부풀려졌고, 포덤 사료집은 그보다 기베르의 기록이 더 정확할 것으로 봅니다.

비잔틴 쪽에서는 안나 콤니니가 아버지의 시대를 기록했습니다. 그녀의 책에서 황제는 십자군을 반기기보다 경계하고, 피에르의 무리는 8만과 10만이라는 큰 숫자로 그려집니다. 유대인 쪽에서는 솔로몬 바르 삼손이 1096년 라인란트 공동체가 겪은 일을 남겼습니다.

세 칸짜리 표 도표. 첫째 칸 라틴 연대기: 풀셰, 익명의 게스타, 레몽 다길레르. 원정에 참가한 성직자들이 적었고 연설 판본과 예루살렘 함락의 숫자가 여기서 나온다. 둘째 칸 비잔틴 기록: 안나 콤니니의 알렉시아스. 황제 쪽에서 본 십자군, 피에르의 8만·10만이라는 숫자, 석궁 이야기. 셋째 칸 유대인 기록: 솔로몬 바르 삼손, 1140년쯤. 1096년 라인란트 공동체가 겪은 일. 아래에 무슬림 쪽 연대기는 이 글에서 확인하지 못했다는 메모가 있다
같은 원정을 적은 세 쪽의 기록. 누가 어디서 보았는지가 서로 다릅니다 (도표)(도표)

무엇이 남았나

원정은 동방에 새 나라들을 남겼습니다. 십자군은 지중해 연안의 많은 도시를 차지하고, 새 땅을 지키려고 성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들이 세운 라틴 예루살렘 왕국에는 대성당이 15곳 있었습니다.

도시의 모습도 바뀌었습니다. 십자군은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을 솔로몬의 성전으로 여겼고, 알아크사 모스크(Aqsa mosque)는 궁전과 마구간으로 쓰였습니다.

그 나라들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살라딘(Saladin)이 이끈 무슬림 군대가 1187년 10월 예루살렘을 되찾았고, 1291년 십자군 도시 아크레(Acre)가 무너지면서 라틴 십자군 왕국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그 사이 원정이 거듭될수록 비잔틴과 서방의 사이도 멀어졌습니다. 1차 십자군은 그 긴 이야기의 첫 장이었습니다.

다음에 읽을 글

  • 살라딘과 3차 십자군: 하틴에서 아르수프까지: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은 쪽과 다시 온 원정을 봅니다.
  • 4차 십자군: 예루살렘 대신 콘스탄티노플로 간 원정: 비잔틴과 서방의 사이가 어디까지 멀어졌는지 봅니다.
  • 십자군 성채와 기사단: 크락 데 슈발리에와 성전기사단: 십자군 국가를 지킨 성채와 기사단을 봅니다.
  • 군사기술의 전환점: 근접신관에서 스텔스와 무인체계까지: 새 무기가 싸우는 방식을 어떻게 바꿨는지 현대의 예로 봅니다.